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5) - 중종의 건강법 (2)
오늘도 장동민 한의사와
자세한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전화연결 - 인사 나누기)
Q1. 자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
중종의 건강법을 알아 본 다구요?
네 맞습니다. 사실 중종 이야기를 하면 꼭 한번 언급하고 지나가야하는 인물이 있는데요, 혹시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조광조라는 대답 듣고) 네 일단 많은 분들이 ‘조광조’를 떠올리지요. 중종이 공신들을 억누르고자 특급으로 승진시켜 중용했던 인물이지요. 하지만 너무나 이상적이고 올곧은 말만 해서 결국에는 중종에게 버림받는 비운의 인물입니다.
자 하지만 이러한 조광조보다 더욱더 유명한 인물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인데, 이란의 경우에는 이 사람이 주인공인 드라마의 시청률이 무려 80%에 달했다고 하지요.
Q2. 아 ‘대장금’이군요!
안 그래도 왜 장금이 얘기가 나오지 않나 궁금했습니다.
대장금이 왕조실록의 기록에도 나오나요?
네 맞습니다. 국내외적으로 유명한 드라마 <대장금>은 조선 중종시대의 실존인물인 의녀 장금이의 일생에 관하여 작가의 허구적 상상이 결합되어 완성된 작품입니다. 실제 <왕조실록>에 실제 기록되어 있는 장금이의 기록은 다음과 같은데요. 최초로 중종10년에 두 번, 17년에 한 번, 19년에 한 번, 28년에 한 번 나타나고, 그 다음에는 무려 11년 동안이나 보이지 않다가, 중종이 숨을 거두는 중종 39년(1544년)에 기록이 집중되어 나타납니다.
물론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 동안에는 중종의 몸이 건강을 잘 유지하였기에, 이에 따라서 장금의 기록도 나타나지 않았을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띄엄띄엄 나타나는 기록 때문에, 역사 속의 장금이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의녀들이 <장금>이라는 호칭을 돌려서 사용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Q3. 어쨌든 장금이에 대한 중종의 신뢰도가 매우 높았나 봅니다.
이렇게 왕조실록에까지 기록되어 있을 정도니까요.
네 실제로 중종 19년의 기록에서부터는 단순히 ‘장금’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앞에 큰 대자를 붙여서‘대장금’이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특히 중종이 사망한 중종 39년의 기록들을 보면 중종이 대장금을 무척 신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요, 39년 1월의 기록을 보면, 왕이 자신이 앓던 해수증에 사용할 처방을 장금이와 의논하라고 어명을 내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중종이 자신의 몸에 투약할 처방을 어의와 의논하는 것이 아니라 의녀인 장금이와 상의하라고 했으니, 사실상 어의보다 장금이를 더 높게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그 열흘 후에 치료를 성공적으로 잘 했다고 장금이에게 상을 내리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실력 또한 뛰어 났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Q4. 대장금이 의술 실력 또한 뛰어났었군요?
혹시 다른 기록도 있는지요?
네 있습니다. 장금이가 중종의 수면상태와 소변 그리고 대변 상태를 소상하게 언급하는 부분이 <왕조실록>에 나오는데, 중종은 자신의 병을 '여의'인 장금이 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 "내 증세는 여의가 안다."라고 직접적으로 콕 집어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요, 수많은 의관과 의녀 중에서 자신의 병을 가장 잘 아는 이가 장금이라고 밝히는 것을 보면, 중종의 신뢰도가 무척 컸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장금이가 다른 어의의 진단과 처방을 받지 않고 직접 왕에게 처방을 내리고 있는 것 또한 장금이의 지위와 신뢰도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라 말할 수 있는데요, 기록을 보면, “여의 장금의 말이 ‘지난밤에 오령산을 달여 들였더니 두 번 복용하시고 삼경에 잠이 드셨습니다. 또 소변은 잠깐 통했으나 대변은 전과 같이 통하지 않아 오늘 아침 처음으로 밀정(蜜釘)을 썼습니다.’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Q5. 아 ‘의녀’가 아니라 아예 ‘여의’라고 부르고 있군요!
남존여비 시대였던 조선시대에 이 정도면
정말 대단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중종 39년 11월 15일에 중종이 사망한 이후로는 더 이상 장금이의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사실 조선시대에 진료하던 왕이 사망하면, 그 치료를 담당했던 어의는 귀양을 가거나 죽음을 당했습니다. 나중에 나올 얘기지만, 선조의 질병을 훌륭하게 관리하였던 어의 허준도 일단 귀양은 갔다가 아들인 광해군이 불러서야 간신히 복귀할 수 있었거든요.
아마도 장금에게는 무언가 변고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가 그래서 혹시나 중종 사망이후에 다음 대에 나오지는 않는지 계속 찾아봤거든요. 그랬더니 광해 5년(1613년)의 기록을 보면, “장금(長今)이란 자는 73세의 여인이었다. 공초에 연루되어 국문을 받았다. 왕이 압슬형을 실시하라고 명하니, 대신이 아뢰기를, "비단 나이만 70이 넘었을 뿐만 아니라 모습도 수척해서 마치 귀신 모습 같으니 아무래도 국문을 실시하지 못할 듯합니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오기는 합니다. 하지만 중종 때의 장금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Q6. 아 혹시 장금이가 중종 사망 시에
뭔가 실수를 저질렀을까요?
그래서 불이익을 당한 것일까요?
사실 기록상으로 볼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왕조실록에는 장금이의 실수나 불이익 등의 내용이 아예 언급되어 있지가 않거든요. 중종 39년 10월 28일의 기록을 보면, 왕이 “평소에 심열증(心熱證)이 있는데, 이즈음 하기(下氣)가 오래도록 통하지 않아 피곤하고, 이것까지 겸해서 발작하기 때문에, 마음먹은 대로 말을 할 수가 없다.”고 호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실 이때 겨울철에 난데없는 천둥이 쳐서 왕이 심히 두려움을 느꼈는데, 두려움의 원인이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의학에서 심은 마음을 다스리는 장부이기 때문에, 이 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습니다. 더군다나 하기가 오랫동안 통하지 않았다는 것은 대변을 오랫동안 보지 못했음을 말한 것인데, 대변이 막혀 상부 쪽으로 열이 올라가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어서 10월 30일에는 다른 증상들이 다 사라지고 심열 증상만 남아있다고 얘기하고 있어, 변비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요. 이어서 다음 날인 11월 1일에는 증상이 심하지 않다고 얘기하며, 2일에도 심하지 않은데, 그동안 계속해서 의녀가 중종을 진료했음을 얘기한 대목이 나옵니다.
Q7. 중종이 변비가 있었군요.
변비 때문에 사망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중종의 사망원인은 뭔가요?
중종은 11월 3일부터 증상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왕이 심열과 노열(勞熱)이 수시로 왕래하면서 수면이 불안하다는 기록이 나오는데요. 이는 실열(實熱)뿐만 아니라 허약하고 피곤함으로 인한 열증도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종도 “내가 지난봄부터 심열이 났는데 그 때는 오래지 않아 그쳤다. 그런데 지금은 심(心)에 노열(勞熱)이 있어 치유가 늦어지므로 몸이 매우 피곤하다.”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 혀가 갈라지고 입이 마르고 몸에 열이 나고 손바닥에도 번열이 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진액이 마르고 음혈(陰血)이 부족해졌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11월 4일부터 증상이 심해지는데, 왕의 증상이 시시각각 변하므로, 어의가 왕과 가까운 곳에서 대기하기 시작했고요.
다음날인 5일에는 심열과 갈증이 없어지지 않았으며, 여기에 더해 밥을 먹지 못해 죽만 먹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6일에는 맥의 변화는 있지만 증상은 차도가 없었으며, 9일의 기록에는 오히려 증상이 더 심해졌다고 적혀있습니다. 이어서 10일과 11일의 기록에도 차도가 없는데, 심열 증상과 더불어 기운이 너무 없다는 것이 적혀있습니다.
Q8. 중종의 병세가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군요.
그런데 말끝마다 ‘심열’이라는 말이 계속 나오는데이 말이 무슨 뜻인가요?
말 그대로 ‘심’에 ‘열’이 있다는 뜻인데요. 여기서 심은 ‘마음 심’입니다. 실제 11월 14일에 드디어 왕이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왕위를 물려주려는 대목이 나오는데, 바로 이 때 이 병의 원인이 언급됩니다. 이렇게 심열증세가 오래도록 회복되지 않는 이유는, 분명 무언가 중종이 마음 쓰는 일이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나온 것이지요. 그 말에 이어서 심열은 모두 심려(心慮) 때문에 나오는 것이니 잡념을 없애야 회복된다고 얘기를 나눕니다.
이것이 바로 한의학적인 심(心)의 개념인데요. 심을 단순히 혈액을 공급하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 사유 능력을 담당하는 ‘마음 심’으로 보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심열증이 많이 생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데요, 당연히 치료도 마음의 불을 끄고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처방을 응용하게 되어있습니다. 중종은 14일 오후부터 혼수상태에 빠졌다 깨어났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15일에 사망합니다.
Q9. 결국 장금이는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군요.
마지막으로 중종이 또 앓았던 특이한 병은 없었나요?
조선시대 왕 중에서 잇몸 질환을 앓은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중종입니다. 중종 23년 윤 10월 19일의 <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요즈음 시사(視事)하려 하였으나 잇몸이 또 부었으므로 시사하다가 더 아프면 일본의 사신을 접견하는 것도 물려야 할 것인데, 번번이 물려 거행할 수 없으므로 더 조리하여 접견하려 하였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시 말해 잇몸이 부어서 업무를 볼 수 없다고 얘기한 것이지요.
이어서 39년 1월 17일의 기록에도 “내가 요즈음 이를 앓는 증세는 이미 나았으나, 잇몸이 아직 아프고 기침병도 생겨서 요즈음은 경연(經筵)을 열지 못하겠다.”라고 얘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비록 치통은 나았지만, 잇몸은 여전히 아프다는 것을 얘기하여, 분명하게 치통과 다른 잇몸질환을 앓고 있음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Q10. 조선시대에도 치과 질환은 있었겠죠.
치료는 어떻게 했는지요?
한의학적으로는 경락적으로 연결된 위나 대장에 열독이 침입한 경우나, 비뇨생식 계통이 허약해진 것, 또는 비위가 허약해진 것 등을 연관 원인으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종 39년 6월 29일의 기록에는 왕이 “이가 빠지면 음식을 먹기 어렵겠고 잇몸도 붓고 진물이 나오는데, 약으로 고칠 수 있는가?”라고 묻자 신하들이 치료법을 제시하는데요. 어의들은 양치하는 처방과 복용하는 처방, 그리고 이에 바르거나 물고 있는 처방들을 제시하는데, 아쉽게도 처방에 사용되는 약재들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고 아뢰는 장면이 나옵니다.
실제 휴식이나 부실해진 영양을 충분히 공급해주면 치아나 잇몸 치료경과가 매우 좋아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이웃나라 일본의 경우에는 한양방 병행치료가 상당히 보편적으로 실시되고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원인에 따라 관련 한약을 병행 복용하면 빠른 회복에 도움이 됩니다. 특히 양약을 함부로 사용하기 어려운 임신부의 경우에도 상당히 유효하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