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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실한 관계 / 호 1:1-6
우리는 지금까지 불신앙을 단지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기독교가 전파된 지 얼마 되지 않고 믿는 사람들의 수나 사회적인 지위가 보잘 것 없을 때에는 하나님을 믿기 싫은 사람은 교회를 떠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사회가 거의 대부분 기독교화되어서 믿는 사람들이 많고 교회가 대단히 사회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때에는 교회를 떠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버리는 길을 택합니다. 그것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호세아서입니다.
이 당시에는 교회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회 자체가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난다고 하는 것은 완전히 이스라엘 사회를 떠나고 가나안 땅을 떠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교회를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었고 종교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형식으로는 교회를 떠나지 않았지만 그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고 그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것은 결국 하나님을 떠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교회나 교파가 아주 많지만, 이 당시에는 두 개의 교회만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북쪽에 있는 이스라엘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남쪽에 있는 유다 교회입니다. 이스라엘 교회는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이름만 하나님의 교회이지 실제로는 완전히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유다 교회도 어느 정도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 있었습니다. 유다 교회도 점점 이스라엘 교회를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음란한 생활에 빠져서 많은 다른 남자들의 아이를 가진 여인이 원래 남편의 아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선언하십니다.
호세아서가 오늘 우리 상황에 아주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이 교회 밖에 있는 불신앙이 아니라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불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불신앙이 교회 밖의 불신앙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것은 이것이 교회 자체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하나님의 진리를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이 신앙을 버리는 것은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들어 있는 불신앙은 교회 전체를 변질시켜버리게 됩니다.
1. 이스라엘의 때아닌 부강
호세아는 자기가 예언한 시대를 서두에 밝히고 있습니다. 1절,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호세아는 이스라엘에서 말씀을 전한 선지자이면서 자신의 활동 시기를 유다 왕의 연표(年表)로 나타내고 있는 데, 이것은 이스라엘 여러 왕들에 대한 심한 거부감을 나타냅니다. 호세아의 신앙은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께서 세워야 하며 이들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백성들을 진리로 이끄는 목자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들은 그야말로 세상적인 왕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목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자신의 활동 연표를 유다 왕의 연표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로보암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 때에 북쪽 이스라엘은 참으로 부강한 나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왕하 14:25이하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로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도말(塗抹)하여 천하에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왕하 14:25-27) 하맛이라고 하면 북쪽 두로와 시돈 훨씬 위의 지역인데 여기서부터 사해까지 영토를 넓힌 것입니다. 이것은 북쪽만 보면 솔로몬 때의 영토를 회복한 것입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늘 나라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매인 자도 없었고 놓인 자도 없었습니다. 이 말은 이들이 모두 노예도 아니고 자유민도 아닌 상태에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늘 노예나 마찬가지 상태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요나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다시 나라를 부강하게 해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솔로몬 이후 잃어버렸던 모든 땅을 다시 되찾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약속을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너무나도 어려웠고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들이 이렇게 장기적으로 어렵고 궁핍한 가운데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잘못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늘 이처럼 침체되어 있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생각을 바꾸셨습니다. '그들이 늘 가난해서 나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 같은데 이제 한 번 그들을 축복해주자 그러면 힘을 내어서 열심히 나를 섬기고 신앙 생활을 힘차게 하겠지.'라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 선지자를 통하여 축복을 약속하셨고 그 말씀대로 여로보암왕 때 나라는 정말 아주 때아닌 부자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의를 해야 합니다. 참으로 신앙이 있는 사람에게는 물질적인 부강이 그로 하여금 힘을 내게 하고 침체에서 벗어나게 하지만,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는 완전히 하나님을 떠나게 만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는 그들에게 주어진 물질적인 축복은 그들로 하여금 더 교만하게 만들었고, 죄짓는데 더 담대하게 만들었고, 완전히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갑자기 잘 살게 되자 사람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고 자기 욕십을 따라 달려가며 타락해가는 가운데 이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는 이스라엘이 완전히 망하는 모습을 지켜본 비극의 선지자입니다.
선지자의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청중들이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진정한 반응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그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대신 호세아의 설교는 허공에 떠도는 말씀이 되고 말았고, 이스라엘은 결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호세아의 말씀은 살아서 역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결코 호세아의 설교는 죽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오늘 우리들의 불신앙을 예리하게 드러내고 치료하는, 살아있는 말씀으로 역사할 것입니다.
2. 호세아에 대한 명령
2절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비로소'라는 말은 의역된 것입니다. 원래 히브리 성경에는 '여호와께서 호세아로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 가난하고 힘들어서 제대로 믿지 못하는 줄 알고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때아닌 복을 주셨습니다. 그들의 국력을 키워주셨고 그들로 하여금 아주 부강한 나라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기다리셨습니다. 그들이 강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와서 그 앞에 무릎꿇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하나님, 저희들을 부강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동안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제대로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강하게 되었사오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제 그 뜻을 이루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나타난 결과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더 바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더 하나님께 나아갈 시간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더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하나님으로부터 떠났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겁이 나서 짓지 못하던 죄도 담대하게 지었습니다.
이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가 얼마나 큰 혜택을 주는데 교회를 떠납니까? 그러나 그들의 중심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첫번째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놀랍게도 이스라엘에 대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호세아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호세아로 하여금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음란한 아내'가 무엇을 의미하느냐를 두고 해석이 구구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직업적인 창녀를 두고 말한다고 해석하고, 또 어떤 사람은 단지 음란한 성향이 있는 여자라고 해석합니다. 원래 이스라엘 사회는 직업적인 창녀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간음을 행한 여자는 돌로 쳐죽이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 음란한 여자를 구한다고 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거의 대부분의 여자들이 음행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처녀를 구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여기서 '음란한 아내'라고 하는 것은 결혼하기 전에도 음란한 생활을 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호세아와 결혼한 후에도 그 음란한 생활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 더러운 생활을 해 온 여자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로 하여금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음란한 자식'은 누가 아비인지 모르는 사생아를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하게 하시는 이유는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이 나라'라는 말에 매우 심한 경멸의 어감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부르실 때 언제나 '내 나라, 내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나 모세 당시에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을 때 '네 백성'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네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이 나라가'라고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심한 거부감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행음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신앙적으로 행음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원래 '행음한다'는 것은 남편이 있는 여자가 남편을 떠나서 다른 남자와 나쁜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행음한다'는 것은 사상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서 다른 사상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상적으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상을 붙들었습니다. 그 사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의 행복을 약속해주는 바알신을 여호와와 함께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평지로 되어 있어서 주된 산업이 농사였습니다. 그런데 농사의 신이 바알이었고 바알을 믿으면 농사가 잘 되고 부자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바알신을 믿는 가나안 족속들은 농사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농사냐 신앙이냐 하는 갈림길에서 농사를 택했습니다. 그런데 바알신을 섬기는 제사에는 무차별적인 성행위가 뒤따랐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성 행위가 많으면 많을수록 바울이 힘을 내어서 농사를 잘 짓게 해준다고 바알 제사장들이 떠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음행은 정신적인 음행과 함께 육체적인 음행이 추가된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좋아하든지 아니면 싫어합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는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사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좋아하지 않으면 싫어하는 것입니다. 좋지도 않은 사람을 좋아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싫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에는 반드시 뜨거움이 따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인격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머리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머리로 사랑을 느끼지 않습니다. 어떤 여자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논리적으로 유추해본 결과 사랑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면 그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면 마음이 거기에 다 가 있습니다. 마음이 가 있으면 모든 것이 다 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설사 농사를 망치더라도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의지하며 자신들의 신앙을 순수하게 지키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사를 잘 지어야 되겠다는 욕심이 생기면서 마치 바람난 여자처럼 들뜨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붙잡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아무리 잡아도 바알의 제사지내는데 달려가서 결국은 그들의 제사에 참가하고 더러운 성행위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종교에 유혹을 느끼고 있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들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섰습니다. 이미 그들의 제사에 참여했고 그들의 신에게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성행위까지 해 버렸습니다. 그들이 관심만 가졌다면 하나님도 이런 식으로 관계를 끊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로 하여금 이미 돌아올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여자와 결혼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호세아의 이 불행한 결혼을 보고서 '과연 하나님께서 그의 종을 이렇게 불행하게 하실 수 있으며, 그의 가정을 이렇게 파괴시키실 수 있는가?'하는 의문을 가질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교인들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교인들이 없는 선지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극도로 좋지 못한 상태에 빠져 있는데 어떻게 선지자가 행복할 수 있습니까? 자기 혼자 이상적인 가정을 꾸미고 행복하게 살 수 없습니다. 백성들이 범죄할 때 선지자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무서운 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백성들과 싸워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아마 호세아의 실패한 결혼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큰 이야기 거리였을 것입니다. 호세아의 설교를 그렇게 싫어하던 사람들도 그의 결혼에 대해서는 입방아 찧기를 좋아했을 것입니다. 마치 요즘 교인들이 자기들이 잘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으면서 어느 목회자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는 것 같다고 생각되면 밤을 새워 가면서 입방아를 찧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호세아의 비극적인 결혼은 바로 자기 자신들의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가 바른 신앙을 떠났을 때 우리는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모친 마리아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도 한 여성이고 좋은 남편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고 싶은 계획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어느 날 천사가 나타나서 이 백성들을 위하여 너를 사용하겠다고 했을 때 그는 기꺼이 자신의 행복을 버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바른 신앙을 버리고 자기 욕심을 향하여 달려갈 때 평안하게 자기 행복을 추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자기 개인 행복을 버리고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이것을 자신에게 적용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호세아는 어떻게 했습니까? 3절, "이에 저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취하였더니 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어떤 사람들은 고멜이 실제적인 인물이 아니고 가상적인 인물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간음하는 자와 결혼한 호세아는 결국 간음한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누구의 아들' 혹은 '누구의 딸'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실제적인 인물을 말합니다. 그리고 호세아의 결혼은 법적인 결혼을 말합니다. 이것은 정당한 신부대금을 주고 아내를 데려오는 것을 말합니다. 고멜은 결혼한 후 여전히 음란한 짓을 계속 해서 자식을 낳았습니다. 물론 이 자식은 호세아의 자식이 아니었습니다.
3. 첫 번째 아이
하나님께서는 고멜이 낳은 첫번째 아이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짓게 하셨습니다. 4절,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이스르엘이라고 하는 것은 지명입니다. 북쪽에 있는 평지의 이름이 이스르엘입니다. 아주 유명한 평지입니다. 그래서 첫 아이 이름만 들으면 아주 좋은 뜻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많은 농산물이 생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이스르엘은 좋은 곳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먼저 타락한 곳이었고 특히 이곳에서는 아주 끔찍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로보암의 조상인 예후가 아합의 가족들을 몰살시킨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세벨도 이곳에서 죽었습니다. 아합 가족의 씨가 완전히 마른 곳이 바로 이 이스르엘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왕은 여로보암 2세인데 그는 예후의 후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이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하심으로 예후의 집안이 아합의 집안을 이스르엘에서 몰살시켰듯이 그들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2차대전때 미국 사람들에게 가장 잊을 수 없는 곳이 바로 하와이의 진주만이었습니다. 그래서 2차대전때의 구호가 '진주만을 기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일본과는 어떤 일이 있어도 타협할 수 없고 반드시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 때 대통령이 자기 아이의 이름을 진주만으로 지었다면 이 아이가 크기 전에 반드시 일본에 복수하겠다는 뜻이 있습니다.
호세아의 큰 아들 이름을 '이스르엘'로 지은 것은 이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에 예후 왕가의 왕들이 자기들이 했던 것처럼 다 죽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왕이 다 죽으면 결국 나라는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역사 끝에는 몇번의 구데타가 일어나서 부하가 왕을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었다가 그 다음에 다시 부하에게 살해를 당하는 일을 몇번 반복하고 난 후 완전히 앗수르의 손에 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언약이 깨어지면 그들은 그 땅에서 쫓겨나야 마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가나안 땅에서 잘 살 수 있는 것을 생각했는데 그것이 오산이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앙의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늘 평안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절대로 마음의 평안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불신자들만큼도 평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떠나서 절대로 행복하거나 평안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두려워 해야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 안에 성령의 감동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어도 감격이 없고 성령이 주시는 기쁨과 확신이 없으면 그 신앙은 극도로 위험한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적신호입니다.
요즘 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한 적이 없다. 혹은 요즘 내가 진심으로 하나님께 뜨겁게 기도해 본 적이 너무나도 오래 된다. 요즘 나의 예배가 완전히 형식적인 것이 되었다고 판단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잃어버린 감동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만신창이가 되고 말 것입니다.
남쪽에도 아이가 한 명 자라고 있었습니다. 이때 유다의 왕은 악한 왕 아하스였습니다. 그는 북쪽 이스라엘왕 베가와 수리아왕 르신의 공격으로 늘 불안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하스에게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서 하나님께서 유다를 버리지 않고 지켜 줄테니까 징조를 하나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하스는 자기가 신앙이 좋은 척하면서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징조가 필요없을 정도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마음속에 앗수르의 도움을 받을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구하지도 않은 징조를 친히 주십니다. 그것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처녀는 나중에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예고합니다. 물론 이 처녀가 누구냐 하는 데는 이론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사야의 새 처녀 부인이라고 말하기도 하는가 하면 아하스의 새 부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아하스의 집안에서 한 처녀가 부정한 방법으로 아이를 가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좌우간 유다 왕궁에 한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의 이름이 임마누엘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다 백성들이 거듭 하나님을 버리고 범죄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유다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두 아이가 크고 있습니다. 하나의 이름은 '이스르엘'이고, 다른 하나의 이름은 '임마누엘' 입니다. 하나는 완전히 망한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그들의 대적을 물리치시겠다는 뜻입니다. 두 아이의 이름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스라엘과 유다의 운명은 갈라집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다. 유다는 아직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많이 변질되고 오염되었지만 말씀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완전히 죽은 교회요 형식만 남은 교회였습니다.
5절을 보십시요. "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활을 꺾는다고 하는 것은 완전히 힘을 쓰지 못하도록 패망시키겠다는 뜻입니다. 활은 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힘있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오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도록 하기 위해서인데, 좀 키워놓으면 자기 갈 길로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기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 활을 꺾어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부하도록 하시고 또 여러 가지 축복을 주시는 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는 도구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조금 형통하면 완전히 이것이 자기의 공로인 줄 알고 더욱 더 하나님의 손에서 빠져 달아납니다.
4. 호세아의 두 번째 아이
첫째 아이를 낳고서도 고멜의 부정의 행실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아이를 낳았는데 이번에는 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이의 이름은 '로루하마'라고 짓게 하셨습니다. 6절, "고멜이 또 잉태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가 루하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서 보호가 됩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지켜 주었듯이 하나님의 은혜가 그 백성들을 늘 지켜 주십니다.
사실 모든 것을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사막과 같습니다.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릅니다. 많은 위험이나 고비들이 우리들이 모르는 사이에 넘어 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장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부분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이 마음의 분노와 절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시면 우리는 불안에 빠져서 한 순간도 견디지 못합니다.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지 않는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지켜야 합니다. 마음속의 생각이 가는 대로 계속 가면 어떻게 됩니까? 로루하마가 됩니다.
믿는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면 단순히 은혜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짐승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 가시면서 다른 일반인들이 가지는 상식이나 판단력까지 다 거두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은혜가 있다는 것은 서로 용서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에 은혜가 없으면 그곳은 지옥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거기는 상식도 판단력도 대화도 아무 것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른 뺨을 맞거나 겉옷을 빼앗겨도 대적하지 말고 손해를 감수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약간의 이익을 지키는 것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떠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분노를 오래 품거나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면 수십 배 수백 배 더 비싼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모든 것을 자기 혼자서 지켜야 합니다.
이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운명을 자기가 책임져야 합니다. 그 이유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아무에게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긍휼히 여기신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도우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불쌍히 여기지 않았고 더 잔인해졌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아이의 이름은 로루하마라고 짓게 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자비를 베풀지 않고 지켜주지 않을테니까 네 능력으로 살아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우리가 책임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인도해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으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다른 사람에 대한 은혜의 문을 닿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 하나님께서도 나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유다에 대해서는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7절,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유다는 구원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이유는 유다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도 이미 많은 부분에서 이스라엘을 따라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이런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구원하시는 일을 완전히 중단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불성실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실망하게 했고 하나님의 의욕을 꺾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구원의 일을 유다를 통하여 계속 하겠다고 다짐하십니다.
'저희 하나님 여호와'가 누구입니다. '저희 왕 다윗'이 아닙니다. 신적인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입니다. 이분은 활이나 칼이나 말이나 마병으로 구원하시지 않고 출애굽때처럼 전능하신 능력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분입니다. 이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활이나 칼이나 말로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하여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일단 하나님을 믿으면 철저하게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을 가지려고 하면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언약이며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으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을 떠나는 것만이 불신앙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더 무서운 불신앙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변질시키기 때문입니다.
결국 구원이 어디 있습니까? 칼이나 창이나 말이나 마병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 여호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있습니다. 주님의 능력만이 우리를 지켜 주실 수 있고 우리를 이기게 하십니다. 더욱 더 주님을 의지합시다. 우리 자신에 대한 모든 자랑과 교만을 버리고 모든 구원이 주님께만 있음을 고백드립시다. 주님의 은혜 안에서 생활을 해야 합니다.
내 백성이 아니다 / 호 1:7- 2:1
어떤 한 남자가 한번 영원한 자기 사람으로 선택한 아내를 버리고 헤어진다고 하는 것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이혼이 바로 그것입니다. 요즘은 이혼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생각될지 몰라도 사실 당사자에게는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서로 많은 갈등과 다툼이 있었고, 이제는 도저히 서로 함께 할 수 없는 불신이 있기 때문에 이혼을 합니다. 그래서 이혼한 가정의 당사자나 자식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아픔과 상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으로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들은 더 이상 나의 백성이 아니라고 선언을 하십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단어는 '암미'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내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언제나 '내 백성'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로암미' 즉 내 백성이 아니라고 선언을 하십니다. 부부가 이혼을 하듯이 이제부터 너희들과 나는 남남이다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백성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그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의 후손들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냈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세웠습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내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생활하셨습니다. 시내산 위에서 천둥과 번개와 나팔소리 가운데 강림하셨던 하나님께서 그 무더운 광야의 성막에서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시고 다윗을 통하여 굳건한 나라를 세우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이 모든 은혜와 축복의 관계를 청산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존전에서 쫓아내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제 이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며 불법으로 하나님의 땅을 차지하고 있는 도둑떼들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경찰들을 불러서 이들을 이 땅에서 쫓아내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경찰은 당시 강대국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과연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해서 이렇게 버리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만약 이들이 버림받는다면 온 세상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 자체는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른 백성들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심으로 모든 구원계획을 완전히 버리시느냐? 아니면 이스라엘을 버리시는 것은 버리시는 것이지만 인류에 대한 구원계획은 변함없이 진행하시느냐?'하는 문제입니다.
1. 로암미라 하라.
우리가 지난 부에 살펴 본 바와 같이 호세아는 음란한 여자 고멜을 아내로 삼아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계속 부정을 저질러서 이제는 세 번째 사생아를 낳게 되었습니다.
8-9절, "고멜이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아마 그 당시에 호세아의 아내 고멜의 음란한 행실은 상당한 소문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도대체 '이 여자가 이런 식으로 몇 명까지 자식을 둘 것이며 얼마나 신기록을 세울 것인지 그리고 이 바보 같은 선지자는 언제까지 이 여자를 자기 아내로 두 고 있을지 관심을 많이 가졌을 것입니다. 드디어 고멜이 세 번 째 사생아 아이를 낳았습니다. 사람들은 드디어 호세아도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고멜에 대하여 버럭 화를 내면서 '이제 너는 더 이상 나의 아내가 아니다. 집에 있는 짐을 다 싸가지고 여기서 썩 나가라'고 소리를 지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당사자인 호세아는 가만히 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엄청난 선언을 하십니다.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하나의 단어는 '암미'라는 단어였습니다. 이것은 마치 그들에게 어떤 보증과도 같은 중요한 단어였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면서 모든 은혜를 주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암미'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로암미'라고 하십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내 백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이요"라는 표현은 의역입니다. 원래 그대로 직역하면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다."입니다. '너희는 더 이상 내 백성이 아니고 나도 더 이상 너희들에 대하여 내가 아니다. 이제 우리의 모든 관계는 깨어지게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고멜이 세번째 아이를 낳을 때까지 호세아가 계속 부부관계를 깨지 않고 기다렸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혹시라도 마음을 돌이켜서 돌아오지 않을까?'해서 기다렸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의 이야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의 아내가 부정을 저지르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보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섹스피어의 사대 비극 중에서 햄릿이라는 작품을 보면 햄릿이 자기 아버지를 독살한 범인으로 현재 왕인 삼촌과 왕비인 어머니에게 혐의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광대들을 불러서 궁중에서 연극을 하게 하는데 그들이 한 것과 비슷한 장면을 연기하게 합니다. 왕이 뜰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누군가가 와서 그의 귀에 독약을 부어서 죽입니다. 그러나 그 연극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자신들이 이야기였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그들은 얼굴이 창백해지고 자신들이 지은 죄에 대한 심판을 두려워 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이 세 번째로 음란한 짓을 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음행을 보았어야만 합니다. 그 여자가 하는 짓은 바로 자신들이 지금 하고 있는 짓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서 모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속일 수 있습니까? 우리의 죄를 자백합니다'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사생아 아이들을 내어놓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범죄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의 이야기로 흘려 들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일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동안만 우리에게 참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과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정했기 때문에 그들을 버리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들 중에서 버림받지 않을 자가 한 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뭔가 부족하고 무서운 죄성을 가지고 있으며, 사실 고멜처럼 악한 정욕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고멜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한번 두 번 세 번째 부정을 저질렀다고 해서 '너는 더 이상 나의 백성이 아니다'라고 선언하신다면 저희들 중에서 모두 걸려서 넘어지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신 것은 단지 그들이 음란한 경향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실 때에 이들이 부정한 자들인 줄 알고 택하셨고 그들이 모두 다 고멜같은 자들인 줄 알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것은 자기들이 그런 자들이라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호세아는 고멜이 음란한 성향이 강한 여자라는 것을 알고 택했습니다. 그러나 고멜의 문제는 자기가 그런 성향이 있다는 것을 호세아 앞에 정직하게 내어놓고 한번도 도움을 청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결혼에는 막대한 신부대금이 있었습니다. 남자가 이혼을 하려고 하면 그 돈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고멜은 호세아가 감히 그런 돈을 돌려주면서까지 이혼을 할 정도로 용기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호세아가 한번 두 번 참았던 것은 이렇게 음란한 줄 알고 결혼했기 때문에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호세아가 두 번씩이나 사생아를 낳았는데도 아무 소리를 하지 않으니까 완전히 바보로 알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가 버림을 받은 이유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신 것은 오직 하나, 자신들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자기들이 연약하다는 것만 인정하고 눈물로 나아오면 열번 스무번 넘어져도 절대로 하나님께서 버리시지는 않습니다. 설사 징계를 해서 바로 잡는다 하더라도 절대로 버리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니까 하나님을 완전히 바보로 생각하고 이제는 완전히 당당하게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암미'라고 부르니까 하나님이 무슨 봉이나 되는 것처럼 당당하게 자기 욕심을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버림받은 것은 그들의 연약함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있는 한 절대로 버림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가 우리 위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그 자체를 무슨 담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연히 은혜를 주셔야 하며,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하나님은 우리를 보살펴 주시고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위험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감히 이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시지는 못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지금까지 이들을 위하여 투자한 것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아브라함때부터 약속하셨고, 모세가 구원했으며, 여호수아의 정복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약속과 역사를 하루아침에 수포로 돌리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겠습니까? 어제까지 '암미! 암미!'라고 하면서 부르던 자들을 하루아침에 '로암미'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발목 잡히지 않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라도 버리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자격없는 자가 구원받았으며 하나님께서 한없는 은혜로 우리들을 참고 계신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위험하게 됩니다. 예수 믿는 것이 당당한 자격이나 되는 것처럼 큰 소리를 치면서 죄를 지으면 안됩니다. 물론 우리는 구원의 확신이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늘 부족한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슨 잘한 일이 있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은 이 일이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할례를 받았고 율법을 가지고 있는 자체로 당연히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구원하셔야 하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들의 자격을 의지했습니다. 그 결과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불신앙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왔으나 아들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내어 주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자격이 없는 우리들을 택하신 것은 우리가 자기 스스로를 믿지 말고 무조건 하나님을 믿고 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겸비하여 아무 자격이나 공로가 없음을 인정하고 매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면 우리는 안전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이나 우리 안에 있는 음란한 성향이나 죄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몰아내지 못합니다. 아무리 연약해도 쓰러지거나 버림받지 않습니다. 속에서 고멜처럼 아무리 음란한 욕구가 치솟아 오른다고 해도 자신의 그런 점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늘 구하면 절대로 넘어지거나 버림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시하고 자신이 오래 믿은 것을 자랑하면서 자기는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는 것으로 생각할 때 그는 이미 깊은 죄악에 빠져 들고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백성의 의미
이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셔서 '암미'라고 부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무슨 도움을 받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신 이유는 그들과 합침으로 어떤 도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도움받으실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헌금을 바치면서 자기가 하나님을 돕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나도 큰 오해입니다. 요즘 하나님이 너무나도 어려우시고 또 그 종들도 어렵기 때문에 내가 이 돈으로 좀 하나님을 도와야 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악할 뿐아니라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아무 것도 도움 받으실 생각이 없으십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에 너무 감격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신 것만 해도 너무 감사한데 하나님께서 곡식을 주셨고 또 우리에게 건강을 주셨으며 직장을 주셨습니다. 당장 죽어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이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너무나도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다 드리는 의미에서 헌금을 바치고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신 것은 하나님을 그들에게 나타내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보십시요. 그 전부가 하나님에 대한 소개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너무나도 엄청난 분이십니다. 이렇게 한 민족의 역사 전체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다 소화할 수 없습니다. 어느 한 개인도 하나님을 완전히 다 알 수 없고 그의 은혜를 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 수백만 명에게 은혜를 주시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에게 가장 큰 축복은 아주 돈 많은 훌륭한 사람의 아들로 입양되어서 더 이상 굶지 않고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한 부자가 고아원에 와서 한 아이를 아들을 입양했다면 대단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어떤 부자도 고아원 전체에 있는 아이들을 아들로 입양한 일은 없습니다. 만약 그런 부자가 있다면 그는 정말 부자일 뿐 아니라 그의 사랑은 엄청나게 큰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고아원 하나가 아니라 한 노예 민족 전체를 아들로 입양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왕도 이런 왕은 없습니다. 우리가 가장 돈이 많다고 하는 재벌들도 이런 식으로 많은 아이들을 한꺼번에 입양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게 해야 겨우 표시가 날 정도로 엄청난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서 훌륭한 부모나 선생들은 똑똑하고 가능성이 있는 아이들을 훈련시켜서 세계 정상급의 선수로 만들어내면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도저히 이 세상에서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을 택하여 최고로 만들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혀 알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한 개인은 도저히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도 없고 감당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셔서 '암미'로 삼으신 것은 그들의 변화된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로우시며 얼마나 큰사랑을 가지고 계신 분 이신지 나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체로 만족하고 더 이상 변하려고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뜻과는 중대한 마찰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주시면 없이 지내야 합니다. 만일 자기들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을 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며 업신여기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가난하게 하시면 가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렵게 하시면 어려운 상태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에게 무한히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실망시키시는 법이 없습니다. 어떤 역경에서도 그의 기도를 들으셔서 구원하시며 풍성한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아무리 잘못을 저질렀어도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에게 인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남용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악용하는 자는 절대로 용서하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이 손상되고 이방인들 가운데서 조롱거리가 되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징계하시고 그 존전에서 쫓아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길은 겸손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교만한 순간부터 우리들의 지위는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는 한 어떤 어려움이나 난관이 와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든든한 산성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신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을 통하여 온 세상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아직 완전한 때가 온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모든 이방인들을 땅끝에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온 이방의 빛으로, 선교사로 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다루셨던 것과 같은 자비로운 방법으로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듯이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주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만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는 것을 막아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면서도 하나님을 전혀 닮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셔서 이스라엘 열 지파를 버리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3. 하나님의 지속적인 구원
하나님께서는 지금 부패한 이스라엘을 버리신다고 해서 하나님의 구원계획 전체가 취소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십니다.
10절,"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버리시겠다고 해 놓고서 금방 또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구약 예언서를 이해하는 데 가장 어려운 점입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하시는 이스라엘은 조금 전에 로암미라고 말씀하셨던 그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지금 로암미는 멸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은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어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멸망이 하나님의 실패가 아닙니다. 아무리 이스라엘이 변화되는데 실패했고 그래서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구원 계획 전체를 포기하시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시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번 입양을 해서 그토록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불순종으로 하나님만 크게 망신을 당하고 그 계획이 실패했다면 '다시는 내가 이런 짓을 하는가 봐라'하면서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마음 문을 닫아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가 끝까지 불순종하면 그 사람은 버리시지만 그 계획을 취소하지 않으셔서 다른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 가십니다.
지금 이 타락한 백성들을 버리신다고 해서 구약 성경 전체가 파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축복과 언약이 무효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지키십니다. 단지 스스로 교만해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지 않은 자들만 그 자리에서 쫓겨 날 뿐입니다.
이렇게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버림받는다고 해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서 구해 오셨는지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하셨습니다. 어디서 이 많은 사람들을 불러 오셨습니까? 온 이방 나라에서 불러 모으셨습니다.
"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10절하)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마음이 변하셔서 어느 때에는 내 백성이 아니라고 했다가 이제는 내 자녀라고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에서 이방 족속들을 향하여 늘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로암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을 향하여 '암미'라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변절에 화가 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방인들에 대한 구원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패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중단될 수 가 없었습니다.
11절,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두목을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이스라엘 민족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유다와 이스라엘이 다시 통일되어서 회복된 온전한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차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들이 한 두목을 앞세우고 그 땅에서 올라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다와 이스라엘'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우선 표면적으로 보면 분리된 두 이스라엘 자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몰론 이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스라엘은 없어져버립니다. 그냥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포로로 잡혀가서 혼혈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여기의 이스라엘은 사실 이방인입니다. 이스라엘의 피라고는 그 전체에서 한 방울이나 두 방울 밖에 섞여있지 않는 완전한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옛날 자기 조상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 하더라는 정도였습니다. 실제로 이들은 육체적인 이스라엘이라기 보다는 정신적인 이스라엘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결국 육체적인 이스라엘 자손들과 정신적인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두 한 두목을 앞세우고 하나님께로 나아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담이 허물어지고 온 인류가 하나되어 하나님께 나아온다는 뜻입니다. 우리 개역 성경은 '한 두목'이라고 했는데 좋은 번역같지는 않습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머리'로 되어 있습니다. 한 분을 머리로 한 한 지체를 말합니다.
우리 안에는 정말 원수된 것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분열은 회복될 수 없는 교만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지파중에서 특히 에브라임 지파는 둘째 가는 것을 너무나도 싫어했습니다. 늘 자기 자신을 주장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열 지파를 떼어서 독립했고 이 찢어진 상처는 결코 회복되지 않고 양쪽 다 망하고 말았습니다. 양쪽이 다 망하고 난 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이 찢어진 상처는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오직 한 성령으로 말입니다.
오늘 교회를 하나로 합치는 것은 조직이 아니고 겸손의 영입니다. 우리는 매순간 우리 안에 있는 분노와 정죄하는 감정을 성령으로 눌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 두목 밑에 있을 수 없습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르엘의 날이 크다'고 했는데, 여기 '이스르엘'은 4절의 이스르엘과 다릅니다. 4절의 이스르엘은 예후 왕가를 멸절한다는 뜻의 멸망의 이스르엘인데 여기서 이스르엘은 원래 히브리어 뜻대로 '심는다'는 뜻의 이스르엘입니다. 이제는 한번 심으면 영원히 뽑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심으셨다가 뽑았던 것과는 달리 새 이스라엘은 온 세상에 굳게 심기울 것이며 결코 뽑히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르엘의 날이 크다'라는 것은 다시는 이들이 뽑히지 않고 그곳에서 크게 열매를 맺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제 그들을 열매맺게 하는 것은 가나안 땅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한 우리는 절대로 이 세상에서 뽑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사람의 수를 의지하고 조직을 의지한다면 우리도 뽑힐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서로 무엇이라고 말하기를 원하십니까? 2:1,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 서로 이런 말로 위로하라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확신이 없어질 때마다, 어려움 때문에 자신감이 없어지려고 할 때마다 서로 당신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형제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매라고 하면서 격려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겸손한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로암미였다가 암미가 된 것을 생각하고 절대로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리로 갑시다. 그리고 계속 변해 가십시다. 이것만이 하나님을 실망시켜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서로의 관계를 개선하도록 노력하십시다. 서로 더 사랑하고 더 좋은 관계에서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이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을 충만하게 나타내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