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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경찰 충혼탑의 의미
하조대에서 끊고 남은 양양과 속초구간을 시내버스로 이동해 원점(속초)으로 돌아갔다.
속초까지 북상하게 되면 속초~주문진 간을 시외버스편으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걷기 위험한 도로에서 짧은 구간의 부득이한 경우 외에는 금기로 하고 있는 차량이용을
피하려면 그래야 했으며 단골인 해수피아를 하루 걸러 다시 찾게 되었다.
백두대간 설악산의 동쪽 해안이며 영랑호로 유입되는 북단의 장천천, 청초호로 흐르는
중간의 청초천, 동해로 유입되는 남단의 쌍천 등 세 하천에 의해 3분되는 속초.
6. 25동란 이전에는 북쪽 동해안의 작은 포구에 불과했으나 북한 주민의 대거 월남으로
인해 토착민을 월등히 능가하는 거대한 실향 피난민의 땅이 된 속초.
조금이라도 고향땅에 다가가고 싶은 열망이 북한과 가장 가까운 속초에 모여들게 했다.
이로 인해 생활 근거가 농업에서 어업으로 전환되었고 생활력이 강한 피난민들이 지역
경제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는 속초.
동란이 없었다면 여전히 북쪽의 이름없는 작은 포구로 신음하고 있을 속초야 말로 민족
동란의 수혜지역이라 할 수 있다.
환동해의 중심 운운하지만 남북통일이 되어 모두 귀향한다면 아마도 공동화(空洞化) 될
지도 모를 지역이다.
매년 쌍(雙)10일(10월10일)에 백두대간영동삼도봉에서 갖는 삼도(경북,전북,충북)화합
제에 빠지게 되어 아쉬운 마음인 채 속초 해양경찰대 충혼탑 앞에 섰을 때는 06시쯤.
(백두대간 종주 이후 거의 매년 참석했는데/메뉴'우리의 이야기들' 475번글 참조)
서.남.동 해상에서 임무 수행 중 전사, 순직한 해양경찰을 추모하고 그들의 숭고한 희생
정신을 기리기 위해 속초시 장사동 나지막한 야산(서낭산?) 기슭에 세운 탑이다.
1953년에 내무부(당시) 소속으로 발족한 해양경찰대는 반도국이라는 특성에 맞췄는지
1996년에는 해양경찰청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해양에서의 경찰 및 오염방제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는 중앙행정기관이라지만 전시에는
해군의 지휘를 받게 되는 이원적인 경찰구조란다.
늙은 길손이 경찰과 해양경찰의 업무영역을 어찌 알겠는가.
다만, 해안의 경찰기구는 해경인 듯 해안과 작은 도서에서 만나는 경찰은 해경이다.
한데, 희생자 72명 중 26명의 전사자가 특히 주목되었다.
전시가 아닌 때의 전사라면 해안으로 침투한 간첩에 희생되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1986년에 세운 탑이니까 그 후에도 희생자가 더 늘어났을 것이다.
이데올로기 때문이라기 보다 강대국들의 흥정에 따른 분단국 민족의 통분할 일이며 해
맞이 명당임에도 떠오르는 아침해까지도 우울해질 것 같아 길을 떠났다.
해안길의 첫 어촌은 장사동(章沙).
장천리(章川)와 사진리(沙津)의 통합으로 두 마을의 앞글자를 합성한 이름이란다.
전에는 사진항으로 불렸으며 오징어맨손잡기축제로 이름났다는 어촌정주어항 장사항.
장사항 바다숲공원의 오징어 조형물 앞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았다.
하루 걸러 보는 아침해가 수줍은 새색시 마냥 얌전하게 솟아오르며 나그네에게 편안한
하루를 약속하는 듯 했다.
물보러 나간 배들의 귀항 전이라 그런가 해가 떴는데도 잠에서 깨나지 않은 듯한 어항.
어항의 아침은 늘 북적대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인지 적막하고 을씨년스러웠다.
하긴, 고기 포획 실적이 날로 저조해 가고 모여드는 사람의 발길도 날로 더 줄어가는데
어민들의 의욕인들 신명나겠는가.
인기 어족을 미끼로 갖은 이벤트(축제)를 앞다퉈 내걸지만 사람이 모여들지 않는단다.
잔치상을 차려놓아도 먹으려 하지 않고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는다면 중병에 걸린
것이 분명한데 처방전이 나오지 않으니 더욱 난감한 일이다.
자업자득이다.
축제란 이름대로 너나없이 모두 한데 모여 마음을 열고 즐기는 것이다.
참가자의 기분이 고조되어 스스로 지갑을 열고 그래서 수익은 절로 창출되는 부산물이
어야 하는데 지갑을 노리고 일을 꾸미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일석이조(一石二鳥)는 커녕 일거양실(一擧兩失)을 초래하고 있는 것.
내가 보는 삼국유사와 속초시의 삼국유사가 다른가
사람도 차도 없고 활기마저 없는 이른 아침의 장사항과 너른 장사횟집단지를 뒤로 하고
남서쪽 영랑호(永郞湖)로 갔다.
신라(新羅) 때 화랑(花郞)인 영랑(永郞)이 선유(船遊)했다는 석호다.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사션(四仙)은 어대 가니, 예 사흘 머믄 후(後)의 어대가 또 머믈고 션유담(仙遊潭) 영낭
호(永郞湖) 거긔나 가 잇난가" (영랑, 남랑, 술랑, 안상 등 사선은 어디로 갔는가. 여기
에서 사흘간 머문 후에 어디가서 또 머물었던가. 선유담 영랑호 거기에나 가 있었던가)
영랑과 영랑호가 등장하는 대목이며 과거사에 대한 의문문형식으로 사선을 추모하였을
뿐 확신(확증)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영랑이 세 동료 화랑과 함께 금강산에서 수련을 마치고 명승지 삼일포(그들이
삼일 머물렀다 해서)에서 3일간 유람한 후에 동해안을 따라 내려와 영랑호에서 풍류를
즐겼으며 이후로 이 곳이 화랑의 순례도장이 되었다는 것.
이 주장의 근거가 삼국유사(三國遺事)란다.
하지만, 삼국유사 어디에 기록되어 있는가.
내가 보고 있는 닳고 닳은 삼국유사와 속초시의 삼국유사가 다른가?
삼국유사 권제3 '탑상'(塔像) 제4의'백율사(栢栗寺)'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라32대 효소왕(孝昭王) 2년(693년) 국선(國仙) 부례랑(夫禮郎)이 천여 낭도(郎徒)를
이끌고 금란(金蘭/통천)으로 놀러갔다가 북명(北溟/원산만) 지경에서 적적(狄賊/말갈
족)에게 잡혀갔다.
문객(門客/낭도)들은 당황하여 돌아갔으나 안상(安常)만이 그를 뒤쫓아갔다............
세상에서는 안상을 준영랑(俊永郞)의 무리라고 했으나 이 일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영랑의 무리에는 오직 진재(眞材), 번완(繁完) 등의 이름이 알려졌지만 이들도 역시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보아서는 영랑이 술랑(述郞), 남랑(南郞), 안상(安詳)과 함께 신라
사선(新羅四仙)으로 불렸다는 것도 신뢰가 가지 않는다.
사선도, 영랑호에서 풍류를 즐겼다는 것도 허풍이 많은 송강의 상상(관동별곡)일 뿐.
송강뿐 아니라 옛시인묵객들이 하나같이 그랬다.
생각이 이쯤에 이르면 시각적 느낌이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병풍처럼 둘러있는 울산바위와 그 뒤로 도열한 설악 제봉이 압도해
올뿐 다른 인력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영랑호가 호수 중 하나일 뿐이고 속초8경 범(虎)바위도 범(凡) 바위에 불과했다.
오히려, 설악의 허리를 옥괴고 있는 듯 호수 뒤로 펼쳐있는 혐오스러운 고층빌딩군으로
부터 눈을 떼려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영랑교를 건너 해안따라 등대해변 백사장을 지나면 속초등대다.
바다 위의 울산바위처럼 웅장한 모습.
석벽에 부닺치는 파도소리가 거문고 소리 같아 영금정(靈琴亭)이라 했다는 돌산.
일제강점기에 속초항 축항용 돌 충당을 위해서 파괴되어 넓은 암반으로 변한 돌산 위에
세운 등대라 해서 일명 영금정속초등대.
1957년 6월 8일에 등고 48m(돌산38m, 등탑10m)에서 식별거리 36km로 점등된 등대는
2006년에 등탑을 28m로 높여 등고 66m에 전망대를 갖춘 지금의 시설로 거듭났단다.
등대전망대에 올라갔다.
등대 개방시간은 06시지만 전망대 관람시간은 09시다.
맑지 못한 현재 시간이 전망대에 오를 수 없는 07시 35분.
시계가 속초항, 청초호 일대로 제한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새들이 많이 찾는 섬이라는 조도(鳥島)와 외옹치(外瓮峙), 두 속초8경이 가까이
다가오고 오늘 통과할 낙산사까지 가늠되었다.
바닷가 바위산과 갯바위 위에 세운 2개의 정자가 영금정해맞이정자다.
설악산 경관은 물론 해안선 따라 멀리 금강산자락까지 조망할 수 있다는 안내에 끌렸다.
그러나 등대와 다를 것이 전혀 없는 시계.
역시 흐린 날씨 탓일 것이다.
속초 아바이 마을과 청초호 선창의 추억
옛 역사와 지리서를 다 뒤져도 양양과 간성 사이에 있는 무명 어촌에 불과했던 속초.
그러나 지금은 청초호를 기준해 남북항으로 나누어 기능을 분산하고 있는 무역항이다.
속초등대, 영금정지역은 북항으로 일명 동명항(東明洞)이며 상업항이다.
북방항로의 관문으로 현재 중단되었지만 금강산 항로였으며 중국과 러시아를 운항하는
국제여객선터미널이 있다.
남쪽은 청초호 안에 위치한 내항으로 통칭 속초항이다.
"어업의 전초기지, 영동지역 수산물 상거래의 중심항구"라는.
70년대 중반에 국가홍보용 드라마 '꽃피는 팔도강산(?)이 있었다.
이 드라마에 등장한 횟집'팔도강산'(?)을 비롯해 속초항의 즐비했던 횟집들이 이즈음의
용어로 60~70년대 속초의 아이콘이었다면 믿어지겠는가.
차(車)를 가지고 있던 나는 회를 즐기지 않으면서도 월남 함경도민 P의 성화에 설악산
등산과 동해안 드라이브를 패키지로 묶어서 이 선창을 드나들었다.
P도 선창의 영화도 다 가버렸고 가련한 추억마져도 굵은 주름살에 묻혀가고 있는 때에
나는 늙은 길손이 되어 그 바닷가를 다시 밟고 있다.
가련한 추억의 선창길 대신 아바이마을을 지나 외옹치로 가는 새 길을 택했다.
갯배를 타야 했던 월남 함경도 피난민들의 집단거주지 아바이마을(청호동)에 갯배대신
(갯배가 아직도 다니고 있지만) 2개의 높은 다리(금강대교, 설악대교)를 걸어서 갔다.
아바이마을 청호동(靑湖洞)
무인지경의 마을이었기에 월남 피난민들의 정착이 용이했을 것이다.
함경도 난민이 절대 다수였기에 속초의 함경도였으며 이의 없이 아바이마을로 불렸고
갯배 타고 청초호(靑草)를 건너다녔기에 청호동 이름도 청초호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마을 지붕들이 예전에 비해 깔끔하게 정리되었으나 옛 정취가
여전한 골목들을 기웃거리다가 돌아섰다.
선창가 횟집에서 취하면 늘 찾아가는 P와 걷던 골목길을 밟기 싫어서.
청초호와 동해를 번갈아 기웃거리다가 해변길로 들어섰다.
'산호 & 사랑'을 형상화한 산호초와 물고기, 소라 등의 조형물을 세우기 위하여 긴 TTP
방파제를 만들었는가.
속초해수욕장 초입(끝?)의 섬 조도쪽으로 방파제를 만들고 그 끝에 세웠다.
젊은이들에게 달콤한 이야기에 엉터리 정보까지 첨부해.
"유라시아 내륙의 맨 동쪽 끝 .. ..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 이라고?
사랑 얘기는 주관적 관념의 세계지만 객관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은 이해가 걸리지 않은
사소한 일인 듯 하나 신뢰를 떨어뜨리기 때문에 중대한 과오가 될 수 있다.
속초는 유라시아는 커녕 우리나라의 동쪽 끝도 아니다.
동해에서 최초로 일출을 볼 수 있는 지점경쟁에 속초는 끼지도 못하고 정동진과 호미곶
까지도 모두 간절곶에 양보해야 한다잖은가.
속초해수욕장 입구에 '제일군단전적비'가 서있다.
중동부의 38도선 이북 대한민국 지역민은 우리 국군에게 결초보은 해도 부족할 것이다.
38선도 지키지 못한 경기 서부지역에 반해 북쪽 깊숙히 올라간 국군장병들의 희생 덕에
중동부 강원 지역민들은 자유를 누리고 있으니까.
설악산에서 동쪽 청대산(靑垈)을 거쳐 동해로 빠지는 한줄기의 끝이 덕산(德山)이며 이
줄기를 넘는 재가 밧독재(바깥독재), 외옹치(外甕峙)다.
긴 속초해수욕장과 외옹치해수욕장을 지나 덕산을 넘어가려 하는데 군 부대가 있단다.
예전에 있었다는 봉수대(烽燧臺)의 인력도 컸으며 막무가내로 올라간 산에서 군인들과
조우하며 강행했건만 군의 주둔지가 봉수대터란다.
내려선 지점 또한 어이없게도 외옹치 정상.
속초 유일의 장승마을이며 속초8경의 하나인 대포동 외옹치.
장승 부부의 환영을 받으며 자그마한 어촌정주어항 외옹치항으로 갔다.
해안을 따라 오갈 수 없는 곶(串)인 외옹치항 뒷산(덕산)이 주둔 부대의 타지 이동 후 곧
관광지로 개발될 예정이라는데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오염되지 않은 외딴 어촌의 조용한 어항이라는 느낌을 주며 현재의 모습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아늑한 어항인데 동반 추물이 될까 걱정된다.
해안길은 대포동(大浦)의 국가어항 대포항으로 이어진다.
한자(漢字) 大浦(대포) 이전에 한개, 큰 포구로 불렸던 어항이다.
설악산 길목에서 손님을 싹쓸이함으로서 옛 선창가 횟집거리의 명성을 잠재운 대포항.
손님의 만원사례로 아래로는 설악과 양양군의 물치, 위로는 동명과 장사가 횟집단지를
확장하게 했다.
속초시의 관문을 자임하며 연간 100만명 이상의 방문객을 소화하는 관광어항으로는 현
규모와 시설이 턱없이 부족함을 자각했는지 대규모의 변화가 진행중이다.
바람직한 변화임에 틀림 없지만 대포항 관계자들이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대포항 주변항의 회단지 고객의 증가현상이다.
대포항의 수용 한계 때문이 아니라 대포항에 부정적인 고객의 이탈이 늘고 있다는 것.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시설의 개선과 확장도 빛좋은 개살구가 될 것이다.
설악산(雪嶽山)에서 발원하여 도문동(道門)을 거쳐 동해로 빠지는 쌍천의 양쪽(속초와
양양군)에 각기 물치가 있었다.
일제는 동일 발음으로 인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속초의 물치에 '내(內)'자를 전치하고
한자도 달리 함으로서 속초의 물치는 내물치가 되었단다.
속초 물치의 '勿'과 달리 '沕'로.
그러나, 속초시는 설악산의 들머리인 내물치를 개편했다.
다양한 조각상들을 설치하고 산책로를 조성하였다.
이름도 '설악해맞이공원'으로 아예 바꿨으며 공원은 속초8경에 들게 되었다.
내물치항도 설악항으로 개명했고.
낙산사 소고
대포항 이후로는 낙산사 한하고 7번국도 외의 해안길이 거의 없다.
'설악해맞이공원'까지 속초시 구간은 국도에 안심하고 걸을만한 인도가 조성되어 있다.
하류인 물치 부근에서 두 가닥으로 나뉘어 흐른다 해서 쌍천(雙川)의 쌍천교를 건넜다.
양양군 땅 강현면 물치리(降峴 沕淄)에 들어선 것.
일제강점기의 물치는 강릉 ~ 원산 사이에서는 가장 큰 장이 섰던 마을이었으나 속초의
번영은 물치의 몰락을 초래했고 결국 경제와 교육 등 생활권이 속초가 되었단다.
양양군의 북단에서 속초시와 경계를 이루는 지방어항 물치항.
속초의 대포항 보다 먼저 변신해서 경쟁력을 갖췄다 할까.
쌍천을 두고 양쪽(설악항과 물치항)에서 유사한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어촌계 가족단위로 소유한 어선이 잡은 활어로 고객을 상대하므로(중간상을 통한 유통
과정이 생략되므로) 다른 어항에 비해 가격경쟁력이 있으며 고객을 배려하는 점 등이.
시설면에서는 물치항이 월등한 우위에 있으며 다른 모든 어항들에 비해서도 그러하다.
고객을 배려하는 어항이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물치천을 건넌 후의 정암해변 길은 해변의 데크가 조성되지 않았다면 포기했을 길이다.
나이와 함께 만용은 작아지고 공차증이 커가는 늙은이가 걷기는 벅찬 7번국도라.
국도의 갓길로 조성된 방부목데크, 시멘트 콘크리트, 자갈해변이 섞인 길이다.
해파랑길 또는 낭만가도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함인지 부분적으로는 인도 공사가 진행
중인 구간이다.(다카에 사진이 담겨있지 않아 이 일대의 기억이 가물거린다)
전망대를 올랐다가 내려서면 7번국도변에 위치한 전진2리의 어촌정주어항 후진항이다.
낙산사가 있는 오봉산 북쪽의 어항이며 설악해수욕장으로 더 알려진 곳이다.
양양 설악해수욕장에서 낙산사로 이어지는 오봉산의 지름길(산길)이 있으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잖은가.
7번국도변(주청리) 식당(청산본가설렁탕)으로 갔다.
간밤에 빵을 먹인 후 점심때가 지나도록(13:00) 아무것도 먹이지 않는 주인에게 협조할
종(몸)이 있겠는가.
식사후 식당에 배낭을 맡겨놓고 낙산사로 갔다.
<배꽃은 벌써 떨어지고 소쩍새 슬피 울 때, 낙산사 동쪽 언덕의 의상대에 올라 앉아서
해돋이 보려고 한밤중에 일어나니 상서로운 구름이 피어나는 듯 하고, 여섯 마리 용이
해를 떠받는 듯도 하여 바다에서 해가 떠날 때는 온세상이 흔들거리더니 하늘에 치솟아
뜨니 가는 터럭까지도 다 셀 수 있을 만큼 환하구나.>
송강 정철이 관동별곡에 담은 관동8경의 하나다.
낙산사는 거의 타의에 의해서였을 망정 내 동네 밖의 사찰로는 가장 많이 들른 곳이다.
매번 안내자, 해설사 역을 맡았으니까.
그럼에도 이번에는 자의로 다시 갔다.
2005년 4월의 산불에 소실된 후의 복원 상태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신라 문무왕11년(671), 의상대사(義湘)가 창건한 이래 소실과 복원을 거듭한 사찰.
1231년(고려23대 고종18년)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도
화재를 당했다.
이조22대 정조원년(1776)에는 원인 모를 화재가 있었고 6. 25 동란 때 또 소실되었는데
이번에는 어이없게도 먼 고성에서 발생해 남하를 거듭한 산불에 타버린 것이다.
3점의 보물(7층석탑, 건칠관음보살좌상, 해수관음공중사리탑·비 및 사리장엄구일괄)과
사적(낙산사 일원), 명승(의상대와 홍련암) 및 강원도유형문화재 등이 수두룩한 사찰의
화재와의 악연이 왜 이리도 오랜 세월 계속될까.
홍련암은 보문사(강화석모도), 보리암(남해금산)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관음기도도량
이라건만 부처님의 원력으로도 보호받지 못하는가.
그보다, 강원도 고성에서 일어난 산불은 속초를 거쳐서 양양 오봉산의 낙산사를 태우고
강릉, 동해, 삼척을 지나 울진 부구의 원자력발전소 앞에서 겨우 진화되었다.
원전까지 태워버릴 기세를 꺾은 것은 우리 국력(방재력)이 아니고 하늘이었다.
하늘의 자비의 시효가 아직은 남아있는지 원전 앞에서 바람을 죽이고 비를 내렸다.
표현대로 요원의 불길이 수백리를 달려가도록 잡지 못한 정부.
무력한 정부를 의지하고 살아야 하는 국민이 참으로 한심하고 불쌍하지 않은가.
낙산사는 고색창연할(古色蒼然)할 기회가 없다.
소멸과 중건과 복원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창건 이래 보존되고 있는 것이란 땅(地) 외에 무엇이 있는가.
로마는 네로의 방화로 발전했고 간토(關東)대지진이 도쿄 발전의 계기가 되었단다.
전쟁과 화재 등 인재와 지진과 해일, 홍수 등 천재라는 재난이 혁명적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소실과 파괴가 거듭되어도 복원 이상은 한치도 나갈 수 없는 낙산사에게 재난은
불행일 뿐이므로 더 이상 재난에 시달리지 않기 바라며 낙산항으로 갔다.
전진1리(前津)의 어촌정주어항으로 전진항에서 바뀐 이름이다.
낙산사 의상대 아래 바다 쪽에 있으며 항포구에 노천 횟집단지가 있다.
이조7대 세조가 낙산사에서 피부병을 고쳤단다.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많은 목숨을 빼앗았는데도 부처님은 자비를 베푸셨던가.
세조는 고마워서 낙산사를 기준하여 바다 포함 사방 10리를 낙산사 땅으로 하사했다나.
이로 인하여 삼국시대, 낙산사 창건 이전부터 살아온 주민들은 해산물까지도 일정량을
낙산사에 바치고 생활하였단다.
일제가 낙산사의 바다에 대한 권리를 박탈하고 땅도 많이 환수했으나 대부분이 낙산사
소유지인 도로의 사용료를 지금도 내고 있는 실정이란다.
절에서는 방생하고 주민들은 잡아서 횟집을 차리고 신도들은 사먹고, 그래서 벌어들인
돈으로 절에 세금내고 시주하고 . . . . .
낙산도립공원 해안을 걸으며 생각하며
식당에 가서 배낭을 메고 낙산해수욕장(주청리)으로 갔다.
해운대(부산)와 경포(강릉)의 두 해수욕장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해수욕장의 하나라고도
말하며 낙산사, 하조대해수욕장 등과 함께 낙산도립공원 지역이다.
하조대 앞까지는 내가 오늘 걸어야 할 해안길이다.
70년대 중반 어느 여름, 해수욕철이 마감해 가던 때 이미 이승을 떠난 P를 비롯해 몇이
설악산과 속초선창의 횟집 등에서 하루를 보낸 후 여기 백사장에 천막을 쳤다.
양양읍의 3대를 이어오는 고씨네 식당(단양면옥)과의 인연으로 거의 해마다 그랬는데
이 날 밤에는 한 사람의 과음에 따른 주정 때문에 비상이 걸렸던 일이 생생히 떠올랐다.
하나씩 떠나가고 남은 사람이 적어졌다.
내가 허전함을 곱씹는 마지막이 될까 내 뒤에 누가 남아서 그러고 있을까.
우울한 생각을 털어버리려고 달리듯 남대천으로 갔다.
오대산과 구룡령에서 각기 발원한 물이 합류해 동해로 빠지는 큰 하천.
남쪽 강원도의 3곳 남대천 중에서 회귀하는 연어의 70%가 모인다는 양양 남대천.
북태평양에서 3~5년 자란 연어떼가 돌아오는 곳이라 해서 연어들의 모천, 어머니의 강.
송이의 고장답게 송이 조형물로 장식된 다리.
하구의 475m 낙산대교 양편 곳곳에 차량들이 정차중이다.
다리 난간에 서서 연어를 낚아 올리려고 낚싯줄을 길게 내려놓은 강태공들의 차다.
아무리 죽으러 오는 길이라 해도 종족번식의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낚아채려는
이들이 야속해 보였다.(본란2회글참조)
양양8경의 제1경 남대천을 건너면 손양면(巽陽)이다.
가평리(柯坪里) 강원외국어교육원을 지나 남행하는 해안길은 '선사유적로'라는 이름의
차로 밖에 없다.
송전리(松田) 선사유적로변에는 양양ATV(All Terrain Vehicle/4륜산악오토바이),양양
오토캠핑장 등이 넓게 자리잡고 있다.
이번에는 ATV 열풍이 전국 지자체를 강타하고 있는가.
가는 곳마다 ATV체험장이다.
자라 형국이라는 오봉(鰲峯)이 용립(聳立)하고 있다 해서 오산리의 오산해변, 어촌정주
어항 오산항, 태양의 해변이라는 쏠비치 호텔&리조트(Sol Beach Hotel & Resort).
철 지나 적적한 해변의 분위기를 쏠비치 호텔&리조트가 만회하고 있다.
다만,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말라가 항, Costa del Sol 주변 건축을 모티브로
했다"느니, "지중해 스페인의 멋과 낭만의 경험"이라는 홍보에 속말로 김이 샜다.
지중해가 우리의 동해보다 멋있고 낭만적이며 스페인이 과연 그러한가.
자연 사대주의에 매몰된 열등의식을 극복하기가 그리도 어려운가.
휴휴암에 "제이의 쏠비치를 만들려는 재벌의 횡포" 라는 글이 있었는데 쏠 비치가 실패
작이라는 뜻인가.
속초 외옹치의 덕산도 또 다른 쏠 비치가 될 운명인가.
탐욕스런 재벌들이 가장 눈독들이는 곳은 아마도 낙산사가 자리하고 있는 오봉산일 것.
거대 사찰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요절났을 것이다.
동명천(오산교)을 건넌후 우측의 선사유적지(선사유적박물관)에 할애할 시간이 없음을
애석해 하며 수산리(水山)의 수산항으로 갔다.
요트전용 부두가 있는 국가어항이다.
요트항의 환경은 서-남-동 가릴 것 없고 예외없이 청결한 인상을 주어 기분이 상쾌하다.
태평양, 대서양 해안에서도 요트항은 같은 느낌을 준다.
동호리 해변 직전에 을지인력개발원이 있다.
'을지'라는 단어가 내게는 경색적梗塞)이다.
을지문덕, 을지부대, 을지훈장, 을지연습(CPX) 등 군사적이라는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한데, 여기는 을지병원, 을지의과대학 등의 을지재단에서 운영하는 수익사업체란다.
이름을 부드러운 단어로 바꾸면 지장이 있을까.
선사유적로를 떠나 구리개, 굴개라고도 불린다는 동호해변으로 갔다.
동쪽에 있는 호수의 색깔이 구릿빛(銅色)이라 해서 동호리(銅湖)의 해수욕장에서도 단
한사람도 만나지 못하고 숲길에 다름아닌 해안차로를 걸었다.
왕래차량이 거의 없어 걸을만 했으나 오래 가지 않아 막힌다.(해뜨는바다팬션 앞에서)
다시 선사유적로로 나와 상운천(祥雲里) 동호교를 건너 양양공항호텔 옆을 지났다.
비로소 인근에 양양국제공항이 있음을 의식했다.
이착륙 여객기가 없으므로 항공기의 굉음을 들을 수 없고 장애물에 막혀 보이지 않아서
공항을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공항이, 더구나 국제공항이 절실히 요구되는 곳인가.
여운포교(如雲浦里)를 건넜다.
하조대 인근의 양양국제공항휴게소가 지근이며 어제 중지한 지점이다.
이 하루는 많은 구간을 해파랑길,낭만가도와 따로 걸었나 보이지 않던 해파랑 표지판이
있는 지점이기도 했다.
기사문항까지 승용차에 편승한 후 38교, 경찰전적비 앞, 잔교리해변, 북문해변, 동산항
삼거리까지 어제 승용차에 편승했던 길을 걸었다.
비록 밤길이지만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을 걷는 것으로 활용한 것이다.
친절하지 못한 버스기사를 원망하느니 그게 마음 편한 방법이니까.
정류장에 사람이 서있는데도 정지하지 않고 달아나는 버스,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변호해 주며 불을 켜서 정지 신호를 해줘야 한다는
다음 버스의 기사.
정류장 정차 의무를 지키지 않고 승객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기사와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있는지 버스요금을 받지 않겠다는 기사.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