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은 세계에서 크리스마스를 가장 오래, 가장 성대하게 치루는 나라로 유명하다.
12월 16일 부터 12월 24일 까지 하루 두 차례에 걸쳐 지켜지는 성탄 미사,
‘심방 가비’(Simbang Gabi)는 그들의 신앙에 대한 은근한 자부심이 되기도 한다.
각 바랑가이는 예수의 마굿간 탄생을 재현하는 연극(Punuluyan)을 하느라 도로를 제한하고
퍼레이드를 하는 통에 12월 24일 저녁, 잘못 움직였다간 꼼짝없이 발이 묶이기도 한다.
‘노체 부에나’라는 말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의 역사적인 산물로서
‘ 크리스마스 이브 ‘를 뜻하는 스페인語이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뿔뿔히 흩어져 제각기 생활해야 했던 가족들과 친척들이 모두 모였으니
결코 빠질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바로 즐길 ‘음식’이다.
그런 연유로 ‘노체 부에나’는 그 날 먹을 음식을 상징하는 말이 되기도 한다.
진작부터 수퍼마켓의 한 코너에는 ‘Queso de bola’라는 빨간 포장지로 쌓인 야구공의 두 배 크기만한 치즈가
비치되어 있다.
필자의 입 맛이 너무 촌스러운 탓인지 비싼 것 보다는 가격이 싼 것이 입맛에 맞는다.
비쌀수록 블루 치즈의 맛과 향에 가깝다.
몇 해 전 누군가로 부터 아주 비싼 ‘Queso de bola’를 선물받았는데 빨간 촛농같은 껍질을 벗기고
한 조각 썰어 입으로 넣자 감당할 수 없는 향과 맛이 난다.
주변에 함께 했던 한국인들도 맛을 보고는 모두 손사레를 친다.
당연히 이 치즈볼은 가정부의 몫으로 돌아 갔는데 가뜩이나 큰 눈이 믿기지 않은 이 횡재에
타시어(안경 원숭이)의 눈만큼 커진다.
이 치즈볼과 스파게티,후라이드 치킨, 햄, 돼지 바베큐 스틱, 엠보띠도, 상하이 룸피아, 비빔카등이
그 날의 주 메뉴이다.
필자가 어렸을 적 통닭은 비교적 귀한 음식이었다.
텔레비젼과 보온 밥통이 이제 막 보급되는 시기에 전자 대리점을 하시던 아버지덕에
중상층의 생활은 할 수 있었는데도 그 당시 통닭을 먹는다는 것은 일상적인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교회를 다녔던 이유로 크리스 마스 이브에는 칠면조는 아니더라도
통닭정도는 먹을 수 있는 것을 당연지사로 여겼던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 어느 크리스 마스 이브날,
엄마는 좀 있으면 통닭을 먹을 것이니
저녁 밥을 너무 많이 먹지 말라고 하셨다.
당시 경제적인 실권을 아버지가 모조리 장악하고 계셨던 것을 익히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아버지가 퇴근하시면서 사오신다는 언질이 엄마에게 이미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텔레비젼을 통해 성경에 관련된 헐리우드 영화를 보며(‘십계’였던가.. ?)
아버지를 기다렸는지 아니면 통닭을 기다린 것인지 확실한 기억은 없지만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졸음도 오고 저녁 식사때 정량을 다 먹지 않고 비워 둔 배는 출출함을 호소했다.
이미 여름 성경 학교를 통해 영화의 결말을 알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곧 영화는 결말을 향해 치다를 것이고
이제 영화가 끝나면 애국가가 울리면서 우리는 곧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그 누구 한 사람도 꺼내는 얘기없이 바깥에서 들려올 인기척에 모두 귀기울이고 있었을 뿐이다.
이윽고 영화는 끝나고 제작진들의 이름이 자막으로 나올 즈음
엄마는 마치 무슨 큰결심을 내리신 듯 아무 말없이 안방에서 부엌으로 통하는 쪽문으로 나가셨다.
낙담한 표정으로 애국가를 건성으로 청취하던 우리들에게 엄마는 삶은 달걀 여섯 개를 가지고 오셨다.
‘한 명당 두 마리씩이야’
아버지께서 통닭 한 마리를 사오시면 항상 부족한 한 쪽의 닭다리를 놓고 쟁탈전을 벌려야 했던 우리 삼남매는
그 날 푸짐하게 어떠한 다툼도 없이 두 마리씩을 먹을 수 있었다.
엄마의 그 말씀에 웃었는지 울었는지 지금 전혀 기억은 없지만
가난했던 ‘노체 부에나’는 결코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어 놓을 수는 없었다.
어린 시절, 엄마는 우리에게 많은 크리스 마스 선물을 주셨다.
크리스 마스 이브, 크리스 마스用 큰 양말을 문고리에 걸어 두고 자면
어김없이 찾아 오는 아침과 함께 양말에 넘쳐 있는 선물을 만날 수 있었다.
쵸코렛 한 박스를 선물받았던 나는 그 이후로 이렇게 달콤한 크리스 마스 선물을 받은 기억이 없다.
메리 포핀스라는 영화도 개봉관에서 볼 수 있었다.
잠 들어 있는 우리 삼형제를 깨워 보여 주셨던 ‘오즈의 마법사’와 ‘사운드 오브 뮤직’은
지금까지도 나의 정서에 큰 영향을 끼치게 만들어 주셨다.
이제는 엄마의 양말을 찾아 내어 그 곳에 찢어질 정도로 넘쳐나는 자식의 사랑을 담아 드리고 싶다.
성탄의 의미가 "이웃 사랑'에 있는 것이라면
‘노체 부에나’는 어떤 특정 종교인들의 잔치만은 결코 아니다.
냉동고와 냉장고..이젠 김치 냉장고에 까지 꽉 차있어 더 이상 다른 음식을 넣을 수 없는 것들을 꺼내어
가난한 이웃과 나누는 의미에서의 축제이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아이들에게도 동전대신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나눠 주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안티폴로’라는 곳은 산악지대로 많은 빈민가들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이 곳에 있는 ‘깜뎀’이라는 맛있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소개하며 글을 마치겠다.
홍 성욱 선교사(0918-211-7034) 부부에 의해 세워진 이 자립 경제 공동체는
빈민들에게 자립심과 자존심을 심어 주어 ‘받는 者’에서 ‘주는 者’로 변화시키며
유치원(월 50페소, 고아나 극빈자는 무료, 우유 급식),무료 병원 운영, 여자 기숙사 운영등을 하고 있다.
(물론 이 외에도 많은 선교사님과 자원 봉사자들에 의해 사랑의 손 길이 필요한 필리핀 곳곳에
이웃 사랑이 실천되고 있다. 가난의 한 복판, 그현장에서 고생하시는 많은 분들의 노고에
지면을 빌어 감사를 전한다.)
성탄의 종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지고,
아름다운 화음의 캐롤이 거리를 장식하는 ‘
노체 부에나’의 맛있는 음식들을 그들과 함께 나누며
한결 더 정겹게 느껴지는 이 날의 인사를 나누어 보자
‘메리 크리스 마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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