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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티재 ~ 이리재
1. 산행 일정
1) 일 시 : 2011. 05. 01. (일) 08:25 ~ 13:20(날씨 : 흐림)
2) 주요산 : 운주산(791m)
3) 소재지 : 경북 포항시 죽장면, 기계면 및 영천시 자양면, 임고면
4) 동 행 : 백양동문산악회
5) 산 행 : 한티재 - 502봉 - 블래재 - 431봉 - 운주산(791m) - 618봉 - 625봉 -이리재
2. 한티재 ~ 이리재의 개요 (약12.6km)
한티재(약240m)에서 상승하여 도착하는 약550봉은 포항 기계면, 죽장면, 영천시 자양면의 경계로 서쪽으로 노구재가 있다. 여기서 좌측으로 하강하며 봉우리를 두어개 넘으면 블래재(약310m)에 이른다. 블래재의 동쪽에 기계면 블랫마을이 서쪽으로 상도암이 있으며 운주산에 다다르면 아름드리 나무들이 벌목되어 한쪽 사면이 민둥산이다. 조금 가면 상안국사가는 삼거리고 곧 운주산 정상전 봉우리(약790봉)로 낙동정맥과 운주산 삼거리봉이다. 운주산은 낙동정맥에서 살짝 비켜 있으며 조망이 수려하여 보현산, 비학산, 내연산 및 영천과 포항을 조망할 수 있고, 헬기장도 말끔하게 정비되어 있다. 낙동정맥으로 돌아와 약600m여 봉우리들 오르내리다가 하강을 시작하여 이리재(약300m)에 이른다. 한티재에서 이리재 구간에는 많은 구덩이가 있는데 6.25전사자 유해발굴지란다. 이리재에는 포항과 대구를 잇는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달린다.
3. 산행의 흐름과 메아리
1) 들머리에서
언제나 일어나는 시간에 자명종이 울린다. 습관화 되어 있는 생활이 미울 때도 많다. 그러나 그 습관들이 있기에 생활을 버티어 온 것이다. ‘아침형 인간’의 책을 떠 올리며 오늘의 산행을 준비한다. 어제 저녁에 먹은 순두부로 아침을 해결하고 한티재에서 출발이다.
2) 한티재 - 502봉 - 490봉 - 블래재 - 326봉 - 431봉 - 운주산 (07:55~12:25)
한티재에서 절개지의 어수선함을 피하며 정맥으로 들어서니 진달래가 연초록의 잎으로 봄을 선사하여 생동감을 살려준다. 싱그러움과 하얀 꽃에서 변화하는 계절의 빛을 보며 세월의 흐름을 담는데 어제부터 군데군데 구덩이가 파여 있다. 크기로 보아 초소는 아닌 것 같고, 구덩이는 직각으로 절도가 있으며, 나무뿌리도 절단된 것으로 보아서 정원수를 파낸 자리처럼 보인다. 벌목 허가를 받아서 정원수를 빼내는구나. 요지경 세상을 야생화와 싱그러운 나무에 달래며 고도를 높이니 약550봉이고 3개면의 경계선이다. 서쪽 봉우리가 ‘노구재’로 왠지 가고 싶은 것은 열정이 많아서 이겠지. 먼발치에서 인사하고 502봉을 지나니 급하게 내려 보냈다가 490봉으로 올려 보낸다. 김신조 유격훈련도 아니고 목적이 있기에 어려움도 마다 않고 가는 것이다. 목적이 없다면 이 험난하고 어려운 길을 왜 택하겠는가? 그래서 사람은 목적이 있어야 목적을 달성하려고 행동하는 것이다. 젊은이여! 목표(목적)를 가져라. 목표가 있는 삶과 없는 삶은 중반부에 들어서면서 차이를 보이기 시작하여 후반부에서는 사람의 가치가 달라진다. 자신의 미래를 그리기 당부하며 황사현상이 싱그러운 봄 빛깔을 퇴색시키는 490봉을 찍고 내려서니 블랫재이다. 포장을 하지 않아도 단정하고 부드러운 흙길이 서민스럽다. 깔끔하며 수수한 단장에서 고유의 미를 만나서 고도를 높인다. 326봉 우측으로 ‘도일리’가 계곡 속 마을로 정겹게 다가온다. 아무리 산이 좋아도 사람냄새가 좋고 사람이 그리워지는 것은 우리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리라. 431봉으로 가며 상도암의 흔적을 느끼고 싶어도 불경소리는 없고 조용한 숲속의 낙엽과 새로 피어나는 잎들이 알려주는 희생과 탄생에서 성불하란다. 막막한 번뇌의 흐름을 바로 세워 놓는 것 보다는 삶에 충실하자며 걷는데 소나무가 우아한 자태로 세월을 아름답게 만들어야 환희가 따른단다. 그렇다 세상은 아름다움을 그리면서 그 그림을 현실화시키는 작업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다. 운주산이 얼굴을 내미는 우측사면은 무슨 사유로 벌목하는지 아름드리나무들이 잘려져 한쪽사면이 전부 민둥산으로 변하였고, 임도가 이리저리 산허리를 헤집는다. 심심유곡의 산들도 성하지 못한 것에 안타까움을 가지며 상안국사가는 삼거리에 다다른다. 운주산까지 700m가 남은 이정표를 따라가면 정상전 봉우리에 이른다. 기계면이 보여도 황사로 오리무중이라 돌탑에 부덕함과 고통을 올리고 안부를 지나 헬기장을 거쳐서 운주산 정상에 안착한다. 구름을 기둥으로 받치는 운주산은 진달래가 활짝 피어나 눈이 부셔도, 황사현상으로 주변 경관을 볼 수 없어서 애석하다. 중국은 외환보유고가 3조가 넘는다고 하는데 사막화를 막는데 투자할 의향은 없는지. 과감한 투자로 사막화 현상을 막는 것도 중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기술강국이 되지 않을까?
3) 운주산 - 618봉 - 안부 - 625봉 - 이리재 (12:25~10:00)
운주산에서 낙동정맥으로 접어들어 이리재로 향하니 넓적한 식탁바위가 식사하며 숨을 돌리란다. 운주산 헬기장에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식탁바위에 눈길도 주지 않고 나아간다. 밋밋한 행로를 따라서 안부에 이르니 기계면 인비리와 영천 영전으로 연결되는 사거리다. 벌목으로 나무들이 이리저리 넘어져 산을 어지럽고 심란하다. 심심산골도 이제는 조용할 날이 없구나. 뒷동산이라도 조용히 산을 즐기며 수양할 공간이라도 남겨 놓으면 어디가 덧나는지. 사람은 자연 속에 있어야 성격이 차분해지면서 정신분열을 줄일 수 있다. 수많은 범죄자가 양성되는 것은 도시의 삭막함도 일부 기인하는 것이다. 도시의 화려한 불빛에서 허황된 꿈을 꾸며 쫒다 보니 자신의 중심을 세우지 못하고 조급하게 행동하는 원인으로 발생하는 것도 많으리라. 곧 도로가 개설되려나? 앞에 보이는 600봉으로 오르지 않고 벌목로를 따라 가다가 618봉에 이르러서 내려가는데 노란 비닐테이프가 감겨 있다. 유심히 보니 노란비닐테이프에는 ‘6.25전사자 유해발굴LINE’이라고 적혀 있다. 아! 그 많은 구덩이가 전부 유해발굴터구나. 구덩이의 오해가 풀리면서 목이 메인다. 6.25전쟁이 언제인데 이제야 유골수습이라니. 묵념을 올리고 기계, 죽장, 자양, 안강지역의 낙동강방어선에 수많은 민초들이 국가 수호를 위하여 희생되었다는 설명을 듣는다. 포항도 불바다가 되었다는 6.25의 참상을 회상하며 소망전망대 이른다. 전쟁의 흔적을 대구-포항간 고속도로가 발전상으로 메워간다. 건너편의 바위들은 고풍의 조각품으로 전시되고, 만나면 떠나는 것. 625봉 돌탑에서 고인들의 영영에 묵념을 올리며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 좋은 세상을 사는 것에 감사드린다. 고속도로가 달리는 이리재에는 ‘낙동강 전선종단 구간 마라톤대회’ 현수막이 걸려 있다.
4) 날머리에서
6.25동란이 다시는 발발하지 않고, 더 나아가 우리나라가 침략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국방을 튼튼히해야할텐데. 들려오는 국방비리와 지휘체계의 허점이 불안 심리를 낳게 한다. 영천IC를 거쳐 생활지에서 기력을 회복하는데 몸무게는 늘어나 산행효과가 반감된다.
* 6.25와 낙동강전선1)
[ 피의 낙동강 전선, 766 유격대의 교란작전 ]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해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감행한 북한군의 공세로 한국군과 미군은 낙동강까지 밀려나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동부전선에 배치된 한국군 제1군단 예하 수도사단과 제3보병사단( 훗날 "백골부대" )은 북한군 제5, 12보병사단 및 오진우 총좌( 한국군의 준장[ 진 ] )의 766유격대를 맞아 처절한 공방전을 벌였다.
당시 북한군 제12보병사단은 경상북도 영주를 함락시킨 기세로 경상북도 청송군-죽장-기계면에 이르는 축선으로 진격 제70보병사단이 담당하는 안동시로 진출할 준비를 하였고, 마찬가지로 보현산과 구암산 일대로 침투한 북한군 766유격대는 제12보병사단과 통신을 유지하며 한국군의 병참선을 차단하고 후방을 교란하였다. 한편 북한군 제5보병사단은 동해안을 따라서 진격하면서 한국군 제3보병사단 23보병연대를 격파한 뒤 영덕을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안동을 목전에 둔 북한군 제12보병사단은 한국군이 견고한 방어전선을 구축한 상태라서 무모한 정면 공격은 막대한 희생을 초래할 것이 예상되었다. 7월 9일에 보현산과 구암산 일대에 거점 구축을 완료한 북한군 766유격대는 제12보병사단이 한국군의 의표를 찌르기 위한 은밀한 침투가 감행하도록 후방 교란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미 제8군사령부는 비정규전과 핵심시설정찰 및 기습공격을 감행하는 766유격대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이에 따라서 제1201건설공병단, 제1독립유격대대, 해병대, 전투경찰대대 병력을 보현산 일대에 투입했다. 하지만 이것은 766유격대의 유인작전에 걸려든 것으로 애시당초 한국군과 정면대결을 회피했던 766유격대는 보현산일대로 병력이 집결하는 것을 확인한 뒤 곧바로 진출로를 확보한 다음 산을 내려가 북한군 제12보병사단과 합류했다. 이렇게 766유격대의 교란작전 덕분에 청송군 현동면 북쪽에 위치한 부남면 대전리까지 진출한 북한군 제12보병사단은 곧 포항시 기계면으로 진출할 준비를 갖추었다. 당시 한국군으로서 포항은 “설마 여기로 쳐들어올까?”라고 생각할 정도로 북한군의 공세는 꿈도 꾸지 않던 지역이었다. 이는 육군본부의 시선이 온통 경상북도 의성과 신녕으로 남하중인 북한군 제8보병사단에게 쏠려있던 탓이 컸기 때문이다. 1950년 8월 4일, 공격 준비를 마친 북한군 제12보병사단과 766유격대는 마침내 T-34/85 전차를 앞세워 청송군 서쪽 15.5km 지점에 위치한 안동시 길안면의 한국군 수도사단사령부를 타격했다. 이 기습 공격으로 수도사단은 일시에 지휘체계가 마비되었고 8월 5일에는 길안면 동쪽 4km에 위치한 제18보병연대( "백골부대" )와 기갑연대 주둔지가 완전히 포위되었고, 수도사단은 청송 일대에서 참패하여 의성군으로 퇴각했다. 청송군을 초토화시킨 북한군 제12보병사단과 766유격대는 주력부대를 청송군과 현동면 축선을 잇는 912번 국도로 진출시켜 8월 6일, 포항시 죽장면을 거쳐 전략적 요충지인 포항시 기계면으로 진격했다. 부산으로 신속하게 진출할 수 있는 포항-안강-경주 축선이 그들의 목표라는 것을 육군본부와 미 제8군사령부가 알아채는데 무려 2일이 소요되었고, 북한군 제12보병사단과 766유격대는 8월 8일에 마침내 안강 북쪽 8.5km 지점에 위치한 포항시 기계면을 함락시켰다. 이제 기계면을 거쳐 안강과 경주만 점령하면 부산으로 진출은 식은 죽 먹기가 되는 순간이었고, 한국군의 의표를 정확하게 찌른 북한군의 작전에 경악한 육군본부는 곧 안강에 포항지구 전투사령부를 신설해 방어태세에 돌입했다.
[ 71 학도병들의 충혼, 포항여중 전투 ]
1950년 8월 9일, 한국 해병대 포항지구대는 지구대장 강기천 소령( 예비역 대장 )의 지휘 하에 기계면 전방 3km 지점에 위치한 달성동에 방어진지를 구축해 경계태세로 돌입했고 제2보병사단 예하였다가 대구에서 재편성을 거친 유해준 중령( 예비역 소장 )의 제25보병연대는 오전 11시를 기해 현지에 도착, 해병대와 협의를 거쳐 다산동 145고지와 31번국도 주변에 차단선을 구축했다. 8월 8일을 기해 죽장면에서 기계면으로 이동하는 T-34/85 대열이 포착됨에 따라 육군본부는 대구에 잔류한 제25보병연대 2대대를 기계면으로 투입하는 등 전력을 증원했지만 북한군은 아군이 배치될 여유를 주지 않았다. 한국군이 신속하게 증원되고 있음을 확인한 766유격대는 그날 밤에 제12보병사단 병력을 배속 받아 달성동 남쪽 140고지에 위치한 제25보병연대관측소를 기습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기계면 남쪽 3.2km에 위치한 445고지의 1대대 방어진지는 제12보병사단에게 함락되었다. 순식간에 방어선이 돌파되자 8월 10일, 유해준 중령은 안강에 도착한 3대대 11중대와 12중대를 512고지에 배치하고 포항시 남구 효자역에서 대기하고 있던 10중대를 1대대 패잔병들과 함께 445고지 주변에 재배치했다. 그러나 한국군은 9일의 패전으로 사기는 바닥에 떨어져 연대장 유해준 중령은 그 날로 보직 해임되고 후임으로 이기건 대령이 부임했다. 일선 지휘관을 교체한다고 해서 땅에 떨어진 병사들의 사기가 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한편, 영덕을 초토화시킨 북한군 제5보병사단의 남진으로 밀려난 한국군 제3보병사단은 이미 주요 퇴로가 북한군 제12보병사단에게 차단된 상태였다. 만약 포항시가지가 북한군에 넘어간다면 포항은 제3보병사단의 집단 공동묘지로 변할 참이었다. 이때 김용섭을 중심으로 한 71명의 학도병들이 제3보병사단 사령부로 쓰이던 포항 여중학교로 찾아왔다. 나라의 위기 앞에 공부를 중단하고 펜 대신 총을 선택한 이들은 어쩔 수 없이 퇴각해야 하는 제3보병사단이 무사히 철수할 수 있도록 후방 엄호를 자원하겠다고 자원하였다. 이에 따라 김용섭이 중대장을 맡고 유명욱이 1소대장, 김일호가 2소대장을 맡아 약 2개 소대로 구성된 학도병들이 포항여중을 지키게 되었다. 1950년 8얼 11일 북한군 제12보병사단의 1개 연대와 766 유격대는 소티고개를 넘어 포항여중으로 진격해왔다. 이에 맞서는 한국군은 학도병 71명과 제3보병사단 사령부 행정병 60명. 이들은 사단 주력과 포항 시민들이 무사히 탈출할 수 있도록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오전 4시가 되자 마침내 포항여중 주변은 치열한 격전지로 변해버렸고 무려 4차례에 걸친 격렬한 교전이 벌어졌다. 전차나 장갑차 등을 보유하지도 않은 학도병들은 조국을 지키겠다는 충혼으로 결코 물러나지 않았으나 중과부적으로 당일 15시를 기해 포항여중은 북한군 766유격대와 제12보병사단에게 함락되었다. 이 전투에서 학도병 71명 중 47명이 전사하고 상당수 부상을 입었으니 이들의 투혼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학도병들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어가며 11시간의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제3보병사단 사령부와 주력부대는 무사히 포항을 탈출할 수 있었다.
[ 포항여중 전투의 의의 ]
제12보병사단과 766유격대는 학도병들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포항 시가지를 함락시켰으나 귀중한 시간을 번 한국군은 반격에 착수했고 결국 8월 18일, 제12보병사단과 766유격대는 애써 점령한 포항과 기계면을 도로 내주고 퇴각해야 했으니 학도병들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이를 영화한 것이 “포화 속으로”다.
* 운주산
이 산을 멀리서 보면 항상 구름을 받치고 있는 기둥 같이 보인다하여 운주산이라 한다. 산세가 험준하여 임진왜란때는 김백암장군이 이곳에 성을 쌓아 항전하였고 1910년대에는 산남의진 항일의병 활동의 근거리지 알려져 산 아래에 있던 안국사가 일제에 의한 방화로 불터 없어졌다. 운주산 중턱에는 박쥐구멍이라 불리는 굴이 있는데 한꺼번에 100여명이 들어갈 수 있어서 임진왜란과 6.25전쟁 때는 주민피난처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 인비리 갈림길
인비리(仁庇里)에는 먼저 추(秋)씨가 마을을 개척하여 터전을 마련하였고, 하(河)씨가 뒤이어 들어와 거주하였으며, 경주 김씨가 세 번째 입주하였다고 한다. 추씨와 하씨가 타지로 떠난 뒤 마을이 커지고 장터가 생기며 역촌이 되어 각처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자 어진사람들은 숨어 버리게 되어 인비(仁庇)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비
* 이리재
영천시 임고면 수성리와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를 잇는 고갯길이다. 이리재는 동물이나 지형을 연상시키지만 사실은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의 옛 지명이 ‘이동’ 이었으며, 이동마을의 골짜기가 이리골로 불리다가 이리재로 불리게 되었다.
1) http://cafe.daum.net/jau8/에서 옮겨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