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의 무작정 자전거 여행기 [서울-부산]
예전에 한때는 "와 ! 자전거에 기어가 달렸네" 하며 신기하게 보던 시절이 있었다.
바로 70년대 중 후반쯤의 일이 되겠는데 정확하게 몇 연도 인가는 기억이 안 나지만
그 해 6월중순경 서울 누님 댁에 놀러 갔다가 어린이 대공원 부근에 살던 조카 사위가
그 당시 나온지 얼마되지 않은 삼천리 5단기어가 달린 자전거를 한 대 가지고 있기에
"어이 ㄱ서방 내가 이 자전거 좀 타고 갈까?" 하니 "예 그러세요" 한다.
조카 사위의 생각으론 어린이 대공원이나 한바퀴 돌아 올 줄 알았던것 같은데...
나는 그 자전거를 타고서 그 길로 부산 쪽으로 방향을 잡아 버렸다.
그 때만 해도 자전거를 아주 잘 타지는 못했고 다만 어린 시절 구멍가게나 아이스케키
통을 들이 받아가며 배운 실력에 간간이 한번씩 타보곤 했던 정도인데 무작정 상경이란
말이 있듯이 무작정 부산까지 가 보자 하고 도로의 이정표 따라 영등포까지는 잘 갔는데
여기서는 어디로 가야하나 생각하다 나름대로 판단하고 계속가는데 이상하게 지나가는
버스가 '서울-인천' 인지라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청소부 아저씨에게 이길이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물었더니 인천가는 길이란다. 아뿔사 모르면 무조건 물었어야 하는데...
가던길을 되돌아 영등포까지 오는데 멋 모르고 갈 때보다는 기분도 상하고 초반부터
맥이빠져서 영등포까지가 엄청 멀게 느껴졌다.
요즘이야 모든 스포츠나 취미 생활이 다양하고 보편화 되어 남의 눈치 볼 것 없겠지만
사실 그 당시 자전거를 타고 영등포에서 부산가는 길이 어디냐고 물었다면 미쳤다고
또라이 취급 당하기 딱 좋았을 것이다.
그래서 안양 가는 길을 묻고 다음에는 수원 가는길 뭐 이런식으로 조금씩 다음 갈 곳을
생각하고 물어 나갔지만 6월의 하지때 내려쬐는 햇볕은 장난이 아니었고 그 해 여름엔
가뭄이 심해 몹시 더웠었다.
안양지나 수원 가는길 쯤으로 생각되는데 끝이 안 보일 정도의 직선 길에 따가운 볕은
내리쬐고 평소에 타지 않던 자전거이다 보니 엉덩이가 아파오고 저어도 저어도 길은
줄어 들지 않아 무척 힘들고 지겨웠던 기억이 난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면서도 능수 버들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겠고 차 조심해가며
앞 만보고 달리니 이윽고 해가 저물고 경부선의 자그만 간이역인 '전의역'이라는 역전
마을에 도착해 여인숙에 들어 업어가도 모르게 골아 떨어졌다.
아침 일찍 달리 할 일도 없으니 또 출발해 얼마를 가니 조치원이 나와 그곳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다시 출발하여 조치원을 지나니 경부선 기차길과는 멀어지고 작은 마을들을
수없이 거치며 유성온천으로 들어서 요란한 간판들을 흘려보며 대전으로 들어 서는데
대 도시는 들어가는 길은 아주 쉬운데 시내길이 찾기 어렵고 빠져 나가는 길은 몇 번을
물어야 겨우 빠져 나갈 수가 있었다.
들판이나 길가의 논에선 모내기가 한창이고 점심때가 되니 여기 저기 논가에 둘러앉아
못밥을 먹는데 그렇게 먹고 싶을 수가 없었지만 가뭄속에 힘겹게 일하다 먹는 점심에
차마 낄 수 없어 침만 꼴가닥 삼키면서 지나쳐야 했다.
대전 지나니 경부선 철길과 다시 만나지고 계속가니 옥천이 나온다.
엉덩이가 아파서 왼쪽만 걸치고 한참을 가다 다시 오른쪽으로 바꾸기를 수 없이 반복
하다 보니 황간이 나오고 뭔가 시원한 걸 먹은 것 같은데 지금의 기억으론 모르겠다.
이윽고 추풍령에 당도하여 해는 떨어지고 숙소에서 세상 모르게 골아 떨어졌다.
구름도 쉬어가고 바람도 자고 간다는 추풍령, 그만큼 높은 곳이다 보니 이곳엔 모기가
없을 정도며 하지때 인데도 아침 기온이 싸아하다.
추풍령이라는 이름값대로 높은 고개라는걸 확인하고는 자전거에 올라 내려가기 시작
하는데 거짓말 조금 보태면 김천까지는 젖지도 않고 오히려 브레이크를 잡으며 가야
하는 그저 먹는 제사밥이나 다름 없었다.
김천의 아침 풍경이 장관이다. 남녀노소 할 것없이 온 시내가 자전거 천국으로 활기에
넘치고 부산이나 대 도시에선 볼 수 없는 진 풍경이었다.
김천 시내를 통과해 금오산이 있는 구미를 지나면 왜관이 나오고 대구로 갈려면 신동
고개라는 엄청 큰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미군부대 옆을 지나 신동고개 입구쯤에 도로
에서 가까운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어 자세히 보니 참외의 선별 작업을 한다.
길가에 자전거를 비스듬히 받쳐놓고 가까이 다가가 참외 100원 어치만 달라고 했더니
모자간에 이상한 듯이 쳐다 본다.
그도 그럴 것이 사흘째 햇볕에 그을러 몰골이 말이 아닌지라 측은해 보였던지 선별해
상품으로선 가치가 떨어지는 참외를 여러개 주신다.
한참을 말없이 먹고 있는데 아들이 묻는다. "어데 가는 길인교" 해서 내가 부산 간다고
하니 놀라면서 "어데서 오는 데요?" 물어 서울에서 온다고 하니 그때까지 듣고만 있던
할머니가 놀란듯 "야 ! 이삼들아 와카노 차비없어 카나?" 하시어 크게 한번 웃었다.
그 당시 서울 갈 때는 아무런 생각없이 그냥 잠깐 놀러 갔을 뿐인데 5단 기어 삼천리
자전거를 보면서 마음이 달라져 그래 이걸 타고 부산까지 한번 가 보는거야 !
그렇게 시작되었지만 당시의 고속버스 요금이 서울-부산 3500원 정도였는데 모든걸
절약해 잠은 여인숙에서 자고 밥은 시장통을 찾아 난장의 긴 나무 의자에 앉아 싸고도
푸짐한 비빔밥을 주식으로 해결하며 마치 노숙자 비슷하게 왔어도 2만원 정도는 들었
던 것 같은데 그 할머니 말이 두고 두고 생각할 때 마다 우슴이 나온다.
아들에게 대구가는 길을 물었더니 저 앞의 신동고개를 넘어야 한다는 것이며 덧붙여
"아저씨 신동고개 넘어 대구 갈라 카다가 잘 몬하모 딴데 가니더" 하며 참인지 농인지
은근히 겁을 준다.
참외 잘 먹고 작별 인사하고 신동고개로 접어 드는데 들판 건너 저만치 경부선 열차가
역이 가까웠는지 기적을 울리며 지나가는게 거의 수평적으로 보인다.
하짓날 작열하는 태양 아래 자전거를 끌고 신동고개를 오르는데 한 구비 돌아가면 또
한 구비 끝없이 이어지는데 온갖 풀벌레며 매미는 귀청이 찢어져라 울어대고 오래전에
포장된 아스팔트길은 좁은 노폭에 뭉턱 뭉턱 뭉치고 패여 열기를 뿜는다.
이리 돌고 저리 돌아도 끝은 안 보이고 얼마나 올라 왔던지 저 아래쪽 까마득이 기적
소리가 들리고 성냥개비 만한 기차가 달려가는게 보인다.
이렇게 올라 오는 동안 지나가는 차 한 대도 없다는 것은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국도는
완전 개점 휴업 상태라 할 수 있겠다.
하도 인적없는 첩첩 산중인지라 대낮인데도 예전엔 이런 산의 길목에서 산적들이 나타
났겠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니 기분이 찜찜한게 별로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맹호가 아니더냐 정신을 가다듬고 누군가 나타나 수상하다 싶으면
얼런 자전거를 되돌려 올라온 내리막길로 달려야지 하는 긴장감속에 비지땀을 흘리며
어느 모퉁이를 도는데 코너에 설치된 원형 반사경에 자전거를 끌고 오는 모습이 보여
내가 왜 저기에 비칠까 하며 자세히 보니 그 곳이 고갯마루이며 반대편 대구쪽에서도
한 사람이 자전거를 끌고 올라오는 것이었다.
희안 하게도 같은 시간대에 나는 왜관 쪽에서 그 사람은 대구 쪽에서 올라온 것이다.
반갑게 인사하고 대구에서 올라 오는 길은 어떻냐고 물었더니 "대구에서 먹은 짜장면이
다 소화됐다."한다.
이제부터 내리막길이라 힘은 덜하지만 위험해서 신경은 몇 배로 쓰인다.
어렵사리 대구 시내를 빠져나와 영천으로 가는 길가의 논에서는 가뭄으로 곳곳에서
양수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영천, 건천을 거쳐 또 하루해가 질 무렵 천년의 고도인 경주 시내에 도착했다.
친절하고 여행에 관심이 많은 여인숙 주인 아저씨와 이런 저런 여행담을 늘어 놓다가
졸리워 골아 떨어졌다.
경주를 출발해 울산으로 향하며 오늘 오후면 부산에 도착하고 지긋 지긋한 자전거를
그만 타도 된다는 생각에 안도감과 약간의 설래임으로 불국사역이며 모화 등을 거치고
울산 시내로 들어섰다.
울산이야 여러번 와 봤기에 시내를 통과하는 길도 문제가 없었고 공업탑을 지나 울산
시내를 벗어날 즈음 군경 합동 검문소가 있는데 꾀죄죄하고 초라한 몰골이 수상했던지
오라고 한다.
신원을 확인하고는 어디 가느냐고 묻길래 부산 간다고 하니 놀라면서 아니 이걸 타고서
부산까지 간단 말이냐고 하더니 또 그럼 어디서 오느냐기에 서울에서 온다고 하니 진짜
깜짝 놀라며 아니 왜 그러냐고 또 묻길래 그냥 한번 그러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했더니
자기네들 끼리 울산 시내에서 검문소까지 자전거로 오는데도 많이 힘들었다느니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잘 가라고 인사를 한다.
검문소를 지나면 문수산 아래 "오복재"라는 제법 큰 고개가 있어 끌고 올라가 내리막을
신나게 달려 내려 오는데 뒷 조그만 짐판에서 덜덜 거리는 소리가 나 확인해 보니 작은
볼트 하나가 빠져 달아나고 없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바람 한번 넣었고 작은 볼트 하나가 빠진 것이 전부이다.
범어사 입구를 지나고 부산 시내로 접어드니 비록 행색은 초라해도 나름대로 해냈다는
자부심으로 가슴이 뿌듯하고 흐뭇해 날아갈듯한 기분 이었다.
집에 와서 보니 사람꼴이 새까맣게 말이 아니고 빨간 티셔츠는 조끼 런닝의 자국따라
소금끼가 허옇고 햇볕에 색이 바래 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집사람 눈치를 슬슬 살피니 기가막혀 말도하기 싫었는지 아예 아무런
반응도 대꾸도 없다.
자전거를 정기 화물로 보내고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켤러니 오른손 엄지가 마비되어
힘을 쓸 수가 없어 유명하다는 곳에서 침도 맞고 몇일을 주무르고 고생하다 보니 언제
부터 인지 모르게 나았다.
왼손은 계속해서 뒷 브레이크를 잡으니 괜찮은데 오른손은 앞 브레이크를 별로 잡을
일이 없어 너무 오랜 동안 꽉 잡은채로 있다 보니 굳어서 마비가 되었던 것 같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때 마침 전국의 대 도시에도 자전거 붐이 일어 사이클에 심취하게
되었으며 동호회를 만들고 무리를 지어 부산 근교는 물론 장거리를 휩쓰고 다니다가
부산 MBC-TV가 주최하는 제1회 전국 아마추어 사이클대회에서 장년부에 참가하여
예선, 준결승전을 통과하여 결승전을 치르게 되었다.
400m 트랙 3바퀴를 도는데 요즘이야 운동장 바닥이 타탄인지 뭔지 깔리어 육상경기
전용으로 쿠션도 좋고 한데 그 땐 흙 바닥인데다 인코스에서 쓸어낸 왕 모래가 아웃
사이드로 몰려 그곳에 바퀴가 빠지면 중심을 잃어 넘어질 수도 있었다.
서울의 '동자 클럽'(동 서울 자전거 클럽)에서 참가한 3명과 부산에서 3명 이렇게 6명이
결승전을 치루게 되었다. 그 무렵에도 서울에서는 아마추어 사이클 대회가 더러 있어
역시 서울 선수들은 경기 경험도 있고 해서 삼각 편대 작전을 펴는데 한 선수가 선두에
서고 두 선수는 1~2코스를 나란히 지키며 달리니 부산 선수 3명이 어찌해볼 수가 없어
2 바퀴까지 그대로 끌려가다가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마지막 남은1/4바퀴 코너를 돌며
100여 미터를 남기고 1m정도 밖으로 빠져 나가며 선두의 세 선수가 안도하고 방심하는
사이 무섭게 대쉬를 했더니 결승선 FINISH라인이 수직으로 내 눈에 보일때 옆 사이클의
앞 바퀴 가장 앞 부분을 순간적으로 봤지만 아슬하게 극적으로 역전에 성공하며 반바퀴
차이로 내가 분명히 먼저 들어 왔으나 판정이 어떻게 날까 신경이 쓰였지만 결국 내가
당당히 1위로 발표되고 서울팀은 2~3위가 되었으니 땅을 칠 일이었을 것이다.
-부산 MBC주최 제1회 전국 아마추어 사이클대회-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다시 생각해도 그때의 내 작전은 정말 대단했고 기가 막혔다.
흑백TV 시절에 20인치 TV를 상품으로 받았는데 세상에 유니폼만 입고 있는 사람에게
시청료(7,200원? 당시 월300원 2년치)를 내라고 해서 이사람 저 사람에게 급하게 빌려
낸것 같고 술값도 좀 들은것 같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다음 해 제2회 대회를 준비하다가 십이륙 사태로 영원히 무산되고
말았다.
그리고 서울에서 '의정부-동두천' 간의 왕복 도로 경기때엔 이런 일도 있었다.
경기 출발전 메가폰으로 주의사항을 말하는데 다들 예사로 듣는다 나 역시 출발 준비로
흥분도 되고 긴장도 되어 상투적으로 하는 말이려니 하고 한 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흘려 버렸는데 이것이 화근이 될 줄이야 정말 몰랐다.
동두천을 돌아서 의정부의 결승선을 생각하며 나머지 1km 정도쯤에서 치고 나가야지
나름대로 작전을 머리속에 그리며 치고 나갈 눈치를 보며 달리는데 저 만치 앞쪽에서
깃발을 흔들기에 응원인줄 알았더니 그기가 결승선이 란다.
아니 이럴 수가 있나 싶어 화가 났지만 경기가 끝이나고 안 사실이지만 출발점의 1km
정도 앞쪽에 결승선이 있다는 얘기를 경기전에 메가폰으로 공지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은 바 선생님 말씀을 빠짐없이 귀담아 듣는 학생이 공부를 잘 할 수 있다는
아주 평범 하지만 지키기 어려운 진리를 깨달았다고나 할까...
그 외도 사이클로 임진각, 진주를 거쳐 남해 상주, 울진 성유굴 등 많이도 돌아 다녔다.
지금도 그 때의 사이클이 고무 제품은 삭았지만 기능엔 이상없이 천장에 거꾸로 메달려
마라톤 때문에 뒷 전에 밀려 있는데 생각난 김에 날 따시면 손을 좀 봐야 할 것 같다.
브레이크를 잡아 버리면 뒷 사람은 100% 넘어지기 때문이다.
참가할 수 없으며 실격 처리된다.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나는 대로 적은 재미없이 긴글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