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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의 사찰과 문화유산 원문보기 글쓴이: 광나루
전남 영암 도갑사 written by 한국의 사찰과 문화유산 |
산악회의 월출산 산행을 따라서... |
월출산은 한 3년 전에 안내 산악회를 따라서 다녀 온 곳인데, 당시는 구정봉에 문화재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관심이 없어서 그냥 지나쳤었습니다. 월출산 구정봉 주변에는 국보와 보물이 각 한 점씩 있고, 도갑사에도 국보와 보물이 여러 점 있어서 답사를 위해서 회사 산악회를 따라 나섰습니다. |
월출산은... |
월출산은 오랜 세월동안 풍화와 절리작용을 통해 깍여나가 갖가지 모양의 기암괴석을 이루고 있어 그 절경을 흔히 "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리우고, 달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곳이라고 하여 월출산이라고 한답니다. 월출산하면 하춘화가 부른 영암아리랑이 생각이 나는군요. "달이 뜬다 달이 뜬다 월출산 천황봉에 보름달이 뜬다."
월출산 등반의 출발점은 주로 천황사에서 시작하며, 어느 정도 올라가면 구름다리가 나옵니다. 위 사진의 구름다리를 건널때는 아찔합니다. 이후에는 계속해서 직벽의 철계단들을 한참이나 올라야 합니다. 정상인 천황봉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구정봉, 향로봉, 장군봉, 매봉, 시루봉, 주지봉, 죽순봉 등 기기묘묘한 암봉으로 거대한 수석 전시장 같습니다.
아래의 천황봉에서 찍은 사진에서 맨 끝의 중앙에 볼록한 부분이 향로봉이며, 바로 오른쪽에 구정봉있습니다. 답사할 곳은 구정봉에서도 한참을 내려 간 오른쪽 끝 머리 부분입니다. |
▲ 천황봉에서 바라 본 구정봉 방향 |
▲ 베틀굴 |
구정봉 삼거리에서 직진하면 도갑사로 내려가는 길이고 오른쪽으로 꺽어지면 전방에 베틀굴이 보입니다. 이 굴은 임진왜란때, 이 근방에 사는 여인들이 난을 피해 이곳에 숨어서 베를 짰다는 전설에서 생긴 이름이라고 합니다. 삼각형 모양으로 생긴 베틀굴은 깊이가 한 10여 미터 남짓합니다.
이 곳을 지나면 갈림길이 나오고 이정표가 있습니다. 왼쪽은 다시 도갑사로 내려가는 길이고, 오른쪽에는 구정봉이 있으며, 직진으로 가면 마애석불로 가는 길입니다. 여기부터는 살짝 내리막길이며,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아서인지 등산로가 좋지 않습니다. 20 여분 정도 내려가면 왼쪽 방향의 저 멀리에 석탑이 보입니다.
왼쪽으로 꺽어져 내려가야 하나 이정표가 없어서 지나 갈 수도 있습니다. 왼쪽으로 난 등산로 흔적을 잘 보고 내려가야 합니다. 급경사를 내려가면 왼쪽으로 월출산 마애여래좌상(月出山 磨崖如來坐像)이 있습니다. |
국보 144호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
마애여래좌상 주변은 넓지 않으며, 앞에는 제단 같은 넓적한 돌이 놓여 있습니다. 마애여래좌상은 올려 보아야 하는 높이에 있습니다. 아래 오른쪽의 사진처럼 마애여래좌상 무릎 오른쪽에 작은 동자상이 있으나 알고 가까이서 자세히 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희미해서 잘 보이질 않습니다. |
▲ 마애여래좌상 전경 |
▲ 좌측 불그스레한 부분에 동자상이 새겨짐 |
전라남도 영암군 월출산 구정봉의 서북쪽 암벽을 깊게 파서 불상이 들어 앉을 자리를 만들고, 그 안에 높이 8.6m의 거대한 불상을 만들었다. 불상의 오른쪽 무릎 옆에는 부처님을 향하여 예배하는 모습을 한 높이 86㎝의 동자상을 조각하였다.
머리 위에는 크고 높은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고, 신체에 비하여 비교적 큰 얼굴은 근엄하고 박력있는 느낌을 준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있는 옷은 얇게 표현하여 신체의 굴곡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옷주름은 가는 선으로 새겼는데 불상이 앉아 있는대좌 아래까지 흘러 내리고 있다. 전체적으로 섬세한 옷주름과 양감있는 신체의 표현에서 탄력성과 박진감이 잘 나타나고 있다.
당당한 신체에 비하여 팔은 가늘게 표현하고 있으며,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를 향하게 하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무릎 위에 올린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광배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따로 조각하였으며, 그 안에 연꽃무늬와 덩굴무늬를 새겨 넣고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새기고 있다.
전반적으로 안정감과 장중한 인상을 주며, 섬세하고 정교한 조각기법과 더불어 박진감이 잘 나타나고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짐작된다. |
이름 모를 석탑은 위태위태하고... |
마애여래좌상을 등지고 오른쪽을 바라보니 저 멀리에 석탑이 하나 보이더군요. 저것이 용암사지 삼층석탑이로구나 생각하고 가보니 안내판도 없고, 사전에 미리 보았던 삼층석탑과는 모양이 다르더군요. 이상하다... 대부분의 석탑은 기단 위에 있는데, 이 석탑은 계란 모양같은 자연석 위에 올려 놓아서 불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자연석 윗 부분이 평평하지도 않은데, 올려 놓기도 잘 올려 놓았더군요. 자세히 보니 작은 돌들을 바위와 석탑 밑 바닥에 끼워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부분 부분 약간의 시멘트를 발라 놓았습니다. |
▲ 석탑 앞에서 바라 본 마애여래좌상 전경 |
▲ 용암사지 전경 |
월출산 용암사지 삼층석탑은 못찾을 뻔했습니다. 이름 모를 석탑을 돌아나오며, 이 석탑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 있다는 말인가? 다시 마애여래좌상 앞으로 돌아 나오니 사람들이 몇 분 계셨습니다. 그 분들은 등산객이 아니라 간혹, 이 곳에 와서 치성을 드린다고 하셨습니다.
잠시 그 분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아주머니께서 아래쪽에 석탑이 하나 있다고 하시더군요. 마애여래좌상을 등지고 왼쪽을 보니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습니다. 조금 내려가 보니 넓은 공간이 나오더군요. 바로 이 곳이 용암사지였습니다. |
보물 1283호 월출산 용암사지 삼층석탑 |
용암사지는 그리 넓지는 않았습니다. 바닥에는 절터였다는 흔적인 주춧돌들이 일렬로 땅에 박혀 있었으며, 왼쪽에는 샘물터와 주변에 석조물 몇 점이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석탑을 찾아보니 용암사지 끝머리의 언덕 위에 월출산 용암사지 삼층석탑이 있었습니다.
아래 왼쪽 사진의 석탑 아래 부분은 흙이 아니고 큰 바위입니다. 바위 위에 석탑이 놓여있습니다. 이 석탑 위로 올라가는 길은 없습니다. 왼쪽의 경사진 곳으로 어렵사리 올라갔습니다. 바위가 미끌미끌하여 잘못하면 미끄러집니다. 내려 올때도 잘 내려와야 합니다. 석탑 주위는 석탑을 제외하고 공간이 협소합니다. |
▲ 월출산 용암사지 삼층석탑 전경 |
▲ 월출산 용암사지 삼층석탑 기단 부분 |
위의 큰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석탑 사진을 가로로 찍을 거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입니다. 낭떠러지 끝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겨우 세로로 찍을 수 있었습니다. 석탑은 부분적으로 떨어져 나간 곳이 있었으며, 석재와 석재 사이가 약간 뒤틀린 곳이 있었습니다. 아래의 자료를 보면 무너진 석탑을 1966년도에 복원해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
용암사는 기암괴석이 많아 남쪽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월출산의 구정봉 아래 있다. 300평에 가까운 부지에 수많은 기와조각들과 주춧돌이 남아 있어 건물이 있던 자리임을 알게 한다. 1955년 ‘용암사’라고 쓰인 기와가 출토되어『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용암사’임을 알게 되었으나 구체적인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중심 건물터 남동쪽에 있는 이 탑은 일명 ‘탑봉’이라 불리는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전체의 무게를 받치는 기단을 2단으로 두었으며, 그 위로 3층의 탑신을 쌓아 올렸다.
둘레에 구역을 조성한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겨 두었다. 기단의 윗면에는 높직한 괴임 2단을 별도의 돌로 끼워 두었는데, 이 가운데 1매가 없어져 1966년 복원공사를 하면서 새로이 보충해 놓았다. 탑신의 1층 몸돌은 2매의 돌로 구성하였고, 2·3층 몸돌은 각각 1매로 하였으며, 각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1·2층은 2매로, 3층은 1매로 구성하였으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 역시 1층은 5단, 2층은 4단, 3층은 3단을 두어 한 단씩 줄어들고 있다. 윗면 모서리는 석탑에서는 흔치 않게 두툼하게 표현하였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다.
1966년 무너진 석탑을 다시 세울 때, 아래층 기단에서 백자사리호 1점, 금동보살좌상 1점, 청자대접 1점, 사리 32과, 철편 11점 등이 발견되었다. |
도갑사를 향해서... |
이 곳은 도갑사로 바로 내려 가는 길은 없습니다. 다시 구정봉으로 올라와서 하산해야 합니다. 다시 돌아 나오며 일행들과 벌어진 1시간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뛰다시피하며 하산을 서둘렀습니다.
서두르다가 넘어지고, 깨지고, 도갑사의 뒤편까지 내려와서야 겨우 직원들 후미를 따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도갑사 경내의 여러 곳을 둘러 보아야 하는데, 시간이 될런지... 걱정이 앞서더군요. |
보물 1395호 도갑사 도선·수미비 |
도갑사 뒷 편으로 내려오면 넓은 담장 안에 있는 큰 비각이 보입니다. 이 비각 안에 있는 것이 얼마 전에 보물 1395호로 승격(2004.1.26)된 도갑사 도선·수미비입니다. 보물로 승격된지 얼마되지 않아서인지 이전의 유형문화재였던 안내판이 아직 교체되지 않았더군요.
도갑사 도선·수미비는 비각도 크게 지어 놓았으며, 귀부(거북모양의 받침)와 비신도 굉장히 큽니다. 이 석비를 건립하는데 18년이나 소요됐다고 하는군요. 그러나 귀부의 조각은 정교하지 않고 두리뭉실 합니다. |
▲ 도갑사 도선·수미비의 전경 |
▲ 도갑사 도선·수미비 |
도갑사 도선·수미비는 귀부, 비신, 이수를 구비한 석비로 도갑사의 부도전 부근에 건립된 보호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승려인 도선국사와 조선시대 수미왕사의 행적을 기록한 높이 517㎝ 규모의 석비이다.
귀부의 머리는 오른쪽으로 약간 튼 형태인데 입에는 상·하 8개의 이빨로 여의주를 꽉 물고 있는 형상이다. 코는 큼직하며, 반구형의 양 눈은 부리부리하게 표현하였다. 등에는 전형적인 귀갑문 대신 평행 사선문(斜線紋)으로 정연하게 음각하였다.
이 석비는 1653년(조선 효종 4)에 건립된 것으로 우선 규모 면에서 다른 비석과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 아울러 각부의 양식에서 귀부는 다른 예와는 달리 귀갑문 대신 평행 사선문으로 이를 표현하고 있다.
비신 역시 조성재료가 대리석이라는 점 외에도 양 측면에 조각된 운룡문은 매우 힘찬 기상과 율동감을 지니고 있어 당대 최고 수준의 작풍을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석비의 건립기간이 18년임을 알려주고 있어 이 방면 기술사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대부분의 석비가 1명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에 비해 도선과 수미선사를 표방하고 있어 이 역시 독특한 예라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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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갑사 도선·수미비 왼쪽에 담장을 같이 하고 있는 곳이 도갑사 부도전입니다. 여러 모양의 부도들이 2열로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부도들이 모두 잘 생기고 멋있더군요. |
▲ 부도전 입구(진화문) |
▲ 부도전 |
보물 89호 도갑사 석조여래좌상 |
부도전에서 조금 내려오면 오른쪽에 계단이 있습니다. 이 곳으로 올라가서 용화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미륵전이 있습니다. 이 미륵전 안에는 보물 89호인 도갑사 석조여래좌상(道岬寺 石造如來坐像)이 있습니다. 이 불상은 몸체와 광배가 하나의 돌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불상과 받침돌은 모서리에 붙인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서로 다른 돌인 것 같습니다.
아래 오른쪽 사진의 광배 위를 보면 불상 모습과 똑같은 작은 부처가 맨 위 중앙에 하나, 조금 밑으로 양 옆에 하나씩 모두 세 개의 부처가 새겨져 있습니다. 사진에서는 작아서 잘 안 보일 겁니다. |
전라남도 영암군 도갑사의 미륵전에 모셔져 있는 있는 석조불상이다. 이 불상은 몸체와 광배가 하나의 돌로 조각되어 있어서 마치 바위에 직접 불상을 새긴마애불과 같은 기법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를 큼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얼굴은 타원형이며 도드라진 눈덩이, 넓적한 코, 두터운 입술은 강건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이다. 넓은 어깨, 평평한 가슴, 단순한 몸의 굴곡 등은 생동감이 없는 경직된 모습이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채 왼쪽 어깨에서 겨드랑이로 걸쳐 입고 있으며 몇가닥의 옷주름이 투박하게 표현되었다.
갸름한 타원형 광배의 가운데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꼭지와 머리 양 옆에 각각 작은 부처가 표현되었다. 광배에 새겨진 조각은 대체적으로 생략이 강하고 치졸한 면도 보인다. 불상을 모시기 위해 만들어 놓은대좌는 밋밋한 4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본래는 연꽃무늬를 새긴 8각형의 대좌였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다소 경직되고 형식화된 수법을 보여주지만 얼굴표정에서 훈훈한 정감을 느끼게 하는 불상이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투박하고 생략이 강한 고려적 요소를 충실히 보여주고 있는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
도갑사는... |
▲ 미륵전 |
▲ 명부전 |
▲ 국사전 |
도갑사(道岬寺)는 월출산에 있는 절로, 신라말에 도선국사가 지었다고 하며 고려 후기에 크게 번성했다고 하며, 원래 이곳은 문수사라는 절이 있던 터로 도선국사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인데, 도선이 자라 중국을 다녀온 뒤 이 문수사터에 도갑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 뒤, 수미·신미 두 스님이 조선 성종 4년(1473)에 다시 지었고, 한국전쟁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타 버린 것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도갑사는 전남 문화재자료 7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미륵전에서 도갑사 본 경내로 내려오면 주춧돌 들만 남아 있는 절터들이 여기 저기 많습니다. 내려오면서 보면 오른쪽에는 명부전이, 중앙에는 대웅보전의 뒤가 보이고 왼쪽 끝에는 국사전이 있으며, 국사전 옆에는 수미왕사비각이 있습니다. |
▲ 수미왕사비각 |
▲ 수미왕사비의 이수 |
▲ 수미왕사비의 귀부 |
수미왕사비각 안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52호인 도갑사 수미왕사비가 있습니다. 귀부의 머리는 거북이 아니라 용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귀부와 비는 작은 편으로 귀부의 조각은 정교하지 않고 많이 닳아 있습니다.
도갑사 경내 중앙에는 대웅보전이 있으며, 앞에는 괘불(법당 밖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거행할 때 걸어 놓는 탱화)을 거는 괘불석주가 양 옆으로 있습니다. 대웅보전의 정면 20 여미터 전방에는 도갑사 오층석탑(전남 유형문화재 151호)이 있으며, 오층석탑 바로 옆에는 도갑사 석조(전남 유형문화재 150호)가 있습니다. |
▲ 대웅보전 |
▲ 도갑사 오층석탑(보물로 승격됨) |
도갑사 오층석탑이 보물 1433호로 승격되어... |
문화재청(청장 유홍준·兪弘濬)은 지방지정문화재였던 전남 영암군 소재 도갑사 경내에 있는 「도갑사오층석탑」을 국가지정 문화재인 보물 제1433호로 승격, 지정 하였다고 14일 밝혔다. 1987년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151호로 지정된 영암 도갑사오층석탑은 전체적으로 균제된 체감율과 안정된 조형미가 돋보이는 고려초기의 석탑으로 보물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 탑은 당초 하층 기단을 잃은 채 단층 기단위에 5층 탑신부 및 노반석만으로 조성되어 있었으나, 1999년 9월 목포대학교 박물관이 도갑사경내 발굴조사하면서 하층기단부를 발견해 2002년 2월 원래의 모습인 2중기단의 5층석탑으로 복원해 온전하게 보존하게 됐다. - 문화재청 보도자료 2005.06.14 - |
▲ 석조 좌측 |
▲ 석조 우측 |
석조는 물을 담아두거나 곡물을 씻는데 쓰였던 일종의 돌그릇으로 길쭉한 돌의 안을 깍아서 만든 것이 작은 통나무배와 비슷해 보입니다. 석조의 한 쪽 끝에는 홈을 파 놓아서 물이 좌우로 넘치지 않고 흘러 내리도록 하였으며, 표면에는 기록이 남아 있어 조선 숙종 8년(1682)에 만든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도갑사 경내에서 해탈문으로 나오면 길 양 옆으로 넓은 절터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넓은 절터를 보니 예전에 굉장히 큰 사찰이었다는 것을 짐작케 합니다. |
▲ 해탈문 입구 왼쪽에 있는 절터 |
▲ 해탈문 입구 오른쪽에 있는 절터 |
국보 50호 도갑사 해탈문 |
도갑사 입구에 있는 도갑사 해탈문(道岬寺 解脫門)은 국보 5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해탈문 안의 좌우 칸에는 보물 1134호인 도갑사 소장 동자상(道岬寺 所藏 童子像)이 있다고 해서 찾아보니 없었습니다. 사전에 조사한 자료에는 해탈문 내에 두 개의 동자상이 있다고 되어 있고, 사진까지 미리 보았었는데... |
▲ 도갑사 해탈문 |
▲ 해탈문 계단 |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해탈문은 모든 번뇌를 벗어버린다는 뜻으로,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이며, 절의 입구에 서 있다. 좌우 1칸에는 절 문을 지키는 금강역사상이 서 있고, 가운데 1칸은 통로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 위쪽에는 도갑사의 정문임을 알리는 ‘월출산도갑사(月出山 道岬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반대편에는 ‘해탈문(解脫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1960년 해체 수리시에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신미·수미(信眉·守眉) 두 스님의 발원으로 조선성종 4년(1473)에 중건되었다고 한다. 도갑사 해탈문은 우리 나라에서 흔하게 볼 수 없는 산문(山門)건축으로, 청평사 회전문(보물 제164호)과 비교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
동자상은 어디에... |
해탈문 주위에서 이리 저리 동자상을 찾고 있는데, 마침 스님이 지나 가시길래 동자상의 소재에 대해서 물어보니 도난 방지와 보존을 위해서 경내에 있는 성보 박물관으로 옮겼으니 보고 가라고 하시더군요.
그러나 도갑사에서 여러 유물들을 둘러 보느라고 시간이 꽤 지났는데다가 기다리는 동료들을 생각하니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되겠기에 급히 동료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보니 이미 모두 차에 타고 저 오기만 기다리고 있더군요. "죄송합니다"... 아래의 동자상 사진은 문화재청에서 가져 왔습니다. |
보물 1134호 도갑사 소장 동자상 |
신라말 도선이 창건한 도갑사 해탈문 안에 있는 목조동자상이다. 국보 50호로 지정된 해탈문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단층건물로 동자상은 뒷쪽 좌우칸에 모셔져 있다.
사자와 코끼리를 타고 있는 두 동자상은 총 높이가 약 1.8m가량이고, 앉은 높이가 1.1m 안팎으로 크기도 비슷하고 조각기법도 동일하다. 다리를 앞쪽으로 나란히 모아서 사자, 코끼리 등에 걸터앉은 두 동자상은 동물상과 따로 만들어 결합하였으며, 두 손도 따로 만들어 끼웠다.
현재의 손도 후대에 다시 만들어 끼운 것으로 생각된다. 두 동자상의 머리를 묶은 모양새는 매우 화려하며, 이목구비가 원만하여 동자의 천진스런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사자와 코끼리를 타고 있는 점에서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과 실천의 상징인 보현보살의 화신으로 추정되며 사자와 코끼리를 탄 동자상이라는 드문 예 가운데 목조상으로서는 유일한 작품이다.
1960년 해탈문을 해체 복원할 때 발견된 기록에 의하면 해탈문이 1473년에 건립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어 이곳에 모신 동자상도 문이 건립될 때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답사를 마치며... |
답사는 여유를 갖고 편안하게 다녀와야 하는데, 먼 곳은 교통편 때문에 주변의 다른 행사에 곁다리 붙어서 다녀 오려니 쉽지가 않더군요. 그래도 계획한 것들을 대부분 보고나니 뿌듯합니다만, 대신, 몸은 만신창이가 됐습니다.
월출산 일대인 영암, 강진, 해남은 "남도 문화유산답사의 1번지"로 꼽을 만큼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언젠가 남도 문화유산들을 답사할 기회가 있기를 기대하면서... - 2004.03.20(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