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요16:16~22).
16절.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본 단락의 해석은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다. 이 말씀은 매우 어색해 모순처럼 보이는 말이다. “조금”이라는 시간을 나타내는 문구가 중복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조금"은 헬라어로"미크로스mikros"인데 남성 혹은 중성단수로“작은”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적음, 소량, 조금(고후11:16), 무의미함, 사소한 것, 짧은 거리(마26:39, 막14:35), 시간적으로 잠시 잠깐, 잠시 동안, 잠간, 잠시 후(마26:73,막14:70)을 말한다, 본 단락에는“조금”이라는 문구가 일곱 번이나 기록되어 있다. 본문 후에 나오는 조금은 장차나, 미래를 표현해야 적당한 말이다. 이 두 문장은 시대적 차이가 있는 말을 합친 문장이다. 즉 앞에 나오는 조금은 예슈아 그리스도의 죽음을 말하는 것은 틀림없다. 주님의 죽으심으로 제자들이 더 이상 주님을 보지 못할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후에 나오는“조금”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는 것인데 다음과 같은 해석들이 있다.
① 어떤 사람들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삼일 동안 제자들을 떠나 계시다가 부활하신 후 다시 볼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② 어떤 사람들은 주님께서 하늘의 아버지께로 가셨다가 후에 다시 오시는 공중 재림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③ 어떤 사람들은 육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오순절 날에 성령을 받고 이제는 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본인은 이 해석에 공감한다. 그러나 어떤 것을 적용해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두 그렇게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17절.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현재 우리도 혼란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당시의 제자들도 주님의 하신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여 서로 말하며 혼란스러워 하였다. 그 이유는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셨기 때문이다.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두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18절.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 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못하노라 하거늘
제자들은 서로 이 조금 있으면 이란 말씀이 무슨 뜻인가를 물었다. 이 말씀은 오늘날에도 학자들 간에 서로 다른 해석들을 하고 있다. 이 말씀은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내용 중 한 가지에 속할 것이다.
19절. 예슈아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예슈아 주님께서 제자들이 묻고자 함을 아셨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그러나 주님은 직접적으로 그들의 문제에 답하시지 아니하셨다.
20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그리고 이 물음에 대하여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 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제자들은 슬퍼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한다는 말이다. 또한 이로 인하여 너희는 잠시 근심하겠으나 주님의 부활하심과 성령님의 오심으로 인하여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될 것을 말씀하고 있다.
21절.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이와 같은 기쁨은 산모가 아이를 출산할 시기가 되면 해산하게 될 고통을 생각하며 근심하게 되지만 아기를 출산하게 되면 그 고통을 쉽게 잊어버리고 다시 기억하지 않는 것과 같이 제자들도 조금 있으면 주님을 보지 못함으로 가졌던 슬픔이 다시 주님을 봄으로 슬픔을 잊어버리고 기뻐할 것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탄생을 위해서는 반드시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 필연성을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 고통은 잠시 뿐이요 이 후에는 탄생의 기쁨 만을 간직하게 될 것이다(롬6:9-10). 구약 성경에 대언자들은 이스라엘이 슬픔과 어려움이 직면해 있을 때 해산하는 여인에 비유하였다
(사26:17-19, 66:7-14, 렘4:31, 6:24, 호13:13-15).
22절.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한다는 것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당시 제자들의 마음 상태를 말하며,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는 것은 오순절 날 제자들이 성령님과 권능을 선물로 받고 주님의 부활 하심을 기쁨으로 전하는 것을 출산의 기쁨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빼앗다"는 헬라어로“아이로airo”인데 영어로"taketh away"이다. 이 단어의 헬라어는 모두 "제거하다, 없애다, 폐기하다, 빼앗다" 라는 뜻으로 사용 되었다. 존 다비 역시도“제거하다, 빼앗다”의 뜻을 가진“takes away”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이 단어는 현재형, 미래형으로 모두 사용이 가능한 단어로(마26:18, 27:63, 막9:31, 눅3:9) 현재에도 빼앗을 자가 없고 미래에도 빼앗을 자가 없다는 약속이요 보증인 것이다. 요한복음10:28, 29절에는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하신 말씀과 동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