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한 묘소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도장(道章), 호는 현주(玄洲). 서울 출신. 부호군 이순장(李順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령 이계(李啓)이다. 아버지는 좌의정 月沙 이정구(李廷龜)이며, 형 白州 明漢(백주 명한) 어머니는 권극지(權克智)의 딸이다.
타고난 자질이 준수하고 총명해 신동으로 불렸다 한다. 1612년(광해군 13) 진사시에 합격하고, 1621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나가 벼슬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과 함께 승문원주서를 거쳐 홍문관정자에 승진되면서부터 풍부한 학식이 정부 관료들간에 널리 인정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공주로 인조를 호종했으며, 환도한 뒤에는 전란으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절용애민(節用愛民)의 정치를 펼 것을 진언하였다. 그 뒤 다시 수찬·정언·교리 등의 문관 요직에 있으면서 상소나 혹은 왕을 모신 자리에서 정사와 왕실의 잘못을 지적해 때로는 왕의 비위를 거슬리기도 하였다.
1626년 수찬으로서 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왕을 모신 자리에서 내수사를 파해 국가 공용에 보탬이 되도록 주청하였다. 1632년 신진 유신들과 함께 인조의 사친(私親)인 정원군(定遠君)의 왕호추숭(王號追崇)을 반대했다가 파직당하기도 하였다.
그 뒤 다시 등용되어 충원현감·진주목사·예조참의 등의 내외 관직을 역임하였다. 1643년 왕세자가 청나라 심양(瀋陽)에 볼모로 갈 때 세자우부빈객 동지중추부사로 호종해 보좌했으며, 이듬해 귀국해 형조참판으로 비변사당상을 겸임하였다. 아버지 이정구, 형 이명한(李明漢)과 함께 3소(三蘇)라 일컬어졌다. 뒤에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에 조예가 깊었으며, 20여 년간 관계에서 활동하면서 『동사록(東槎錄)』·『진양록(晉陽錄)』·『심관록(瀋館錄)』·『방축록(放逐錄)』 등의 시를 남겼다. 시문집으로는 『현주집』 7권이 있다.
<윤조 묘소>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예문관 검열 등을 지냈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자는 태숙(泰叔)이다. 인조 때 좌의정·우의정을 지낸 이정구(李廷龜)의 증손자, 형조참판을 지낸 이소한(李昭漢)의 손자, 도승지·예조참판을 지낸 이은상(李殷相)의 아들이며, 병조참의를 지낸 박안제(朴安悌)의 외손자이다. 1660년(현종 1) 진사시에 이어 16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에 제수되었고, 1668년 설서(說書)·주서(注書)를 거쳐 1669년(현종 10)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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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상 묘소>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동둔(東芚), 자는 세경(世卿)이다. 인조 때 좌의정·우의정을 지낸 이정구(李廷龜)의 손자, 형조참판을 지낸 이소한(李昭漢)의 아들, 현종 때 대사간·도승지를 지낸 이은상(李殷相)의 동생이다. 1642년(인조 20) 사마시에 이어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과 지평·부교리·헌납을 지냈고, 1664년 사간원 헌납과 홍문관 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에 제수되었으나 고사하여 파직되었다.1665년 다시 등용된 뒤 이조정랑·응교·집의와 세자시강원 사서(世子侍講院司書) 등을 거쳐 1668년 사복시정(司僕寺正), 1669년 홍문관 부응교와 성균관 사성, 종부시정(宗府寺正)을 지내고 외직인 능주목사(綾州牧使)로 부임하였다가 내직으로 복귀하여 응교를 지냈다. 1672년(현종 13)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겸임한 뒤 성균관 사예(司藝), 장악원정(掌樂院正), 사헌부 집의, 봉상시정(奉常寺正) 등을 지냈으며, 사후에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시문에 능하고 서예에도 뛰어나 특히 초서(草書)를 잘 썼다.
<이 명신 묘소>
<이 은상 묘소>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열경(說卿), 호는 동리(東里). 조선 중기 한학 4대가의 한 사람인 정구(廷龜)의 손자로, 소한(昭漢)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여주이씨(驪州李氏)로 좌찬성 상의(尙毅)의 딸이다.
할아버지 정구와 큰아버지 명한(明漢)은 모두 제학 또는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아버지와 사촌형제들이 모두 문장에 뛰어나 일가가 사림을 이루었다.
1651년(효종 2)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설서로 있다가 문과중시에 장원을 하였다. 1656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660년(현종 1) 교리로서 통정대부의 품계에 오르고 1663년 승지가 되었으며, 1666년 대사간, 1668년 도승지가 되었다.
1674년 인성왕후가 죽자 자의대부복상문제를 논할 때 형조판서로서 대공제(大功制)를 주장하였다. 같은 해 현종이 죽자 애책문(哀冊文)을 찬진한 바 있으며, 송시열(宋時烈)이 복상문제로 유배당하자 벼슬에 나가지 않고 관동지방을 유람하였다. 김만중(金萬重)의 장인이며, 저서로는 ≪동리집≫과 ≪동리소설≫이 남아 있다.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우리나라의 문치(文治)가 휴명(休明)하여 수백 년 동안 논리를 세워 글을 쓴 사람이 정말로 시대마다 부족하지 않았지만, 여러 세대를 통하여 나라의 융성을 구가하여 한 가문이 문단(文壇)의 예찬을 독차지한 것은 오직 이 동리(李東里) 공의 가문을 일컫고 있다. 공의 6세조 저헌(樗軒) 문강공(文康公) 이석형(李石亨)은 과거에 세 번 장원하고 세조(世祖) 때에 수문제학(修文提學)이 되었으며, 할아버지 월사(月沙) 문충공(文忠公) 이정귀(李廷龜)는 명(明)나라에 변무(辨誣)한 주문(奏文)을 지어 명성이 중국에 진동하였고 선조(宣祖) 때에 대제학(大提學)을 지냈으며, 큰아버지 백주(白洲) 문정공(文靖公) 이명한(李明漢)은 뒤를 이어 인조(仁祖) 때에 대제학이 되었으며, 아버지 현주(玄洲) 참판공(參判公) 이소한(李昭漢)은 동시에 휴가를 받아 호당(湖堂)에서 글을 읽었으며, 사촌형 청호공(靑湖公) 이일상(李一相)이 또 뒤를 이어 선왕조에서 대제학이 되었으며, 공도 사촌 아우 정관공(靜觀公) 이단상(李端相)과 같이 휴가를 받아 호당에서 글을 읽고 또 제학이 되었으며, 공의 아우 동곽공(東郭公) 이홍상(李弘相)은 일찍이 과거에 합격하고 아우 동둔공(東芚公) 이유상(李有相)과 같이 홍문관(弘文館)에 출입하면서 모두 문장으로 이름이 저명하였으며, 매간공(梅澗公) 이익상(李翊相)도 뒤에 제학이 되었는데, 이처럼 가문이 찬란한 바는 옛날에도 없었다. 그러나 공이 가끔 사람들의 훼방을 받았고 또 만년에 들어 조그만 기회를 만났으므로 결국 문단의 맹주가 되어 위로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계승하지 못하였으니, 여론이 지금까지 한스럽게 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