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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201 (월)
- 신라의 불교와 선덕여왕 ① : 불교 전래와 법흥왕 - 역사이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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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구분을 “역사이야기”라고 하였습니다만 단순히 역사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모두 다 아시는 내용이어서 여기서는 이미 알려진 역사를 불교적인 측면에서
본 내용을 다루는데 이런 관점이 “선덕여왕”에 대하여 이해하기가 더 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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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처음 출현하였을 때에는 “깨달음” 즉, 삶과 죽음이 서로 다른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달아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목표이었으므로
“석가모니부처님”을 “먼저 깨달은 스승님” 또는 “성인(聖人)”으로 생각하여
아직 신격화(神格化)하지는 않았는데 따라서 “불상(佛像)”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부처님 열반 후 약 600년이 지난 다음에 “대승불교(大乘佛敎)”가
일어나고 이를 이념의 기반으로 하여 당시 불교가 성행하였던 인도 서북쪽의
“간다라“와 인도 중부지방에서는 동쪽의 진(秦)나라, 한(漢)나라와 서쪽의 그리스,
로마제국을 연결하는 “실크로드(Silk Road)"의 중심이면서 세계무역을 주도하는
상업제국으로서 불교가 점차 세계적인 성격을 띠어가며 부처님과 보살의 힘에 의지
하려는 타력신앙(他力信仰)으로 발전하며 예배대상으로서의 “불상(佛像)”이
출현하게 됩니다.
* 그 이전에는 부처님이 계신 곳을 “빈자리”나 “발자국” 등으로 표현했습니다.
* 소승불교(小乘佛敎)와 대승불교(大乘佛敎) :
사실 이 내용을 설명하려면 책 한권이 되는데 오늘은 간략하게 말씀드립니다.
- 소승(小乘)과 대승(大乘) : “소승”은 “1인용 수레” 또는 “작은 수레”라는 뜻인데
적은 수의 사람이 탈 수 있다는 뜻이고 ”큰 수레에 많은 사람이 함께 탈 수 있다“
라는 뜻이 ”대승“입니다.
- 소승불교 : 우리는 통상 "북방불교“를 ”대승불교“, ”남방불교“를 ”소승불교"라고 알고
있는데 사실 “소승불교”라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없습니다. 대승불교가 생겨나면서
“대승”을 믿는 흐름이 이를 믿지 않는 다른 불교의 흐름을 그렇게 불렀는데 소위
“남방불교”는 교학사상이나 수행의 전통 및 계율의 준수 등에서 보수적인 경향을
나타내고 있는데 어찌 보면 “초기불교” 또는 “근본불교”의 전통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이쪽 부류의 불교신자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정통이라고 자부하고 있는데 나라별로 보면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 등 주로 남쪽나라에서 성행하고 있어서
“남방불교”라고 구분하는 것입니다. 이 부류의 불교를 일반적으로 억지로 설명하면
자력(自力)수행에 의하여 몇몇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폐쇄적인 면이 있다고 봅니다.
- 대승불교 : 통상 “북방불교”라고 하여 인도의 불교가 실크로드를 따라 북쪽으로 전해진
불교로서 티벳, 중국, 우리나라, 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이긴 하지만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베트남의 불교를 말합니다. 그러나 각 나라마다 독특하게 발전하여 지금 우리가
보듯이 서로 다른 형태의 믿음을 보여주는데 베트남의 경우 토착적인 의미가 강하여
마치 우리나라의 “원불교”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대승사상”은 대략 기원전 1세기경에 나타났다고 하는데 그 배경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BC 334~BC 325)"과 중국 한(漢)나라의 “무제(武帝 : 재위 BC 140~BC 87)의
서역경영(西域經營)“에 따른 ”실크로드“의 형성 등이 세상에서 자기들 인도대륙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왔던 인도인들에게 서방세계와 동방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어서 무수히 많은 다른 세계와의 공존이 우주의 섭리라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불교의 측면에서는 석가모니부처님과 동등한 부처님이 다른 세계에도 얼마든지
출현할 수 있으며 모든 부처님의 말씀이 다 진리라는 합리적인 사고 속에서 보다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교리체계를 확립해 갑니다.
따라서 공간적인 개념으로는 석가모니부처님 이외에도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
에는 무수한 부처님과 보살님이 있으며 또한 시간적인 개념으로는 현재, 과거, 미래의
삼세(三世)에도 또한 그에 맞는 부처님과 보살님이 존재한다는
“삼겁삼천불설(三劫三千佛說)”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합리적인 사고는 종전의 폐쇄적인 생각에서 주변의 일체중생을 모두 큰 수레에
태워 함께 해탈시키려는 뜻의 “대승사상”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여기서 “보살(菩薩)”의
개념이 중요하게 등장하게 됩니다.
즉, 부처님도 전생에는 “보살”이었다는 것을 알고 자신들도 현실생활에서 여러 가지
선행을 쌓아 가면 언젠가는 부처님이 될 수 있으며 이 정신이 부처님의 본래의미라고
사상적인 발전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보살”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수많은 중생들을 모두
큰 수레에 태우고 깨달음의 경지에 함께 도달하겠다는 서원(誓願)을 세운 분으로 이렇게
하여 자연히 사람들은 보살의 초월적인 능력에 귀의하려고 하여 부처와 보살이
예배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불상”이 생겨나게 됩니다.
# 그런데 우리나라 사찰에 가보면 여자신도들은 모두 “보살”이라고 부르고 남자신도들은
“처사”라고들 부르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 듯 들리기도 하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이 호칭은 우리나라에만 있다고 하는데 불교 쪽 설명을 들어도 좀 애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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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말씀드릴 이야기의 제목을 “신라의 불교와 선덕여왕”이라고 한 이유는
그동안 신라의 “성골-진골”에 대한 오해, “선덕여왕을 둘러싼 미스터리“ 등에
대하여 “불교적인 측면”에서 보려는 뜻입니다. 최근에 모 방송국에서 “선덕여왕”
드라마로 큰 인기를 끌면서 몇몇 역사적 사실이 약간 왜곡된 측면이 없지 않은데
그것은 드라마로서 전개를 하기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보고 불교가 왕성하게
발전했었던 당시의 신라에 대하여 살펴보면 “선덕여왕”이 어떻게 왕이 되었는가를
이해하기가 좀 낫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내용이 너무 재미있어서 이야기를 열심히 그리고 길게 썼는데 세 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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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불교와 관련된 각 나라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고 “신라의 불교”에
대하여는 별도로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 인도에서의 불교의 소멸
불교가 일어난 인도에서는 지금은 불교를 볼 수가 없는데 그 이유를 크게 보면
두 가지가 있는데 내적인 요인은 종전 인도의 사상이었던 “바라문교”가 민간의
토속적인 신앙을 흡수하여 “힌두교”로 재편되면서 민중들의 상당한 지지를 얻게
되었는데 석가모니부처님의 이성과 합리주의에 기초를 둔 청정한 수행이라는
특성이 인기를 잃었고 여기에 외적으로는 AD 10세기경부터 이슬람교가 침입하여
이슬람왕국을 세우고 “한손에는 코란, 다른 손에는 칼”이라는 방침에 따라
이슬람교의 타종교에 대한 박해와 회유는 엄청난 것이었는데 불교는 상당히 많은
사원이 약탈, 방화, 파괴되고 수많은 승려들이 살해당하는 등의 세계역사상
유례없는 참화를 입고 인도대륙에서 소멸됩니다.
# 1648년 무굴제국 때 세워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건축물인 “타지마할”도 이슬람
왕에 의하여 세워졌지요. ---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그리고 2007년
“신(新) 세계7대불가사의”로 지정되었습니다.
-- 타지마할
2. 불교의 중국 전래
불교역사에서는 중국 후한 명제 영평(後漢 明帝 永平 AD 58~75) 연간에 인도의
전도승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 불상과 불경을 흰말의 등에
싣고 와서 전하였다고 하는데 이 시기에 대해서는 학자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말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중국불교는 “불상”을 예배대상으로 하여 출발하게 됩니다.
* 전에도 잠시 말씀드렸지만 ”달마대사“는 중국에서 불교가 한창 성행하였던
AD 520년경 ”선(禪)“을 골자로 하는 불교를 중국에 전하며 또한 융성케 합니다.
3. 우리나라의 불교전래
자세히 다루려면 너무 장황하니까 고구려와 백제에 대하여는 기록에 의한 내용만
간략히 말씀드리고 신라에 대하여는 조금 더 자세히 살펴봅니다.
(1) 고구려에의 불교전래
우리가 학교 때 배운 대로 고구려 제17대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인 AD 372년
6월에 중국 북부에 자리 잡고 있던 나라인 “전진(前秦)”의 왕인 “부견(符堅”이
“순도(順道)”라는 스님으로 하여금 불상과 경전을 보내와서 공식적으로 불교의
전래가 이루어집니다. 이어서 2년 후에 “아도(阿道)”라는 스님이 왔으며
그 이듬해에는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라는 최초의 사찰이
세워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국가 간의 공식적인 전래이고 그 이전에 이미 불교가
들어와 있었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2) 백제에의 불교전래
백제 제15대 침류왕(枕流王) 원년즉, AD 384년 9월에 중국 동진(東晋)으로부터
인도 승려인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온 것이 처음입니다. 그때 왕은 교외에까지
나가서 스님을 맞이하고 이듬해 2월에는 “한산(漢山)”에 절을 짓고 열사람의
스님을 출가시킵니다,
(3) 신라에의 불교전래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것은 제23대 법흥왕(法興王) 14년, 즉 AD 527년
“이차돈(異次頓)”의 순교가 있은 직후라는 설이 지배적입니다.
신라에 대하여는 다음의 “신라의 불교”라는 항목에서 다시 다루겠습니다.
* 신라왕의 호칭은 처음에는 정치적 지도자라는 뜻의 제1대 “박혁거세”의
“거서간(居西干)”으로 시작하여 다음에 제2대의 “남해” 때는 종교적 의미로서 제사장
(祭祀長) 이라는 뜻의 “차차웅(次次雄)”으로 바뀌었고 제3대 “유리”로부터 제18대
“실성”까지는 앞의 두 의미를 합하여 연맹장(連盟長)의 뜻인 “이사금(尼師今)”으로
발전하였는데 이 호칭은 다시 제19대인 “눌지”에서 대군장(大君長)의 뜻을 가진 “마립간
(麻立干)”으로 바뀌었는데 이 호칭은 제22대 “지증”까지 계속되다가 나라가 중앙집권화
하면서 제23대 법흥왕으로부터 “왕(王)”으로 불리게 되어 이후 계속됩니다.
4. 우리나라의 불교
- 다음은 불교연구자의 의견입니다.-
중국을 통하여 전래된 우리나라의 불교는 원래의 전승을 충실히 수용하면서도
나름대로의 독창성과 주체성을 발휘하여 매우 독특한 발전을 이룩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신라의 “불연국토설(佛緣國土說)”이 있는데 이의 의미는 신라는
석가모니부처님 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과거불이 설법하셨던 터가 그대로 남아있는
본래부터 부처님과의 인연이 깊은 땅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교가 단지 수입된 종교가 아니라 민족의 주체적인 종교로까지 승화
시킨 질 높은 신앙의 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나라 불교는
“화회소통(和會疏通 = 줄여서 ‘회통’-會統)”된 ”통불교(統佛敎)“로서 서로간의
논쟁을 일삼는 중국의 종파불교를 계승하면서도 그들 사이의 화해와 융합을
시도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회통“의 전통은 ”원효(元曉)스님“의 교학사상에
나타나는데 원효스님은 “화쟁(和爭)의 논리”를 내세워 대승과 소승의 수많은
경론들을 일관된 논지로 해석하고 정리하여 중국불교의 한계를 극복한데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같은 전통은 다시 고려시대 “지눌(知訥)스님”의 ”정혜쌍수
(定慧雙修)“와 조선시대 ”휴정(休靜)스님“의 “교선일치(敎禪一致)” 사상으로 이어져
오늘날 우리나라 불교가 통합불교로서 선(禪)과 교(敎), 염불(念佛), 진언(眞言) 등을
별다른 무리 없이 아울러서 수행하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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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신라의 불교
가. 신라의 지역적 특성
지금도 그렇지만 백두산에서 태백산으로 다시 속리산으로 그리고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높은 산맥들은 신라를 따로 떨어진 별도의 구역을 만들어서 교통이
불편하니 자연히 문화의 전파속도가 늦을 수밖에 없어 외래문화의 충격을
상당기간 동안 받지 않고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자연 이 지역은 보수성과
배타성이 강화되어서 갈수록 외래문화의 유입을 꺼리게 되었습니다.
한편 고구려와 백제는 한사군(漢四郡) 설치나 중국과의 교류로 불교와 유교문화의
충격을 받아 세계화되어 가고 있을 때 이 지역만은 이를 외면한 채 전통문화의
순수성을 지켜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성장과 인접국가의 문화성장은 더 이상 외래문화유입을 거부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제19대 눌지마립간 시대부터 불교의 전도승들이 고구려로부터
들어와서 신라의 문호를 두드리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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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에는 신라왕들을 기준으로 살펴봅니다.
나. 제19대 눌지마립간(訥祗痲立干 : 재위 417~458 = 42년) 시대
-“묵호자(墨胡子)”라는 승려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 = 지금의 경북 선산)”
으로 들어와 “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렀다-라는 기록이 “삼국유사”의 눌지마립간
시대에 나오는데 아직은 배타적인 신라가 이를 용납하지 않았던 듯, 묵호자는
모례의 집에 굴을 파고 숨어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눌지마립간은 이미 불교에 대한 지식이 있었으리라 믿어지는데 그 사유는
신라 제18대 실성(實聖)마립간 11년(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 22년 = 412년)에
“눌지”의 둘째아우인 왕자 “복호(卜好)”가 고구려에 인질로 갔다가 “눌지” 2년
(고구려 제20대 장수왕 6년 = 418년)에 돌아오는데 “복호”는 6년 동안 당시
신지식이었던 불교와 충분히 접촉이 있었으리라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다. 제20대 자비마립간(慈悲痲立干 : 재위 458~479 = 22년) 시대
“자비”시대에 이미 왕실에서는 불교에 대한 이해가 많이 확대된 것으로 보는데
“자비(慈悲)”라는 왕의 호칭이 불교식이라는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라. 제21대 소지마립간(炤知痲立干 : 재위 479~500 = 22년) 시대
“소지”는 “炤知”라고도 쓰고 또는 “조지(照知)마립간”이라고도 부르는데 여기서
“소(炤)“와 “조(照)”의 의미는 모두 “밝다, 비치다, 비추다”로서 그 뜻대로 우리말로
“비처왕(毗處王 - 이는 우리말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데
이 “비처”가 “부처”라고 보는 견해도 있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름답게 왕궁 안에 불전(佛殿)을 두고 불교의식을 맡아 집전하는
분수승(焚修僧)도 있었던 모양으로 이는 “삼국유사”에 “사금갑(射琴匣) =
거문고집을 쏘다”라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생략하고 이 내용은 보수 세력들이 불교의 공식전파를 저지하려고
꾸민 음모라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마. 제22대 지증마립간(智證痲立干 : 재위 500~514 = 15년) 시대
“지증”의 왕호 역시 “지혜(智慧)로 증득(證得)한다”라는 의미의 불교식 표현인데
본래의 왕호는 “지철로(智哲老)” 또는 “지대로(智大路)”, “지도로(智度路)”라는
신라 고유의 말로 된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아직 이 말들의 정확한 의미는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왕의 몸이 보통사람들과 달라서 짝을 구하기가 어려웠다고
하여 이와 관련된 의미였으리라고 만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이름을 불교식 한자로 세련되게 표현하여 “지증”이라고 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지증”은 등극할 때 이미 64세였는데 재위 15년 만에 79 세로
돌아가고 큰아들인 “법흥왕”이 뒤를 잇습니다.
바. 제23대 법흥왕(法興王 : 재위 514~540 = 27년) 시대
법흥왕이 즉위하는 514년경에는 중국문화권 전체가 불국토화(佛國土化)하여
불교발전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로서 북위(北魏)의 선무제(宣武帝 : 재위 499~515),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효명제(孝明帝 : 재위 515~528)의 섭정을 맡았던 영(靈)태후
호(胡)씨 등은 선무제의 부모인 효문제(孝文帝 : 재위 471~499)를 기리기 위하여
엄청난 규모의 석굴을 만들어 불상을 만들고 250미터 높이의 9층 목탑을 만들며
또한 남조(南朝)의 양(梁)나라 무제(武帝 : 재위 502~549 = 달마대사와 여러 가지 일화를 남김)는
스스로 “보살제(菩薩帝)”를 자처하면서 조회(朝會)를 불교의식으로
거행하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웃나라인 백제도 제26대 성왕(聖王 : 재위 523~554) 5년인 서기 527년
에는 충남 예산에 지금도 남아있는 “예산사면석불(禮山四面石佛) = 보물 제794호”를 만드는 등
주위가 온통 불교의 분위기였습니다.
* 예산사면석불 : “성왕”은 아버지인 “제25대 무녕왕(武寧王 : 재위 501~523)”의 업적을
기리고 고구려에 빼앗긴 옛 땅을 회복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로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 백제의 수도이전 : 백제 제21대 개로왕(蓋鹵王 : 재위 455~475)이 고구려 장수왕과의
싸움에서 크게 패하고 잡혀서 살해당하며 그때까지 유지했던 제해권(制海權)을 빼앗기자
그 아들인 제22대 문주왕(文周王 : 재위 475~477)은 수도를 “한성(漢城)”에서
“웅진(熊津)”으로 옮기고 후일을 도모했으나 귀족세력인 병관좌평(兵官佐平) 해구(海仇)
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이 이어지는데 그 후 제25대 “무녕왕”이 제해권을 되찾았지만
제26대 “성왕(聖王)”은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계속 패하고 한편 신라가 법흥왕19년
(532년) 오랜 동맹관계에 있던 “금관가야”를 합병하자 가야를 잃고 한편으로는 또 다른
동맹인 일본과의 해상권에 위기를 느껴 성왕16년(538년) ”사비(泗沘)“로 수도를 옮기게
되나 ”성왕 32년(554년) = 신라 진흥왕 15년“ 신라와의 “관산성(管山城 : 지금의 옥천-
沃川)” 전투에서 “김무력(金武力-김유신장군의 할아버지)“등에게 크게 패하여
피살되는데 이때 호종했던 좌평 4인과 장졸 29,600여인이 함께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그래서 백제는 두 번이나 왕이 다른 나라에게 잡혀죽는 비극을 맞이합니다.
--- 그보다 앞서 371년 백제 최전성기 시대의 왕인 제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 재위
346~375)“는 평양성 싸움에서 고구려 제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 : 재위
331~371)“을 죽인바 있는데 이렇게 하여 백제는 고구려왕 한사람을 죽이고
백제 스스로는 고구려에게 “개로왕”이 잡혀죽고 또 신라에게는 “성왕”이 비참하게
죽어서 고구려와 신라가 모두 백제의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讎)가 됩니다.
그보다 앞서 백제 제25대 무녕왕(武寧王 : 재위 501~523) 21년인 서기 521년
고구려로부터 제해권(制海權)을 되찾고 11월에 중국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내게
되자 법흥왕(8년)도 이편에 딸려 사신을 함께 보냄으로서 국제사회에 처음 얼굴을
내밀게 됩니다. 이때 사신들이 백제와 양나라를 둘러보며 왕성한 불교문화에
큰 충격을 받고 돌아와 보고를 하자 법흥왕은 반드시 자기 대에 불교를 공식 수용
하여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하겠다는 욕망을 가지게 되며 한편으로는
외증조부(外曾祖父)이자 종증조부(從曾祖父)인 “눌지”이래의 김씨 왕들의
숙원사업을 이루기로 합니다.
그래서 법흥왕이 불법을 일으키기 위해 크게 가람을 세우고 불상을 세우려 하자
“공알(恭謁)” 등 배타적이고 보수성이 강한 신라 사람들이 크게 반발합니다.
“이제 승도(僧徒)를 보니 어린애처럼 머리를 깎고 이상한 옷을 입었으며 의논하는 것이
기이하여 일상(日常)의 도가 아닙니다. 이제 만약 그것을 쫓는다면 아마 후회가 있을 듯
합니다. 신등은 비록 중죄를 받는다 해도 감히 조칙을 받들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요사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편안치 않고 더하여 이웃나라 군사들이 국경을 침범하여
전쟁이 끊이지 않는데 어느 겨를에 백성들을 부역시켜 쓸데없는 집을 짓겠습니까.“
이에 왕은 좌우신하들이 믿고 따르지 않음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법흥왕 14년
(527년) 가까운 신하이며 26세의 청년으로 “내사사인(內史舍人)”직에 있던 “이차돈
(異次頓 = 거차돈-居次頓 이라고도 하며 = 또는 박염촉-朴厭觸 이라고도 함)“이
왕의 큰 뜻을 돕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폐하가 만약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신다면 신이 거짓왕명으로 맡은 관청에 전하기를 왕이
불사를 시작하려한다고 말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하면 뭇 신하들이 반드시 간할 터이니
짐은 이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는데 누가 왕명을 바꾸었느냐 하십시오. 그들이 마땅히 신의
죄를 탄핵할 터인데 만약 그렇게 아뢰기만 한다면 저들은 반드시 굴복할 것입니다.“
이에 왕이 이르기를,
“저들이 이미 사납고 거만한데 비록 경을 죽인다 해도 어찌 굴복하겠는가.”
이에 박염촉(이차돈)은 말합니다.
“큰 성인의 가르침은 천신(天神)이 받드는 바이라 만약 소신을 벤다면 마땅히 하늘과 땅의
이변이 있을 것입니다. 과연 이변이 일어난다면 누가 감히 어기고 오만하겠습니까.”
그리고 또 주위를 향해 말합니다.
“나는 불법을 위해서 형벌을 받으러 나가니 부처님이 만약 신통력이 있다면 내 죽음에
반드시 남다른 일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이차돈의 목을 치자 자른 곳에서 피가 솟구치는데 빛이 희어서 젖과
같았고 높이가 수십 길이었으며 그리고 머리가 날아가 금강산 꼭대기에 이르러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날이 새까맣게 어두워지고 하늘은 기묘한 꽃으로 꽃비를
내리며 땅은 크게 흔들려 움직이니 임금과 신하 및 백성들이 모두 위로는 하늘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아래로는 이차돈의 죽음을 슬퍼하여 통곡합니다.
그래서 이차돈의 목이 떨어진 곳에 남은 몸과 함께 예법에 맞게 장사를 지내고는
임금과 신하들은 다음과 같이 맹서합니다.
--- “지금 이후부터는 부처님을 받들고 스님께 귀의하겠습니다.
(자금이후 봉불귀승 - 自今而後 奉佛歸僧)“ ---
그리고 후에 이 자리에 “자추사(刺楸寺)‘를 세워 기리게 됩니다.
* 여기서 “금강산”은 현재 경주시 동천동의 “소금강산“으로 전해지는데 ”자추사“는 지금의
소금강산 지구에 있는 “백률사(栢栗寺)”로 보고 있으며 국립경주박물관에는 이 순교의
모습을 새긴 ”백률사육면석당비(栢栗寺六面石幢碑)“가 남아있습니다.
또한 백률사에는 통일신라시대 때에 조성된 국보 제28호인 ”백률사금동약사여래입상“이
있었는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보존중이며 이는 같은 박물관에 보존중인
“불국사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호)”와 ”불국사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와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불교가 공인이 되자 지금까지 어떤 외래문화의 충격도 받아보지
못했던 신라는 오히려 백지에 물감이 스며들듯 매우 빠른 속도로 불교화가
진행됩니다.
법흥왕 16년(529년)에는 살생을 금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고 동 21년(534년)에는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는 사찰의 건설이 시작되며 왕 자신은 스스로 출가하여
“법공(法空)”이라는 법명으로 이 절에 주석하게 되며 또한 왕비도 “영흥사(永興寺)”
라는 절을 짓고 비구니가 됩니다.
이는 대체로 중국 양나라 무제의 “사신(捨身 : 수행과 보은을 위하여 속계에서의
몸을 버리고 불문에 들어감)“을 능가하는 더 큰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신라가 불교의 공식수용에 의하여 국제사회로 웅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자 법흥왕은 우선 해상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하여 동 19년(532년)
지금의 김해지방을 근거로 하여 해상왕국을 이루고 있던 “금관가야”를 합병하여
국세를 두 배로 늘리고 해양왕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며
동 23년(536년)에는 독자 연호(年號)를 세워 “건원(建元)”이라 일컫게 됩니다.
이에 백제의 “성왕”은 동 16년(538년 = 법흥왕 25년) 수도를 “사비(泗沘)“로
옮겨 이에 대비하게 됩니다.
* 당시 “금관가야(金官伽倻)”의 마지막 왕은 “구형왕(仇衡王 : 재위 521~532)”이었는데
시조인 ”김수로왕(金首露王)”으로부터의 제10대왕이었으며 왕비인 “계화(桂花)”와
세 아들인 “노종(奴宗)”, “무덕(武德)”, “무력(武力)”과 함께 나라의 재산과 보물을 가지고
항복합니다. “구형왕”은 “구충왕(仇衝王)”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아마 한자의 오기인
것으로 보이고 또는 나라를 양위하였다하여 “양왕(讓王)‘이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하여 “금관가야”는 AD 42년~AD 532년의 491년간으로 사라집니다.
그리고 당초 6가야에서 “대가야(大伽倻)--지금의 경북 고령지방”가 진흥왕 23년(562년)
신라에 합병됨으로서 가야는 모두 끝이 납니다.
이들 금관가야의 왕족은 신라로부터 “상등(上等)”과 “각간(角干)”의 벼슬과 옛 가야의
땅을 식읍(食邑)으로 받고 “신김씨(新金氏)”라 하여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구형왕”은 죽을 때 “나라를 구하지 못한 몸이 어찌 흙에 묻히겠느냐. 차라리
돌로 덮어 달라”고 해서 현재도 돌무덤으로 남아있습니다.
또한 셋째아들인 “무력”은 아들인 “서현(舒玄)“과 손자인 ”김유신장군(金庾信將軍)”과
함께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는데 “무력”만 해도 “관산성” 싸움에서
백제 제26대 성왕과 좌평 4인과 수많은 군사를 무찔러 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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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률사 육면석당비(栢栗寺 六面石幢碑)
--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栢栗寺 金銅藥師如來立像) = 국보 제28호
-- 예산 사면석불(禮山 四面石佛) = 보물 제794호
-- 금관가야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
-- 구형왕릉이라고 전해오는 돌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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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왕의 이름은 “원종(原種)”, 왕비는 “보도(保刀 또는 파도-巴刀)부인 박씨”이며
키가 7척이면서 마음이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고 하는데 나라를 중앙집권화
하면서 “왕(王)”이란 칭호를 제일 먼저 부르게 되었고 또한 “불교의 공인”
이외에도 “연호(年號)”를 세우고 “율령(律令)”을 내려 “공복(公服)”과
“상례(喪禮)”를 제정하고 “위계(位階)”를 명확히 하여 “상대등(上大等)”제도를
만들었고 또한 “병부(兵部)”를 설치하며 나라의 땅을 많이 넓혀 고대국가의 면모를
확실히 자리 잡게 한 왕이었는데 재위 27년만인 540년 돌아가고 그의 외손자이자
조카가 되는 “진흥왕”이 자리를 잇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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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 이고 다음 편에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을 살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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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첫댓글 하이코, 다 읽기도 숨이 찹니다, 샘! 이게 삼분의 일이라굽쇼? 휴.... 어째튼 아는 얘기도 있고, 모르는 얘기도 있고.. 재미 있군요. 무심하게 대승, 소승하고 마구 외웠었는데, 수레 탈 승이라니,, 이해가 쏙쏙 되는 군요.
재미있게 읽으셨으면 제가 고맙지요. 그런데 앞으로 올릴 두번째의 "진흥왕" 이야기와 세번째의 "선덕여왕" 이야기가 지금 올린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으니까 계속 보시지요. 사실 불교에 대한 용어나 이야기들은 언뜻 생각하면 다 아는 것으로 생각하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모르는 것이 참 많습니다. 깊숙한 이야기는 저도 잘 모르겠고 우리나라가 불교와 워낙 관련이 많으니 일반적으로 그냥 알아두어서 나쁘지 않을 만한 이야기를 앞으로도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