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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 소묘 박남수
갈매기 소묘(素描)
□ 1
하늘이 낮게
드리고
물 면(面)이
보푸는
그 눌리워
팽창한 공간에
가쁜 갈매기 하나
있었다.
□ 2
바람이 일고
물이
결을 흔드는
그 설레임에
떠 있던
갈매기는 그저
뒤척이는
한가운데서
중심을 잡고
있었다.
□ 3
내려 꼰지는
바람의 방향에
꼰지고,
튀치는 바람결에
물 면(面)을 차고,
치솟아
어지러운 바람 속에
갈매기는 가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 4
꿈 같은 자부림
천심(千尋) 깊이에
깔먹는 중량
휘뚝 치솟아
몸을
가누며
갈매기는
꺄륵 꺄륵
노곤한 쭉지를
흔들어
본다.
□ 5
휘딱
물 면(面)을 때리고
가다듬으면
놀라운
푸름.
갈매기는
파랗게
질려
파란 갈매기.
면(面) 위에
갈매기는 혼자
있었다.
□ 6
혼자면
또한
가슴에 스미는
고독을 안고
벅찬 기류 속에
갈매기는
축제 같은 어제를
생각한다.
헤아리지 못할
어제가
즐거움 같고,
즐거움이
어제 같은
오늘, 오늘은
없었다.
□ 7
없는 오늘에
갈매기는
떠
있었다.
없는 바람 속에
내려 꼰지는
방향으로 꼰지고,
튀치면 튀솟는
제 그림자.
어쩌면
갈매기는
육면 거울 속에
춤추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8
덜덜덜 말리는
자꾸 솟구쳐
끝없이 깔먹는
이 구겨진
무한한 푸름에
휘뚝
놀라면
물러섰다가는
다시 가다듬고,
가다듬고는
그 물 위에
노여운 지축을
때린다.
□ 9
찢어지는
분통을
메다쳐 보다가는
서러워서
꺄륵 꺄륵
울어도 본다.
어쩔
수
없어서
공중에 그냥 서서
잠깐
누그러치고
눈을
붙여도 본다.
□ 10
드리운 하늘
보푸는 물 면(面)
그 눌림 속에
태양은
아예 없었다.
알알이
따로 노는
보석이 끓는
물이랑 위에,
갈매기는
본디 살고
있었다.
옛날에……옛날에……
갈매기는
한 번
웃어 본다.
□ 11
칠흑의 어디를
뚫으면
핏물 같은
빛이 흐를까
알알이
따로 뿜는
보석이 끓는
불 면(面)에
지도
따로 뿜는
광채이고
싶었다.
□ 12
지지눌려
숨가쁜
갈매기 하나
있었다.
스스로는
가지 못하는
방향에 밀리는
갈매기는
흰 갈매기는
불안한 물 면(面)에서
꺄륵꺄륵 기울면서
꿈이 꾸고 싶은
갈매기는
흰 갈매기는
영원한 내일을
꿈처럼 그려 사는 것인지도
기실은
알
수
없다.
매기 소묘(素描), 춘조사, 1958
강 박남수
강(江)&
밤새도록 충혈(充血)된 등(燈)이 하나
검은 강(江)을 비추고 있다.
도시(都市)의 가슴을 뚫고 흐르는 강(江)은
산물소리처럼 맑지 않지만, 가끔
점벙 물고기 뛰는 소리를 낸다.
사위(四圍)가 어두워서
잘못 길을 잡은 물고기는
오예(汚濊)의 물을 마시고
한 길을 뛰어오르는 고통(苦痛)을 치솟는가.
밤새도록 충혈(充血)된 등(燈)이 하나
검은 강(江)을 비추고 있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강물의 띠를 두르고 박남수
강(江)물의 띠를 두르고
강(江)물의 띠를 두르고
밀양(密陽), 저녁 놀이 서는
어느 주막(酒幕)에는 은어회가 일품(一品)이란다.
그물을 던져 거둬 올리는
붉은 놀 속에서 은어(銀魚)가 뛴다.
초라한 식탁(食卓)에서도 은어(銀魚)가 뛴다.
친구의 금 이빨이 무는
은빛의 디스토마를 삼킨다.
우리가 먹는 것은 형이하(形而下)의 오염(汚染)뿐
나의 가슴 속에서는, 조금도
은어(銀魚)가 뛰지 않는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거리 박남수
거리(距離)&
남포불에 부우염한 대합실(待合室)에는
젊은 여인과 늙은이의 그림자가 크다랗게 흔들렸다.
―네가 가문 내가 어드케 눈을 감으란 말이가.
경편열차(輕便列車)의 기적(汽笛)이 마을을 흔들 때,
여인은 차창(車窓)에 눈물을 글썽글썽하였다.
―네가 가문 누굴 믿구 난 살난?
차(車)가 굴러 나가도
늙은이는 사설을 지껄였다.
―데놈의 기차가 내 며누리를 끌구 갔쉬다가레.
초롱불, 삼문사, 1940
거울 -1- 박남수
거울 -1-
살아 있는 얼굴을
죽음의 굳은 곳으로 데리고 가는
거울의 이쪽은 현실이지만
저쪽은 뒤집은 현실.
저쪽에는 침묵으로 말하는
신처럼 온몸이 빛으로 맑게 닦아져 있다.
사람은 거울 앞에서
신의 사도처럼 어여쁘게 위장하고
어여쁘게 속임말을 하는
뒤집은 현실의 뒤집은 마을의 주민이다.
거울은 맑게 닦아진 육신을 흔들어
지저분한 먼지를 털듯, 언제나
침묵으로 말하는 신처럼 비어 있다.
비어서 기다리고 있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거울 -2- 박남수
거울 -2-
한 마리의 새에도 민감한 눈이다.
때로는 이즈러지는 표정으로
모든 물상을 찌그러뜨리는 불평꾼이다.
오른편은 왼편으로 바꿔 놓고
왼편은 오른편으로 바꿔 놓는
세상 제일의 장난꾼이다.
□ *
탐욕한 눈은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고.
여인들은 그 앞에 서면 옷을 벗는 마술을,
부끄럼도 아무것도 털어버리는
고회(告悔)의 소슬한 종교.
□ *
거울은 곱게 닦고
온갖 물상과 조용히 이야기한다,
세상 제일의 장난꾼은 물상을 뒤집어 놓지만
상하(上下)를 바꿔 놓지 않는
정연한 질서의 집.
□ *
지금은 비어 있는 시간.
햇볕이 거울에서 꺾이어
천정으로 뛰어 오르는 장난스런 시간.
햇볕은 지상으로 내리는
무한한 강하(降下)를 즐겨왔지만, 지금은
천정으로 뛰어 올라 한 마리 나비가 되어 있다.
장자(莊子)의 꿈 속 같은 긴 시간을
거울은 속으로 속으로 보듬고 있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겨자씨만한 육신을 박남수
겨자씨만한 육신(肉身)을
겨자씨만한 육신(肉身)을
육척(六尺)으로 키운 이십년을
겨자씨만한 소견(所見)을
우주(宇宙)의 크기로 불린 오십년을
되돌아보며, 지팡이로
겨우 스스로를 부지(扶持)하는 칠십년을
이 거짓의 크기에 눌리어
꺼져 버린 풍선(風船)처럼
저 긴장이 빠진 공허(空虛)를, 무덤에
덮으면 종말(終末)은 원초(原初)로 돌아가는
겨자씨만한 육신(肉身)을.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고독 박남수
고독(孤獨)&
인간의 발자국 소리가 끊어진
통금시간(通禁時間)의 이승 쪽에는
사만년(四萬年) 전(前)의 고독이 깔린다.
모딜리아니의 그림 속의 사나이처럼
가는 모가지 위에
여윈 얼굴을 얹고
어디라 없이 흐린 시력(視力)은
이승 쪽의 관심을 잃어가고 있다.
문명(文明)의 묘지(墓地)에 갇혀
긴 밤의 시간(時間)을, 어쩌나
사람의 이야기가 끊어진 시간에
어쩌나, 이 뜬 눈을.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귀 박남수
귀
귀를 기울인다.
나는 지금 음악을 찾고 있다.
나의 귀는 꼭또의 조개껍질
먼 바다의 소리가 들린다.
새의 지저귐도
귀뚜라미도 들린다.
귀에 손을 덧대고
나는 귀를 기울인다.
나는 지금 음악을 찾고 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들리지 않기 시작한다,
비인 속에
오직 하나만의 존재처럼
지금 나는 모든 것을 다시 듣는다.
베에토오벤의 귀.
신의 쓰레기, 모음출판사, 1964
다리 밑 박남수
다리 밑&
나무 다리 밑 불빛이 부우염히 달려
거적자리 위에 그림자 크다랗다.
잠자리 찾아 이리로 들렸나……
반딧불이 날고, 개울물이 도론도론 들리는
다리 밑에는 얻어 들인 저녁이 한참 갔고나.
개울 물만 화안히 트고
통 어둠에 잠겼는데
어디서 장타령 외는 소리 느렇지게 들린다.
날이 새면
다리 밑은 아무것도 없으리라.
초롱불, 삼문사, 1940
딸에게 박남수
딸에게
내 딸이 딸을 낳았다는
유월(六月) 십팔일(十八日)의 국제전화(國際電話)를 받고
네가 걸음마를 떼고, 어느 날
문지방을 넘던 모험(冒險)의 기쁨을
네 얼굴에서 보았을 때,
네 어미는 큰일이나 난 듯,
두 팔을 벌리고 부축하려고 했었지.
그 후, 너는
도랑을 뛰어 넘었고
바다를 또한 뛰어 넘었고
그 조심스런 어머니 품에서 날아 올라
지금은 뉴욕에서 딸을 낳았다.
어느 날엔가는, 너도
네 어린것이 문지방을 넘어설 때
너는 두 팔을 벌리고
어머니가 될 것이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마른 풀잎이 박남수
마른 풀잎이
마른 풀잎이
하루 종일 울고 있었다.
눈이 덮인 산말령으로
고압선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입춘 대길의 문을 열고
진달래가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죽은 나무 등걸에
푸른 좁쌀이 돋고 있었다.
한랭한 가지 끝에서, 멀리를
발돋움하는 새의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마을 박남수
마을
외로운 마을이
나긋나긋 오수에 조을고,
넓은 하늘에
솔개미 바람개비처럼 도는 날……
뜰 안 암탉이
제 그림자 쫓고
눈알 또락또락 겁을 삼킨다.
초롱불, 삼문사, 1940
무제 5 박남수
무제(無題) 5
나는 회현동(會賢洞)에 있고
당신은 마석(磨石)에 있습니다.
우리는 헤어진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성북동(城北洞)에 살고 있었고
나는 명륜동(明倫洞)에 살고 있었을 때에도
우리가 헤어져 있었던 것이 아닌 것처럼.
나는 이승에 있고
당신은 저승에 있어도 좋습니다.
우리는 헤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일본에서 대학의 학생이었고
당신은 서울에서 역시 대학의 학생이었을 때에도
우리는 헤어져 있었던 것이 아닌 것처럼.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무제 6 박남수
무제(無題) 6
한동안
어느 시인(詩人)이 죽음의 연습을 하신다고
발랄한 체조(體操)를 하셨지만,
얼마간은 팔뚝에 알통도 생기기는 하셨겠지만
이 세상에는
죽고 사는 일이란 본시 없는 것.
그저 저기 돌처럼 있고
여기 꽃처럼 있을 뿐,
한 동안 지훈(芝薰)으로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고
한 동안 한직(漢稷)으로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고
한 줄의 시구(詩句)가
잠깐 피는 꽃이나 다를 바 없다.
어제에 진 한 송이 꽃이나
오늘에 핀 한 송이 꽃이나
꽃은 꽃일 뿐―언제나 꽃은 꽃일 뿐이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미명 박남수
미명(未明)
희멀건 그믐달이
별짜구니를 돌아 흘러 흐르면,
장 보러가는 나귀 옆 초롱이 흘러 따르고,
나귀 눈방울에 마을이 흘러 지나자……
뒷골 닭이 자즈러지게 울어
객주집 맏며느리,
뜬 눈에 대청 높은 집 마나님 꿈이 머물렀다.
초롱불, 삼문사, 1940
미열 박남수
미열(微熱)
툇마루에 떨어지는
평(坪) 가웃.
햇볕은 따갑고
화분의 거밋한 겨울 나무에
뾰루지 같은 것이 뾰죽 돋아난다.
□ *
빛을 반사하는 연두의 빛.
미열에 뜨는 눈들이
아물아물 자라는,
세상은 아지랑이가 뜨는
뜬 세상.
□ *
뜨는 메주 냄새가 매캐한
평(坪) 가웃 어둔 방에는,
시방 마을 어린 것들이
뾰루지의 붉은 꽃을 쓰고
구실이 한창 창궐하고 있다.
신의 쓰레기, 모음출판사, 1964
밀밭의 신비 박남수
밀밭의 신비(神秘)
동지(冬至)의 꼬리가
이제 조금씩 빛으로 녹아 가는
죽음 속의 삶이 조금씩 되살아나는
이 신비의 국경을, 나는
밀수꾼처럼 몰래 넘어간다.
사실 어처구니없이 비싼 값을 치르며
다시는 돌려 받을 수 없는
나머지 젊음을 담보로 하고, 나는
어두운 강을 밀항하고 있다.
저쪽의 눈밭에
파릿한 것, 꽝꽝한 흙을 제끼고
반역하듯 솟아나는 밀밭의 신비들
그 황홀한 젊음을 위하여, 나는
어두운 강을 넘어
밀수꾼처럼 지금 건너가고 있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바람 박남수
바람&
□ 1
바람은 울고 있었다.
이룰 수 없는 형상(形象)을 끌고
나무 그늘에서
나무 가지에서
흐렁 흐렁 흐느끼고 있었다.
*
꽃밭에 뛰어들면
꽃이 되고
날리어 흐르는 바람의 수염.
푸른 하늘에
걸리어선
나부끼는 기폭이 되다가,
*
어쩔 수 없으면
서러워 부림치다가,
노여워
흩날려 불리는
꽃잎에도
부러져 꺾이는
가지에도
몸을 부벼 울다가……
*
바람은
구름이 되어
하늘에
졸
다가,
서러우면
떨리는 비가 되다가,
*
결국은 이루지
못하는 형상(形象)이 되어
쏠리듯
날리면서
피리의 흐느낌.
□ 2
흐느껴 울고 있었다.
갈대의 가슴에서도
풀벌레의 날개에서도
흐렁 흐렁
울고
있었다.
*
네거리를
걸어서 가도
가슴에
복받는 가락이
흐느끼는
고독
처럼
혼자서
어디론가
숨듯이
바람은 땅 위에 쓰러져
굴고
있었다.
매기 소묘(素描), 춘조사, 1958
밝은 정오 박남수
밝은 정오(正午)
어두운 북향 방에
환히 한 오리의 볕이 들어
누웠는 눈이 부시다.
벽에 걸어 논 면도용 거울의 장난.
가끔은 불의(不意)의 볕이라도 들어
어처구니없이 밝은 마음으로
더부룩히 자란 수염을 다듬어 보는
뚜우가 우는 밝은 정오.
신의 쓰레기, 모음출판사, 1964
밤 1 박남수
밤 1&
밤은 새들을 죽이고
등불들을 죽이고
온갖 물상들을 죽인다.
새들은 어두운 숲, 나뭇가지에
그 외각(外殼)을 걸어 두고
어딘가 멀리로 날아간다.
등불은 어둠을 밝히고, 어둠이 내장한 것들을 밝히지만
스스로를 밝히지 못하여 절망한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밤 2 박남수
밤 2
일몰에
보랏빛 그림자가 짤리고
자잘한 기물들은 어둠이다.
굳은 껍데기에 쌓여
스스로를 방어하는 검은 물상들.
지하에서 얼굴을 내어미는
쥐의 예리한 이빨에,
이빨에 썰리는 나무 의자는 톱 소리를 낸다.
잠들기 전,
귀만 듣는 전모.
담장 위를 쥐가 달빛을 지고
조르르 건너간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밤길 박남수
밤길&
개구리 울음만 들리던 마을에
굵은 빗방울 성큼성큼 내리는 밤……
머얼리 산턱에 등불 두셋 외롭고나.
이윽고 홀딱 지나간 번갯불에
능수버들이 선 개천가를 달리는 사나이가 어렸다.
논둑이라도 끊어서 달려가는 길이나 아닐까.
번갯불이 스러지자,
마을은 비 내리는 속에 개구리 울음만 들었다.
초롱불, 삼문사, 1940
밤비 박남수
밤비&
하늘이 짖는다. 저 노(怒)한 목소리는
죄 지은 자의 머리 위에서 터지고,
분노의 눈빛은 세상을 쏘아보며
어두운 소나기가 한밤내 쏟아진다.
반짝이던 보석(寶石)을 거둬 들이고, 지금
신(神)의 숨소리는 거칠기만 하다.
돌아선 처용(處容)처럼 용서하지 말라.
돌이 젖고, 꽃이 젖고
인간(人間)도 젖는, 낮은 숨결이
한밤이 새도록 빗풍을 한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병동의 긴 복도 박남수
병동(病棟)의 긴 복도
□ 1
병동의 긴 복도에는
걸을 때마다 크레졸의 기류가 흔들린다.
코오너를 돌아서는
흰 천사의 손에는 성기 같은 주사기가 바늘을 뽑고 있다.
나는 눈을 꿰어 등으로 내어밀은 주삿바늘에
꼼짝없이 박제가 되었다.
간호부는 부드럽게
웃음의 파동을 건네고 지나간다.
□ 2
복도를 향한 유리창 앞에는
유리 상자 안에서 아물거리는
조산아의 밥풀 같은 꼬투리가 푸들거릴 때마다
웃음이 터지는
일군(一群)의 아낙네들의 거침없는 웃음.
일군(一群)의 아낙네들의 거침없는 웃음에
거북한 눈을 돌려,
창 밖의 병원 뒷문으로
살그머니 숨어서 빠져나가는 영구차를 본다.
□ 3
병동의 긴 복도에는
걸을 때마다 크레졸의 기류가 흔들린다.
코오너를 돌아 것차(車)를 밀며
창백한 간호부가 조객처럼 천천히 따라온다.
망가진 육신에 바치는
마지막 경의.
목례를 하며, 상부처럼 따라간
흰 나비의 잔상이 지워지지 않는 병동의 긴 복도.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봄비 박남수
봄비&
봄비가 내린다.
나의 구부정한 척추가 조금 선다.
소리 없이 내리는 봄비는
간지러운 속삭임.
언젠가 나의 귀에도 있었던
사랑의 말씀이다.
구부정한 척추를 세우고
나도 육신에 꽃이나 더덕히 달아 볼까.
□ *
진종일,
봄비는 꽃에 내려 맺혀, 붉게 흔들리고
잎에 내려 푸르게 흔들린다.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을까요)
지금,
꽃밭에는 한창 공사하는 소리가 들린다.
□ *
땅에 묻히듯, 나도
방바닥에 누워서 기다리고 있다.
무료한 시간에 가녀린 뿌리가 돋아나듯
내 턱이 가렵더니
더부룩한 것이 돋아나고 있다.
진종일,
봄비는 공사하는 소리를
그치지 않는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부락 박남수
부락(部落)
온천(溫泉)을 둘러 쌓고 마을이 생긴 날……
망아지 울던 벌에
신파(新派)쟁이 트럼펫이 가을 바람을 실어 왔다.
앓는 이는 앓는 이끼리
창부(娼婦)는 창부끼리
벌 위에 진(陣) 친 천막(天幕)이 고운 이야기였다.
온천만 호올로 솟아 흐를 동안,
마을은 병들지 않은 사람을 찾아
옛날 추억에 십전(十錢) 백동화(白銅貨)를 놓고 왔다.
그후 며칠도 천막은 불려 가지 않았다.
초롱불, 삼문사, 1940
비가 박남수
비가(悲歌)&
□ 1
나의 눈에는
넓은 원야(原野)의 그림자가 있다.
한 무리의 새가 건너가며 굽어본
넓은 원야(原野)의 그림자가 있다.
싸락눈이 치는 넓은 원야(原野)를
철새가 무리져 이동해 가면서
아픈 마음의 상흔을 피로 뿌린
흰 눈발의 혈흔들.
195×년 12월
날아가는 공중의 새들은
한 걸음 뒷걸음치는 지평선을
날아가도 지워지지 않는 지평선을
바보, 바보, 바보처럼.
포탄이 터지는 터널을 뚫으며
우리가 찾아가는 길은,
꿀이 솟는 복지를 찾아서가 아니라
귓맛 좋은 자유를 찾아서가 아니라
찢어진 절규처럼
찢어진 기폭처럼.
그것은 삶의 무늬,
머리에 흰 붕대를 감고
온 고통을 앓던 Z씨의 감금은
한 민족의 투옥.
창살 밖에는 외국군대의 보초병의 군화 소리가
언 당을 가르며 저벅거렸고,
195×년 12월,
나의 최초의 탈출은
넓은 하늘을 날아오르는 승천.
민족이란 말의 뜻을
되새기며 되새기며 남하하였지
그것은 삶의 무늬.
□ 2
그것은 삶의 무늬.
부러진 쭉지를 너펄거리며
백결의 해어진 의관을 쓰고
신의 군대처럼 다열종대로 서울에 입성하였지.
동정의 눈화살을 받으며.
―워커 장군의 죽음.
호외의 놋방울이 울리는 가두에 서서
아직도 동․서․남․북
어디도 갈 길은 없었다.
깨어진 서울 거리에 서서, 나는
넓은 원야(原野)의 그림자를 보며
자유로이 나는
무리 새의 행방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늘은 흐르고
찬 삭풍의 매운 칼날은
우리의 살결을 갈랐지만,
넓은 하늘이 저렇게 펄쳐져 있으면
날개를 띄울 공간으론 충분하지 않겠는가.
□ 3
쫓기듯 쫓기는 듯 밀리어간 부산항에 닻을 내리고,
헌데처럼 딱지 앉은 판자촌에서
어린것들은 연한 손톱이 짜개지도록
넓은 원야(原野)의 그림자를 캐고 있었다
고 파릿한 것을
꽝꽝 언 얼음 속의 새봄을 후비고 있었다.
그것은 삶의 발견.
어린것들은 손톱이 짜개져
몇 점, 뿌려진 핏방울을 굽어보며
이것이 언젠가는 꽃 필 것을
어린 눈동자들은 확신하고 있었다.
□ 4
부두(埠頭)를 나는
배고픈 갈매기들.
기름 위에 뜬 밥풀을 쪼아올리며
―이거 정말 못 살갔쉐다가레.
―므스거 그 따위 마르 하지비.
늙은 갈매기는 수척한 목소리로
서로를 위무하며
하역장에서 얌생이를 치고 있었지.
어디선가 들리는 확성기는
―켓세라, 켓세라.
신의 음성처럼 고귀한 격려를 보내고 있었다.
―켓세라, 켓세라.
살결 고운 한국의 계집애들은
기름 위에 뜬
밥풀을 쪼으려 몰려들었고,
보이지 않은 투망에 걸리어
성성한 비늘이 번득이고 있었지.
좁은 한 칸 방,
아랫목에서 건장한 미스터 콜리는
애완용 강아지를 덮치고
부엌에서는 그 에미가
깡통을 뜯어 술상을 만들고 있었다.
암담한 언어의 장벽은
날로 그 부피를 더하는 역사 속에서
배고픈 갈매기들은
오직 바다 위를 날면서
밥풀을 쪼아먹는 일만이
사는 이유의 전부였다.
□ 5
켓세라, 켓세라.
파도는 노하여 머리를 들고
골목마다 흩어진 주먹에 멍들은 얼굴에는
아무런 신분증도 없었다.
―이 새끼, 코피루 세수를 해야 알겠니.
후들거리는 다리로는
무거운 머리를 세울 수도 없는
거리의 북. 그래도……
좀 기술적으로 말하면,
내일을 믿으며, 믿어보며 돌아가는 판자촌.
서른넷의 젊은 시인은 광복동 네거리에서
갈 곳이 없다. 아무데도 시는 없었다.
□ 6
만나는 옛 친구는
히죽이 흰 이빨을 내어밀고 웃으며
슬금슬금 꽁무니를 내뺏지.
―저 친구도 도강을 못했다던가.
오히려 내 편에서 동정하며
소금 같은 쓴 가래를 삼켰다.
뒷짐을 지고 하릴없이
도떼기시장으로 가면, 피난 친구들이
물들인 군복의 허수아비가 되어
깡통 장수, 헌옷 장수, 꿀꿀이 장수가 다 된 친구들이
히죽이 흰 이빨을 내어밀고 웃으며
―아직 점심 전이지?
코뼈가 시큰둥하게 울리는
38따라지의 뜨거운 정분을 느꼈지.
친구의 품 좁은 웃도리를 얻어 입고
늘 떳떳치 못한, 나는
갈 곳이 없다. 부두(埠頭)에 앉아서
두보처럼 울었다.
갈매기의 끼룩거리는 노래가
바다보다 세차게 일렁이는 가슴을 쓰다듬어 주었다.
어느 영화관에서 울리는 유행가는
―사나이는 도둑, 사나이는 도둑
이 판에도 그런 감상이 있었던가
영도까지 울리게
처음으로 큰 웃음을 웃어 보았다.
□ 7
저무는 햇빛은 피를 뱉고
수평에 꺼져 내리는 해질녘
비로소 현실인 처자가 있는 판자촌으로 간다.
어둠 속을 누비며
갈매기도 하나 둘 사라져 간다.
도도하게 살리라던, 나는
어둠 속에서 점점점 작아져
지금은 풀섶을 기는 버러지가 된다.
버러지만큼의 주장도 내세우지 못하는
제 주제를 내려다보며
195×년 춘삼월,
가장 작아진 육신이 왜 이렇게 무거우냐.
수척한 얼굴에
날로 커지는 눈방울은
잠자리처럼 복안(複眼)의 어지러운 시력이 되어
지금 나는 넓은 원야(原野)의 그림자를 본다.
한 무리의 새가 건너가며 굽어본
넓은 원야(原野)의 그림자를 본다.
찢어진 절규처럼
찢어진 기폭처럼.
□ 8
경상도 사투리가
―어서 오이소야
환영하는 곳은 밥집뿐이지만,
누가 불러서 왔던가.
나두 북에 가면 고래등 같은 집두 있구요
쩡쩡 울리는 한 푸내기가 살구 있디요
믿든 안 믿든 그렇지 않고는
뼛대겨 볼 자랑이 없다.
앞은 어둡고
빛은 지나간 날에만 비치는 서글픈 따라지의 목숨.
에라 어디에 불이라도 붙어라.
원자탄이 떨어졌으면 어떠랴.
기울 수도 없는 누더기의 젊음을 가누며
전황 뉴스에는 흥미도 없었다.
진종일 걸어보아야
도떼기시장을 맴도는 미아.
어느 날,
군고구마 장수가 된 동창생이
끝내 자살을 하고
친구들은 오히려 그 결단에 쾌재를 부르던
통곡. 지금도 내 귀에서
그날의 통곡이 지워지지 않는다.
―자식, 혼자만 가문 뎨일이야.
□ 9
나의 눈에는
넓은 원야(原野)의 그림자가 있다.
한 무리의 새가 건너가며 굽어본
넓은 원야(原野)의 그림자가 있다.
앞이 보이지 않게
쏟아지던 싸락눈에 뿌린 혈흔.
도도하게 살리라던, 우리가
점점점 작아져 간 저 역사 위에
찢어진 상흔을 남기고
아픔을 끼루 끼룩 울면서
내일을 내일을, 아 내일을……
매기 소묘(素描), 춘조사, 1958
비비추가 된 새 박남수
비비추가 된 새
□ 1
지금,
새는 온갖 고민, 온갖 공포를 뛰어 넘었다.
그것은 한 줌의 흙, 한 방울의 물.
한 포기의 비비추가 되어, 지금
그것은 북망 뒷기슭에서
바람이 불 때마다 방울 소리를 내고 있다.
□ 2
가을 하늘이 곱게 흐르고 있다.
때가 밀리듯 한 꺼풀의 유한(有限)한 것을 벗기고
지금,
비비추의 방울 소리는
맑고 깊은 하늘의 가슴에 울리고 있다.
어느 젊은 여류 시인의 공간에 울리고 있다.
□ 3
사월에 죽은 넋이가
시월에 여무는 건강을 휘파람 분다.
산길을 구비 내려 술 익는 마을
솔밭 지나 길이 끊긴 어느 산사(山寺)에서
선어(禪語)를 외우고 있을까.
지금,
쏴아 송뢰의 알지 못할 말씀이
내 귀에 그득히 흰 버금을 일구고 있다.
□ 4
날이 어두웠는가,
산 밑을 도오는 헤드라이트가
내 어린 날의 반딧불 날듯 한다.
그야 별장이든 원두막이든 이승의 끝에서
나는 길을 잃었다.
쉰둘의 어둔 눈으로 찾아가는
내 귀로의 초라한 모습이어.
□ 5
가지에서 가지로 옮아 앉듯
그렇게 쉽게 인생을 풀은 시인의 묘소에서
지금,
벗들은 즐겁게 비비추의 방울 소리를 듣고 있다.
청록(靑鹿)의 운(韻).
어느 선사(禪寺)를 기어오르던 청록(靑鹿)의 울음을 듣고 있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사모곡 박남수
사모곡(思母曲)&
아침녘 잠결에 들리는
남비 부딪는 소리.
잠결에 솔솔 스며드는
찌개 끓는 내음.
그래선지 아침녘에
어머님의 꿈을 꾸었다.
소식을 모르기 이십유여년(二十有餘年),
요새 서울에선 보기 어렵지만
망아지도 송아지도 자라면
어미를 잃고 산다.
그래선지 그 눈망울이
늘 눈물 같은 것이 끼어 있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사슴의 관 박남수
사슴의 관(冠)
□ 1
상고대(上古代)의 사슴은
뿔 위에 뿔이 자라
세상을 향으로 채웠지만,
뿔 위에 뿔 위에 뿔이 자라
이윽고, 상고대(上古代)의 사슴은
가는 다리로는 설 수가 없어서
그 태반이 절멸하였습니다.
□ 2
중고대(中古代)의 사슴은
뿔 위에 뿔이 자라
근지러운 뿔을 마주 부비며
끝내는 생사를 걸고 결판을 내고
모든 뿔이 부러져, 다시
그 태반이 절멸하였습니다.
□ 3
뿔이 아무리 향 높은 관이라 해도
뿔은 결국은 받아서 피를 흘리는
어쩔 수 없는 무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새 1 박남수
새 1
□ 1
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쭉지에 파묻고
다스한 체온을 나누어 가진다.
□ 2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하지 않는다.
□ 3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신의 쓰레기, 모음출판사, 1964
새 2 박남수
새 2
이른 녘에
넘어오는 햇살의 열의를
차고,
산탄처럼 뿌려지는 새들은
아침 놀에
황금의 가루가 부신 해체.
머언 기억에
투기(投企)된 순수의 그림자.
신의 쓰레기, 모음출판사, 1964
새 3 박남수
새 3
나의 내부에도
몇 마리의 새가 산다.
은유의 새가 아니라,
기왓골을
쫑,
쫑,
쫑,
옮아 앉는
실재의 새가 살고 있다.
새가 뜰로 내리어
모이를 쪼든가,
나뭇가지에 앉든가,
하늘로
날
든가,
새의 의사(意思)를
죽이지 않으면, 새는
나의 내부에서도
족히 산다.
새는 나의 내부에서도
쫑, 쫑, 쫑
기왓골을 옮아 앉으며
조그만 자연이 된다.
신의 쓰레기, 모음출판사, 1964
새 박남수
새&
이제까지 무수한 화살이 날았지만
아직도 새는 죽은 일이 없다.
주검의 껍데기를 허리에 차고, 포수들은
무료(無聊)히 저녁이면 돌아온다.
이제까지 무수한 포탄이 날았지만
아직도 새들은 노래한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교외에서
아직도 새들은 주장한다.
농(籠) 안에 갇힌 새라고 할지라도
하늘에 구우는 혀 끝을 울리고 있다.
철조망으로도 수용소로도
그리고 원자탄으로도 새는 죽지 않는다.
더럽혀진 하늘에, 아직도
일군(一郡)의 새들이 날고 있다.
억척 같은 포수들은, 저녁이면
무료(無聊)히 주검의 껍데기를 허리에 차고 돌아올 뿐이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새의 암장 1 박남수
새의 암장(暗葬) 1
삶보다 투명한 궤적을 그으며
한 마리의 새는
저승으로 넘어가고 있다.
죽음과 생식의 알이 쏟아지는
보이는 싸움과 보이지 않는
싸움 속에서 암장되고 있다.
스스로가 노래인 하늘의 주민들은
붕 붕 날리는 위협으로
온몸에 소름을 쓰고 떨고 있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새의 암장 2 박남수
새의 암장(暗葬) 2
침묵을 터뜨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새들은 떼를 지어
순금의 깃을 치며 멀어져 갔다.
물낯에 그려진 무수한 동그라미가
하나씩 허무로 꺼져 갔다.
붉은 피가 풀어져
다시 푸르러지는 일순(一瞬)을
누구도 보지 못하였지만, 다만
어디선가 아픈 절규가 검게 떨어져,
갈대밭이 수런거리고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침묵을
완전히 뒤엎고, 하늘의 표류물이 강반(江畔)을
피로 적시는 것을 보았으리라.
모든 위험을 잊어버린, 새는
죽음의 점토에 떨어져
스스로를 한 폭의 판화로 찍고 있었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새의 암장 3 박남수
새의 암장(暗葬) 3
땅 속을 자맥질하던
한 쭉지의 날개는
삼천년의 계절을 넘어서, 지금
이승 쪽으로 떠오르고 있다.
고구려의 하늘이었을까, 아니면
예맥의 하늘이었을까
부릉 날아오른 활촉에
꿰뚫린 것은 새가 아니라, 그것은
죽음에 앞지른 절규,
일순(一瞬) 후에
새는 피를 쓰고 곱게 낙하하였다.
□ *
땅에 떨어져 내린
한 쭉지의 날개는 지하로 강하(降下)하여
어느 지층을 날아가고 있었다.
피를 앞지른 절규.
사람의 귀에 세운 불립문자(不立文字).
화석은 어느 표본실
유리창 속에서 증언하고 있다.
□ *
죽음을 앞지른 절규는
삼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어느 십자로에서
나이 어린 소년의 붉은 입술에서
어느 전장터에서
꽃다운 젊은이의 목덜미에서
지금도 귀먹은 사람의 귀에
불립분자(不立文字)를 세우고 있다.
□ *
어두운 삼천년의 세월을
자맥질해 온 한 쭉지의 날개는
지금 어느 표본실에서 증언하고 있지만
귀먹은 사람의 귀로는 듣지 못한다.
무수한 죽음을 앞지른 절규는
긴 계절의 저쪽에서 화석하여
선명한 쭉지의 무늬를 만들고 있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생성의 꽃 박남수
생성(生成)의 꽃
□ 1
무구한 빛.
피를 흘리는 젊음의 뒤안길에서
꽃이 피고
흐르는 꽃잎․꽃잎․꽃잎
꽃이 피고
피가 흐르는 아픔을
흐르는 피로 맺는
생성의 꽃, 꽃밭에서,
불로 타는
붉은 빛깔로 부르는
무구한 빛.
아픔이 없이는
이루지 못하는 뒤안길에서
피로 꽃이 피고 꽃이 지고……
□ 2
꽃밭에 도사린
꽃뱀이 곱게 도사리고
어디로 쏘아 가려나.
팽팽히 당겨진 탄력의 대가리.
한 번 겨누면
구멍이 뚫어지는 독,
독의 누런 진으로 풍기는
흰 백합의 축축한 향,
향이 흐르는 꽃밭에
덮씌운 꽃문(紋)도 아름다운
이불 속에서,
그 어둠의 단층
어디메쯤 맺혔을 것이다.
생성의 수염, 수염이.
□ 3
바람이 분다. 모두 귀를 기울이고
흔들린다. 하늬바람 마파람,
푸름의 물결이 일렁이는 속에서
색깔들이 엇갈려 흔들린다.
소나기가 때리는
뇌성. 뇌성에 터지는
번개. 번갯불에 어린
가녀린 꽃.
꽃. ……꽃은
역시 피어 있었다.
그 떨리는 낙화에 묻혀―
죽음 앞이면
오히려 살아나는 꽃잎 위에
이윽고 강한 햇볕이 어리었다.
□ 4
무지개의 이슬이 맺힌
꽃밭 한켠에
쏟아지는 주먹비에 터진, 개구리는
눈을 외면하고 있었다.
떨어지는 꽃잎이 하나 둘.
꽃 그림자에 놀란 개구리는
껑충 앞으로 한 번 뛴다.
뛰면서 보는 건 신라쯤인가.
뛸 제마다 흔들리는 눈으로
기실은 작아만 가는
그 상거(相距)의 거리가 멀어만 간다.
개굴 깨굴 깻굴
꼬부라진 꽃밭 사잇길에서
갸웃 흔들리는 바람에 벙그는 또 한 가지의 꽃.
□ 5
아직은 무구한 빛
피를 흘리리라.
옆구리에 터진 상채기에 붉은 꽃송아리를 달고
아픔으로 여기에 서 있다.
사흘 후에는
조그만 징조(徵兆)로 맺힌 씨앗이
푸르름 속에 태동하는 조용한 시간 위에서
스스로의 우주를 세우고 있었다.
꽃이 지고
잎이 지고
줄기가 메마른 것은,
스스로의 우주에
다시 생성의 꽃을 피우고
잎을 달기 위해서였다.
매기 소묘(素描), 춘조사, 1958
섬 1 박남수
섬 1&
시푸런 남빛으로 설치며, 파도는
작은 섬을 핥으고 있지만,
실의(失意)에 낯익은 섬은
고독의 귀를 세워
어둠을 나는 갈매기의 절규(絶叫)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이 짧은 절규(絶叫)는, 결국
파도 소리에 지워져
그의 의사(意思)는 전달되지 않았지만,
언제나 비통(悲痛)의 소리는
이렇게 묵살(黙殺)되어 오지 않았던가,
세월이여,
세월이여.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소등 박남수
소등(消燈)&
□ 1
나는 불을 끈다.
꿈꾸는 시간을 위해 나는 불을 끈다.
메마른 껍질로 둘러진 현실의 울타리 안에는
한 포기 풀도 자라지 못하는 가뭄의 뜰이 있고,
불모의 뜰에서는 뿌리도 타는 목마름과
비틀어진 가지에 마른 나뭇잎들이 보스라지고 있다.
나는 불을 끈다.
꿈꾸는 시간을 위하여 나는 불을 끈다.
□ 2
불을 끈 시간의 끝에서
가뭄에 마른 현실의 시체에 꽃이 달리는
찬란한 화재를 위해 지피는 불길은
거인처럼 치솟아 꿈 속을 밝힌다.
요원의 그슬린 검은 잿더미 위에서
푸른 바다가 번져 가고
싱그러운 냄새가 뿜어 삼월의 뜰을 만드는
삼월의 사상(思想)을 위하여.
□ 3
나는 불을 끈다.
꿈꾸는 시간을 위해 나는 지하 층계를 딛고 내려간다.
가는 물줄기는 어느 샘에 뿌리를 박고
질적질적 땅을 적시고 있다.
마른 뿌리는 가는 물줄기에 주둥이를 박고
지금 목을 축이고 있다.
나는 불을 끈다.
불을 켜는 시간을 위해 나는 불을 끈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소리 박남수
소리&
나의 귀를 스치어 가는
무슨 소리 같은 것이 들린다.
통곡처럼 무너지는
그 장엄한 소리
아테네가 그랬듯이 폼페이가 또 그랬듯이
찬란한 존재들은
모두 무너지는 한때의 장엄한 시간을 가졌듯이
지금 무슨 수세(水勢) 같은 것에 밀리어
떨어지는 폭포처럼 장엄한 소리가 들린다.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면
역시 잠잠한 세상.
잠들은 자정에
바람의 칼날이 시푸렇게 번개치는
노한 거리 바닥에
달이 가리이는가, 집도 나무도 어둠의 자락으로
조용히 갈앉는 밤은 아직도 흐르고 있다.
신의 쓰레기, 모음출판사, 1964
손 박남수
손&
물상이 떨어지는 순간,
휘뚝, 손은 기울며
허공에서 기댈 데가 없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손은 소유하고
또 놓쳐 왔을까.
□ *
잠깐씩 가져 보는
허무의 체적.
그래서 손은 노하면
주먹이 된다.
주먹이 풀리면
손바닥을 맞부비는
따가운 기원이 된다.
□ *
얼마나 오랜 세월을 손은
빈 짓만 되풀어 왔을까.
손이
이윽고 확신한 것은,
역시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뿐이었다.
신의 쓰레기, 모음출판사, 1964
숨가쁜 언덕을 넘어 박남수
숨가쁜 언덕을 넘어
숨가쁜 언덕을 넘어
내리막길에서 다리가 휘청거린다.
죽음의 밝은 얼굴이 지켜보는
가을 어구에는, 억새풀들이
바람에 허리를 휘고 허우적인다.
금잔디는 파랗게 살았지만
죽음의 알몸이 여물어
송장냄새처럼 붉은 잠자리가
막대 끝에서 떨고 있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시계는 열한시 오십구분 박남수
시계는 열한시 오십구분
시계(時計)는 열한시 오십구분.
일분(一分)이 지나면 날이 바뀐다.
날이 바뀌어 본들 별일은 없지만
바뀌는 날에 기대(期待)를 걸어 본다.
기대를 걸어 본들 별일은 없지만
언제나 속으며 믿어 본다.
믿어 본들 별일은 없지만
시계(時計)는 열한시 오십구분.
일분(一分)이 지나면 새날이 된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신의 쓰레기 박남수
신(神)의 쓰레기
천상(天上)의 갈매에서
부어 내리시는
부신 볕은
다시 하늘로 회수하지 않는
신의 쓰레기.
□ *
아침이면
비둘기가 하늘에
구
구
구
굴리면서
기억의 모이를
쪼고 있다.
다스한 신에 몸김을
몸에 녹이면서.
□ *
신의 몸김을
몸에 녹이면서
하루만큼씩 밀려서 버려지는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시인들은 종이 위에 버리면서
오늘도 다시
하늘로 귀소(歸巢)하는 비둘기.
신의 쓰레기, 모음출판사, 1964
심야 박남수
심야(深夜)
보름달이 구름을 뚫고 솟으면……
가므스레한 어둠에 잠겼던 마을이 몸을 뒤척이며 흘러 흐른다.
하아얀 박꽃이 덮인 초가집 굴뚝에 연기 밤하늘을 보오야니 오르고,
뜰 안에 얼른얼른 사람이 흥성거린다.
어린애 첫 울음이 고즈넉한 마을을 깨울 때
바로 뒷방성 개 짖는 소리 요란요란하다.
새악시를 못 가진 나는 휘파람 불며 논두렁을 넘어 버렸단다.
초롱불, 삼문사, 1940
아침 이미지 1 박남수
아침 이미지 1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 꽃을 낳는다.
아침이며,
어둠은 온갖 물상을 돌려 주지만
스스로는 땅 위에 굴복한다.
무거운 어깨를 털고
물상들은 몸을 움직이어
노동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즐거운 지상의 잔치에
금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아침이면,
세상은 개벽을 한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아침 이미지 2 박남수
아침 이미지 2
□ 1
아침 공간에
얼얼히 울리는 지난 여름의
우뢰 소리가 들린다.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어둔 길목에
수레바퀴가 삐걱이고,
멀리 가등(街燈)은 안개에 뜬 작은 섬.
□ 2
기동(起動)하는 도시는 든든한 두 다리를 벌리고
거인처럼 서 있다.
저잣거리에 모여드는 장사치들은
버얼건 눈을 부비며
전대(錢帶)를 끌러 무딘 은전(銀錢)의 은빛을 되질한다.
□ 3
이윽고 멀리 라디오는
첫 뉴우스를 알린다.
예멘에는 다시 쿠데타가 있었고
한국에는 또 물가가 오릅니다.
어제 같은 오늘이 몸을 흔들어
조금 더 거센 파동이 인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아침 이미지 3 박남수
아침 이미지 3
샐 녘의 장판에는
북대기는 공급자들의 싸움이
도시의 한자락을 벗긴다.
자알 익은 과일들이
좌판에 적막처럼 앉아 있고
도마에서 허리가 끊기어
좌우로 달아나는 꼬리와 머리.
연방 선하품을 하는
아낙들의 옆구리에 낀 바구니에는
하나씩 아침의 행복이 담기고
이른 녘의 기동(起動)이 진폭을 넓히는
아침 놀이 거리에도 선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어딘지 모르는 숲의 기억 박남수
어딘지 모르는 숲의 기억
□ 1
어느 날, 나는
어딘지 모르는 숲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당신의 눈에 낀 안개 같은 것,
새가 죽어, 눈에 끼던 산안개의 흰빛이
나의 어두운 거울에 히뜩 지나가는 그 순간에, 나는
어딘지 분명찮은 숲 속을 날고 있었다.
겨울 마른 나뭇가지가 어른거린다.
땅 위에는 흰 눈이 깔리고
다섯 가락의 굳은 발자욱이 꽃잎처럼 패인,
긴 긴 일직선을 굽어보면서, 나는
끼룩끼룩 가슴의 소리를 뽑아 보았지만,
그것은 발톱이 판 상흔이 되어
나의 내벽(內壁)으로 되돌아오는 메아리에 지나지 않았다.
□ 2
어딘지 분명찮은 숲의 기억이, 지금
나의 겨드랑이에서 날개를 돋게 하지만,
나에게는 하늘이 없다. 이 큰 날개를 날릴 하늘이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 땅 위를 기는 요트처럼,
당신의 원야(原野)에 선
한 그루 나무의 둘레를 맴돌며
어딘지 분명찮은 숲의 기억을
일심(一心)으로 뒤적이고 있지만,
그것은 유사 이전의 하늘에서 굽어본 한 폭의 검은 숲,
아니면 나의 가슴 깊이에 되새겨지는 마드레느기(紀)의 기억,
아니면……
□ 3
사람은 모두 원생(原生)의 새.
어느 기억의 숲을 날며, 가지 무성한 잎 그늘에
잠깐씩 쉬어 가는 원생(原生)의 새.
지평과 하늘이 맞닿는 곳에서, 새는
땅으로 꺼져 들든가, 하늘로 증발되어 그 형상을 잃는다.
당신의 눈에 낀 안개 같은 것,
산새가 죽어, 눈에 끼던 흰 안개 같은 것,
―커어피를 마시며
아침 두 시, 분명 어딘지 모를 어느 숲의 기억에서
당신은 날아왔다. 나의 내벽(內壁)에 메아리가 되어.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여름에는 보이지 않던 박남수
여름에는 보이지 않던
여름에는 보이지 않던
그 영혼(靈魂)까지도 얼비춰 보이는
투명한 한국의 가을은, 지금
누더기진 옷을 벗고
그 밋밋한 육신(肉身)을 세우고 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장식(裝飾)으로
건강한 육신을 가리워 왔나 보다.
손가락에서 뿜어오르는 보석(寶石)의 빛으로
우리 여인(女人)들은
그 아름다움을 이즈러뜨려 왔나 보다.
지금 한국의 가을은
모든 것을 벗어 버린 청자(靑磁)의 살갗.
그 영혼(靈魂)까지도 얼비춰 보이는
투명한 한국의 가을은, 지금
그 밋밋한 육신(肉身)을 세우고 있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열매 박남수
열매
열매는 꽃나무가 세우는
마지막 고독이지만
죽어서 오히려 뿜어 올리는
이미지의 첫 분수다.
어느 한 톨의 연(蓮)밥은 이천 년의 굳은 고독을 깨고
신라 적 혹은 고구려 적
그 늙은 아버지의 고명딸로, 지금
꽃을 벌린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열쇠 박남수
열쇠&
유폐된 것에는
해방을.
자유로운 것에는
구속을.
―그러기 위해서
멋도 없이 길다란 쇠붙이는 있다.
내 포켓에서
내 손가락의 애무를 받으면서
그것은 늘 차갑다.
한 장의 여닫이의 이편과
저편에서, 세상을 달리하는
이 신비를 그것은 쥐고 있다.
때로는 귀중한 것이
모셔지는 장소지만,
때로는 귀하신 분들도
들어가시는 장소.
―그러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열린 것은 닫히고
닫힌 것은 열리고.
신의 쓰레기, 모음출판사, 1964
오랜 기도 박남수
오랜 기도(祈禱)
내가 어둠으로 띄운 새들은
하늘에 암장되었는가. 어머니를 향해
이십 년의 세월을 기도로 띄운
새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내 나이가, 지금
헤어질 때의 어머니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도 그 생사조차 모른다.
하늘이여, 이 불륜의 세월을 끊고
아들은 어머니의 무릎에
지아비는 지어미의 품으로
돌아가게 하라. 저들이 함께 웃고
저들이 함께 울도록, 하늘이여
무수한 사람이 띄운 새들이
이제는 귀소(歸巢)하도록 빛을 밝히라.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유전 박남수
유전(流轉)
온천(溫泉)이 솟아난 날……
말 궁둥이에 송아지 찰찰 감아 들고
황소 모가지에 놋방울이 왈랑이던 벌에,
앓는 이와 창부(娼婦)의 마을이 들어앉았다.
이윽고 어느 날,
풀섶 헤이며 걸어 나온 멧도야지는
낯설은 마을을 버려두고 어디로 가 버렸다.
온천(溫泉)은 솟아 솟아 오르기만 할 것일까……
초롱불, 삼문사, 1940
임종 박남수
임종(臨終)
죽음은 돌려 놓은 병풍의 산수(山水)를
혼자 보고 있을까.
이승 쪽에는 향을 태우며
곡 소리가 들리지만,
산수(山水)의 쪽에는
소리가 없는 무(無)의 찬바람만이
유한(有限)한 것을 흔들고 있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잉태 박남수
잉태(孕胎)
감탕을 먹고
탄생하는 연꽃의 아기가
이끼 낀 연못에
웃음을 띄운다.
지금 한창
볕을 빨고 있는
이승의 뒷녘에서는
외롭게 떨어져 가는
낙일(落日)의 후광.
구천(九天)에 뿜는 놀의 핵심에서
부신 상(像)이 타면,
―나는
어둠에 연소하는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신의 쓰레기, 모음출판사, 1964
잔등의 시 박남수
잔등의 시(詩)
하늘은 돌아누워 있는 것일까.
잔등을 이리로 향하고.
누구도 하늘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다.
나는 세상을 향해 잔등을 돌리고 누워 있다.
□ *
새가 늘 하늘의 잔등에
제 잔등을 부비며
하늘을 날아갈 때만 노래하듯이
나도 잔등의 뒤에서
혼자 노래를 부르리라.
새는 잔등을
하늘로 부비며
노래는 세상을 향하여 부르고 있었지,
그렇지, 나도 잔등 뒤켠에서
외로운 사람들을 향하여
잔등을 맞부비는
그런 노래를 만들어 불러야지.
신의 쓰레기, 모음출판사, 1964
잘 익은 막걸리는 박남수
잘 익은 막걸리는
잘 익은 막걸리는
시골 계집아이의 머리카락
냄새가 난다. 그래서
밤이면 사내들은 주막으로 찾아가
막걸리를 퍼마시지만,
안아 볼 수도 없는
허무를 헷안고 허청거린다.
썰렁한 주안상을 물리고
씨부렁하니 자리를 뜨지만, 누구도
채울 수 없는 빈 가슴에
시골 계집아이를 출렁거리며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그래서 그대로 꿈으로
밀행(密行)하는 것일까.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적경 박남수
적경(寂境)
산짜구니에 올라 다람쥐 벗삼아
가랑잎 긁어 모아 술병이 오골오골 끓어 나면,
늦은 가을에, 마음은 트인 하늘이였다.
서쪽 하늘 붉게 붉게 물들 무렵,
남은 술 낙엽(落葉)에 재벌 데우고 앉어
초롱불, 삼문사, 1940
절규 박남수
절규(絶叫)
새는 가지 끝에서
석양에 타고 있었다.
슬픈 안경을 두리번거리며
벗어날 수 없는
사위(四圍)의 사정거리를 느끼고 있었다.
숲을 한 번 힐끔 보고, 단념하듯
석양의 피를 뿜으며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놀은 하늘로
붉게 번져 오르기 시작하였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종달새 박남수
종달새
하늘의 병풍 뒤에
뻗은 가지, 가지 끝에서
포롱
포롱
포롱
튀는
천상(天上)의 악기들.
□ *
보리밭에 서렸던
아지랑이의 영신(靈身)들이, 지금은
하늘에서
얼굴만 내어밀고.
□ *
군종(群鍾)이 울리는 음악의 잔치가 되어
고운 갈매의 하늘을
포롱
포롱
포롱
날고 있다.
□ *
흐르고
있다.
포롱
포롱
포롱
시냇물 위에 날리는 잔바람에
하늘이 떨어져
파안(破顔)의 즐거운 파문.
신의 쓰레기, 모음출판사, 1964
주막 박남수
주막(酒幕)
토방(土房)마루에 개도 어수룩히 앉아
술방을 기웃거리는 주막……
호롱불이 밤새워 흔들려 흔들린다.
밤이 기웃이 들면
주정꾼의 싸움이 벌어지는 행길, 행길 앞 주막.
둘 사이 들어 뜯어놓는
얼굴이 바알간 새악시, 술방 아가씨.
술상이 흩어질 무렵……
마른 침에 목을 간지르던 마을이
소갈비를 구워 먹는 꿈을 꾼다더라.
초롱불, 삼문사, 1940
창 -1- 박남수
창(窓) -1-
답답한 인정이 터쳐놓은
창가에 내가 앉았다.
어둠이 숨막히는 깨스처럼 몸 부비는
여기 창에는
볕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깨스가 폴폴 새어 나가고 있었다.
내 마음의 허전한 넓이처럼
허전한 하늘에는, 지금
하늘님이 뱉어 놓은 가래가
너저분히 희다.
귀가 큰 노자의 구름은
적막강산을 듣는다.
창가에 앉았는 나는, 지금
가슴이 아려서 기침을 한다.
답답한 인정이 터쳐 놓은
창가에 가슴이 아려서 가래를 뱉는다.
신의 쓰레기, 모음출판사, 1964
창 -2- 박남수
창(窓) -2-
창은 외경(外景)을 네모진 액틀에 끼워
방 안의 답답한 하루를 위무한다.
밖으로 열리는 눈을 즐겁게 하고
답답한 사람의 내부를 즐겁게 한다.
어두운 속을 밝히고, 저 멀리
멀리에 마음을 실어 가는 그리움을 만든다.
그리움으로 열리는 강에 다리를 놓고
사람과 사람의 가슴에
다리를 건넨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청계천 박남수
청계천(淸溪川)
온갖 오물(汚物)이 썩어
검게 빛을 뿜어도 이름은 청계천(淸溪川).
옛날에는 그 물줄기를
맑은 샘터에 박고 있었지만, 지금은
하수구(下水口)의 토사(吐瀉)로 더럽혀진
저 청계천(淸溪川)의 물잔등 위를
천렵(川獵)군의 배가 가듯
세도가(勢道家)의 차가 간다.
온갖 오물(汚物)이 썩어
검게 빛을 뿜는 청계천(淸溪川)은 덮였지만
온갖 오물(汚物)이 바람에 날리어
도시(都市)의 내장(內臟)을 더럽히고 있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초롱불 박남수
초롱불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하늘 밑에
행길도 집도 아주 감추었다.
풀 짚는 소리 따라 초롱불은 어디를 가는가.
산턱 원두막일 성한 곳을 지나
무너진 옛 성터일쯤 한 곳을 돌아
흔들리던 초롱불은 꺼진 듯 보이지 않는다.
조용히 조용히 흔들리던 초롱불……
초롱불, 삼문사, 1940
초봄의 꼭두 무렵 박남수
초봄의 꼭두 무렵
응달목에
흰 눈이 아직은 시린
초봄의 꼭두 무렵은
파릿한 파 내음의 파근한 종교.
파헤친 고랑마다 살찌는 파 줄기가
삐죽히 창을 뽑고
알 정신(精神)의 파릇한 건강으로
젊은 신처럼 서 있다.
신의 쓰레기, 모음출판사, 1964
칼을 간다 박남수
칼을 간다
칼을 간다.
자르고 베일 것을 위하여
조심스레 날을 세운다.
부질없는 혹을 자르고
허욕의 군살을 도리기 위하여
칼을 간다.
날이 시퍼렇게 노(怒)하도록은
감정(感情)의 연한 기름을 찍어 낸다.
마지막 뼈를 동강내고
결국은 시퍼런 날만 서는
역사(歷史)의 칼을 돌에 대고
서늘하도록 서걱서걱 칼을 간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투창 박남수
투창(投槍)
빈 하늘에 던져진
은빛의 창은
고구려의 벌판을 건너, 지금
서울의 꼭지에서
vie의 잔등을 노리고 있다.
고층 건물이 떨구는
한 장의 벽돌.
□ *
휘뜩,
창이 각도를 꺾는 순간에,
죽음은 멧돼지의 넓은 잔등에서
털을 세우고 피를 흘린다.
이윽고 조용히 굽는
순종의 다리가 던져져 있다.
□ *
누굴까,
빈 하늘로 쏘아 올리는
은빛의 창.
잔등은
누구나 시원(始源)의 벌에서
꽃같이 터지는 화약을 지고 있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한제 오화 박남수
한제 오화(閑題 五話)
□ 음악(音樂)
내가 아지랑이 속에 있소. 어쩌면 요지경으로 조용한 들녘입니까. 말하자면 음악과 같은 것이지요. 복사나무는 복사나무의 작업을 하고, 배나무는 배나무의 작업을 하고…… 가시내사 가시내의 구실을 시키시구려. 푸른 열매를 먹으면 좀 조용도 해지리다.
□ 무제(無題) 1
그저 한 귀가 모자라는 나날을 살다가 보면, ……푸면 다시 고이는 우물물처럼 충만한 게 부러워지오. 두레박으로 푸시지만 마시고, 가다가 하늘과 맞보는 충일로도 두어 주십시오, 제가 무엇으로 넘치고 싶으오. 오늘은 참말 무엇으로 넘치고 싶으오.
□ 무제(無題) 2
종달새는 어디까지 오르려나. 꺼질 듯 꺼질 듯 하늘로 점(點)져 가는 종달새는 하늘 그 너머가 보고 싶은가 보오. 나도 잠시면 지구를 좀 떠나 보고 싶소. 어쩌면 성층권쯤에서 가향(家鄕)이 그리워지고, 사람이 보고 싶어질는지도 모를 일이오.
□ 기도(祈禱)
뺨이야 부빌 수 있습니다. 부둥켜안기사 더욱 쉽습니다. 그저 당신이 하듯이 사랑할 수가 도무지 없습니다. 내 가슴에 파묻혀 귀 기울이는 검은 머리카락을 지키는 일만도 여간이 아닙니다.
―이런 이제의 마음을 잊지 않도록만이라도 해 주십시오.
□ 한 모금의… 물
처녀야 물 한 모금만 다오. (한 바가지의 우물을 주었습니다.) 처녀야 네 웃음도 조금만 다오. (왠지 복사꽃의 그 부끄러움을……)
―모두 그렇고 그렇잖아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매기 소묘(素描), 춘조사, 1958
할머니 꽃씨를 받으시다 박남수
할머니 꽃씨를 받으시다
할머니 꽃씨를 받으신다.
방공호 위에
어쩌다 된
채송화 꽃씨를 받으신다.
호 안에는
아예 들어오시질 않고
말이 숫제 적어지신
할머니는 그저 노여우시다.
―진작 죽었더라면
이런 꼴
저런 꼴
다 보지 않았으련만……
글쎄 할머니,
그걸 어쩌란 말씀이시오.
숫제 말이 적어지신
할머니의 노여움을
풀 수는 없었다.
할머니 꽃씨를 받으신다.
이제 지구가 깨어져 없어진대도
할머니는 역시 살아 계시는 동안은
그 작은 꽃씨를 털으시리라.
매기 소묘(素描), 춘조사, 1958
합승지점 박남수
합승지점(合乘地點)
무교동에는 식품상 옆에
장의사가 나란히 머리를 맞대고 있다.
(여기서 나는 합승을 탄다)
이승과 저승이 이웃한 곳에서
밤 열한시면,
취객들은 머뭇거리다가
일서(日書)집 앞에서 오줌을 갈긴다.
술집 색시들이 오리처럼 떼를 짓고
오리(汚吏)의 버르장머리를
낚우는 합승지점.
(재수가 좋으면 택시를 타고……)
내놓은 몸,
옆으로 가면 호텔이고
곧추 가면 사글세 방으로 간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해토 박남수
해토(解土)
어둠의 자락을 헤치고
눈뜨는 물상들을 쓰다듬듯
바람은 소리가 되어
지붕에서 운다.
마른 풀잎이 서걱이고
나뭇가지는
가지를 몸 부비며
오만 가지가 움직이고 있다.
얼어붙은 것의 저변에는
강물이 흐르고(생동(生動)의 소리로 강물이 흐르고)
흐르는 강물의 소리에
고독의 소가 귀를 세운다.
다들 살아서들 있었는가.
긍정의 눈을 굴리며
소는 푸른 환각의 풀잎을 오늘도 되삭이고 있다.
눈이 뜨는 물상들은
조금씩 빛의 부분을 받으며
검게 옹이진 줄기에 근지러운 부스럼을 쓰고
등 부비듯 바람에 부비고 있다.
신의 쓰레기, 모음출판사, 1964
호루라기의 장난 박남수
호루라기의 장난
□ 1
호루라기는, 가끔
나의 걸음을 멈춘다.
호루라기는, 가끔
권력이 되어
나의 걸음을 멈추는
어쩔 수 없는 폭군이 된다.
□ 2
호루라기가 들린다.
찔끔 발걸음이 굳어져, 나는
뒤를 돌아보았지만
이번에는 그 권력이 없었다.
다만 예닐곱 살의 동심이
뛰놀고 있을 뿐이었다.
속는 일이 이렇게 통쾌하기는
처음 되는 일이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