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암 남사고는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 누금마을에서 태어났다. 수곡리는 자연경관이 빼어난 왕피천과 성류굴이 인접해 있는 작은 마을이다. 울진군은 2006년 12월 남사고의 생가터가 있는 수곡리 일대를 경북북부 유교문화권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기 위해 ‘격암 남사고 유적지’를 조성했다. 울진의 대표적인 관광명소인 왕피천과 성류굴을 연계해 새로운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서다. 유적지는 남사고 생가터와 목조한식기와로 지은 격암정사, 사당, 서재로 구성되어 있으며, 건물외부에는 20여개의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또 대형 주차장과 정자, 연못 등 관광객을 위한 편의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1509년(중종 4)에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에서 태어난 격암(格菴) 남사고는 역학과 천문을 비롯하여 모든 학문에 두루 통달하였던 학자다. 권세와 돈으로 치르던 당시의 과거에서 여러 차례 떨어진 뒤에 벼슬을 하겠다는 꿈을 접고 천문지리와 복술(卜術)을 깊이 연구하여 예언이 어긋나지 않았다고 한다. 63세에 죽기까지 숱한 예언과 일화를 남겨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전설에 가장 많이 나오는 인물로 꼽힌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남사고가 말하길, 임진년에 백마를 탄 사람이 남쪽에서 조선을 침범하리라 했는데, 그의 예언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백마를 타고 쳐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고, 『연려실기술』에도 남사고의 예언이 틀림없이 맞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남사고가 소백산을 보고 “허리 위로는 돌이 없고, 멀리서 보면 웅대하면서도 살기가 없고, 떠가는 구름과 같고 흐르는 물과 같아서 아무런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형상”임을 들어 많은 사람을 살려줄 산이라고 칭송하였다고 한다. 그의 말이 옳았는지 임진왜란 초에 왜적이 잠깐 새재를 넘기는 했지만 소백산 기슭인 풍기와 영주 일대는 온전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한산한수(漢山漢水)는 다골다탄(多骨多灘)하여 골육상잔의 화가 많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여러 가지 재난이 많이 일어날 것으로 예언하였다. 그는 『정감록』 중의 길지인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예언했으며, 또 당쟁이 일어나기 전 명종 말기에는 서울의 지세와 연관 지어 당쟁을 무서운 병에 비유하여 예견하기도 하였다.
어느 날 울진 향교에 갑자기 참새 떼가 날아들자 사람들이 남사고에게 무슨 징조인지 물어보았다. 그는 “잠시 후에 쇠갓을 쓴 여자가 들어올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하는데, 조금 뒤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문 밖에서 밥을 짓던 향교의 여종이 솥뚜껑을 덮어쓰고 뛰어들어와 자리한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고 한다.
남사고는 근남면 구산리 바깥잘미에 있는 달팽이집 같은 초가집에 살았지만 술을 즐기며 성품이 고결하여 찾는 이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죽음과 후손이 없을 것까지 예언하며 맞혔던 남사고는 우리나라의 미래에 대하여 예언한 참서인 『격암유록』에서 38선으로 국토가 분단될 것과 한국전쟁을 예언했는데, 그의 죽음 이후 문집마저 임진왜란 때 대부분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