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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첩기행(2) / 김병종
예의 길을 가다.
( 밑줄 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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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종의 화첩기행』은 이름 없이 스러져간 예인들을 되살려내어
각박한 삶에 메마른 독자들의 가슴속 희망을 주었다.
그림과 글이 어우러진 에세이로 그의 인문학적 소양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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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영과 목포 / 이난영의 목포는 울지 않는다.
부르다보면 어느새 마알간 슬픔의 굽이를 돌아 나와
힘이 되어주던 노래.
민초들에게 삶의 뒷심이 되어주던 노래.
그래서 가요이면서도 남도창 같은 느낌을 주는 겨레의 노래.
유달산은 목포사람들에게는 어버이 같은 산이다.
목포는 호남선 열차가 싣고 온 쌀을 부려놓으면 고베로 실어가곤 하던
거점이어서 부두 노동자들이 많았다.
난영의 아버지도 부두 노무자.
유달산을 사이에 두고 산 아래에는 일본과 조선의 부자들이 살고
산비탈에는 부두 노무자들이 많이 살았다.
가난에 지쳐 그녀가 열 살 때 엄마는 식모살이로 떠나버리고
난영은 조선면화공장에 나가 솜 타는 일을.
어느날 이난영은 제주로 식모살이 간 어머니를 찾아가고
거기 일본인 집에서 난영은 허드렛일을 도우며 혼자서 노래를 부르다가
집 주인의 눈에 띄어 그녀 나이 열 여섯에 삼천리 가극단 무대가수가 된다.
이즈음 조선일보사가 한 가지 독특한 기획
일제의 탄압 속에 흐트러진 민족정서를 일으켜 세우기 위한 문화사업으로
OK레코드사와 손잡고 향토가사 현상모집
이때 목포출신 문일석이라는 문학청년이 목포의 노래를 출품하여 당선
목포의 노래를 목포의 눈물로 바꾸어 목포출신 이난영의 목소리로 취입.
목포의 눈물이 이난영의 눈물에서 민족의 눈물로 바뀐다.
종로거리 레코드가게는 음반을 사려는 사람으로 장사진.
눈물은 불길이 되어 삼천리 반도에 타오름.
노래의 성공과는 달리
이난영은 굴곡과 파란의 삶. 남편 김해송이 납북.
이난영의 LP판을 팔아 기반을 잡은 박오주(74)씨는
사재를 털고 시의 도움을 받아 1969년에 유달산에 노래비를 세운다.
진도소리唱와 진도 / 노래여, 옥주 산천 들노래여
땅에도 음양이 있다.
학문은 양기 센 땅에서 승하고
예는 음기 센 땅에 승하다.
대구, 안동은 양기가 센 땅.
그래서 남자가 세고 학문이 세다.
안동에서는 서예를 선호하고
목포, 진도에서는 그림을 선호한다.
예향이라고 불리는 곳일수록 음기가 센 땅임을 느끼게 된다.
예향중의 예향인 진도도 그렇다. 여자가 세고 예가 세다.
갯마을이 많았던 진도에 고기잡이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부인 남편이 죽고 나면 생계는 꼼짝없이 여인인 아내의 몫
남편 없이 시부모 섬기며 험한 일손에 하루해를 보내다 보면
신세 한탄이 절로 나오고
동병상련의 여인네들이 새벽부터 들일, 길쌈일, 바닷일로
함께 어울려 일하다보면 이런 타령들이 노랫가락화할 수 밖에.
흥얼대다보면 한나절이 힘든지 모르고 지나곤.
진도창은 바로 그런 슬픔을 삭이고 이길 수 있는 힘.
진도 남자 중에는 유난히 풍류를 잘하는 한량들이 많다.
단가 하나 못하고 북채 한번 못 잡는다면
그건 배냇병신이란 소리가 있을 정도.
충무공 혼이 서린 역사의 바닷길 울돌목을
하늘에 걸린 사장교 진도대교로 건너
그 소문난 藝島로 들어간다.
동행한 산수화가 우암 박용규의 말마따나 <징하게 이쁜 섬> 이다.
‘청미장’이나 ‘향원’ 같은 유서 깊은 한식집에서는
옥색 치마저고리에 품새도 아름다운 동녀들이 나와
치마 말기 위로 삼각형 겨드랑이 살을 슬쩍슬쩍 드러내며
부채춤도 추고 북채가 부러지도록 밤들이 낭자하게
‘단가‘ 도 뽑았다고 하건만
이제는 그런 풍류를 찾기 어렵다.
진도소리는 조선말 궁내부 참의관 정만조(1858-1936)가
남망산 아래로 유배오고 박영효가 제주로 유배 갔을 때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조직되었다는 진도협률단 이나
아성창극단, 8.15 이후 공화창극단 등을 통해
歌 舞 樂의 총체 속에서 발달해 왔다.
강도근과 남원 / 지리산 첫잠 깨우는‘동편제’의 탯자리
열여덟 나이에 명창 송갑수의 수제자였던
김정문 문하에 들어가면서 동편제를 구전심수 받았던 그는
타계할 때까지 남원을 떠나지 않았다.
돈과 명예와 중앙무대를 좇지 않고 평생 야인으로 남원에서만 지냄.
남원은 청각 못지 않게 미각문화가 발달한 곳.
번성기 남원 요정의 한끼 식사에 반찬이 마흔일곱가지가 나왔대서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와 점심 한 끼만 하고 올라가도
차비가 빠진다는 우스개가 돌 정도.
‘새집’의 별미를 들거나 ‘명문장’의 상을 물리고 나면
‘조산’ 사람들이 만든 墨蘭, 風竹의 사군자 부채를 부치며
요천강을 따라 걸어볼 일이다.
반짝이는 물빛을 길잡이로 박재삼의 시 ‘울음이 타는 강’ 이나
‘김용택’의 ‘섬진강’을 읊조리다 보면 해가 기우뚱 서쪽으로 옮겨질 쯤
곡성의 입구에 닿게 될 것이다.
일사에 지쳐 사는 일이 시들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
남원행 열차에 몸을 싣고 소리여행을 떠나 볼 일이다.
서정주와 고창 / 선운사 동백꽃에 미당 시詩가 타오르네
고창읍내에는 흔히 그 조형미와 건축미가 수원 화성과 비교되는
사적 제 145호 모양성(고창읍성)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풍천장어로 유명한 선운사 앞 풍천 삼거리
풍천장어는 복분자 술과 곁들여 먹어야 제 맛.
허소치와 해남 / 조선 남화의 길 따라
조선 초기 선비화가 양팽손이 화순 출신인데다가
후기의 겸재 정선 또한 나주 출신이 아닌가 하고 보는
일부 학계의 의견이 있는데다가
해남의 윤두서, 윤덕희 부자에 이르기 까지 기라성같은 화가가
이 호남의 풍광 속에서 조선 남화의 씨를 부리고 열매를 거두었던 것이다.
전라남도에는 나라 안 여덟 승경 중 세 개가 몰려있다.
다도해와 한려수도 그리고 지리산 일대와 영산강 유역의 빼어난 풍광은
홍도와 월출산 등과 다불어 예술과 문화가 배태될 만한
자연입지를 이룬다.
해남쪽 재안고개,
장흥의 바람재,
영암의 땅재, 누릿재, 불티재가 강진을 감아 안은 형상이랄지.
수많은 구릉 같은 재와 산들의 부드러운 선들은
그대로 남화의 한 폭 그림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수줍은 듯 숨어있는 사찰들이며 군데군데 드러나는 황톳길과
붉은 소나무 밭 또한 그림속의 현실과 별 대차가 없다.
남화와 허소치
한중일 동양 3국에는 남화와 북화가 있다.
남북의 가름은 지리적이기보다는 양식적인 가름인데
남화는 주로 선비들이 그렸고
븍화는 화원같은 직인 화가들이 많이 그렸다.
남화는 먹을 주로 tM고 여백을 많이 남기면서
시 서 화가 함께 어우러지는데 반해
북화는 시나 서예의 역량보다는
채색에 의해 묘사나 장식성이 두드러지는 경향으로 나아갔다.
남화는 문인 사대부들이 주로 많이 그렸다하여 ‘남종 문인화’ 라고 불럿다.
허소치는 조선말기 남화의 대가로써 시 서 화 삼절로 칭송되었고
청년시절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가 진도에 돌아가 화실을 짓고 작품 활동에 들어갔을 때
스승 추사는 ‘운림신방’ 이라는 당호를 지어 건네는 각별한 사랑을 보인다.
목포의 남농기념관 광주의 춘설헌이 소치의 맥을 잇고 있다.
이매창과 부안 / 이화우 흩날릴 제‘매창뜸’에 서서
이 땅의 풍광과 예술을 사랑하는 그대여
부안에 가거든 격포의 일몰과 내소사 월명암의 달빛만 보고 오지 말기를 부탁하노니
찾는 이 하나 없고 울어줄 이 하나 없는 두 여인의 무덤에 꽃 한 송이 씩 바쳐주기를.
푸르른 나이에 외롭게 떠난 시인 이매창과 명창 이중선의 묘소는 서로 지척이니
한번 들러 혼백이나마 위로해 주기를.
흔히 북의 황진이 남의 이매창(부안관기 1573-1611?)이라 했듯
특히 한시와 가사에 능했지만 그녀는 서러운 기생의 신분,
원치 않는 별리의 아픔을 묵향과 거문고 가락으로도 다 못 달래 오늘도
부안 땅에 가면 부는 갈대마다 그녀의 한숨소리가 들려온다.
서른일곱에 죽어갔던 그녀는 스물일곱에 유희경을 사랑했다
그는 내일을 기약 할 수 없는 임진란의 전쟁터로 떠나고
허망한 기다림 속으로 한 남자가 걸어온다.
시대의 반항아 교산 허균, 시대와 불화했던 개혁주의자,
그도 훗날을 기약하며 부안을 떠낫던 그 비운의 천재는 역모의 상소에 연루, 참형.
사랑을 나누어도 헤어짐은 늘 일방적이었다.
생전에 그가 자주 놀러갔다는 개암사에서 아전들은 바람에 날아다니며
구전 되던 시 들을 모아 그녀 사후 58년 만에 목판본의 책으로 묶어내고
그 시집이 하버드 대학 도서관에서 발견된 것은 불과 수십 년 전이다.
윤선도와 보길도
수국水國에 들려오는 어부의 가을 노래
섬 전체가 시인의 거대한 유물관인 보길도
보길도는 그냥 아름답기만 한 섬이 아니란다.
허벌나게 이쁜 섬이지만 성깔이 보통이 아니라서 한번 씩 돌풍이 불면
수십 년 된 나무들이 뽑혀나간다.
그 사납고 모진 바람 끝에 거짓말처럼 붉은 동백이 섬을 덥고
향기가 십리를 간다는 석란, 풍란이 꽃을 피운다.
조선조의 예술사는 어떤 면에서는 배소(配所 유배지)의 예술사였다.
송강과 다산과 추사의 예술은 한 결 같이
쓰라린 인고의 세월 속에 피어난 꽃이었다.
왕자의 사부로 경학, 천문, 지리, 공학, 건축으로부터
문학과 음악에 이르기까지 이루지 못한 글이 없었고
통달하지 못한 학문이 없었건만
서른 살에 시작한 귀양살이는 백발이 성성할 때까지 계속.
고산은 동대 서대를 세우고 비홍교로 왕래하며
무희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하였단다.
이런 점 때문에 나는 혼란.
시인의 정신적 사치가 너무 심한 것이 아니었던가 하고.
그는
평생 산수를 사랑하는 병이 깊더니..
비로소 이 섬에 와 흥을 붙이고 근심을 잊었노라고 고백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물색과 벗처럼 찾아오는 솔바람 소리.
여름이 환각처럼 가고 뭍에서 몰려온 소란한 이방인들마저 떠나고 나서야
보길도는 다시 청정한 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시인의 나라 모습으로.
운주사와 화순 / 천년의 바람이여, 운주의 넋이여
화순.
시골처녀처럼 순박한 이름.
빛고을 광주의 너릿재를 사이에 두고 지척이다.
이 너릿재는 터널이 뚫리기 전까지만 해도 큰 눈이 오면 한달씩이나
길이 끊기곤 했다는 험한 고갯길.
고려말 홍건적에 쫒겨 내려온 공민왕이
어머니 품속처럼 푸근한 모후산 아래에서 피난살이를 하고 갔다는 전설.
화순은 물고 돌의 고장이다.
물은 산수의 피요 돌은 산수의 뼈.
동복댐 수심이 올라오면서 보기 어려워진 적벽.
이 경치에 취해 예서 돌아서지 않았다는 곳.
임방울과 광산 / 낡은 소리북 하나로 남은 명창 40년
이효석과 봉평 / 봉평에는 하마 메밀꽃이 피었을까
소금을 뿌린 듯 하얀 메밀꽃
그 위로 달빛의 거친 숨소리.
메밀꽃 필 무렵의 그 토속적 탐미주의는 아직도
봉평 장터에 희미하게 남아있다.
9월이면 봉평에 가고 싶다.
이효석... 칠피단화를 신고 서양의 음반을 수 십장 씩 모았으며
입맛 까다로운 미식가인데다가
흑백 대비 강한 프랑스 영화를 즐겨보았다는
섬세하고 이지적인 사나이.
[메밀꽃..]의 허생원이 달빛을 밟으며 산 넘고 물 건너 오갔을 장평과 평창
그리고 봉평의 구중(九中) 심처(深處) 삼각구도 속을
영동고속도로 와 장평 인터체인지를 뚫고 한걸음에 달려온 것 자체가
스스로 소설의 상상력을 파괴하는 일이겠지만.
김삿갓과 영월 / 노루목 누워서도 잠들지 않은 시혼
손으로 잡는 것마다, 토해내는 숨결마다 시가 되었던 김삿갓
시로 울고 시로 웃던 김삿갓.
태어난 지 이틀 만에 어머니를 잃고 열두 살에 왕이 되었으나
폐위된 채 청령포에 유배와 열일곱 나이로 사약을 받았던 단종
그도 이 눈부신 영월 봄 경치를 두고
골짝마다 피 흘러내리는 것 같다(血流春谷)는 절규같은 자규시(自規詩)를 썼다
한겨울에도 푸른 산죽이 난다는 ‘대밭드리’ 지나 노루목에 닿는다.
묘역입구에는 김삿갓 난고선생유적비 라는 훌쩍 큰 바위가 서있다
불과 17년 전(1982.10월)전라남도 화순군 동복에서 철종 14년(1863) 객사한
병연의 시신을 영월의 차남 익균이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내력이 소상이 적혀있다.
당대 제일의 세도가 안동 김씨 문중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나이 다섯 살 때 일어난 홍경래 난에 선천부사였던 조부 김익순이
혁명군에 투항함으로써 삽시간에 역신의 집안이 됨.
이일에 얽혀 김병연 또한 평생 방랑시인으로 떠돈다.
아리랑과 정선 / 아우라지 뱃사공아, 내 한恨마저 건너주게
나운규와 서울 / 어둠 속에 치솟은 한국 영화의 혼불
김명순과 서울 / 도시의 허공에 펄럭이는 찢겨진 시
정지용과 옥천 / 얼룩백이 황소울음… 꿈엔들 잊힐리야
이화여전 교수를 역임하던 이 문학지성은 6.25때 제자들과 함께 행방불명
월북시인으로 오인되어 38년 동안이나 그 문학이 공개되지 못했다.
그러다 1988년 해금과 함께 그의 시 향수가 노래로 불려 지면서
고향 떠난 메마른 가슴마다의 연가요 귀거래사가 되었다.
가슴에 묻어둔 첫사랑은 다시 만나려 애쓰지 말 것
사랑만이 아니다, 그리움의 장소도 가급적 가슴에만 담아 둘 것.
고향을 찾아가보면 그리던 고향이 아니다
아무리 찾아가 보아도 우리네 그 옛 고향은 이미 현실지도 위에는 없다.
그것은 옛 초등학교 여선생님의 앳된 모습이 서른 해가 지난 후에도
그 모습 그대로 남아주기를 기대하는 것만큼 무망하다.
[항수]는 이미 지도 위의 특정 공간이 아니라 우리들 마음에 상상의 공간으로 남아있다.
나혜석과 수원 / 못다 핀 화혼은 서호西湖에 서리고
이건창과 강화 / 어둠의 역사 밝힌 강도江都의 애국시
김동리와 하동 / 저문 화개장터에‘역마’는 매어 있고
그 이름마저 탐미적인 화개(花開)를 찾아가는 길에 ...
하필 인간의 부끄러운 사랑이야기가 이리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계절에
이리고 아름다운 땅에서였다는 것인가.
왜 동리는 인간의 무섭고도 슬픈 이야기를 싣고 떠날 ‘역마’를
하필 이 아름다운 화개장터에 매어 놓았던 것일까.
때때로 사랑에는 눈이 없다. 그래서 윤리적 구별과 선택이 되질않는다.
사랑은 위대하다 그러나 동시에 위해(危害)하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 까지는 벚꽃 십리길
나는 그 길을 둥둥 떠간다. 거의 환각적으로.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동으로 하동 서로 구례 광양의
거의 모든 길과 마을이 꽃으로 덮여 있다.
구례의 산동면 일대만 하더라도 수 만 그루의 산수유가 일시에 토하는
노란색으로 멀미를 일으킬 정도인데다 광양의 섬 마을 또한
백운산 일대가 설산을 이룰 만치 온통 매화로 뒤덮여 있다.
구례에서 하동에 이르는 하동포구 팔 십리 꽃길을
김용택 시인은 이렇게 그려냈다.
‘천지간에 꽃입니다
눈 가고 마음 가고 발길 닿는 곳마다 꽃입니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지금 꽃이 피고
못 견디겠어요 눈을 감습니다
아, 눈감은 데까지 따라오며 꽃은 핍니다.
피할수 없는 이 화사한 아픔,
잡히지 않는 이 아련한 그리움
참을 수 없이 이 떨리는 이 까닭 없는 떨리는 분노
아아, 생살에 떨어지는 이 뜨거운 꽃잎들.‘
별신굿 탈놀이와 안동 하회 / 유림은 모른다네, 한풀이 탈춤
이인성과 대구 / 낡은 화폭에 남은 달구벌 풍경
한국의 고갱이요 세잔으로 불렸던 그는
1950년 늦가을 서른아홉의 나이로 북아현동 집에서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생을 마친다.
작가 최인호가 이인성의 최후를 소설적으로 각색해서 쓴 ‘누가 천재를 죽였는가.’
목포나 광주가 전통 미술 쪽에 강세를 보였다면 대구는 확실히 서양화 쪽에서
강했고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남인수와 진주 / 남강에 번지는 애수의 소야곡
박세환과 경주 / 서라벌 향해 귀거래사 부르는 광대
이 한세상 누군들 광대로 살다가는 것이 아니랴만은
박세환은 서커스단 동춘의 3대 단장
창단자이던 박동수의 양아들로 30년 가까이 동춘을 이끌고 있다.
문장원과 동래 / 언제 다시 한바탕 동래춤을 춰볼꼬
소리가 전라도라면 춤은 경상도, 그중에서도 단연 동래춤.
그 한복판에 동래 춤꾼 문장원이 있다.
암각화와 언양 / 대곡천 비경에 펼쳐진 선사미술관
금강산과 예인들
정선과 금강산
최북과 구룡연
최익현과 금강산
- 요즘 가벼운 금강산 후유증을 앓고 있다.
어느 시구절처럼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 한 죄 일게다.
차마 금강산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떠나온 그 세월이 애달파 단 며칠 그 땅을 밟고
휑하니 되돌아 올수 없는 것이기에.
그러기에 격한 뜨거운 가슴을 가진 사람일수록
조심할 일이다, 금강산 행을.
면암(최익현)이 금강산에 온 것은 흑산도 유배에서 풀리고 나서였다.
마음은 우울하고 나이도 50을 넘고
그 아름다운 금강산도 남의 것이 될 처지.
금강산은 잠시나마 그의 울분과 음울함을 씻어내고 달래기 위해.
금강산의 위대함은 거기에 있다.
상처입은 자에게 위로가 되고 쓰러지는 자는 일으켜 세우는 모성.
그는 옥류동에 이르러서는 이런 시를 토했다.
이내 몸 신선 세계에 찾아들었나
생각하니 그림 폭을 번져가는 듯
그 누가 삐뚠 바위 먼저 오를까
아슬한유라름다리 보기조차 두렵네
온 나라가 이처럼 깨끗하건만
서울아 너만 어이 어지러우냐.
그는 다시 그 어지러운 서울로 간다.
그리고 흰수염을 휘날리며 일흔넷의 고령에
전라도 태인 땅으로, 가서 마지막 의병을 일으킨다.
질게 뻔한 싸움이지만 다른 선택이 없었다.
이 싸움에서 패배, 대마도로 끌려가고
그는 거기서 최후를 맞는다.
금강산 유람은 곤고한 생애의 유학자에게 몽매에도 못잊을
평생 한 번의 호사였던 것이다.
이중섭과 제주 / 지금도 살아 있는, 바다 위에 그린 그림
김정희와 제주 / 탐라의 하늘에 걸린〈세한도〉한 폭
추사체.
거센 해풍에 뼈대를 드러낸 제주의 현무암처럼
힘있고 거칠면서 지극한 아름다움을 이룬
그 글씨는 좌절과 소외의 배소에서 피어난 검은 꽃이었다.
또한 겨울당한 이후에야 소나무 잣나무의 진가를 알 수 있다는 소회를
피력했던 세한도는 그림으로 쓴 독백이요 일기였다.
대체로 배소는 아름답다.
추사가 머물렀던 제주의 풍광 또한 쪽빛 바다와 유채꽃으로 눈부시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의 한 자락을 들추고 보면 제주에는
뭍사람이 모르는 아픈 상처들이 드러난다
삼별초 항몽 4.3민중항쟁 조선왕조 오백년 동안 광해군을 비롯
송시열이나 최익현같은 무려 삼백 명에 이르는 인물들이
한 맺힌 귀양살이를 보낸 천형의 섬이었다.
1백50여 년 전(1840년)모슬포해변에
또 하나의 아픈 사연을 안고 배 한척이 닿는다.
30대에 이미 규장각 성균관을 거쳐 병조참판에까지 이르렀던
그가 제주에 유배를 당하게 된 것은 헌종의 즉위와 함께 시작된
순원왕후의 수렴청정 기간 동안 득세하게 된 정적 안동 김씨 일문의
김홍근이 대사헌에 임명되면서 10년도 더 지난 윤상도 옥(獄)사건이 재론되었는데
바로 윤상도의 상소문을 김정희가 초안했다고 들고 나왔던 것이다
세한도
글씨와 그림의 경계위에 있는 추사의 내면 풍경화이다.
그 바스러질 듯한 먹선 몇 개로 그린
선기 짙은 그림에 담긴 사연과 뜻은 깊다.
세한도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그렸으되
그것은 나무가 아닌 사람을 그린 그림이었던 것이다.
그 그림은 주인의 생애를 닮아 풍상 속에 유리하게 된다.
훗날 이 그림은 경성제대 사학과 후지스까 교수의 수중에 들어가고,
그는 추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추사연구의 제 1인자.
그의 딸도 추사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추사에 미쳐 반평생을 추사에 바쳤고 관악산 아래에 있던
추사의 초라한 묘를 찾아 예산 고택 옆으로 이장까지 했던 장본인이다.
그래서 추사 묘석에는 쇼와(소화)라는 일본연호가 적혀있다.
해방되기 전 그는 세한도를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진도 출신의 청년 손재형은 이 사실을 알고 얼마간의 돈을 마련해
폭격으로 아수라장이 된 동경으로 날아간다.
후즈스까는 병석에 누워있었는데 손재형은 후즈스까 집 부근에 여관을 잡고
매일 식전이면 찾아가 무릎을 꿇고 문안인사만 드린다.
문안인사 백일이 되던 날, 노학자 후즈스까는 드디어
‘내가 눈 감기 전에는 내 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는 고백과 함께 세한도를 내 놓았다
손재형은 세한도를 찾아와 위창 오세창에게 보였고
위창은 즉석에서 “전화를 무릎 쓰고 사지에서 찾아온 우리의 국보” 라고
제발(題跋)을 썼다.
해남 대둔사의 외우 초의선사, 진도의 청년 허유 등은
가랑잎같은 목선에 의지하여 험한 제주바다를 뚫고 찾아와
정성으로 스승을 모시다 가곤 했다.
제자인 이상적
연경에 다녀와 구하기 힘든<황조경세 문편>같은 서적을 보내오곤 했다.
그전에도 遠行에서 돌아오면 귀한 책들을 보낸 것.
그의 선물을 받아들고 세한도를 그렸으며
모처럼 그림옆에 소회를 피력한 題跋제발도 썼다.
... 세상사람들은 오직 권세와 이익만 좇아가는데
... 이 절해고도 유배지에 있는 초췌하고 마른 나에게
그대는 천만 리 먼데서 구입한 이와 같은 것을 보내주다니
... 그대와 나의 관계는 귀양 전이나 후가 더하고 덜함이 없구나.
추사는 나이 예순넷에 헌종 14년에 이르러서야
길고 고통스럽던 제주 적거에서 방송된다.
그러나 그도 잠깐,
眞宗挑禮論 진종도례론과 관련되어
다시 머나먼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된다.
땅끝에서 땅끝으로 내몰린 것이다.
북청 귀양에서 돌아와 과천 관악산 아래에서 쓸쓸히 은거하다가
고달프고 힘들었던 한 생애를 조용히 마감한다.
화첩기행이 조선일보에 주간 연재 된 후 독자들의 반응.
전국 각처와 멀리 미주 유럽등지에서 수많은 편지
그래서 새로운 정인들과 필담의 즐거운 추억.
더불어 방송국에 불려 다니기도 하고 강의 요청도 도 잇따라
학교 밖 출연도 많이.
지극히 정적으로 살던 나는 약간의 멀미 증세를 느끼기도.
그래서 내 삶의 한쪽 축이 기우뚱 - 김병종 화첩기행 2권을 내면서.
박수근과 양구
한밤중 달랑 자장면 한 그릇을 들고 육교를 건너온 청년에게 미안해 했다
“미안하긴요. 장산걸요.”
“그래도 한밤중에... ” 했더니 불쑥
“정 그러시면 저 그림이나 하나 줘요” 했다.
나는 애매하게 웃고 말았는데 며칠후 점심에 다시 배달 온 그 청년이
그림 언제 줄거냐고 물으며
저거 주세요. 닭 두 마리가 서로 노려보고 있는 투계 연작중의 하나였다.
옆에 있던 후배가 정색을 하며
“세상에 저거 얼마짜린 줄 알기나 하나? 고 물었다
수백만원 짜리야 하고 후배가 말했지만
“뻥까지 마요 어느 미친것들이 저런 걸 그런 돈 주고 사요
생각해봐요. 저 시커먼 닭, 저거 진짜 닭이라 해도 몇푼가겠어요.
종이에 먹물로 찍찍 그린 걸 가지고..... 가만 저거 오골계예요?“
가난과 전란 속에서 양구 춘천 평양 군산 그리고 서울의 창신동과
전농동 일대를 떠돌며 때로는 도청의 서기로 미군부대 초상화가로 심지어
부두노동자로 전전하면서 죽기까지 손에서 화필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박완서의 소설 [나목]에는 박수근으로 짐작되는
한 미군부대 초상화가의 이야기가 나와
세간의 화재가 되기도 했다.
고유섭과 인천
내 추억의 사진첩속에 희미한 동판화로 찍혀있던 그 중국인....
옛이름이 “미추홀”인 인천은 황해 문화의 관문이자
개화의 물꼬를 튼 곳이기도 하다.
이 항구도시는 중국의 상하이처럼
서구 각국의 조계(組界)가 들어서면서 자유공원의
옛이름이 만국공원인 것만큼이나 여러 문화가 교차한 곳이다.
박인환과 서울
그러나 어쩌랴. 서울은 돌아와 안길 그리움의 풍경을 상실한 도시다.
과거를 버린 도시다. 떠났던 이들이 아무리 돌아오고 돌아와 보아도
시간의 이끼 덮힌 과거는 거기에 없다
박인환은 1945년 종로 3가 2번지 낙원동 입구에 책방을 낸다
책방의 이름은 마리서사(書肆)
거기에는 김기림 김광균 오장환 송지영 김수영 같은
모더니즘 계열 시인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마리서사에 모여 저녁을 먹고 명동까지 걸으며
문학과 사랑과 인생을 이야기 하였을 터이다.
박인환은 강원도 인제군 출신.
그러나 열 살무렵 서울로 옮겨
서울 토박이 같은 깔끔하고 산뜻한 느낌이 든다.
더구나 연이은 서구적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발표함으로써
서울하고도 종로나 명동의 도회적 이미지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는 책을 팔기보다 시를 썼고 창 앞으로 지나가는 인간의 풍경을 그렸다.
1956.3.20일 술에 취해 귀가하여 답답하다며 가슴을 쥐어뜯다가
그만 심장마비로 눈을 감을 감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때 나이 서른 살. 그 목숨이 새벽 이슬처럼 저버린 것이다
그가 세상을 뜨기전 썼다고 알려진 [세월이 가면]은 명동에 있던 주점
‘경상도집’에서 송지영 이진섭 나애심 등과 대작을 하다가
즉흥적으로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를 즉석에서 이진섭이 작곡하고 나애심이 불러 노래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을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이 시 [세월이 가면]은 망우리 묘지에 묘비를 겸한 시비로 세워져있다.
박인환을 생각하면 똑같은 서른의 나이로 요절한 기형도가 생각이 난다.
시골 출신으로 서울에서 똑 같이 심장마비로 떠나버린 시인이었다.
연어처럼 그리움이 겨워 찾아오는 이들에게는
그러나 찾아갈 옛 공간이 없다.
그들이 살던 거리와 골목은 서울의 지도 위에는 없다.
그러나 쓸쓸히 돌아서게 하지는 말자.
그 옛날 그 자리는 잊어버렸지만
그리움에 겨워 찾아오는 이들에게마다
시집을 한권씩 선사하자
박인환의 시집을 선사하자.
그 시집을 펼치면 희미한 흑백사진처럼
거기 그 눈동자 그 입술 그 거리가
아직 살아있을 것이기에.
김승옥과 순천
내 스무살을 지켜준 문화에는 김미기의 음울한 통기타와
이노우에 야스시,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그리고 김승옥의 ‘무진기행’ ‘환상수첩’
같은 것이 있다. 무진은 안개 저편의 도시 현실의 지도위에는 없는 땅이다.
내 스무 살도 혼각의 세월, 현실 바깥으로만 떠돈 몽환의 계절이었다.
순천만 주변은 누런 갈대밭과 개펄과 길이 간단없이 이어졌다.
비로소 무진 그 몽환의 도시에 온 것 같았다.
마침 희뿌연 저녁안개가 내리고
갈대밭에서는 간혹 새들이 날아오르고
안개 저편으로는 삐걱이며 목선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올 뿐,
사위는 적막하고 적막했다.
시에 편입되어 있는 승주군에는
송광사 선암사와 같은 유서깊고 아름다운 명찰이 있고
중요민속자료인 낙안읍성이 있다
선암사의 매화는 3월 하순이면 장관을 이룬다
또 5월의 영산홍은 보는 이의 가슴을 온통 붉게 물들여 놓는다.
김대환과 인천
천상병과 인사동
1967년 7월,
한 친구가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면서 엉뚱하게 기관에 끌려가 전기고문.
그 후유증으로 정신병원...
병구완에 헌신적이었던 아내 목순옥을
그는 하나님이 숨겨두셨던 천사라고 했다.
화장실에서 발견한 낙서
예술가가 될 수 없는 세가지 타입
넥타이를 메기 좋아하는 자
도장 찍기를 좋아하는 자
회의하기를 좋아하는 자
김유정과 춘천
가을엔 춘천행이 좋다.
코스모스 한들거리는 경춘가도를 물길따라 달리면서
물에 어린 산 그림자를 바라보는 것이 좋다.
수향의 춘천의 관문에 의암호가 있다.
자욱이 안개가 내리고
밤이면 옥수수 별무리가 부서지는 곳
그 호숫가 한적한 옛 경춘국도 변에는
혼령인 듯 서 있는 하얀 비석이 하나 있다
지난 서른 해 동안 문향 춘천의 상징이 되어 왔던
스물아홉의 나이로 붉은 피를 토하며 죽어갔던
강원도식 토종말로 언어 조선의 아름다움을 열었던
김유정의 문학비다.
배회한과 서울
“언젠가 팔당의 내 시골집이 좋다고 했지?
그거 가지라구
나 그 집 필요 없게 됐어.
당호가 금주정사인 선생의 시골집은 비록 한칸짜리 토담집이었건만
담 너머가 강인데다 후원엔 수백년 된 은행나무 그늘이 서늘하여
예술인들 사이에선 상당히 소문난 집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난데없이 강가에 시골집을 갖게 되었다
아니다. 난데없이는 아니다. 실은 강가의 토담집은 오래된 내 꿈이었다.
강위로는 커다란 달이 둥실 떠 올랐다.
달은 물을 환하게 비추고도 모자라 넘실, 어두운 방안까지 흘러왔다.
밤이 깊어지면서 어디선가 컹컹 개 짖는 소리도 들려왔다.
적막했고 달콤한 외로움이 몰려왔다.
혼자였지만 황홀했다.
전화는 물론 라디오나 TV 한대 없는 집이었다.
문을 닫고 있으면 천상 절간이었다.
이런 적막 속에 거하기는 실로 눈물겹게 오래간만이었다.
나는 거의 늘 소음 속에 휩싸여 지냈으니까.
도시의 삶에서 참으로 견디기 힘든 것이 소음과 색의 폭력이다
전화도 아홉시 뉴스도 신문도 없는 그 집에서 나는 비로소 내존재와
대면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부쩍 조선식의 모든 것이 그립다.
한때는 독일풍 카페에서 재즈음악을 듣는 것이 좋더니 이제는 한옥에서
녹차를 마시는 한가함과 정적이 좋다.
조선음식 조선음악 조선그림 그리고 따근한 온돌의 조선집이 좋다.
석달동안 나는 그 집에서 아무것도 안했다.
아침 저녁 군불을 지피는 일과 차를 끓이는 일,
우수수 바람소리를 듣는 일과 방안에 달빛을 들이는 일이 전부였다.
달빛에 더 보탤 것도 어스름 새벽빛에 더 뺄 것도 없었다.
특히 아궁이에 장작불을 땔 때마다
타닥타닥 타 들어가는 불길을 보는 것이 좋았다.
허난설헌과 강릉
중국에까지 문명을 떨친 대시인이었지만
고독과 한의 스물일곱 해를 살고 요절했던 그녀는
닫힌 시대에 무언의 항거를 하며 시로써 끊임없이
실존적 자의식을 드러냈다.
강릉은 우리나라 예원의 두 여류 가인을 낸 곳이다.
우선 신사임당의 친정집인 서쪽 죽헌동의 오죽헌을 들 수 있다.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시대의 가장 큰 학자로 손꼽히는
율곡 이이가 태어난 곳으로 이집은 본디 규모가 작고 호젓한
여염 영동의 한 양반가였다.
칠십년대 어느날 강릉에서 하룻밤을 머물던 박정희 대통령이
불현듯 연필로 스케치하여 중수시키고 터를 넓혀
오늘과 같은 모양새가 되게 한 것이다.
이곳은 해마다 백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들어 북적거리는 곳이 되었다.
또 다른 하나는
시내 초당동의 또 한 채 소슬한 양반가는 찾는 이 없이 적막하게
오랜 세월의 무게를 이고 있다
그 유명한 경포대 해수욕장이 가까이 있건만.
이 집으로 가는 입구에 허균 생가라고 씌여 있어서
조선의 풍운아 허균으로 알고 있으나
이 집은 허균 보다는
그의 누이인 여류시인 허초희 난설헌과 더 인연이 깊은 곳이다.
사람들은 홍길동전의 저자이자 혁명가였던 허균은 익히 알아도
조선조 규방작가로서 일찍이 중국과 일본에서까지 시집이 간행,
애송되었던 공전절후(空前絶後)의 존재 허난설헌이
바로 그 허균의 누이라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다섯 살에 한시를 지었던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스물일곱에 의문의 죽음을 맞아야했던
허난설헌, 한결같이 시대와 불화하며 숙명적 이단아의 삶을 살다
비극적 생애를 마쳤던 것이다..
똑같이 강릉에서 태어나 똑같이 출중한 재능을 타고났으나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의 생애는 너무도 달랐다.
한 여인은 남성우위의 유교 이데올로기 속에 자신을 조화시키고 순응하였으나
다른 한 여인은 그 이데올로기에 무언의 항거를 하였을 뿐 아니라
시의 세계로써 실존적 자의식을 드러내며 불화하였다.
그녀의 죽음에 자살의 의문을 가져봄직하다고 생가되는 것도
그녀의 고통과 불화는 극심했었고 대부분 우리 옛여인네들이
거의 숙명으로 끌어안고 가야했던 것들이다.
그녀는 한 여인으로서 남편의 흡족한 사랑을 받지 못했으며
남편 역시 선비이기는 했지만 아내에게 열등감을 가진데다가
술과 여자를 멀리하지 못한 문약한 남자였고
모든 희망을 걸엇던 두 자녀를 잇달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뱃속에 있던 아이마저 그만 잃고 만다.
문학의 스승으로 마음에 의지했던 오빠 봉 마저 요절하게 되면서
그녀의 좌절과 시름은 깊어만 갔다.
유일한 의지가 시였고 유일한 벗이 시였다.
시로써 꿈결같이 이상적 남성을 만날 수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내모든 작품을 불태워달라는 유언을 끝으로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대부분 주옥같은 작품들이 불태워져버리고 난 후
누구보다 누이의 재능을 알아보았던 허균은
서둘러 본가와 친정에 흩어져있던 나머지 시편들을 수집하고 시집을 꾸몄다.
자신의 스승 유성룡의 발(拔)을 받아 처음 [난설헌고(蘭雪軒藁)]로 편집하면서
비로소 비운의 시인 허난설헌의 이름은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중부고속도로의 하얀 사선이 긋고 지나가는 야산 기슭에
난설헌의 묘는 두 아이의 작은 묘와 함께 외따로 있어
쓸쓸함과 애잔함을 더해주고 있다.
난설헌에게는 평생을 두고 가슴에 사무치는 세 가지 한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나는 왜 이 넓은 하늘 아래 하필이면 조선 땅에 그것도 여자로 태어나
수많은 남자 중에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는가고 한탄했다는 것이다.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에 시비와 묘소가 있고
광주 경화여자상업고등하교 교정과 용인의 양천 허씨 선산에 또 다른 시비가 있다.
이월화와 서울
섬광처럼 솟구쳤다가 어둠속으로 사라져버린 전설의 여배우 이월화.
석모도
서울에서 강화도 외포리까지의 길지 않은 자동차 길과
다시 짧은 뱃길을 이어 이만한 해변이 숨어 있다는 것은 축복같은 일입니다.
해인(海印)이라 했던가요, 바다는 만상을 비출 뿐 아니라
시간까지는 빨아드리는 것 같습니다.
지금 그 바다를 바라보며 마시는 한 잔의 차는 차를 마심이 아니라
노을을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해변에 와서 저 고운 노을의 빛을 빌려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떠난 후 혹 석모도에 오시면 전신주의 소실점 구도 속으로 이어지는
염전의 소금창고들을 지나 민머루 해변의 솔밭도 거닐어 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도회에서 묻혀온 허망한 욕심들까지 솔바람 속에
비늘처럼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 청정한 솔바람은 우리 몸을 훑고 지나가면서 ‘버리라, 버리라!’고
속삭여줄지도 모릅니다
성서에도 나와 있습니다
앞도 뒤도 옆도 꽉 막혔을 때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구요.
그렇습니다. 습기 차고 어두운 땅만 볼 것이 아니라 한 번쯤 하늘을 볼 일입니다.
이 아름다운 섬은 반드시 강화 본섬의 외포나루를 건너야 오게 되어 있습니다.
저 눈물과 수난의 강도(江都)인 강화를 건너서 야 오게 되어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하늘에 제사지냈던 성산 마니산과 참성단이 있는 강화는
선사로부터 근대까지가 고스란히 누워있는 우리 역사의 단층지대입니다.
사나운 정복왕조 몽골에 끝까지 피로써 대항하면서
38년동안(1232-70)이나 고려의 망명정부가 서 있던 곳이었습니다.
석모도의 노을은 이제 그냥 아름다운 빛으로만 오지 않습니다.
노을은 숫제 핏빛이 되어 사방으로 튀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굳이 가벼운 마음으로 왔다가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가야 할 의무까지는 없습니다.
삼량염전의 소금밭 삼거리에서 장구너머까지의 그 호젓한 길을 걸으면서
소금물에 삭아든 시간을 바라보는 여유도 좋겠지요.
통나무집도 있어서 바다냄새 속에서 하룻밤을 묶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와 보내는 그런 한날의 밤은 무심히 흘러 보내버린
수많은 날들보다 더 소중한 추억이 될것입니다.
해풍 불어오는 개펄들과 삭아내린 소금창고의 건물들
그리고 쓸쓸한 전신주의 풍경은 너무도 문학적이어서 콧날이 찡 할 정도입니다.
모든 것이 신속하게 사라지고 변쩍거리면서 명멸해가는 문명 속에서
시간의 퇴적이 그대로 느껴지는 이곳 풍경은 고요한 흑백사진처럼 정겹습니다.
한강
세상의 모든 강은 아름답다.
난 세상의 강에 대해 정겨운 언어로 속삭이고 그림으로 그렸다.
그러나 동작대교 잠실대교를 그린적은 없다.
겸재 정선은 ‘압구정도’ ‘양화진도’ ‘송파진도’ 를 그렸지만
나는 단 한 번도 한강에 마음을 열지 않았다.
삼국시대로부터 그 이름이 욱리하(郁里河), 아리수(阿利水),였던 강.
‘욱리’ 나 ‘아리’는 크다는 뜻이다.
한강에 대해 나는 자주 화를 내었다. 그 회색 물줄기에 짜증을 내었다.
자연이든 사람이든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서울의 젖줄이자 국토의 심장부를 흐르면서도 사랑을 받지 못하는 강
민족의 온갖 애욕과 애환을 함께 나누었으면서도 버림받은 강.
서울의 온갖 가래침과 고름을 다 빨아들여 정하게 만드는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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