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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옥스퍼드대학교 종양생물학과 김강건 박사 후 연구원
암의 특성
암은 인류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큰 숙제로서, 전 세계적으로 매년 천만명에 달하는 사람이 암에 의해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암을 극복하기 위해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으며, 최근 이루어진 여러 혁신적인 발견을 통해 암 치료효율은 극적으로 상승했습니다 (영국의 경우 지난 50년간 암환자 생존율이 두 배로 증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여러 난치성 암에 대한 치료 전략이 부족한 상황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가 추진되고 있습니다.
암 치료를 위한 방법은 크게 수술 요법과 비수술적 요법(방사선 요법, 화학 요법 등)으로 나뉩니다. 그 중 외과적 적출이나 방사선 치료가 불가능한 종양의 경우, 분자적 약제 투여를 통한 화학 요법은 매우 중요한 치료법입니다. 암 치료를 위한 효과적인 화학 요법의 조건은 사용되는 화합물이 (1) 암세포를 죽이거나 적어도 제어할 수 있음과 동시에 (2) 정상 세포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상세포에는 영향이 미미하면서 암세포를 “선택적으로” 사살할 수 있는 약제를 발굴하는 것이 암 치료법 개발을 위한 주된 과제입니다.
암세포만을 표적으로 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으려면, 암세포가 정상세포와 다르게 어떠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암(Cancer)은 간단히 정의되는 하나의 질환이라기보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만가지의 질병 중에서 학계가 정한 몇가지 기준들에 부합하는 질병들을 통칭하여 부르는 포괄적인 질병군입니다. 그 중 핵심적인 기준에는 “무한히 증식할 것”, “체내의 타 조직에 침입하여 증식할 것(전이)”, 그리고 “세포사멸(apoptosis) 신호를 무시할 것”, “면역체계(immune system)의 공격을 회피할 것” 등이 있습니다(이는 항암제 개발의 방향성이 다양한 이유이며, 제게 암 연구가 흥미로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중, 최근 항암요법 개발을 위해 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암의 특성으로 “유전적인 불안정성 (genome instability)” 이 있습니다.
암세포만을 표적으로 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으려면 암세포가 정상세포와 다르게 어떠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 Douglas Hanahan and Robert A. Weinberg et al. 2011
암과 DNA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들은 그 위치와 역할에 따라 매우 다양한 형태와 기능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모조리 동일한 유전정보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유전정보는, 각 세포의 세포핵(nucleus) 내부에 존재하는, 그 이름도 친숙한 DNA라는 물질 속에 담겨있습니다. 이 DNA에 담긴 방대한 양의 유전정보에서 세포들은 각자 일부의 정보만을 사용하여 다양한 형태를 형성하고 다채로운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성장기 인간의 체내에서는 여러 체내 조직을 생성하기 위해 많은 세포들이 수십번의 세포분열을 거치게 됩니다. 세포가 분열하는 과정에서는 개인의 유전정보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서 DNA가 매우 정밀하게 구축된 체계를 통해 복제됩니다(DNA replication). 한편, 성장기가 끝난 인간의 체내에서는 혈구세포를 생성하는 조혈모세포나 머리카락과 손톱을 생성하는 줄기세포들을 제외하고는 많은 세포들이 세포분열을 멈춘 상태입니다. 흥미롭게도, 암세포는 어떠한 이유로 인해 끝없이 세포분열을 하게되고 이로 인해 그의 DNA 또한 반복적인 복제를 거치게 됩니다.
DNA 복제 체계가 매우 정밀하게 짜여져 있다고는 하지만, 아주 현실적인 분자생물학적 과정이기 때문에 매우 낮은 빈도임에도 분명히 유전정보 상의 오류나 DNA물질의 구조적인 이상현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수없이 되풀이되는 암세포의 DNA 복제는 정상세포와 비교할 때에 근본적으로 상당한 오류와 이상현상의 가능성을 내재하며, 결국 개인의 유전정보를 온전히 유지하지 못하고 DNA의 여러 부분에 비정상적인 정보가 발생하거나(genetic mutation, 유전적 돌연변이) 분자구조의 결함으로 의한 DNA 손상(DNA damage) 등이 발생하게 됩니다. 따라서, 암세포는 개인의 유전정보를 담고 있는 DNA를 온전히 보존하지 못하고 여러 결함과 이상상태를 보이며, 이러한 특성을 유전적 불안정성이라고 칭합니다.
유전적 불안정성
중요하게도, 대다수의 암세포는 DNA 복제 체계에 이상이 있거나 DNA 손상에 대응하는 능력이 저조하며, 이는 유전적 불안정성의 결과(특히 유전적 돌연변이의 결과)인 동시에 유전적 불안정성을 초래하고 심화시키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많은 유방암 및 난소암 환자들의 암세포는 BRCA1 혹은 BRCA2라는 유전자에 돌연변이를 지니고 있으며, 이 유전자 돌연변이가 있는 세포는 손상된 DNA의 복구(특히 homologous recombination repair 기작)에 치명적인 결함을 보이게 됩니다. 따라서 DNA 복구체계를 교란하는 분자물질을 사용하면, DNA 복구가 원만한 정상세포에는 큰 영향이 없지만 DNA 복구에 결함이 있는 암세포에는 매우 치명적인 효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BRCA1/2에 변이를 지닌 암세포는 주요 DNA 복구요소인 PARP를 억제하는 약제(PARP inhibitor) 들에 매우 취약합니다. 이 BRCA1/2-PARP 표적 현상은 그 획기적인 발견 이후 여러 세포 실험, 전임상 실험, 임상시험을 거쳐 지금은 실제 임상 환경에서 여러 암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적용되고 있습니다.
예리한 독자분들이라면, 이 쯤에서 한 가지 의문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BRCA1/2 변이 암세포들이 DNA 손상의 복구에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한정 증식하며 환자를 위협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DNA 손상은 단 하나의 원리로 복구되는 것이 아니라, DNA 손상의 종류에 따라 서로 다른 원리의 하위 기작(sub-pathway)을 통해 손상부위의 복구가 이루어집니다. BRCA1/2 유전자 돌연변이는 그 하위 기작 중 하나인 Homologous Recombination Repair(상동 재조합 복구)에 결함을 초래하며,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이 하위 기작에 결함이 있어도 암세포가 세포생존을 유지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BRCA1/2 변이 암세포들이 무분별하게 분열하며 종양을 형성하는 것이지요.
표적 항암제 기전
이러한 배경을 이해하셨다면, BRCA1/2-PARP 표적의 원리를 보다 자세히 살펴볼까요? PARP는 DNA 복구의 초기 단계, 특히 DNA 손상의 감지에 기능하는 요소입니다. PARP 억제제가 투여되어 PARP를 통한 DNA 복구가 저해된 상황에서는, 자연적인 DNA 손상(특히 DNA single strand break, DNA 단일가닥 절단)이 효율적으로 복구되지 못하고 잔재하여 더 치명적인 DNA 손상(특히 DNA double strand break, DNA 이중가닥 절단)을 초래합니다. 정상적인 세포의 경우 DNA 이중가닥 절단이 원만하게 복구됩니다. 그러나 BRCA1/2 변이를 가진 암세포는 이를 복구하기 위한 상동 재조합 복구체계가 저조하기 때문에, 세포생존을 유지하지 못하고 사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BRCA1/2 변이를 가진 암세포는 이를 복구하기 위한 상동 재조합 복구체계가 저조하기 때문에
세포생존을 유지하지 못하고 사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 Sayra Dilmac and Bulent Ozpolat et al. 2023
항암치료의 혁신을 가져온 PARP 억제제를 시작으로, 암세포의 유전적 불안정성을 활용하여 효과적인 표적항암제를 개발하기 위해 지금까지 수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왔습니다. 특히, 최근 주목받고 있는 주제인 DNA 손상 반응 체계(DNA damage response pathway)는 세포가 DNA 손상을 감지한 후 세포 내에서 촉발되는 다양한 생물학적 프로그램입니다. 세포는 DNA 손상이 감지되면 더 이상의 추가적인 손상을 방지하고 이미 손상된 DNA를 효과적으로 복구하기 위해 세포주기(cell cycle) 진행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복구 체계를 활성화시킵니다. 따라서 DNA 손상 반응의 주요 요소들인 ATR, ATM, WEE1, DNA-PK 등을 억제하는 물질들은 DNA 손상 반응에 지장을 줌으로써, 유전적 불안정성을 지닌 특정 암세포들을 선택적으로 사멸할 수 있습니다.
암세포의 DNA에 주목하라: 표적항암제의 미래
제가 최근 연구한 물질은 WEE1이라는 요소를 억제하는 억제제(WEE1 inhibitor) 입니다. 대부분의 뇌종양(특히 glioblastoma) 세포는 DNA 복제에 기능하는 ATRX라는 유전자의 돌연변이를 지니며, 이는 상당한 유전적 불안정성을 유발합니다. WEE1 억제제는 ATRX 변이를 지닌 암세포에 매우 치명적이며, 제 연구는 이러한 WEE1-ATRX 표적의 원리를 분자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보다 상세히 규명하고 동물 모델을 사용한 전임상 실험에서의 결과를 보고합니다. 유전적 불안정성에 기반한 연구를 비롯하여, 앞으로도 항암치료법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통해 더 많은 암환자들에게 희망을 전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