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逆說)
임병식 rbs1144@hanmail>net
평소, 긍정적으로 생각한 것에 대해 그 진실을 알아버리면 실망하게 되는 때가 있다. 좋아보여서 신기하게 생각한 것이, 그 속살을 알아버리면 ‘차라리 모르니 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 일은 살면서 여러 곳에서 경험한다.
살면서 대하는 어떤 역설(逆說)도 그 중의 하나이다. 문법에 있어서 반어법(反語法) 사용은 문장용법 중 표현기법의 하나인데 이것은 상황묘사와 표현을 극대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컨대 실수로 그릇을 깨뜨린 아이를 보고 “그래, 잘 한다 잘해” 라고 한 것이 그 예이다. 이런 역설은 언어생활뿐 아니라 고질병을 치료하는 약제로 쓰인 단방약(單方藥)에도 적용된다. 더러 효과를 보기도 하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이열치열식의 극약요법이다. 그런데 생사가 경각에 달렸을 때 최후의 비방(祕方)으로 써서 죽어가는 사람을 소생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처방으로는 사약으로 쓰던 천남생이 이용되고 복어 알이나 맹독성 뱀독이 쓰이기도 한다. 일종의 역발상이라고 할까.
어느 날이다. 하루는 민물매운탕 집으로 외식을 나갔다가 미꾸라지가 담긴 고무 통에 함께 매기를 풀어놓은 것을 보게 되었다. '왜 그리 해 두었을까?'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아서 주인에게 물었다. 돌아온 대답이 의외였다.
"그래야 폐사율이 낮아집니다.“
하는 게 아닌가. 그 말에 바로 기시감이 들었다. 언젠가 읽은 토인비의 글 한 토막이 바로 소환되었던 것이다. 거기에서 보면 바다에서 잡아 올리는 청어는 금방 죽기 때문에 폐사를 막기 위서서 함께 메기를 넣어둔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렇다면 그런 이치인가.’
그것을 떠올리자 '아하, 그래서 그랬었구나.'하고 고개가 끄덕여진다. 미꾸라지가 메기한테 잡혀 먹이지 않기 위해 부단히 움직인다는 것인데 그래서 살아남기야 하겠지만, 얼마나 고단한 일인가.
그래보았자 죽는 날은 예견되어 있는데 며칠을 더 산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다소 복잡한 생각이 스쳐갔다.
상황은 다르지만 내가 경험한 것 중에 생각나는 역설의 사례가 있다. 군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을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기합이 혹독하기로 유명한 헌병학교를 거쳤는데, 그 곳에서의 훈련병 생활은 그야말로 극한의 인내를 요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은 여간한 정신력으로는 견뎌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잠을 통 재우지 않은 건 물론이고 수시로 가하는 기압은 신체를 녹초가 되게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두 눈은 고된 훈련 으로 충혈상태가 계속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런 눈은 눈초리까지도 사납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고통 속에서 반대로 눈동자는 빛이 나는 것이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눈동자가 한층 또렷또렷해지고 반짝거렸다.그런 상태를 보고 중대장은
“눈동자가 살아 있는 걸 보니 기압이 들었군” 했다.
아무튼 생명이 있는 것들은 어떻게든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려든다. 그러니 ‘빛나는 눈동자’는 그 과정에서 일어난 신체현상의 역설적 반응임이 분명하다.
어느 책에서 본 내용이다. 열대 밀림 속에서 살아가는 파푸아뉴기니의 어느 부족은 오줌을 30초 내에 누워버릴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단다. 그렇게 된 데는 그곳에 동물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흡혈 거머리가 워낙 많아서 이것들을 피해 살다보니 신체기능이 그렇게 진화하여 적응하게 됐다는 것이다.
사람의 인체는 조물주가 만들때 일정시간의 순환기관을 거치고 그곳을 통화하는 시간을 지키도록 설계되었다. 그런데 이를 어긴 것이다. 역설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아마존 강에 사는 어느 여인 부족은 맨발로 밀림 속을 누비면서도 무엇에 찔리거나 물려도 덧이 거의 나지 않는다고 한다. 상처가 나면 간단히 입으로 그 부위의 피를 빨아내고 만다고 한다. 굳이 하는 처방이라는 것도 주위에 널린 풀을 뜯어서 쓱쓱 문지르는 게 고작이란다.이 또한 독을 독으로 다스리는 역설의 저방법이 아닌가 한다.
언어적인 측면에서 볼때 각 고장마다 사용하는 어투 또한 역설이든 아니든 향토에 어떻게든 적응하려든 현상이 엿보인다. 나는 전라도 사람이어선지, 강원도에서 군생활을 하면서 낯선 걸 많이 느꼈다. 그중에 특이한 것은 사람이 죽어서 메고 나가는 장례풍습이 퍽 낯설었다. 상여 어울림 소리도 생소했지만 상여를 메고 내달리는 것이 매우 낯설어 보였다. 특히 매장 후에는 말목을 가지고 흙 다지기를 하는 장법이 충격적으로 가다왔다.
시신은 정중히 모셔야 한다는 나의 인식과는 상반된 것이어서 어떤 역설의 이치가 숨어 있는지 알수 없었다. 한편, 나는 남녘 끝에 살면서 어쩌다 볼일이 있어 상경할 때면 특유의 어투 이외에 빛나는 눈동자의 인상을 느낀다. 유달리 형형한 눈빛들이 빛나 보여서 스치는 사람들에게서 긴장을 하게 된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민첩하게 움직이는 행동들은 보기 좋지만 그 빛나 보이는 눈동자는 그 닥 호의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 안에서 오히려 우수를 느낀다.
‘얼마나 생업전선이 치열하면 그런 모습일까’
하는 생각에 마치 미꾸라지가 천적인 메기를 피해 살아가듯이 그런 삶의 반영이 아닐까 함을 느끼게 된다. 좋은 것들이 많은 이면의 역설적인 실상이 보여주는 현상이라고나 할까. (2001)
첫댓글 상반되는 과정을 거쳐와도 그 결과가 같을 수 있다는 데 대하여 깊은 생각에 잠겨봅니다.
별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생존 법칙의 산물임에도 순결한 예술혼의 정표인듯 영롱한 까닭을 어렴풋이나마 알듯 합니다.
저는 그 빛나는 눈동자의 내밀한 부분을 알아버린 이후 빛나는 눈은 썩 좋게 생각하지도 않고 부러워하지도 않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도 역설이지요. 고난없이는 영광도 없다 ..그러고보면 인생 자체가 역설이 아닌가 싶습니다.
눈동자는 그 사람의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라는데, 빛나보이는 눈동자는 오히려 살벌한 생존경쟁의 삶의 현실을 보여주는것 같아 연민이 들기도 합니다.
역설의 아이러니는 많은 수수께끼를 안겨주는 것 같습니다.
해를 입히려고 했던 것이 오히려 상대에 득이 되는 경우도 있고,
도움을 주려고 했는데 오히려 해가 되어 미안할 때도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역설의 아이러니는 생존하는 한 끝임없이 맞이하는 경우라는 생각이 듭니다.
생존 경쟁에 매몰되어 남녀노소 누구라 할 것 없이 뛰어 다니며
반짝거리는 서울인의 눈동자가 선연합니다.
미꾸라지 같기도 하고, 매기도 같으며 천남생 복어알처럼 보입니다.
역설에 대한 다양한 예시가 일품입니다. 고맙습니다.
역설에 대해 예전에 써놨던 글인데 다시 꺼내어 조금 퇴고를 했습니다.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