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원
현감ㆍ훈도 : 각 1인.
군명
신촌(新村)ㆍ신읍(新邑).
성씨
본현 : 장(張)ㆍ최(崔)ㆍ이(李)ㆍ임(任)이 있으며, 문(文)ㆍ진(陳)ㆍ나(那)ㆍ유(兪)ㆍ신(申)ㆍ김 (金) : 모두 촌에 있다.
형승
땅이 협소하고 서해[鰈海]가에 위치해 있다. -정대(鄭帶)의 기문에 있다.
산천
당산(唐山) : 현 동북쪽 4리에 있는 진산이다.
지을현(地乙峴) : 현 동쪽 5리에 있다.
오서산(烏棲山) : 현 북쪽 17리에 있다.
아현(我峴) : 현 서쪽 12리에 있다.
타고도산(打鼓島山) : 현 서쪽 43리에 있다.
사읍현(沙邑峴) : 현 남쪽 9리에 있다.
백월산(白月山) : 현 동쪽 25리에 있다.
바다 : 현 서남쪽은 모두 바다다.
대천(大川) : 현 남쪽 24리에 있는데 백월산에서 나와 해소포로 들어간다.
해소포(蟹所浦) : 현 남쪽 24리에 있으니, 대천 하류다.
죽도(竹島) : 현 서쪽 19리에 있다.
송도(松島) : 현 서쪽 22리에 있다. 둘레가 12리며 조수가 물러가면 고만도와 연하게 된다.
고만도(高巒島) : 현 서해 22리 지점에 있는데, 옛날에 군사가 지키던 곳에 민가가 있다.
○ 고려 최해(崔瀣)가 일찍이 이 고을로 좌천되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외로운 도서 위를 오가면서, 타향에 기식(寄食) 하고 아침저녁을 보낸다. 아낙네들은 키가 작아 다니는 것이 흡사 자라[鱉]와 같고, 백성이 곤궁하다 보니 그 모습이 원숭이 방불하구나. 풍속은 비록 그 습상(習尙)의 잘못은 있어도, 예절만은 간혹 존비(尊卑)를 분간한다.
해 떨어지니 비린내 풍기는 바다 연기 모아들고, 가을 기운 이미 서늘한데도 해상의 장기(瘴氣)는 훈훈하다. 바다 가운데 위태한 봉우리는 조심조심 서 있는 것 같고, 포구의 맑은 물은 한층 더 꿈틀꿈틀 흐른다. 배 돛대의 모습이 물속에 박히니 하늘 그림자를 갈라 놓고, 모래 쌓여 있어 지나간 물 흔적을 알겠도다. 바다 지리는 옛것을 가지고 징험하겠고, 조숫물의 역수(曆數)는 지금 사람들에게 번거롭게 물어본다.
늙은 나무는 바람이 싫어서 구부리고 있나. 놀란 물결 암석을 만나 시끄럽게 소리낸다. 중과 이웃하여 지식(止息)을 같이하니, 세상과 더불어 시끄러운 잡음이 막혔도다. 낚싯대 잡고 때를 어찌 견디어 기다리랴. 뗏목을 타고 바다로 멀리 뜨는 것도 또 흥취 있으리라. 이 긴 노래를 누가 화답하리요. 긴 한숨 짓고 말하지 않으련다. 다만 이 연파(煙波)를 즐기는 것도, 오히려 성주(聖主)의 은택임을 믿노라." 하였다.
모도(茅島) : 현 북쪽 12리에 있다.
용연(龍淵) : 현 북쪽 15리에 있다. 또 현 동쪽 15리에 역시 용연이 있는데, 모두가 날이 가물면 비를 비는 곳이다.
토산
지치[紫草]ㆍ모래무지[鯊魚]ㆍ홍어(洪魚)ㆍ청어(靑魚)ㆍ석굴[石花]ㆍ조기[石首魚]ㆍ삼치[麻魚]ㆍ전어[錢魚]ㆍ준치[眞魚]ㆍ숭어[秀魚]ㆍ도루묵[銀口魚]ㆍ살조개[江瑤柱]ㆍ민어(民魚)ㆍ농어[鱸魚]ㆍ오징어[烏賊魚]ㆍ전복[鰒]ㆍ조개[蛤]ㆍ낙지[絡締]ㆍ참가사리[細毛]ㆍ김[海衣]ㆍ안식향(安息香).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1백9척에 높이는 12척이며, 안에 우물 셋이 있다.
관방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병영(兵營) : 현 서쪽 20리에 있다. ○ 절도사와 우후(虞侯) 각 1명이 있다.
신증
정덕(正德) 경오년에 비로소 돌로 성을 쌓았는데, 둘에는 3천1백74척에 높이는 11척이고, 안에 네 개 우물과 한 개 못이 있다.
봉수
조침산봉수(助侵山烽燧) : 현 서쪽 15리 지점에 있는데, 남쪽으로는 남포현 여도점(餘道岾)과 호응하고, 서쪽으로는 홍주 흥양곶(興陽串)과 호응한다.
궁실
객관(客館) : 정대(鄭帶)의 동헌기(東軒記)에, "보령이 경인년부터 바다 도적의 해를 입어 우리 태조 경진년에 봉당(鳳堂)에 성을 쌓고는 이를 방어하는 곳으로 삼았다.
그러나 성터가 얕고 좁은 데다가 험준하고 조격(阻隔)한 공고(鞏固)함과 우물을 보유하는 편리함이 없더니, 세종 경술년 가을에 순찰사(巡察使) 최윤덕(崔潤德)이 감사 박안신(朴安信), 원융(元戎) 이흥발(李興發)과 더불어 다시 성 동쪽 1리 지점인 지내동(池內洞) 당산(唐山) 남쪽을 살펴보고는, 서산 군사(郡事) 박눌생(朴訥生)과 현수(縣守) 박효함(朴孝諴)으로 하여금 공역을 헤아려 기한을 명하였던 바, 수 개월이 못 되어 낙성을 고하게 되었다.
내가 신해년 겨울에 박현수를 대신하여 이 고을에 왔고, 다음 해에 비로소 객관과 동서름(東西廩)ㆍ제민당(濟民堂)ㆍ공아(公衙)ㆍ현사(縣司)ㆍ어풍정(馭風亭)ㆍ병기고(兵器庫)ㆍ영어(囹圄) 등을 지어 이루니, 모두 140여 칸에 달하였다." 하였다.
누정
어풍정(馭風亭) : 객관과 동헌 북쪽에 있다. 박눌생(朴訥生)의 기문에, "신해년에 온천(溫泉) 정공(鄭公) 대(帶)가 이 고을 수령이 되어 왔는데, 그 정사가 청렴하고 송사를 잘 다스리니, 백성들이 즐겨 역사에 달려가서 관우와 공청을 한결같이 모두 신축하였고, 또 동쪽 봉우리 위에 정자를 짓고는 도식(塗飾)과 단청을 이미 마치고 나서 나에게 명명해 주기를 청해 왔는지라, 내 그 경치를 보려고 처음 정자 위에 올라 보니, 북쪽으로 높은 산에 의거하고 남으로는 큰 들을 내려다 보고 있어 누정의 마루가 시원하고 처마도 나는 듯이 높이 솟아서 마치 구산(緱山) 산마루에 올라 낭풍(閬風 산이름)을 제어해 보는 것 같았으므로, 이름하기를 어풍이라 하였다고 하였는데, 해가 오래되고 퇴락하여 현감 박적손(朴迪孫)이 이를 중수하니, 관찰사 정미수(鄭眉壽)가 이름을 무이정(撫夷亭)이라고 고쳤다." 하였다.
제민당(濟民堂) : 현 북쪽 성안에 있다.
환영루(環瀛樓) : 수군절도사 병영 안에 있다. 유제(柳睇)가 세웠다.
신증
이의무(李宜茂) 시에, "한가하여 높은 누정에 올라 먼 눈길 시원하게 바라보니, 고래 희롱하는 물결 호호(浩浩) 망망(茫茫)하게 하늘과 접해 떠 있구나. 현포(玄圃)로 신선 찾아 마냥 술 마시고서, 푸른 용[蒼虯] 잡아 타고 마음껏 멀리 놀고 싶다.
우연히 만난 옛벗 푸른빛이 눈에 가득 차 있는데, 탐승(探勝)에 지쳐버린 먼 길손 흰 것이 온통 머리를 덮었다네. 참 신선이 어디 있기에 돌아오는 것이 이다지 늦으랴. 부자유한 진세의 번롱(樊籠)을 그대는 응당 웃으리라." 하였다.
신증 영보정(永保亭)ㆍ빙허당(憑虛堂) : 모두 수사(水使)의 영안에 있다.
○ 박은(朴誾) 시에, "땅은 절박해 다하여도 천경(千頃)의 바다는 궁하지 않아 산을 열어 오히려 한 머리 조수를 받아 들이고 있구나. 빠른 바람이 안개를 쫓으니 물은 거울 같은데, 주저(洲渚)가에 사람 없이 새들만 스스로 노래 부른다.
나그네 길에 맑은 경치 만나면 매양 한탄을 일으키는 법, 해(임금) 있는 곳 바라보고 다시금 고향이 먼 것을 깨달았다. 고심해 읊으며 떠나지 못해도 새로운 말이 떠오르지 않아 떨어지는 해 먼 하늘 가로 빠지는 것을 수심에 찬 채 바라보고 있노라." 하였다.
○ "늦 조수 오는 곳에 잠깐 베개에 기대있다가, 눈을 들고 홀연히 주저가 생겨나는 것을 보았다. 아침저녁으로 정녕 누가 호흡하도록 하는 것이겠지. 저 하늘과 땅도 마침내는 또한 찼다가는 기우는 일이 있으리라.
남녘 사람들 바다에 뜨면 육지에 말 걸어가듯 하고, 물 나라[澤國]에서도 봄을 만나더니 날이 조금은 개는구나. 날마다 누각에 의지하곤 내려갈 줄 모르니, 괴상한 음성 때로 백구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하였다.
○ "평생 병든 눈이 먼 조망(眺望)을 겁내어, 심장(尋丈, 심은 8척이고 장은 10척을 말한다)의 사이조차 분별하지 못하였다. 새가 지나가면 오히려 한 점의 눈[雪]인가 의아했고, 산이 비껴 있는 것을 다시 구름더미로 착각도 했다.
서녘 하늘 가에 떨어지는 해는 빨리 서로 옮겨가고, 공허한 저 속에는 별들이 더욱 스스로 분분히 번쩍인다. 책상에 기대어 어두운 하늘 보고 있노라면 문득 졸음을 이루나니, 다만 낭연(琅然)한 쇠거문고 소리가 들을 만하구나." 하였다.
○ "땅의 형세는 탁탁 치며 곧 날려는 날개와 같고, 누정의 모양은 한들한들 매여 있지 않은 돛대와도 같다. 북녘으로 구름에 쌓인 산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디로 향하려는 것이냐. 남방으로 오면 둘러싸인 산천 예가 가장 웅장하구나.
바다 기운은 안개를 빚어 비를 이루고, 파도의 기세는 하늘을 뒤집을 듯 스스로 바람을 일으킨다. 어두운 속에서도 새들이 서로 부르짖는 소리를 듣는 듯하여, 앉아 있는 사이에 지경이 함께 비어 있음을 완전히 깨달았노라." 하였다.
○ "아름답지 않은가. 내가 아침에 홀로 와 글 읊는 곳에, 한 낚시대만큼 솟아오른 첫 아침해가 발을 비쳐주네. 바람 돛대는 언제나 조수와 함께 올라오고, 어민의 집들이 모두 굽어보고 있으니 언덕이 기울려 한다. 비 온 뒤의 바다와 산은 모두 수려한 빛을 띄고 있고, 봄이 돌아오니 금조(禽鳥)들은 스스로 그 소리를 화답하네. 나그네 길에서도 기이한 승경 만나면 오히려 좋은 구절 나오기를 기다리나니, 승평한 세월의 문장이라 하여 명성을 요구하려는 것이 아니로세." 하였다.
학교
향교 : 본현 동쪽에 있다.
역원
청연역(靑淵驛) : 현 남쪽 6리에 있다.
우이현원(牛耳峴院) : 현 동쪽 27리에 있다.
보원(寶院) : 보원부곡에 있다.
가두원(加頭院) : 현 남쪽 20리에 있다.
불우
사나사(舍那寺) : 백월산에 있다.
성당사(聖堂寺) : 오서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지을현(地乙峴)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봉당성(鳳堂城) : 지금 관아 서쪽 2리에 있다.
현하부곡(懸河部曲) : 현 남쪽 28리에 있다.
보원부곡(寶院部曲) : 현 동쪽 17리에 있다.
금신부곡(金神部曲) : 현 서쪽 13리에 있다.
건자산소(巾子山所) : 현 북쪽 20리에 있는데 지금은 청소리(靑所里)라 부른다.
당산성(唐山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8백10척이다. 안에 우물 하나 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아현산성(我峴山城)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7백45척인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제영
죽오풍경침(竹嗚風警枕) : 유원순(兪元淳) 시에, "낮에 해풍군(海豐郡)을 출발하여 저물어서야 보령에 이르렀다. 대가 바람에 울며 베개 가를 흔들어 깨우더니, 구름이 비로 눈물을 뿌려 나의 길을 머물게 했다. 저녁 연하(煙霞) 깊이 끼어 머리가 다시 무거웠는데, 아침해 돋아 오르니 뼈가 잠시 가벼워 지는 듯하다. 이 몸이 늙고 병들고 보니, 비로소 음청(陰晴)만을 풀어 점치는 까닭을 알겠도다." 하였다.
《文獻備考》
연혁
효종 3년에 도호부로 승격시키고 수군절도사로서 부사를 겸하게 하였다가 6년에 다시 예전처럼 현으로 강등시켰다.
방면
장척(長尺) : 끝이 5리다.
금신(金神) : 본디 금신부곡이었다. 서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5리다.
주포(周浦) : 남쪽으로 끝이 10리다.
목충(睦忠) : 동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15리다.
청라동(靑蘿洞) : 동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20리다.
오산외(烏山外) :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5리다.
명암(鳴巖) : 동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다.
○ 현하부곡은 남쪽으로 28리, 보원부곡은 동쪽으로 17리며, 중자산소(中子山所)는 북쪽으로 20리다.
성지
당산고성(唐山古城) : 둘레가 1천8백10척이고, 우물이 하나다.
아현고성(我峴古城) : 둘레가 7백45척이다.
영아
수영(水營) : 서쪽으로 20리인 바닷가에 있다. 본조 태조 5년에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두어 보령을 관리하였다. 세종 3년에 도안무처치사(都安撫處置使)로 고쳤다가 세조 12년에는 수군절도사로 고쳤다.
관원
충청도 수군절도사 중군(中軍) -바로 수군의 우후(虞侯)다. 각 1인. 속읍 ; 홍주(洪州)ㆍ태안(泰安)ㆍ서산(瑞山)ㆍ당진(唐津)ㆍ면천(沔川)ㆍ서천(舒川)ㆍ임천(林川)ㆍ한산(韓山)ㆍ비인(庇仁)ㆍ남포(藍浦)ㆍ보령(保寧)ㆍ결성(結城)ㆍ해미(海美).
속진
영보정ㆍ관덕루(觀德樓)ㆍ대변루(待變樓)ㆍ능허각(凌虛閣). ○ 고소대(姑蘇臺) ㆍ이오도(離鰲島)ㆍ한산사(寒山寺).
본영과 속읍ㆍ속진은 갖가지 모양의 전선 92척을 가지고 있다. -진(津)의 배는 40척이다.
토산
감ㆍ전죽(箭竹).
사원
화암서원(花巖書院) : 광해주 경술년에 세웠고, 숙종 병인년에 사액되었다.
이지함(李之菡) : 자는 향백(馨白) 호는 토정(土亭),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벼슬은 아산 현감이었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이산보(李山甫) : 서천에 보임.
이몽규(李夢奎) : 자는 창서(昌瑞), 호는 천휴당(天休堂), 본관은 경주다. 대사헌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