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와 기적
나는 늘 숫자가 불편했다.
숫자만 생각하면 한치의 오차도 없이 틀려서는 안된다는 생각. 왠지 모를 긴장감이 느껴져 거림감이 생기는 것 같다. 무언가를 각자 몫으로 반으로 딱 나눌 때면 왠지 정이 없어 보였다. 정확하게 나누어지지 않을 때, 혹시 누군가가 더 가지거나, 덜 가져서 마음이 불편한진 않을지. 그 에누리를 처리할 생각에 눈치를 보게 되고, 나도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졌던거 같다.
요즘에는 더치페이가 기본이라, 보통 함께 식사를 하고 나면, 각자의 몫을 공평하게 나누어 내는 것이 상식이긴 하지만, 나는 금액이 부담되지 않는 범위에서라면 밥값을 내가 것이 편하고 즐겁다. 그렇다고 이번에는 내가 한번 샀으니, 다음엔 지켜 봐야지란 기대는 애초부터 하지 않는 편이다.
지난 8월은 나에게 너무나 힘겨운 시간이었다.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코로나를 겪었기 때문이다. 정상으로 유지되었던 체온이 갑자기 치솟고, 해열제를 수시로 챙겨먹으면서, 정상체온에서 벗어나는 숫자들이 눈에 거슬리는 상황이 이어졌다.
남편과 나는 비교적 가볍게 코로나를 겪었다. 아이들은 평소 감기 몸살보다 더 심하게 앓는 것 같았다. 평소에 감정표현에 롤러코스트를 타던 아이들이 ‘엄마, 너무 아파.’ 라는 낮은 목소리의 말만 반복하였다. 며칠간 누워있기만 하여 걱정되고 염려스러운 시간이 이어졌지만, 다행히 모두가 조금씩, 서서히 회복이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고혈압과 당뇨를 가진 와상환자였던 엄마였다.
조심한다고 했지만 목소리는 변했고, 쇳소리가 나는 가래는 듣기가 힘들 정도로 끓기 시작했다, 기력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뇌경색환자, 와상환자, 폐질환을 가진, 그것도 자칫 위험한 상황이 생길까 백신접종도 하지 않은 80대 고위험군... 여러 가지 최악의 상황들이 머릿속을 복잡케 했다. 그렇게 두렵기만 하던 순간을 이제는 맞이해야 하나 깊은 근심이 되었다. 호흡이 힘들었기 때문에 119대원은 전화를 끊지 말라고 하며, 계속 엄마의 상태를 물었다. 119를 타고 순천향병원에 가셨던 엄마는 다시 격리병동이 있는 포항 선린병원으로 옮기셨다. 산소포화도가 급격히 떨어져 3리터의 고용량 산소기를 달았다. 일주일 격리 해제 후에도 상황이 좋지 않았고, 고용량 산소기를 달고 계신이상 구미로도 오실수가 없었고, 그곳에 계셔도 위험한 상황이 이어졌다. 그 곳 중환자실에서 다시 한달을 버티셨다. 3리터짜리 산소기를 떼고 1리터로 바꿔야 구미로 오실 수 있는데, 매일 병원에 전화하여 산소수치와 맥박수치를 물어보았다.
그렇게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시간이 지나 치열했던 8월은 지나가고, 9월은 시작되었다. 감사하게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서서히 산소포화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병원에서는 장례식장까지 알아보라고 했을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기적적으로 산소기도 떼게 되었고, 낯선곳에서 엄마를 보내드려야 하나라는 막막함을 느꼈던 때가 바로 엊그제같은데 순식간에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의사 선생님은 놀랍게 회복은 되셨지만, 이제 집으로는 다시 가실 수 없고, 언제라도 위험해지실 수 있으니 요양병원으로 모셔야 한다고 당부를 하셨다. 하지만 이미 하나님의 기적을 본 나는 어디에서인지 모를 용기가 생겨나 다시 부탁을 했다. 집에서 며칠간만 씻어드리고, 안정시켜드리다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는 병원에서 탈출하듯, 구급차를 타고 다시 계시던 집으로 왔다.
그리고 밤을 지새며 걱정스러운 날들을 지내는 동안, 하나님은 또다시 기적을 주셔서 엄마는 집에서 생각보다 빨리 안정을 찾으셨다, 방문간호사님을 모셔서 여러 의료적인 조치를 받으실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 엄마는 예수님을 영접하셨고, 천국소망을 가지고 늘 예배드리시던 분이니 장례절차는 기독교식으로 하겠다라고 떨면서 선포하던 때로부터 딱 이주간의 시간이 지났다. 불신가족들이 다 인정한것만해도 내게는 수십년간 해오던 기도의 응답이었지만,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견디시고, 격리실, 중환자실, 다음 코스인 요양병원행이 아니라 친정집이라니! 과연 이분이 코로나를 겪은 80대 폐질환 와상환자인지, 지난 여름에 나에게 과연 그러한 일이 있었기나 한건지... 믿고 중보기도를 해주신 분들도 사실이냐고 다시 한번 물어볼 정도로, 나 자신은 더 헷갈릴 정도로 아무튼 내게는 하루하루가 선물인 일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책상 위에는 혈압기, 체온계, 산소포화도 체크기가 나란히 놓여있다.
혈압을 체크한다. 180. 산소포화도90, 맥박수 89.
남편이 전화를 했다. 오늘은 좀 어떠셔? 음 혈압은 안정되었고, 산소포화도도 어제보다 더 괜찮은편이야. 맥박이 좀 빠르고, 영양식은 코로 잘 들어가고 있고...지나가면서 누군가가 우리의 대화를 듣는다면, 통화하는 둘 중 하나는 분명 간호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할 그런 모양새다.
바이탈 사인이 오늘은 더 안정적이다. 수치를 정확히 안다는 것이 이렇게 나에게 안정감을 준 적이 있었을까. 이번 여름을 지나면서 나는 그 어느때보다 숫자에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다.
알고 보면 인간이란, 태어나면서부터 00년도, 0월, 0일, 0시라는 숫자 속으로 들어가 0월 0일 0시 사망 선고를 받고나서야, 그러한 숫자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유한한 존재가 아닐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숫자들이 주는 절대적인 안정감 속에서 나는 오늘 하루의 시간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이번 여름 코로나를 겪으면서, 모든 숫자의 주인되시고, 우리 삶의 시간을 주관하시며,모든 생명의 주인되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경험케 하심을 감사드린다. 알파와 오메가되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시간, 신비로운 카이로스의 시간속에 내가 거하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그저 감사하고 감격스러울 뿐이다.
첫댓글 많이 힘든 8월을 겪으셨네요... 부족하지만 어머님의 건강을 위하여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아울러 숫자 안에서 우리가 더 자유로울 수 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