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고등학교 2학년 기숙사 생활(1)
나는 고등학교를 수원에서 다녔다. 우선 당시 수원시의 현황을 보면 경기도의 도청소재지라고 하기에는 초라한 수준으로 1977년 인구 30만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27만명의 작은 도시에 불과했다. 주요 기업은 삼성전자와 한일합성, 전매청의 연초제조창 등이 있었다. 대학이래야 서울농대 수원캠퍼스가 화서 외곽지역에 있었으며, 아시아주립대학을 표방한 아주공과대학이 1973년 개교하였다. 주요 도로는 북문에서 팔달문을 거쳐 오산으로 가는 남북축선과 수원역에서 중동과 교동 사거리를 거쳐 신갈방향으로 가는 동서축선이 있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당시 수원의 도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곽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42번 국도는 학교로부터 거의 1Km가량 앞으로 지나가고 있어 등교길에 스쿨버스를 놓치면 시내버스 정거장에서 교실까지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숨막히게 달려야 했다. 교문으로부터 학교 교실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진 길은 앗쭈대(우리 고딩들은 당시 그렇게 불렀다, 지금은 명문대학으로 눈부시게 발전했지만)생들이 길이름 공모에 들어갔을 때 ‘똑바路’가 인기였다고 하나 최종 원천路로 결정됐었다. 그 정도로 먼길이었다.
학교의 앞쪽은 소나무와 상수리나무가 우거진 작은 숲이 있었고 우측에는 같은 학교재단으로 아주공과대학과의 사이에는 야산이 있었다. 운동장은 특이하게도 학교 건물의 뒤쪽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학교와 운동장의 좌측은 벼를 재배하는 논이 있었다. 무엇보다 특별한 것은 아주공과대학을 포함한 학교 캠퍼스 전체가 울타리도 없었고 담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약간의 불편함만 감수한다면 개구멍을 뚫고 나간다든지, 월담을 할 필요도 없이 산길로, 들길로 얼마든지 땡땡이 칠 수 있는 환경이었다. 걸리면 호된 벌을 받아야 했지만................
학교 설립자는 원스타 출신으로 박정희 전대통령과 육사동기이며 기독교 모태신앙자다. 대학과 고등학교를 동시에 설립하였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대학은 후에 대우재단으로 넘겼다. 학교안에 건축부문 국전 수상작품으로 교회(산상교회)를 신축하였고 매주 1시간씩 성경공부 및 채플시간이 있었다. 그 유명한 김장환 목사가 젊은 시절 교목이었으며 그의 아들 김요셉 목사는 2학년때 같은 반이었다. 그래서 학교이름이 넉넉할 裕자 믿을 信자였다. 10월 維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학교의 규율은 신설학교인데다가 장군출신 설립자의 의지를 반영하여 매우 엄격한 편이었다. 거수경례를 했고, 바지 주름은 칼같이 서 있어야 했으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도 안될 정도였다. 아예 바지에 앞주머니가 없거나 있는 주머니는 재봉틀로 꿰매고 다녔다. 하복은 일본군 장교복처럼 하얀 카라를 덧대는 아주 연한 국방색계열이며 마치 군복처럼 상의 앞뒤에 주름을 잡고 상의를 바지속에 넣고 입는 형식이었다. 전교생이 태권도를 배웠고 태권도 시범과 카드섹션, 응원에 동원되는 행사가 많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웃기지도 않겠지만 그땐 그랬다.
또한 당시 일반 고등학교로는 매우 특이하게 기숙사와 스쿨버스를 운용하였다는 점이다. 기숙사가 있다는 것이 바로 내 큰형이 원서를 사보낸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내 입학성적은 기숙사에 입주할 수 있는 정도는 못되고 겨우 하위권에서 간신히 합격만 한 것 같다. 그러다가 겨울방학을 마치고 2학년 1학기를 시작하자마자 시내에서 임차건물로 쓰던 기숙사를 학교 내로 신축하여 옮겼고, 성적과는 관계없이 원하는 대로 입주할 수 있었다.
기숙사가 위치한 곳은 운동장 끄트머리에 있는 도서관과 인접한 곳이었다. 스레트 박공 지붕의 블록조 단층 2개동과 슬라브 지붕의 벽돌조 2층 2개동, 세면장 겸 세탁장, 식당, 야외 재래식 화장실 2개동이 갖춰진 시설로 대략 150~60여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한방에 4~6명씩 생활했으니 그야말로 쌍팔년도에나 가능한 분위기다. 기숙사의 주변환경은 매우 조용했다. 차 소리 등의 인공적인 소음이 들리거나 불빛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도로와 주택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기숙사를 중심으로 4방을 보면 우측은 작은 야산, 뒤쪽은 논, 좌측은 저수지와 저수지 건너 공동묘지(지금 수원 월드컵 경기장 자리) 앞쪽은 도서관과 학교운동장이 있었다. 기숙사도 학교와 매한가지로 담도 없고 울타리도 없었기 때문에 맘만 먹으면 10시 점호가 끝나고 비인가 외출이 가능했다.
기숙사에 들어가니 좋은 점이 많았다. 편도 2시간 30분에 이르는 전철 통학을 하지 않아도 됐다.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찬물로 세수하지 않아서 좋았다. 허겁지겁 아침밥을 먹지도 않았고, 전날 미리 싸둔 도시락을 가져갈 필요도 없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아 깜깜한 이른 새벽에 얼음짝처럼 차가운 버스 의자에 앉아 매캐한 냄새를 맡지도 않았다. 전철 시간에 쫒겨 계단을 서너칸씩 뛰어내리고 오르지 않아도 되었다. 전철에서 학생이라 마음대로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어쩌다 운이 좋아 빈자리에 앉으려면 멀리서 빛의 속도로 달려와 손부터 뻗어 자리를 찜하고 마는 수원 연초제조창에 근무하시는 아주머니들, 염치불구하고 바로 내 앞 빈자리에 앉아 애써 잠든 척 쌩까고 있는데 마치 들으라는 듯이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어’라며 자리 양보를 은연중 강요하는 꼰대 아저씨들과 수 싸움을 할 필요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무더운 여름날 천정에 매달린 선풍기로는 택도 없은 찜통 전철을 타지 않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행복했다. 그러나 무릇 세상의 모든 일에는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고, 좋은 점이 있는 그렇지 않은 점도 있기 마련이다.
기숙사의 하루일과는 5시 50분 기상으로 시작하여, 6시에 운동장 아침 점호 집합, 체조후 세면, 7시 아침식사, 7시 40분 등교, 12시 점심식사, 18시 저녁식사, 21시까지 자유 및 자율학습시간, 9:30 점호, 22:00 취침으로 끝났다. 22시 이후 공부하고 싶으면 바로 옆에 있는 도서관에 가면 되는데 나는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사감은 교련선생, 체육선생을 포함 4분의 선생님이 하루씩 교대하였다.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감샘의 성향을 완벽히 파악했다. 교련선생 사감이 당직하는 날은 그냥 쥐죽은 듯이 있어야 한다. 체육선생 사감은 당시 일본의 권투선수 와지마 고이치와 외모가 판박이라 우리는 와지마라 불렀는데 전국 체전 검도선수이며 육군 중위 출신이라 점호가 끝나도 수시로 순찰을 돌았기 때문에 조용히 찌그러져 있어야 했다. 다른 두 선생님은 점호가 끝나면 사감실에서 나오지 않으셨다. 그 두 분의 당직 일에는 점호시간 후의 시간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단 3학년 선배들에게 들킬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지만 말이다. 이쯤되면 완전 군대생활이나 다름없다. 나는 이러한 조직생활 특유의 억압된 분위기에 서서히 젖어 들면서도 탈출구를 찾아 일탈을 서슴치 않았다.
처음에 입주했을 때 룸메이트는 같은 학년 4명, 1학년 후배 2명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개인에게 철제 캐비넷 한 칸, 학교 책상과 의자 하나, 군용 철제 2층 침대중 한 칸이 배정되었다. 애시당초 자율적인 학습은 불가능한 구조였다. 입주 한 달쯤 후 슬라브 지붕구조의 2층 기숙사가 추가로 완공되어 1실 4명으로 바뀌게 되었다. 나의 룸메이트는 전남 광주 출신의 수재 崔ㅇㅇ(전교 2등 졸업), 제주도 애월 출신의 강단있는 姜ㅇㅇ, 충남 서산 출신의 순둥이 安ㅇㅇ였다. 고집세기로 유명한 安姜崔 방구석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혹자는 韓家들의 고집도 이들 못지않아서 安韓姜崔李 순으로 말하기도 한다. 내 고집도 만만치 않다는 이야기다.
룸메이트들과의 생활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것은 면학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려는 나의 배려 때문이었다. 나는 그들이 공부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로 다른 방의 놀기 좋아하는 동기들과 어울렸으니까. 놀았다기 보다는 가끔 기숙사옆 산속으로 들어가 담배도 피우고 누군가 구해온 소주를 홀짝이는 수준이었다. 처음엔 다 그렇게 시작한다. 그러다가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와 점점 더 강도 높은 도발을 이어가는 것이다. 취침시간 이후 두문불출 사감샘의 당직일이면 몇몇 악당들과 영역을 서서히 넓혀가기 시작했다. 학교앞 마을에서 자취를 하거나 하숙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 구축해놓은 아지트를 방문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학교 앞의 우만동은 도농이 결합된 전형적인 변두리 지역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골목은 구불구불 자연발생적이며 주택은 벽돌조 스레트 또는 기와지붕으로 오래된 단층 주택을 개량한 수준에 불과했다. 벼농사를 하는 논이 많았고, 딸기밭이나 배밭, 포도밭 등도 가끔 있었다. 목줄을 하지 않는 똥개들이 동네를 배회하며 개똥과 오줌을 갈겨대기도 했다. 동네엔 구멍가게가 두 개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담배도 팔고 막걸리도 팔았다. 항아리를 부엌의 땅속에 묻어놓고 말통으로 배달받은 막걸리를 쏟아부어 보관했다. 플라스틱 페트병이 없었던 시절이니 주전자나 1되(1.8리터) 짜리 유리병을 들고 가서 막걸리 심부름을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 집에는 바로 작은 골방이 있었고 그 골방을 몇 명 친구들이 심야 아지트로 삼았다. 통행금지가 있었으나 변두리 지역이라 경찰이나 방범의 순찰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소영웅주의에 매몰돼 일탈을 일삼는 몇몇 친구들과 저녁 점호가 끝나면 아지트로 몰려가곤 했다. 운동장 옆 논둑길을 따라 15분 정도 걸어가면 아지트의 희미한 불빛이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 아지트에서 주로 라면을 끓여 소주나 막걸리를 마셨다. 아직 신체적으로 덜 익은 앳된 넘들이 짧은 시간에 집중하여 누가 누가 잘 마시나 하다 보면 금방 취하고 만다. 그래도 통금이 있으니 점빵주의 강퇴로 12시 10분전에 아지트를 나서서 다시 기숙사로 돌아오곤 했다. 그런데 문제는 돌아오는 과정이다. 불빛도 없는 캄캄한 밤에 별빛, 달빛에 의존하여 돌아오는 길은 아무리 주의력을 집중한다 하더라도 술에 취한 상태에서는 미끄러지기 일쑤였고 그러다 보면 논에 빠져 신발이 온통 진흙 투성이가 되곤 했다. 나갈 때는 멀쩡하게 나갔다가 돌아올 땐 엉망진창이 되는 것이다.
그래도 술을 잘 마신다는 친구들의 고무에 으쓱했고, 술 자체가 주는 망각 기능, 즉 성적에 대한 걱정, 부모와 형제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심적 부담감, 장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등을 털어버릴 수 있어서 좋았다. 약간의 죄책감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그렇게 술의 달콤한 유혹에 한없이 약한 존재가 돼가고 있었다.
아주 어린 나이에...........
|
첫댓글 눈에 선하게 생생하게 그려놨네. 영화 시나리오 초본을 보는듯하다!!!
아주 어렸을 적 일어났던 일들은 생생한데 최근의 일들은 잊어버리기 일쑤네요.
나이와 세월은 아무도 이길 수 없겠죠. ㅎㅎ
ㅎㅎㅎ
병희 노는 모습이 보이네.
문제 학생?
며칠만에 꼬리가 밟히겠지.
그래서 아버지 호출?
기대 만발.
초,중,고,대 입학과 졸업을 통털어서 부모님이 학교에 오신 적 없었습니다.
다만 큰형 집에 다니러 오셨던 아부지가 때맞춰 열린 대학 졸업식에 당시 중학교 다니던 조카가 모시고 온 적은 있었습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