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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구현 사제단이 되어버린 정의구현사제단을 성토한다
김원율 안드레아 (송파동 본당)
9월 23일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서울역 광장에서 ‘국정원개혁과 정부의 회개를 촉구하는 시국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이들은 ‘각 교구의 사제로서, 수도회원으로서 시국선언에 동참하던 정의구현사제단은 진실과 공정의 불쏘시개가 되고자 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현재 전국 15개교구(군종교구 제외)가 국정원의 불법대선개입을 규탄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는데 그들은 복음의 가르침과 공동선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부산교구 사제들이 9월 9일 발표한 시국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공권력의 명령이 도덕질서의 요구나 인간의 기본권 또는 복음의 가르침에 위배될 때, 국민들은 양심에 비추어 그 명령에 따르지 않을 의무가 있다. (간추린 사회교리 399항)”
또한 시국선언을 행한 사제들은 “교회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추구하는 것은 정치적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성숙하지 못한 민주주의, 인권과 인간 존엄성에 대한 침해를 막고 '공동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함'인 것이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이들 사제단이 국정원이 대선에 불법 개입했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이는 검찰수사에서 밝혀졌듯이 국정원이 여러명의 직원으로 하여금 여론을 좌우할 수 있는 댓글을 달게 하였고 이에 따라 국가기관의 중립성 유지의 의무를 위배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평신도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듯이 지난해 한국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누가 보아도 교회의 중립성 유지의 의무를 벗어나는 낯 뜨거운 대선개입행위를 저질렀습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전형적인 이중잣대입니다. 그들은 선거를 열흘 가량 앞두고 인권주일 담화문이라는 글을 교회마다 강론시간에 낭독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모름지기 교회의 공동선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신자들에게 특정후보를 지원하도록 하는, 명백하게 교회법에 어긋나는 행위였습니다.
2012년 3월 총선을 앞두고 선거관리위원회는 시민 · 종교단체가 선거 쟁점인 4대강 사업 등에 대하여 찬반집회를 열거나 서명운동을 하는 것은 선거법에 어긋난다고 공식발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에도 불구하고 정의구현사제단, 주교회의의 정의평화위원회가 이끄는 천주교 연대는 이를 무시하고 5월 10일 4대강 사업 중단 생명평화미사를 개최하고 전국사제수도자 3천여명이 참여하는 ‘4대강사업 중단을 촉구하는 전국 사제수도자 선언’을 행하는 불법을 저질렀습니다. 이러고서도 이들이 과연 국정원의 불법대선개입을 규탄할 수 있습니까? 내가 남을 비판하면 교회의 진리와 공동선을 위한 것이요 남이 나를 비판하면 기득권자의 불의라고 생각하는 위선자들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위선자야 먼저 네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남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과오는 없는 지 반성하고 성찰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최소한의 양심과 상식이 있다면 평신도들도 이런 사제들의 얼빠진 짓거리에는 동조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은 대선을 앞두고 집요하고 후안무치한 정치개입행위를 저지르고서도 조금의 반성이나 가책이 없이 국정원 직원의 댓글 수십편을 빌미삼아 나라의 분열을 선동하고 획책하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정의구현사제단의 시국선언은 미군철수, 국가보안법 폐지를 줄기차게 외치면서 종북구현사제단이라고 비판받아온 정의구현사제단의 일탈된 행위의 연장인 것입니다.
이러한 시국선언에서 사제들은 ‘간추린 사회교리’의 여러 항목에서 근거를 대면서 사제의 정치행위를 옹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간추린 사회교리 170항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사회의 공동선은 그 자체로는 하나의 목적이 되지 않는다. 공동선은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고 피조물 전체의 보편적 공동선을 실현하는 것일 때에야 비로소 가치가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피조물의 궁극적 목적이시다.”
인간의 본 모습은 하느님입니다. 인간이 하느님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 공동선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당신의 본 모습 그대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이는 인간의 본질과 존재가 가장 심오한 방식으로 하느님과 연관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정의구현사제단의 신부들은 인간의 본모습을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사랑으로 보지 않고 인간의 증오심과 투쟁에 두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복음이 바로 계급투쟁이라고 생각하며 그 예를 들자면 헤아릴 수 없습니다.
송기인신부의 계급투쟁적인 인식
2006년에 부산의 송기인 신부는 노대통령의 임명을 받아, 과거의 폭동이나 정치적 사건 등을 조사하는 과거사정리위원회라는 정치적지위에 취임하였습니다. 송 신부의 이런 지위의 취임은 교회법전 제285조 제3항의 금지규정에 위반되는 것입니다.
송 신부는 2005년 4월 22일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서거한 요한 바오로 2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습니다. “교황님도 사람들의 각도에 따라 공과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 중심에 남미의 독재국 등 핍박에 항거하는 민주화인사들과 민중들의 고통에 구체적으로 응답하기보다 ‘평화’라는 구호만을 되뇌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이 말은 반평화(反平和) 즉 폭력도 사회정의를 위해서 때로는 필요한데 요한 바오로 2세가 오로지 평화 즉 사랑의 사도여서 불만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송 신부는 같은 인터뷰에서 “우리나라에서 놀라운 것은 지금까지 기득권자들이 계속 일반사람들을 묶어 놓고 자기들은 기득권을 누리려는 자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결국 상류층은 영구히 대대손손 기득권을 이어 갑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기득권자 계급이 다른 계급을 묶어 놓고 있다’는 계급논리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해방신학의 올바른 이해”에서 나타난 함세웅 신부의 인식
(1984년 분도출판사)
함세웅신부는 1984년 출간된 “해방신학의 올바른 이해”라는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해방신학의 올바른 이해, 15쪽)
“제3세계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확장은 서구교회의 연장에 지나지 않았다. 그 결과 식민지에서 크리스찬이 된다는 것은 그들 전통적 공동체로부터의 분리 내지는 이탈을 가져왔고 지금까지의 생활양식과 문화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제3세계 교회는 서구의 문화적 소산인 서구교회를 고스란히 복사하여 옮겨놓은 것으로서, 때로는 민족주의적 저항이나 자주독립운동에 대한 민중의 의지를 약화 내지 저하시키는 부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서구 그리스도교의 제3세계로의 선교과정은 부끄럽게도 많은 경우 식민모국의 권력과 밀착되어 있으면서도 그 보호아래 식민지에서 이루어진 선교였다. 이 경우 선교사들은 식민지 민중에 대한 억압의 근원을 외면한 채 개인 영혼의 구원만을 설교하거나 억압당하는 측에 대해서 용서와 사랑을 강조하였다. 성서의 전수자가 서구인인 이상, 그들의 설교와 선교방법이 그대로 식민지 교회에 전수되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서구문화의 소산인 그리스도교가 제3세계에 사랑과 관용을 전함으로써 식민지배세력에 대한 민중의 투쟁의식을 약화시켰다는 논리입니다. 한국사회의 모든 면에서 끊임없이 분란과 갈등을 조장하고 있는 함세웅 신부다운 논리전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반정부 투쟁의 도구가 되어버린 환경운동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는 거의 모든 정부의 개발사업에 반대하였습니다. 이로 인한 국책사업의 지연과 예산낭비는 천문학적인 액수에 달합니다.
2013. 6. 5. 환경의 날 담화문(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이용훈 주교명의)의 일부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개발로 인한 이익은 결국 소수의 자본가에게 돌아가고 그 피해는 국민 대다수가 입는 현실이 이미 우리 사회에 많은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사회의 가야 할 방향을 바르게 세워야 한다는 진리를 역설적으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풍광이 좋은 산골마을에 들어서는 골프장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고 쫓겨난 주민들은 현재도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고, 4대강 사업은 많은 이들의 우려처럼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강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으며,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유지비와 관리비용이 투입되어야 하는 상황에 와 있습니다.”
이용훈 주교님의 담화문은 한마디로 사실에 입각하지 않은 무책임한 선동에 불과합니다. 개발의 이익이 결국 소수의 자본가에게 돌아갔다고 하였는데 주교님은 더울 때 에어컨도 켜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고속철도 사업에 대해 천성산 도룡뇽을 거론하면서 반대하였는데 이 주교님은 부산가실 때 KTX는 이용하지 않으십니까?
최근 걸핏하면 환경단체가 4대강 보 해체를 주장하지만 일부 경비집행과정에서 문제가 있다 하여 4대강 사업 전체를 폄훼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누가 무어라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4대강 사업이 홍수피해를 크게 줄였고 가뭄해갈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6조원이 넘는 태국 물관리 사업까지 수주하여 수출효과까지 거두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보 해체를 주장하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은 보수정부의 모든 사업을 환경이라는 잣대로 비난하는 반정부 활동에 다름아닌 것입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과 정의평화위원회 사제들은 이른바 천주교 연대라는 집단을 결성하여 사사건건 보수적인 정부가 하는 사업을 훼방놓고 반대하였습니다. 이들은 과격한 환경활동으로 경부고속철 천성산 터널, 사패산 터널 공사, 새만금 개발, 4대강 사업, 원자력 발전소 등 주요 국책사업 모두에 반대하였습니다. 이로 인한 예산의 낭비와 국가이익의 손실은 천문학적인 수치에 달합니다. 이들이 단순히 이념적으로 환경탈레반, 즉 환경근본주의자라고 한다면 차라리 일관된 철학을 가졌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친북정부에 대하여는 철저한 침묵으로 일관하는 이중잣대를 들이대었습니다. 경부고속철, 새만금 사업은 노태우 정부가 시작하였고 4대강 사업은 이명박 정부가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김대중 정부가 대선공약으로 그린벨트 해제를 내걸어도 철저히 침묵하였습니다. 그린벨트는 30여년간 우리 강산에 대한 산소탱크로서 막중한 역할을 행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가 행정복합도시, 혁신도시 개발한다면서 전국의 산과 들을 불도저로 밀어낼 때 일언반구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대상지역이 수많은 보호생물이 살고 있는 생태계 보고라는 발표가 있어도 침묵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이들의 환경활동은 자기들 입맛에 맞지 않는 정부에 대한 반정부활동의 구실로 철저히 이용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언필칭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이 강산을 보존하여야 한다고 떠들었습니다. 위선도 이런 위선이 없습니다. 이들의 환경운동은 공동선을 지켜야 한다는 표어를 내 걸었으나 한마디로 보수정부를 타도하고자하는 그들의 속내를 숨기고 그럴싸한 명분으로 포장하기위한 구두선에 불과하였습니다.
어디든지 분란이 있는 곳에는 달려가서 갈등을 조장하는 정의구현사제단
2004년 이후 새만금 갯벌 살리기 기도회, 핵페기장 반대미사, 천성상 터널 반대를 위한 종교단체 연석회의, 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를 위한 반전평화미사 등에서 보듯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은 어디든지 분란이 있는 곳이면 달려가서 갈등을 확대하고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한진중공업 사태에서는 세계적인 조선불황으로 인한 불가피한 구조조정을 “멋대로 뽑았다가 멋대로 버리는 고용현실” 운운하면서 한편으로 외부개입과 폭력을 유발하는 희망버스에 대하여 교회의 희망이 실려 있다고 하면서 옹호하였습니다. 쌍용자동차 사태에서는 대한문 앞에서 분향소 설치 및 미사를 행하면서 “야만에 저항하지 않는 것도 야만”이라고 하면서 노사합의에 의한 쌍용차 경영정상화를 끝까지 방해하였습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갈등을 증폭하면서 공동선이 아니라 공동으로 멸망하는 길로 나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공동선에 대한 암적인 존재가 바로 정의구현사제단입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대화로 문제를 풀 수 있음에도 외부세력이 개입하면 극한대결로 번지곤 하는게 우리 현실입니다. 밀양 송전탑 건설에는 정의구현사제단, 환경∙반핵∙노동단체 들이 다양하게 합세하여 일을 그르치고 있습니다. 이들은 밀양 송전탑이 신고리 3호기(원전)의 전기를 송전하는 시설이라는 점을 의식해 반대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밀양송전탑이 화력이나 수력발전소를 위한 송전탑이라면 밀양에 지어도 된다는 이야기인가요?
이들 갈등을 조장하는 세력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갈등의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이들이 갈등을 먹고 사는 세력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갈등이 있어야 그들의 존재감을 키우고 자신들의 영향력과 힘을 키울 수 있다고 믿는 세력입니다. 종교적 신념과 하등관계가 없는 4대강 문제를 반대하며 추기경에게 집단항명을 하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바로 그러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빛과 소금의 역할
예수님은 분명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어 이 세상을 맑게 만들고 그 결과 사회의 구조적인 불의를 없앨 수 있게끔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성화와 이웃사랑의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지 우리 개인 모두가 정치일선에 나서라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다윗집안에서 메시아가 출현하여 자신들을 억압하던 로마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아를 소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원은 이 세상의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수난을 당하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것도 결국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현세의 정치적 압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정치적 이용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결과였습니다. 지금 거룩한 미사시간의 강론대를 정치이야기로 채운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러한 희생과 거룩한 피의 희생을 바로 짓밟는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들 정치사제들은 “신앙이 양심이고 윤리의 문제라면 정치는 그 믿음을 실천하는 행동이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편리한 논리요 언어의 유희입니다. 한 가지 신부님께 여쭈어 보겠습니다. 우리 교우가 교회에 가서 미사성제에 참례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의 잘못된 모습이 있다면 회개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며 마음을 정화하기 위하여 교회의 미사성제에 참여한다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 거룩한 미사성제에서마저 교우들이 정부를 비판하고 한미FTA,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의 정치이야기를 들어야 합니까? 사제가 교우들에게 해주시는 강론이 사랑의 언어가 되어야 합니까? 저주의 언어가 되어야 합니까? 사제가 교우들에게 생명의 언어를 들려주어야 합니까? 죽음의 언어를 들려주어야 합니까?
정의구현사제단의 행위에 대하여 많은 신자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그들의 주장이 과격하고 우리의 현실과 다른 나라의 현실이 다름에도 그들 나름대로의 지정학적 이유에서 근거한 해방신학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추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해방신학은 교황청에서도 유물론적인 신학의 관점과 폭력을 용인한다는 점에서 배척하고 있지 않습니까? 2010년 12월에 일어난 사태를 보십시오. 정진석 추기경께서 ‘4대강 사업에 대하여 주교회의에서 반드시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정의구현사제단이 벌인 패륜적인 행위들은 평신도 신자들에게 광범위한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추기경께서 북한에 종교의 자유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하여 골수 반공주의자의 면모를 보였다고 하면서 대교구장에서 물러나라고 하는 하극상을 연출하였습니다.
참여정부 시절 정의구현사제단 162명의 신부들이 KAL폭파사건이 대한민국 정부의 사주로 행해졌다고 기자회견을 하였습니다. 이들이 하는 행태를 보면 이들이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것인지 김정일의 나라를 구현하겠다는 건지 잘 모를 지경입니다.
필자가 세상을 살아오면서 느낀 점은 이 세상에는 언제나 ‘불의가 가득한 이 사회를 당장 치유하지 않으면 내일이라도 세상이 망할 것’이라는 종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자신이 아니면 이 불의를 치유할 수 없다는 메시아적 망상을 가진 인간들이 무척이나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걸핏하면 세상에서 벌어지는 부정이나 비리를 침소봉대하고 이를 구조적 불의요, 총체적 부정으로 몰고 가서 비분강개한 어조로 사자후를 내뱉으며 소외된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이명박 정부에서도 박근혜 정부에서도 잘 하는 일도 있고 잘 못하는 일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소외된 사람들을 보호하고 배려하기 위한 복지에 많은 예산과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 하에서도 해외 자원개발과 무역자유화에 의한 수출증진, 일자리 늘리기 등 많은 바람직한 사업들이 행해졌습니다. 4대강 사업도 마무리되었고 이로 인해 가뭄과 홍수 피해를 많이 줄인 것도 사실입니다. 오로지 자기논리의 노예가 되어 반정부 선동, 파괴에만 몰두하는 인간들, 환경 이야기만 나오면 환경이 우상이 되어 인간의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환경만이 지상가치라고 떠드는 환경탈레반 들, 이들이 나라와 공동체를 파괴하는 바로 적 그리스도(Anti-Christ)입니다. 이들의 속내를 들여다 보면 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어지럽게 하여 자신의 세속적 명예욕을 충족시켜보고자 하는 추한 욕심으로 가득 차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진정 환경에 관심이 있다면 남이 안보는 곳에서 조용히 활동하는 겸손과 고 이태석 신부처럼 소외된 사람들을 조용히 돌보는 봉사와 헌신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천주교 사제들 중에도 겉멋에 빠져 자신들이 마치 세상의 불의를 구하는 메시아라는 망상에 집착하는 부류들의 사제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에는 노동자, 농민만 사는 것처럼 말만 하면 노동자, 농민을 내세우고 한미FTA를 반대하고 환경을 내세워서 나라의 안보는 뒷전인체 해군기지반대에 결사적으로 매달리는데 어디에서 이런 교리를 배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흔히 하는 이야기로 예언자적 사명 운운 하는데 지금이라도 성경책을 펴들고 구약을 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신명기에는 벼, 무화과, 포도를 수확할 때 과부, 고아, 이방인을 위하여 일부는 남겨두라는 가르침이 나옵니다. 그러나 유다에서 과부, 고아, 이방인이 소외되고 착취당할 때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분노를 이야기 하였습니다. 사제들이 마치 자신들이 시대의 불의를 질타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갖고 있는 양 착각하고 있는데, 지금이 고아와 과부가 착취의 대상이 되는 그러한 불의의 시대입니까?
흙탕물을 맑게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다
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은 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지혜에 대하여는 어느 것 하나 알지 못하는 인간들이 눈앞에 보이는 표피적인 현상에 취하여 일희일비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전혀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이 세상 어느 것도 바뀌게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을 관조하듯 바라보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흙탕물이 맑아지기를 기다린다면 세상을 어느듯 맑아질 것입니다. 먼저 자신의 마음을 평화롭게 가꾸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도록 하십시오.
오늘도 야외에서 시국미사를 드린다고 나대는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드리면서 이 글을 맺습니다.
“모든 것은 인간의 마음이 움직인다. 바뀌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다. 먼저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라. 그리고서 세상을 바꾸도록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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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시국미사는 통치자가 독재자가 되어서 국민들을 억압할때 어쩔 수 없이 특정계통, 즉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 나와서 드리는 미사나 집회인데 지금 이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환경이 어쩌구, 공포시대니 뭐니 하는데 정신병자들이에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지금이 공포시대냐고 물으면 이 사람 정신이 돌지 않았나 아래 위 훑어 볼겁니다.한심한 인간들, 저런 친구들한테 미사참례하고 강론때 강론 내용 수첩에 받아적은거 참 그것 또한 한심하죠.저 사람들 따라다니는 나이든 수녀들은 또 뭔가요? 내용이나 아는지 몰라요.신부라면 죄다 하느님 아들인줄 착각하는 것같아요
요새 겉멋이 든 신부들이 많습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하느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줄도 모르는 신부들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예언자적 사명을 수행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으니 한심합니다.
김원율님의 논리정연하고 정확한 지적에 크게 공감하고 찬사를 보냅니다. 대신학교 교수 강사진을 점검해 보고, 이런 계급투쟁논리를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변환시키는 위선자들을 색출해야 하는 것 아닌지요, 한국가톨릭교회 어른 여러분???
감사합니다. kesbene님. 요새 신학대학의 강사진 중 교구에서 쫓겨나서 강사로 가서 해방신학등 좌익교육을 하는 사제들이 꽤 있다고 합니다. 참으로 보통일이 아닙니다.
훌륭한 글에 감사드립니다. 감사님!~~
좋은 글 많이 올려 주셔요~
감사합니다, 루치아 자매님. 앞으로 종종 글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