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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호대의의 좌선명(坐禪銘)2
이런 글은 있는 그대로 음미할 뿐이지, 해석하면 군더더기가 되고, 오히려 공부하는 사람의 눈을 흐리게 하겠지요. 그래서 다시 한 대목 읽고 살필 것 있으면 살피고 넘어가겠습니다.
아호대의 화상의 앉아서 참선하는데 대한 내용의 글이지요.
첫째 대목,
참선하고 도를 배우는 것이 몇 가지나 되던가?
중요한 것은 공부하는 이가 선택하는 것이다.
몸을 잊거나 마음을 죽이려하지 말아야하니,
이는 치료하기 힘든 가장 깊은 병이네.
참선하고 도를 배우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지요. 간화(看話)하는 법도 있고, 묵조(黙照)하는 법도 있고, 이외에 여러 가지가 있는데, 중요한 것은 공부하는 사람 말하자면 발심한 이가 내가 무슨 화두를 간택하든지 해서 내가 철저히 한번 깨쳐보겠다는 철석같은 마음, 그것이 중요하다. 어느 것이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 공부하는 이가 어떤 화두, 어떤 방편을 내가 해서, 꼭 깨달아야 하겠다는 입지, 아주 철썩 같은 그 입지가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몸을 잊거나 마음을 죽이려하지 말아야하니
이는 치료하기 힘든 가장 깊은 병이네.
몸뚱이를 잊어버리려고, 말하자면 무심하려고 애를 쓰고, 또 마음을 이런저런 마음을 꾹 눌러서 없애려고, 성내는 마음을 없애려 하고, 질투하는 마음을 없애려 하고 그렇게 몸부림치면 안 된다. 그것은 치료하기 힘든 가장 깊은 병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나? 단지, 화두의 낙처(落處)를 깊이 관찰하고 관찰해서, 의심하고 의심할 뿐이다. 그렇게 화두 의심하는데 목숨을 걸어야지, 몸뚱이 한 번 놔보려고, 또 성질나는 질투하는 시비하는 이 마음을 자꾸 안하려고 애쓰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채질해서 더 성하게 돼요. 그래서 치료하기 힘든 깊은 병이 생긴다. 억지로 자기 몸을 잊으려하고, 억지로 자기마음을 없애려하지 말고 , 단지 화두만 열심히 들고 들 뿐이라는 것이지요.
둘째 대목,
앉아서 깊은 근원 참구하라.
이러한 도는 예로부터 세상에 전해져 온 것이다.
앉아서 깊은 근원을 참구하라는 것은 모든 마음이 일어나기 그 전에 살펴보고 참구하고, 살펴보고 의심해 살펴보고 살펴봐라. 일체 마음 일어나기 그전에는 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 실지로 그 세계를 살피고 살피며, 의심하고 의심한다는 것이지요. 앉아서 깊은 근원을 참구하라. 이러한 도(道)는, 이렇게 공부한 도리는 옛날부터 세상에 전해져온 것이다. 본사 석가세존께서 고행림에서 육년을 좌부동 하시며 견명성 하고 견성성불 하신후로 무수 조사께서 그 법을 이어 오셨지요
태산처럼 단정하고 반듯이 앉되,
늠름하게 공한(空閑)을 지킬 필요 없다.
몸은 태산처럼 한번 앉으면 죽비 칠 때까지, 일어날 때까지 태산처럼 움직이지 말고, 단정하고 고요하게 앉아서, 일체 번뇌 망상을 놔버리고 단정하게 앉되, 공한(空閑)을 지킬 필요 없다. 말하자면 비고 한가한 그것을 지킬 필요가 없다. 비고 한가한 것을 지키는 게 아니라, 근원을 살피고 살펴야 된다. ‘아~ 조용해서 좋다! 아~ 망상도 없고 비어서 좋다~’하면 안 된다. 망상 없고 한가하고 자유롭고 그런 걸 사랑하지 말고, 그런 걸 찾지 말고, 그 근원, 일체 마음이 일어나기 그전의 근원을 살피고 확인하는, 의심하고 의심할 뿐이지, 한가하고 비었구나~ 그렇게 그걸 지킬 필요 없다.
셋째 대목,
당장에 취모검(吹毛劒)을 들어서
서래제일의(西來第一義)를 밝혀내야 하리라.
취모검이라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설명하면, 하도 칼이 잘 들어서 칼을 잘 갈고 나중에 시험할 때는 머리카락을 칼날에 얹어 확 불면 머리카락이 두 동강이 나요. 그만큼 잘 드는데, 말하자면 취모검과 같은 그 의지, 그 깨끗한 마음으로 공부해야 된다는 거지요. 세상의 오욕락이나 어떤 유혹도 취모검 앞에선 얼씬도 못하죠. 그걸 들어서 서래제일의(西來第一義)를 밝혀내야 하리라. 달마스님이 서쪽에서 온 그 첫째 뜻을 밝혀내야 하리라. 이 생각, 저 생각, 이게 옳을까, 저게 옳을까 하는 것은 야호정령이고, 취모검이라는 것은 눈을 번쩍 뜨고 정신을 번쩍 차려서, 달마스님이 여기 온 첫째 뜻이 뭘까? 그 깨끗하고 밝고 아주 섬뜩한 그런, 남이 그 모습을 보면 기함할 정도로, 그런 마음으로 화두를 들어야 된다는 뜻이지요.
말하자면 화두 참구하는 사람은 이 생각 저 생각이 끼어 들 겨를이 없이, 아주 번뜩이는 그 칼날 같이 섬뜩한 그런 기(氣 )로써 조사선을 간파해야 된다. 이럴까? 저럴까? 이 뜻 아닐까? 저 뜻 아닐까? 이것은 야호정렴이다. 말하자면 의심하기 좋아하는 여우들이나 소인배들이나 하는 것은 그건 공부도 아니고 망상하는 것이다. 공부한다는 것은 당장에 취모검을 들어서 서래의 달마가 온 뜻, 그 첫째 뜻이 뭘까? 하고 그걸 밝혀내야 하리라.
두 눈을 크게 뜨고 눈썹도 치켜세워서
저것이 무엇인지 거듭 바라보아라.
말하자면, 흐리멍텅하니 눈을 뜬지 감은지, 조는지 어떤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눈을 크게 뜨고, 눈썹도 치켜세워서, 저것이 무엇인지 거듭 바라봐라. 망상할 틈이 없고, 삿된 생각이 거기 못 침범하고, 잠이 어디 스멀스멀 기어들어올 틈이 없이, 그런 아주 사자같은 용맹으로, 해야된다 그렇다고 해서 힘을 꽉 주고 눈 크게 뜨고 하면 일 분도 못 앉아 있어요. 그 뜻이 그렇다 그 말이지.
네 번째 대목,
도적을 잡으면 장물(贓物)까지도 찾아내야하되,
도적이 깊이 숨었다고 두려워하지 마라라.
도적이란 것은 뭡니까?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이 그만 내 근본지를 어둡게 해서, 도둑으로 표현하지요. 눈도 내 마음의 공덕을 뺏는 도적이고, 귀도 그렇고, 코도 그렇고, 입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고, 생각도 그렇다. 이런 도적을 잡으면, 말하자면 장물까지도 잡아내야하니, 말하자면 눈으로 지은 죄 그게 장물이고, 귀로 지은 죄 그게 장물이지요. 그러니까 도적 잡으면 도적 때문에 내가 세세생생(世世生生) 지은 죄까지도 낱낱이 찾아내야 하지. 말하자면 다시는 살생하는 일이 영원히 없고, 다시는 도둑질 할 일이 영원히 없고, 다시는 음행할 일이 영원히 없고, 다시는 거짓말하는 일이 영원히 없고, 이러한 마음의 도적을 잡으면 그래 되지요. 그것이 이 공부다. 그런데 도적이 깊이 숨었다고 두려워하지 마라라. 말하자면 도적을 잡으려 해도 도적이 보여야 잡지. 그렇다고 두려워하지 마라라.
지혜가 있으면 찰나에도 찾아내지만
지혜가 없으면 일 년이 지나도 그림자조차 보지 못한다.
말하자면, 이 방에 당장 스위치를 끄면 깜깜해서 아무 것도 안 보이잖아요. 그러나 스위치만 올리면 방안이 활짝 밝아서 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명명백백히 드러나요. 그러니, 도적이 숨었다고 걱정할 일이 아니라, 마음의 불을 밝힐 뿐이다. 도적이 숨어서 어디 있는지 알 필요 없이 참선하는 사람은 화두를 들어서 화두만 밝히면 된다, 이 뜻이야. 그러나 화두를 깨치지 못하고 지혜를 밝히지 못하면 일 년이 아니라 한평생을 고생을 해도 도둑은커녕, 도둑 때문에 지은 죄가 지옥도 만들고, 아귀도 만들고, 축생도 만들어서 한도 끝도 없는 세월을 윤회하면서 고통 받게 된다.
다섯 번째 대목,
애달프구나, 항상 죽은 듯이 우두커니 앉아서
천 년, 만 년 그렇게만 지내는가?
참선하는 꼴을 보면 좌선한다고 앉았지만, 참 죽은 지, 살은 지 모르게 우두커니 앉아서, 안으로 참선은 안 하고, 그저 그렇게 시간이 되면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조금 앉았다고 그만 누우려하면 죽은 생활이지요. 병이 들어도 고약한 병이 들은 거야. 천 년, 만 년 송장 같이 지내는가? 그 말이지.
그렇게 하여 선문(禪門)의 종지(宗旨)에 이르게 된다면,
염화미소의 가풍(家風)이 쇠퇴하고 말리라.
만일 그렇게 흐리멍덩하게 앉았을 때도, 선문의 종지를, 말하자면 참선의 문중에 가장 궁극의 뜻을 모두 알게 된다면, 이심전심(以心傳心) 부처님이 꽃을 드니 가섭이 미소를 하는, 말하자면 부처님의 마음이 가섭한테 이어지고, 가섭의 마음이 대대로 조사(祖師)를 통해 이어진 그 가풍이, 그만 사라지고 말거다, 이 말이지. 그러니 공부는 흐리멍덩하게 세월아, 내월아 하는 게 아니라, 당장에 시퍼런 칼을 갈아서 그런 취모보검을 안고 앉아야 돼요. 그래서 부모란 생각도 거기 쳐들어올 수가 없고, 또 무슨 돈이니, 여자니, 명예니, 거기 범접할 수가 없이, 그런 것은 그만 전생에 다 해 마쳤다하고, 탁 차버리고, 오로지 금생에는 이것 마음 밝히는 것뿐이다, 하고 취모보검을 안고 살아야 돼요.
여섯 번째 대목,
흑산(黑山) 아래 앉으면 사수(死水)가 침입하니,
대지에 만연히 퍼지는 것을 어찌 막으리.
다섯 번째 대목을 이어서 이번에도 걱정하는 시(詩)지요. 흑산, 검은 산, 말하자면 다 죽은 산, 시커먼 다 죽은, 마음광명은 없고 그냥 우두커니 앉은, 이 흑산 아래에 앉으면 사수가 침범하니, 말하자면 죽은 물, 썩은 물이 내 마음에 침범을 하니, 썩은 물이 넓은 대지에 들어오면, 말하자면 내 마음의 땅에 들어와 퍼지면, 그걸 어떻게 막겠는가? 가만히 앉아보면 그만 일시에 졸음에 떨어지고, 졸음이 지나면 망상에 떨어지고, 망상이 지나면, 또 졸음에 떨어지고, 이래서 한도 끝도 없이 그렇게 망상하다 졸았다, 이렇게 세월만 보낸다. 겉잡을 수 없다는 거지요.
철안(鐵眼)과 동정(銅睛)을 가진 이라면,
마음으로 스스로 판단할 수 있으리라.
이건 또 무슨 말이냐? 철안(鐵眼) 철로 된, 쇠로 된 눈과, 동정(銅睛) 구리로 된 눈동자, 그걸 가진 이라면, 철안과 동정은 그 무엇으로도 파괴할 수 없는, 아주 명확한 정신이지요. 그런 눈동자 정신을 가진 이라면 마음으로 스스로 판단할 수 있으리라. 말하자면, 내가 지금 망상을 하는지, 조는지, 이렇게 몇 날 며칠 익혀 왔던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안다, 이 말이지. 뭘 아나? 살아서는 이 망상과 졸음에 떨고, 먹을 것, 잘 것, 또 이런 것 즐기고 하다가, 죽어서는 한량없는 윤회 고통 속에서 표류하게 된다. 이것을 미리 안다, 이 말이야. 내 마음에 본정신이 있는 사람이면 그걸 미리 알아요. 죽은 뒤의 윤회의 일을 미리 알기 때문에 내 인생을 도저히 허비할 수가 없고, 내 인생 소중한 기회를 부모 때문에 저당 잡힐 수가 없고, 자식 때문에 이적거릴 수가 없고, 한 푼 돈 때문에 내가 기회를 뺏길 수가 없어요.
그래서 부처님도 왕국 부귀영화를 코딱지 같이 풀어재끼고, 헌신짝 같이 내던져버리고, 모든 조사스님이 다 그랬지요. 이 공부하는 데는 부모가 방해될 일이 없어요. 자식이 방해될 일이 없어요. 명예가 방해될 일이 없어요. 그 철안과 동정을 갖고 있는데 얼씬 거리지를 못해요. 거기다 취모보검을 품고 있으면, 그 어떤 전생의 마누라가 와도 얼씬 못하고, 전생의 원수가 와도 얼씬 못해요. 그러니 철안과 동정을 가진 이라면, 마음으로 스스로 판단할 수 있으리라. 꼭 견성하기를 기다리겠는가? 견성하기 그전에 견성한 사람과 똑같은 정신으로 임해야 견성이 오지, 우리 중생이야 이러다보면 잘 될 때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래서는 안 된다~이 말이지요. 참 절절한 법문이고 노래입니다.
일곱 번째 대목,
깨닫고야 말리라고 굳게 다짐하니,
크게 한번 울부짖을 수 있는 사자로다.
깨닫고야 말리라는 굳게 다짐하는 여기에 그만, 견성(見性)의 시작이 되고, 사자와 같은 용맹을 갖추게 돼요. 내가 죽기 전에 꼭 깨닫고 죽어야 되겠다, 꼭 깨닫고 말겠다는 이런 큰 서원(誓願)이, 그런 굳은 다짐이 크게 한번 울부짖을 수 있는, 사자가 한번 울면 백수(百獸)들이 구석에 가서 숨지요. 그만큼 그런 큰 표호를 할 수 있는 사자의 기질을 갖추게 된 게 뭐냐면, 기어코 깨쳐봐야 되겠다, 깨달음이 별거 있나하고 엉뚱한 소리하는 게 아니라, 깨달아보자, 큰 다짐하면 바로 사자와 같은 용맹을 절로 갖춘다.
그대는 보지 못 했던가?
벽돌을 갈아 거울 만든다는 비유에도 이유가 있으니,
수레가 멈추면 소에게 채찍질을 하는 이치이다.
마조스님께서 참선한다고 이래 앉아있으니 남악화양 선사가 묻기를,
-너 뭐하고 앉았나?
-좌선합니다.
-좌선해서 뭐하려고?
-견성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좌선한다고 견성을 하는가?
그러고는 마조스님 좌선하는 그 옆에서 기왓장을 갈고 있어요.
-스님, 뭐 하십니까?
-기왓장 간다.
-기왓장 갈아서 뭐 하려고요?
-거울 만들려고.
-기왓장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이 됩니까? 암만 갈아도 기왓장이지.
-기왓장 갈아서 거울이 안 되면, 좌선해서 어떻게 견성을 하는가?
-좌선해서 견성 못하면, 필경에 어떻게 해야 됩니까?
-소가 수레를 몰고 갈 때 수레가 가지 않으면, 소를 때려야 되나? 수레를 때려야 되나?
거기서 마조스님이 크게 깨닫게 되지요. 그래서 그런 이치가 있다는 거지요. 벽돌을 갈아 거울 만든다는 비유에도 이유가 있는데, 말하자면 수레가 멈추면 수레를 암만 때려봐야 안 된다. 소를 때려야 빨리 가지, 수레만 쳐야 되느냐? 견성할 사람이 자기마음을 봐야 되지, 몸뚱어리만 삐죽하니 앉았다고 되는가? 그래 앉는데 고집을 하니까, 그런 법문을 하셨지요.
여덟 번째 대목,
그대는 보지 못 했던가?
바위 앞에 고인 물이 만 길이나 맑아서
깊고 고요하여 아무런 소리 없다가
하루아침에 어룡(魚龍) 와서 휘저어버리면
출렁이는 파도가 더욱 심해진다.
말하자면, 좌선한다고 가만히 앉아서 내 마음이 맑다, 고요하다, 이래 하지만, 깊고 고요하고 아무 소리도 없다가 하루아침에 어룡이 와서 휘저어버리면, 말하자면 전생의 업이 나한테 닥쳐서, “네 아버지 죽었다, 네 아들이 가다가 교통사고 나서 병원에 입원했다.” 이러면 그만 풍비박산이 돼버려요. 우리 일심화 불자가 참 일심화라, 일심으로 열심히 하고, 뭘 해도 잘 해요. 딸이 어쨌다 하니, 그런 전화 오니까 몸이 여기 가만히 못 있는 거야. 자기가 나간 줄도 모르고 튀나가서 집에 가야 된다, 이래 돼버리는 거야. 바로 그런 얘기겠지요.
바위처럼 턱 앉아서 그 마음이 고요해져 거기에 탐착하면, 이래 좌선하니 이래 좋구나, 이래 맑아 좋구나, 번뇌도 달아나고 잠도 달아나고 고요하니, 말하자면 그것은 만 길이나 깊은 못처럼 참 맑고 고요해서 아무 소리도 없다가, 하루아침에 그런 업들이 와서 휘저어버리면, 출렁이는 파도는 공부하기 이전보다 더 심해진다. 그만 정신이 없는 거야.그러니 잠시라도 방심하지 말고 더욱 간절하게 화두를 들어야 되죠.
아홉 번째 대목,
고요히 앉기만 할 뿐 공부하지 않으면,
어느 시절에 심공(心空)을 깨달아 급제(及第)하리오.
고요한 걸 좋아해서 앉기만 할 뿐, 공부하지 않는다는 것은 본래마음을 참구하지 않는다면, 이 말이야. 본래마음을 찾아내야 돼요. 밝혀내야 된다. 이걸 밝혀내려면 때로는 이마에 땀이 나기도하고, 때로는 상심이 되기도 하고, 왜냐면 나는 무슨 업이 많고, 얼마나 하근기(下根機)가 되어서 이렇게 해도 해도 안 되는가 싶어서, 그런 태산을 넘고 넘어서 공부하게 되지요. 그렇게 참구해야 되는데, 고요하게 그런 걸 즐기면, 어느 시절에 심공(心空)을 깨달아 급제(及第)하랴~
이 말은 방거사 께서 깨닫고는 송(頌)을 지었어요.
시방 동취회(十方 同聚會)하여,
시방에서 동서남북 사유상하 온 세상에서, 이 사람 저 사람 한가지로 모여들어서
개개 학무위 (箇箇 學無爲)
함이 없는 것을 배우니,
차시 선불장(此是 選佛場)이라,
여기는 부처를 뽑는 그러한 도장이다.
심공 급제귀(心空 及第歸)하네
마음이 공하니 급제해 가네.
하였지요. 그 말을 여기에 넣은 거지요. 어느 시절에 마음이 공(空)해 깨달아서 과거에 급제할까~ 이 말인데, 고요한 걸 즐기지 말고, 화두를 들고 들어서, 기어이 자기의 본래마음을 깨쳐야 된다는 뜻이지요.
열 번째 대목,
빨리 공부를 시작하여 높은 곳을 올려다보아
금생에서 판단을 끝내야 하리라.
오히려 묵묵히 어리석은 척하면
공부할 줄 모르는 이라 여길 것이다.
말하자면, 살아있는 공부를 하라는 뜻이지요. 흐리멍덩하게 하지 말고 살아있는 공부를 해서, 금생에 반드시 내가 본래마음을 봤다고 판단을 끝내야 한다. 그러면 내가 약한 공부로 죽으면, 전생 업으로 어느 세계에 유람하면서 무슨 죄업에 휘말릴지 모른다. 금생에 본래마음을 찾아서 세세생생 본래 그 마음광명의 반야로 살아야 된다는 뜻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오히려 모든 면에서 그만 묵묵히 어리석은 척하고 공부할 줄 모르는 이라고 남이 여기더라도 안으로 자기 공부만 해야 된다.
열한 번째 대목,
정신을 바짝 차리고 유의해서 살펴보아라.
형체도 그림자도 없지만 깨닫기 어렵지 않도다.
이것이 충분히 마음을 잘 쓰는 것이니,
용맹한 장부라면 기억해야만하리라.
공부를 정신 바짝 차리고 유의해서 살펴보아라. 내가 졸고 있나, 화두를 하고 있나? 형체도 그림자도 없지만 깨닫기 어렵지 않도다. 만일 그렇다면 내가 밝히고자한 바가 모양도 없고, 모양에 의한 그림자도 없지만 깨닫기 어렵지 않도다. 흐리멍덩한 그 정신이 문제라는 거지요. 이것이 충분히 마음을 잘 쓰는 것이니, 말하자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유의해서 살펴보는 이것이, 마음을 잘 쓰는 것이니, 용맹한 장부라면 기억해야하리라. 이렇게 공부해야 된다는 걸 잊지 않아야만 된다.
열두 번째 대목,
도(道)를 참구할 필요 없다는 말 듣지 말고,
옛 성인을 부지런히 지침으로 삼아라.
비록 옛날 집의 놀리는 논밭이라 해도,
한번쯤은 풍년이 오지 않으랴.
그러니, 스님을 봐도 그렇고, 뭘 봐도 그렇고, 평생을 해도 그렇고 그렇던데, 우리 같은 사람은 뭐 하겠는가? 하열한 생각을 한다든가, 뭐 사람이, 중생이 따뜻하게 자고, 배부르게 먹고, 또 선행하면서 이래 남한테 좋은 일하고 살면 되지, 무슨 꼭 도(道)를 닦아야 되나? 이런 엉뚱한 소리 듣지 마라라. 그러지 말고, 부처님이 가섭한테 전하고, 가섭이 아란한테 전하고, 아란이 상나화수한테 전하며, 33조사한테 전해지고, 또 33조사를 통해서 오늘 날까지 이어온 그 조사스님들의 자취, 그걸 지침으로 삼아라. 다른데 주저앉아서 퍼져가지고 제 멋대로 사는 말쟁이들 말 따라가지 말고, 오로지 혜명(慧命)을 이은 조사스님을 지침으로 삼아라는 뜻이지요. 우리가 토요일마다 33조사를 외우는 것도 바로 이 대목에 있습니다.
비록 옛날 집의 놀리는 논밭이라 해도 한번쯤은 풍년이 오지 않으랴. 말하자면 조사스님의 마당, 논밭이 아손들이 게을러가지고 놀려있더라 해도 한번쯤은 풍년이 오니 않으랴. 내가 눈을 부릅뜨고 정진한다면, 나한테 견성성불의 풍년이 오지 않겠는가~ 그 말이지. 그러니 시시하게 사는 사람, 그 많은 사람 보지 말고, 표적을 보인 조사스님들을 지침으로 삼고 정진하라는 뜻이죠.
열세 번째 대목,
조사선의 극치(不動尊)를 알고자 한다면,
바람이 불면 풀이 쓰러짐을 모두 논하리라.
지금은 사해(死海)가 거울처럼 맑으니
하나도 빠짐없이 나에게 들려온다.
조사선의 극치라고 했는데, 원문을 보니 부동존(不動尊)이지요. 흔들림이 없는 그런 높은 경지를 말하는 거지. 일체 희로애락(喜怒哀樂)과 모든데 걸리지 않는 그러한 위대한 경지를 알고자한다면 바람이 불면 풀이 쓰러짐을 모두 논하리라. 지금은 사해(死海)가 거울처럼 맑으니 하나도 빠짐없이 나에게 들려온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는 화두로 두는 게 좋지요.
열네 번째 대목,
길고 짧음과 모나고 둥근 것은 다만 저절로 아나니,
본래부터 털끝만큼도 제자리를 옮기지 않았네.
좌선해서 무엇을 이루었느냐고 묻는다면
동쪽에서 해가 떠서 밤에는 서쪽으로 진다 말하리라.
이것이 끝입니다. 탁~~~! (죽비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