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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가소개
- 엮은이 프란츠 요제프 오르트켐퍼 신부
1939년 독일 뮌스터의 벡쿰에서 태어나 1965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뮌스터 대학 가톨릭 신학부 교수, 뮌스터에 있는 프란츠 히체 하우스 사회교육원 원장, 렉클링하우젠의 성 엘리사벳 성당 주임 신부, 슈투트가르트 가톨릭 성서학회 의장 들을 역임하였다.
- 옮긴이 김선태 신부
전주교구 소속으로 1989년 사제품을 받은 후, 스위스 프리부르 대학교에서 기초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주 가톨릭신학원 원장을 거쳐, 현재 전주 화산동 성당 주임신부로 있다.
2. 내 마음에 다가온 글귀
카인과 아벨(한스 슈베글러) : 창세 4,1-16
인간의 제사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지 듣지 않는지의 여부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일상에서도 체험한다. 우리는 삶에서, 왜 어떤 사람은 부유하게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가난하게 태어나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의 삶에는 있는 그대로의 절대적 평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p15)
☞ 이해할 수는 없지만 비교할 수 없는 나의 삶이 이미 주어졌을 뿐이다
카인은 하느님을 열렬히 갈망한다.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보다 동생 아벨에게 더 가까이 계심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그의 마음속에는 원망이 사무친다. 이러한 원망은 이제 그의 얼굴에 까지 나타난다.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창세 4,5) (p15)
☞ 카인이 정말 하느님을 열렬히 갈망했을까? 아닌 것 같다. 그저 질투가 살인을 낳았을 뿐.
카인은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카인이 악의 세력을 허용할 때에야 비로소 그 세력은 카인을 사로잡을 것이다.(p15)
☞ 죄를 짓는 것은 자유의지지만 책임은 자신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결국 죄는 인간의 선택과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만이 죄를 범한다. 죄에 대한 책임은 자신외에 그 누구에게도 지울 수 없다. 악마에게도, 환경에게도 자신의 본성이나 격정에도 책임을 돌릴 수 없다.(p15)
☞ 인간을 제외한 동물은 본능에 의하여 행동할 뿐이다. 그러므로 죄가 없다. 결국 죄란 자신의 선택이며 행동의 결과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라는 하느님의 물음은 카인에게 다시 한 번 대답할 기회, 곧 죄를 고백하고 뉘우칠 기회를 준다. 그러나 카인은, 하느님께서 내민 손을 붙잡지 않고 오히려 빈정거리며 회피하려고 한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p17)
☞ 카인의 반응은 뉘우침이 아니라 반항이다.
동생을 죽인 살인 행위에도 카인이 죽임을 당하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저주를 받은 카인이 그 표징을 통해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죄를 범한 인간의 생명마저 보호해 주시는 분, 자비를 베푸시고 지켜주시는 분으로 드러난다.(p18)
☞ 무한히 자비하신 하느님의 속성은 우리에게 위안이 된다.
만일 카인이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고 사람들과도 대화를 나누었더라면,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이다.(p18)
☞ 결국은 소통의 문제다. 하느님과 나와의, 나와 다른 사람과의.
바벨 탑(안톤 로체터) : 창세 11,1-9
그들은 안전과 안정을 가져다줄 도시를 건설하고, 도시의 명성을 온 세상과 미래에 확고하게 알리는 거대하고 웅장한 탑을 세운다. 도대체 이런 시도에 무슨 잘못이 있다는 말인가? 사실 우리도 오늘날 온 세상의 일치를 꾀하고 있지 않은가?(p20)
☞ 언제나 질문은 가치가 있다. 왜?
이러한 모든 것은 바벨 탑의 이야기가 거론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 일치가 과연 옳은가, 나쁜가?
역사는 이러한(독일, 스페인, 소련, 동독, 쿠바, 중국 등)이해를 통해 만들어진 일치가 결국 몰락하고 만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릇된 일치의 원형인 것이다.(p21)
☞ 그릇된 일치의 위험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본다. 그 원형이 바벨 탑이다.
(하느님께서는 바벨 탑이)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만들고, 개개인의 인격과 사상과 느낌을 억압하여 획일화하고 있다고 생각하신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동조하여 행동하실 수도 그냥 바라보고만 계실 수도 없었다. 사람들의 그러한 시도에 끝없이 놀라기보다는 끔찍하지만 그런 시도를 끝장내시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말들을 뒤섞어 놓으신다. 그리고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괴물을 ‘바벨’ 곧 ‘혼란’이라 부르신다. 이것은 거대한 어리석음에 대한 경고의 표시이다.(p22)
☞ 획일화는 하느님이 주신 선물인 ‘자유의지’에 위협을 가한다.
언어가 다양해진 것은 바벨 탑 파괴와 같은 하느님 구원 행위의 결과다. 다양성은 획일성보다 훨씬 더 바람직하며 일치가 결코 평준화는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인간을 그릇된 길에서 구원하신다.(p22)
☞ 우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릇된 일치의 폐해는 얼마나 큰가?
하느님께서는 국가의 전능한 권력에 무기력하게 넘겨진 사람들의 편에 서 계신다. 그분께서는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을 대변하신다. 결코 하느님께서는 권력자의 편에 계시지 않는다. 그분은 희생된 사람, 인간과 그 존엄성을 위해 서 계신다.(p23)
☞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느님은 ‘약자’의 편이라는 것이다.
성령 강림 사건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점은, 일치는 힘의 논리가 아닌 사랑의 논리를 통해서, 곧 상대방을 억압하고 점령함으로써가 아니라 서로 인정하고 고유의 자리를 존중해 줌으로써 실현되다는 것이다.(p24)
☞ 일치는 힘의 논리가 아니라 사랑의 논리로 이루어져야 한다.
옛 아브라함을 뒤돌아보아라(볼프강 레이블) : 창세 12,1-9
인간의 삶을 실패로 이끄는 길을 우리는 아브라함 이전의 이야기들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인간의 유한함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 형제를 질투와 시기로 바라보고 대하는 것, 이름을 세상에 날리려는 것 등은 우리의 삶을 무너뜨린다. (p26)
☞ 창세기는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주고 있다.
복음이라는 악보를 탐구할 때, 성경 구절이나 이야기를 대할 때 혹은 어떤 성경 말씀이 갑자기 나의 이야기로 다가올 때 하느님께서 나를 개인적으로 부르시고 나에게 호소하시는 까닭을 식별할 수 있다.(p27)
☞ 말씀을 통해 하느님이 나를 부를 때, 나는 하느님께 응답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순례자로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이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안식을 누릴 수 없다. 우리가 종종 넋두리처럼 중얼거리듯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단지 나그네일 뿐이다.(p28)
☞ 영원한 안식처는 죽음 이후의 삶이다. 우리는 지상의 나그네다.
영혼이 뒤따라오게 하는 일은 중요하다. 아브라함은 휴식을 취할 때면 어디에서나 제단을 세우고 주님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걸어온 길이 바른길인지 확인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는 지금까지의 여정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앞으로의 여정에도 동행해 주시기를 간청한다. 그는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히말라야의 짐꾼들처럼 영혼이 뒤따라오게 한다. 그는 지금까지의 여정에서 있었던 감동, 체험, 만남, 위기 들을 되돌아본다.(p29)
영혼이 뒤따라오게 하는 일을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배운다. 우리는 때때로 호흡을 가다듬고 바쁜 일정을 잠시 머문다. 어떤 신학자는 ‘영혼의 숨 고르기’로 ‘미사’를 꼽는다. 우리가 거행하는 미사성제를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좋겠다.(p30)
☞ 주일은 내 영혼이 하느님을 만나는 날이다.
아내를 팔았던 아브라함(후안 페터 미란다) : 창세 12,10-20
아브라함은 영웅으로 칭송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보통 ‘믿음의 조상’으로 간주된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아무런 저항도 없이 자신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약속된 미지의 땅으로 향한다. 이는 우리를 감탄하게 하고,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행동 때문에 인간을 칭송하지 않는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도 마찬가지다.(p32)
☞ 인간은 인간일 뿐이다. 그 이상은 교만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아브라함의 이러한 처신에 대해 성경 저자는 아무런 변호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성경은 아브라함의 굶주림과 두려움만이 아니라, 이기심마저 정당화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정말 ‘믿음의 조상’인가 아닌가? (p33)
☞ 벌거벗은 모습의 아브라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는 도발적인 이야기는, 신앙의 이야기가 결코 평범하고 값싼 영웅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지 않는가?(p33)
☞ 신앙의 선조 아브라함도 결함이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위안과 희망이 된다.
이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지는 이유는, 단순히 어떤 신성불가침한 영역에 오점을 남기거나 인간 윤리의 한계를 문제 삼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신앙은 유혹과 오류, 심지어는 타락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보여 주기 위해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이 이야기가 중요성을 갖고 성경에 세 번씩이나 나오는 것이 아닌가?(p33)
☞ 삶은 성공과 실패의 변주곡이다.
그분은 당신의 확언과 약속에 늘 성실하시고, 당신 자신을 ‘주 하느님’으로 드러내신다. 곧 ‘우리를 위해 늘 현존하시는 분’으로 드러내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이야기의 근본적인 핵심이며,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메시지이다.(p35)
☞ 언제나, 늘 나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믿으면 구원을 약속하시는 분.
그분의 개입으로 사건이 변화된다. 그분 앞에서 파라오의 권능은 한낱 보잘것없는 인간의 무능함으로 퇴색된다. 그러기에 모순적인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거나 체념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우리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p35)
☞ 하느님의 넓은 시선으로 바라보자. 하느님은 희망이다.
사라의 웃음(알프레드 메르텐스) : 창세 18,10-15
우리는 사라를 우리의 수호성인으로 삼을 수 있다. 신앙이 요구되는 어떤 일에 직면하여 회의적인 웃음을 지으며 “오늘날에는 그 사실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 결코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하고 말하는 사람들도 사라를 수호성인으로 모실 수 있다.(p39)
☞ 회의(懷疑)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하느님을 떠나지 않는 한.
우리가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 우스꽝스럽게 여겨질 때 우리는 웃을 수 있는가? 사라는 웃었다.(p40)
☞ 우리도 웃을 수 있다. 하느님은 그 정도로 째째한 분이 아니다.
사라의 웃음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긴 생애동안 수많은 일을 겪으면서 사람에게 가능한 일이 무엇인지, 또 그렇지 못한 일은 무엇인지 터득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무도 그녀에게 쉽게 장담할 수 없다. 그녀는 결코 환상이나 헛된 꿈을 좇아 살거나 또 그것을 원하지도 않는다. (p41)
☞ 하느님의 약속마저도 사라에게는 장담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웃었다.
나는 불신의 웃음을 지은 사라를 전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한다. 그녀는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녀는 마음 속으로 웃는다. 그러나 이것은 사라의 인간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웃음이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그것은 불신의 웃음이었다. 그러면 그녀는 웃지 말아야 했는가? 우리도 사라처럼 웃어서는 안 되는가?(p41)
☞ 성경을 읽으면서 질문을 해야 한다. 사라는 웃으면 안 되는가? 의문을 가지면 정말 안 되는가? 된다. 웃어도 된다.
어쨌든 그러한 웃음에 대해 질책하거나 형벌을 내리지 않는다. 의심과 불신은 허용된다. 그러니까 웃을 수 있다. (p42)
불신의 웃음은 허용되지만, 신앙의 노력은 끝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신앙에 대한 물음이 포기되어서는 안 되듯이, 하느님에 대한 물음은 끝까지 지속되어야 한다. 삶의 의미와 미래 등에 대한 물음도 허용되지만, 이 물음은 끝까지 이어져야 한다.(p42)
☞ 물음의 중요함. 회의는 더 나은 발전의 과정이다.
이러한 물음은 거부되거나 불필요하다며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 불신에 대해 묻고, 그에 대해 웃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적인 일이다. 동물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에 대해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웃지 않는 것은, 그리고 그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인간이기를 포기한 일이다. 사람들이 더 이상 묻지 않고, 아무런 의문도 없이 어떤 일에도 개입하지 않으며 그에 복종하다 죽을 경우, 이를 ‘순종’이라고 더 이상 부를 수 없음을 아우슈비츠의 역사는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p42-43)
☞ 무조건적인 순종만이 능사가 아니다.
성경 본문에서 물음의 형태로 제시된 “주님이 못 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창세 18,14)라는 말씀은 신약성경에서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로 언급된다. 이 구절은 하느님의 새 백성 가운데 ‘신앙인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물음에 대한 천사의 대답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나자렛 예수님의 모습으로 오신 사건은 그 옛날부터 오늘날에까지 의심하고 질문한 모두 ‘사라’에게 주는 마지막 대답이다.(p43-44)
웃음이 허용된다. 불신하는 사라의 웃음이 허용되고, 그리고 약속이 실현되어 사라가 아들을 낳았을 때에(창세 21,6참조) 비로소 의심에서 해방되어 믿고 감사하는 사라의 웃음도 허용된다. 우리에게도 이런 비슷한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우리의 회의와 불신에서 비롯한 웃음이 신앙으로 굳건해진 감사의 웃음으로 바뀌기를 바란다.(p44)
☞ 불신은 굳센 믿음에 이르는 과정이 될 수 있다. 자책할 필요가 없다.
야뽁에서 하느님과 씨름하는 야곱(페르디난트 케르슈타인) : 창세 32,23-33
야곱은 축복을 가로챘던 것이다. 그는 이사악과 에사우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까지 속였다. 그래서 그가 계획했던 에사우와의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친히 개입하셔야 한다. (p51)
☞ 사람을 속일 때 하느님까지 속이게 된다.
아우슈비츠에서 하느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무죄한 어린이들이 네이팜 혹은 전쟁으로 비참하게 죽어 가는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인가? 정신병자에 의해 죄 없는 이가 죽거나 무고한 이에게 고문이 자행되는 상황에서 하느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우리가 깊은 좌절과 상처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하느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시는가? 우리의 신앙은 다시 깊은 어둠 속에 잠긴다. 나이 든 많은 사람은 그로인해 고통을 겪는다. 그들은 예전처럼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많은 젊은이는 의혹과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이 도대체 어떻게 하느님을 찾을 수 있는지 반문한다. 어떤 사람은 미지의 인물이 된 하느님과 겨루고, 또 어떤 이는 자신의 과거에서 헛되이 그분을 찾는다. 그러니까 우리 시대는 어둡고 이해할 길 없는 하느님의 현존과 부재를 새롭게 느끼고 있다.(p54)
☞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가? 현대는 하느님 부재의 시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느님을 떠나서는 안 된다. 우리의 희망이기에.
한밤중에도 동이 터 오리라는 희망 속에서 새로운 단계로 건너가기 위한 싸움에는 온 힘이 필요하다. 아브라함, 이사악 그리고 야곱, 예수님, 우리 신앙의 선조가 모두 우리와 동행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시대에도 당신의 약속과 축복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p54-55)
☞ 희망만이 우리의 마지막 보루다.
생명을 선택하라(마리아 트라우트만) : 탈출 1,15-22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당신의 가르침을 알려 주시고 그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신다. 두 산파는 이스라엘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태어나는 생명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그들 자신의 소명을 성실하게 수행한다.(p63)
☞ 생명을 지키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사명이다.
인간을 경시하고, 자신의 권력 유지만을 생각하는 이집트의 파라오는 오늘날에도 있다. 물론 그리스도인 가운데에도 있다. 그와는 달리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인간의 생명을 구출한 두 명의 히브리 산파 시프라와 푸아 또한 오늘날 이 세상에서,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 가운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p65)
☞ 그리스도인이라고 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위급한 상황을 그냥 지나치지 않은 사람은 종종, 자신이 베풀었던 도움이 도리어 자신에게 큰 선물이었으며, 그것으로 자신이 더욱 단련되었다고 고백한다.(p67)
일상 안에서의 연대성(프란츠 요제프 슈텐데바흐) : 탈출23,1-9
헛소문은 오늘날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언론 매체와 여론이 갖추어야 할 윤리를 촉구할 수 있다.(p77)
☞ 우리나라에서는 언론이 ‘악의 축’같다. 아니 이미 악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단호하게 부조리한 사회와 정반대로 행동하고, 경제적인 이익보다 사람을 더 우선시해야함을 분명하게 증언해야 한다.(p78)
☞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가? 안팍으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이방인으로서 떠돌아야 했던 시절을 기억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으니, 이방인의 심정을 알지 않느냐?”(탈출 23,9) 우리도 이방인의 상황, 곧 잠잘 곳이 없는 처지에 처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아니, 실제로 우리는 이 지상 어디에 있든 나그네이자 이방인이며, 다른 이들에게 존경받고 친절하게 대우받기를 바란다.(p78-79)
☞ 인간은 궁극적으로 지상의 나그네, 이방인이다.
“너희와 함께 머무르는 이방인을 너희 본토인 가운데 한 사람처럼 여겨야 한다. 그를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34) 이는 자신을 대하듯이 같은 마음으로 이방인을 대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를 너 자신처럼“이란 말은 ‘이방인이 너와 같은 사람이다.’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곧 ‘이방인은 너처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연약한 사람이다.’라는 뜻이다. 아니, ‘그는 너와 같은 하느님의 모상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를 우리는 이방인에 대한 태도에서 분명하게 보여주어야 한다.(p79)
☞ 놀라운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은 원수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추상적이고 고상한 빈말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일상 안에서, 공동생활 안에서 실천해야 한다.(p80)
☞ 원수는 사랑하려고 애쓰야한다. 하지만 쉽지 않기에 십자가다.
다툼이 있는 곳에서 싹트는 사랑: 레위 19,11-18
‘모세의 율법’은 본래 일차적으로 ‘율법’이었던 것이 아니라, 생명에 관한 하느님의 가르침이었다. 모세의 율법은 처음부터 이렇게 요구하고 있었다. “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 그런데, 왜 ‘사랑’이 ‘율법’으로 변질되었을까?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로 이 성경 본문 전체를 바라보면 다른 인상을 받게 된다. 곧 이 사랑의 계명은 재산과 관련된 도둑질이나 사기, 거짓 맹세를 멀리하고, 가난한 사람에 속하는 날품팔이꾼과 소경과 귀머거리를 보호하고, 법정에서 지켜야할 태도 등에 대한 모든 내용의 요약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웃 사랑은 매우 구체적인 행동 방식을 나열하는 모든 내용의 집합 개념이다.
☞ 결국 10계명은 ‘사랑’의 방법이다.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레위 19,17) 마음속에 감추어진 증오와 부글부글 끊는 복수심은 공개적인 징계로 대체되어야 한다.(p83-84)
☞ 마음속에 증오를 품기보다는 꾸짖는 편이 낫다.
사랑은 곧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증오와 복수의 감정이 사람들과의 관계를 힘들게 하고 위태롭게 하는 곳에서 요구되는 것이다. 사랑은 바로 다툼이 있는 곳에 실천되어야 하는 것이지, 늘 친절과 이해심이 많은 곳에서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 여태껏 사랑에 대하여 잘못 생각했구나. 좋은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사랑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하는 것은 참 사랑이다.
성경은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라고 가르친다.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털어놓고, 갈등을 해결하라는 것이다. 사랑은 불의를 바른 것으로 둔갑시키지 않으며, 다툼을 억누르지 않고 또 경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툼을 근본적으로 해결한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이웃 사랑은 다툴 수 있고 구체적으로 보이는 사랑이지, 아무런 대립 없이 지내는 나약한 사랑이 아니다.(P84)
☞ 잘못 가는 길을 바로 잡아주는 것이 사랑이다. 그런데 그게 나에게는 어렵다.
하느님께서는 나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권한을 박탈당한 사람 등을 위해 열정적으로 개입하시는 모습을 통해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 보이신다. 그분의 사랑은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개입에서도 나타난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라는 구절은 “하느님께서는 연대하십니다.”라고 옮길 수 있다.(p85)
☞ 하느님은 사회적 약자와 함께 하신다, 이것이 하느님의 연대며. 이것이 사회교리다.
사랑에 근거하여 그분은 인간을 질책하신다. 하느님의 사랑은 격정적이고 다툼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은 천진무구한 것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P85)
☞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그리고 사랑이 잣대가 되어야 한다. 그 외의 것은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불의에 대한 ‘서슴없는 꾸짖음’이 ‘사랑없는 행위’로 비판을 받고 있고, 갈등에 대항하지도 제대로 그것을 조정하지도 못하는 것이 교회의 현실이기 때문이다.(p 86)
☞ 2013년 대한민국의, 우리 교회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또한 사랑에 대한 이러한 다른 이해는 우리의 일상에도 영향을 준다. 곧 사랑이 매우 개인적인 영역에 한정되어 이해되고 있을 뿐, 착취와 사회적 질서와 정의 등과 관련하여 다루어지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p86)
☞ 개인의 체험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사랑’의 교리. 반쪽짜리 신앙이다.
성경이 제시하는 사랑은 구체적인 사랑이며, 싸움을 배제하지 않는 사랑이며, 특히 억압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랑이다.(p86)
☞ 아멘.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하인츠 가이스트) : 민수 22,1-21.36-23.12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 교회 밖에 있는 종교적이고 예언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순수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통해서도 당신의 진리를 가르쳐 주신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p95)
☞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만족에 빠져 구원에 대한 확신을 자기 개인에게만 국한 시키는 것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p96)
☞ 세상의 신음 소리에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면 과연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다른 종교의 신자들과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존경과 열린 마음, 서로 배우려는 자세로 만나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그것이 비록 아주 작은 걸음일지라도 하느님의 신비로 가까이 나갈 수 있을 것이다.(p96)
그리고 이것이 어쩌면 우리 사람들 사이에 평화가 흐르게 하는 길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비록 서로 다른 길 위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생각과 삶 안에서 모든 진리의 근거로 한 분 하느님을 재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p96)
☞ 결국은 하느님이라는 바다로 모이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신앙은 신비다.
모세의 죽음(크리스토프 도멘) : 신명 34,1-12
“그대는 항상 한계 상황에 있어야 하고, 산 위의 모세처럼 항상 약속의 땅을 바라보아야 한다.”(p102)
☞ 발은 땅에 눈을 하늘을 향해 매일 매일을 목숨을 걸고 살아야 한다.
하느님의 권능을 신뢰하는 일(피에르 스튜츠) : 판관 6,11-16
우리를 위해 시간을 내고, 우리를 위해 거기에 있고, 우리에게 다가서고, 우리의 말을 경청하는 천사를 발견하는 일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혹은 우리 스스로 성실하게 다른 사람들 곁에 있어 줌으로써 그들에게 천사가 되어 줄 수도 있다.(p105)
☞ 곁에 있는 것 만으로도 천사가 되어줄 수 있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곳에서 찾으며, 그분께서는 과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지, 과연 우리를 받아 주시는지 의심하는가! 바로 우리의 의심 한가운데에서 성경 본문은, 우리가 힘들 때 하느님께서 우리와 동행하고 계심을 신뢰하라고 가르친다.(p105)
☞ 임마누엘 하느님.
"너의 그 힘을 지니고 가서 구원하여라.“ 이 말이 뜻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그대 안에는 해방을 체험하기 위해 내딛어야 할 걸음이 있다. 그대 자신을 신뢰하라. 그대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그대 자신 안에 있다. 나는 그대 안에서 인간이 선하다는 나의 신뢰를 새롭게 한다.(p106)
☞ 너 자신을 믿어라. 너 안에 답이 있다. 너는 할 수 있다.
신비가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집약한다.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 안에. 심지어는 큰 죄인들 안에서도 머무르고 활동하신다.”(p106-107)
☞ 하느님과 나와의 실존적인 삶이다
많은 부르심의 이야기에서처럼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의 첫 반응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상에서 우리도 종종 겪는 일이다. 연대성을 체험하기는 쉽지 않다. 다른 모든 사람은 평안하게 살고 있는데, 왜 하필이면 내가 그 일을 해야 합니까? 왜 나만 곤란한 처지에 있어야 하고, 심지어는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어야 합니까? 다른 사람을 위해 투신하는 것은 결국 비난받는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까?
☞ 왜 하필 납니까?
하느님께서는 많은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도덕적인 이야기를 펼치지 않으신 채 인간의 의구심을 받아들이신다. 그분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겠다!”하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 삶의 신비에 대해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신다.
☞ 의구심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다.
그대 안에서, 곧 그대 자신과 그대의 한계와 가능성 등을 받아들이는 그대 안에서, 그대 안에 있는 하느님을 화해하시고 정의를 창조하시는 능력의 하느님으로 체험할 수가 있는 열쇠가 있다.
☞ 열쇠는 나에게 있다.
한나의 찬미가(베아테 코발스키) : 1사무 2,1-10
하느님께서는 당신 편에 서 있는 보잘것없는 이들과 연대하신다. 곧 비틀거리는 이들, 배고픈 이들, 아이를 못 낳는 여인들, 죽은 이들, 가난하고 궁핍한 이들, 당신께 충실한 이들과 연대하신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능동적으로 활동하신다. 그분은 그들의 환난과 곤경을 굽어보시고, 그들이 곤경에서 벗어나도록 행하신다. 그분은 외면하지 않으시고, 구원하기 위해 개입하시고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p113)
☞ 약한 자들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 이 얼마나 큰 위로인가!
불과 폭풍으로만이 아니라(클레멘스 디츠) : 1열왕 19,1-15
“산들을 향하여 내 눈을 드네. 내 도움은 어디서 오리오? 내 도움은 주님에게서 오리니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네 발이 비틀거리지 않게 하시고 너를 지키시는 그분께서는 졸지도 않으신다.”(시편 121,1-3)
다정하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이 말씀은 우리를 일어서게 하고,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과 대면하게 하고, 또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우리는 일어설 수 있다. 우리가 태만과 안락, 이기주의와 좌절, 일상의 다양한 죽음 등을 멀리할 때 우리의 삶은 새로운 시작과 변화된 시각을 향해 열리게 된다. 우리의 삶에 요구되는 발걸음을 우리는 내디딜 수 있다.(p140)
☞ 하느님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신다.
그분은 위기에서 나를 직접 보호하지 않으시지만, 내가 나약할 때 내 가까이 계신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더 좋은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계시지만, 엄격한 모범 생활로 나를 강요하지 않으시고 일어서서 나의 길을 스스로 걷도록 나에게 힘을 주신다.
☞ 늘 곁에서 지켜주시는 어머니같은 하느님.
순간순간 민감하게 깨어 있는 일은 중요하다. 폭풍도 지진도 모든 것을 단번에 흔들어 놓지 못하고, 불도 벼락도 일상을 환하게 할 수 없다. 천사의 정성스러운 어루만짐, 부드러운 바람처럼 하느님과의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질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정성스럽게, 부드럽게 우리를 어루만지신다. 그러나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우리에게 힘을 주고 감동과 용기를 갖게한다.(p141)
☞ 하느님이 함께 있음을 느끼려면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의 하느님상에 대한 물음(라이너 딜만) : 욥 3,1-26; 10,1-12
“나는 내 생명이 메스꺼워
내 위에 탄식를 쏟아놓으며
내 영혼의 쓰라림 속에서 토로하리라.“(욥 10,1)
“나는 내 생명이 메스껍다.” 이 말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우리 사회 안에서 버림받고 경제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사람들의 무언의 침묵이기도 하다. 그들의 고통은 남의 눈에 크게 띄지 않지만 종종 운명으로 치부된다. 그리고 이 말은 결국 고통을 겪고 박해를 당하는 모든 사람의 울부짖음이다.(p144-145)
☞ 약자의 울부짖음을 외면하면 안 된다. 그들을 돌보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다.
당신의 창조물을 악인의 손과 과격한 사람에게 내맡기시는(욥 9,24;40,8) 하느님께서는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 이러한 고통에 직면하여 차라리 그러한 하느님과 결별하는 것이 더 나은 일이 아닌가? 무의식 중에 ‘하느님께서는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물음이 떠오른다.(p145)
☞ 역사의 어둠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울부짖었던가? 왜?
욥은 하느님과 친구들에게 버림받아 홀로 남은 것처럼 느낀다. 그는 하느님의 부재를 체험한다. 하느님 부재 체험은 신앙을 의심하는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깊은 신앙의 표현이다. 욥은 하느님의 부재를 느꼈고 또한 깊이 체험했다. 그는 하느님께 맞서거나 상처를 받는 것을 죄스럽게 여기지 않는다.(p146)
☞ 신음하면서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믿음. 어둠의 밑바탕까지 내려간 믿음.
“이제 탄식이 내 음식이 되고 신음이 물처럼 쏟아지는구나.”(욥 3,24) 인간의 삶은 그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욥 3,11)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죽음을 기다리지만 죽음은 찾아 오지 않는다.(욥 3,21참조).
☞ 힘들때면 하느님께 대들어야 한다.
탄식은 관계가 어려운 국면에 처했다는 표현이다. 탄식은 곤경과 고통을 구체적으로 겪는 데서 비롯한 갈등 상황에서 하느님과 나누는 친밀한 일종의 대화이다.(p147)
☞ 탄식은 깊고도 깊은 기도이다.
어둔 밤 한가운데 있더라도 하느님에 대한 물음에 답하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마치 십자가의 성 요한의 어둔 밤처럼 “빛도 인도자도 없이, 마음 속에 타오르는 것 없이”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탈출의 밤을 거치고 난 뒤 광야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찾았다. 욥은 고통의 밤을 견디어 내고 나서야 하느님 없는 세상은 혼돈 속으로 가라앉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자렛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밤을 두루 거친 다음 부활의 새 생명에 이르셨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역사의 밤, 우리 자신의 역사의 밤을 두루 거친 후에야 하느님께서 우리의 여정에 함께하셨음을 깨달을 것이다.(p148)
☞ 우리 삶에 어둠이 온다해도 하느님께 매달리고 탄식하고, 끊임없이 질문하자. 나와 연결된 하느님의 손을 결국 놓아서는 안 된다.
스트레스(롤랜드의 브라이텐바흐) : 잠언 17,22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의 지혜처럼 불안과 대결하셨다.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4) 우리는 과거의 인간이고 동시에 미래의 인간이기 때문에, 그래서 아름다운 현재의 순간을 보지 않고 향유할 수 없기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우리는 과거를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하고 앞서 미래를 걱정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현재에 있으면서도 현재에 살지 못한다. 우리는 지금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부담스럽게 하고 억누른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은 모든 기쁨과 즐거움과 경쾌한 의미 등을 우리에게서 앗아 가는 것이다.(p151)
☞ 지금, 여기의 일상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이른바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살아갈 각오가 되어 있다면, 분명히 즐거움과 기쁨을 만끽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p151)
☞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구절. 이런 각오로 살면 무슨 걱정이 있으랴!
가장 가까운 일만을 생각하고 나중에 일어날 일을 미리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과거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고, 내일의 걱정으로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 (p152)
과거의 부담과 내일의 걱정에서 벗어나는 일은 중요하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많은 압박에서 벗어나 육신이 병들지 않게 될 것이고, 영혼도 우울함에서 해방될 것이다.(p152)
☞ 내게 주어진 시간은 지금, 이 순간이다.
구약 성경의 지혜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처방은 즐거움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충고는 태연함이다. 이 둘을 모두 삶에서 실천할 수 있다면 분명히 우리는 스트레스를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p152)
우리에게 부담을 주는 모든 것에서 기쁘게 벗어나자. 시간, 분노, 일상의 바쁨, 걱정, 계획 등에서 벗어나자.(p152)
☞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스트레스에 대한 처방전은 즐거움과 태연함이다. 여유를 가지고 즐겁게 살아가도록 노력해야한다.
오늘은 오늘의 걱정과 괴로움만으로 충분하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다음 말씀은 우리에게 실로 중요하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p153)
☞ 앞으로 내 삶의 지침이다. 결코 잊지 말자.
비전이 없는 백성은 문란해진다(한스 후버) : 잠언 29,18
당시 이스라엘은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백성의 지도자들은 나라를 다스리는 힘을 하느님의 계시에서가 아니라 재화와 외교술에서 찾기 시작하였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에게 바빌론 유배라는 비극이 시작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에 대한 비전, 하느님에 대한 시선을 잃게 된다. 각자 자신의 의지만을 따라 행복을 찾다보니, 서로 하나 되고 서로에게 감동을 주는 ‘올바른 길’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p156-157)
☞ 하느님을 잃어버릴 때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국가도 개인도. 성경은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완전한 충만을 향한 갈망(울리히 뤼케) : 코헬 1,12; 2,4-11
그는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그 무엇에도 결코 만족하지 못했다. 그 모든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그를 충만하게 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헛되었다.“(p162)
☞ 모든 것을 가졌던 코헬렛도 결국 모든 것은 헛됨을 깨달았던 것이다.
코헬렛은 예언자들이 현세에 약속한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절망적인 선언을 한다. “이 모든 것이 바람을 잡는 일, 태양 아래에서는 아무 보람이 없다.” 그는 이러한 근본적이고 실존적인 인식에서, 모든 욕구의 충족보다 더 위대한 것에 대한 깨달음을 추구한다.
☞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소유하고 사는 일이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지고 살더라도 하느님을 소유하지 못하고 살 때 코헬렛처럼 허무를 외치게 될 것이다.
욥은 고통 속에서 한계를 체험한다. 한계 체험은 그로 하여금 하느님을 더 가깝게 만나게 한다. 코헬렛은 행복 속에서 한계를 체험하고, 이를 통해 하느님을 좀 더 분명하게 깨닫는다.(p163)
☞ 하느님은 고통 중에서도, 행복 속에서도 만날 수 있다. 깨어만 있다면.
코헬렛이 갈망하는 충만은 잠시뿐인 충만이 아니라 고통과 슬픔의 뒷맛이 없는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현재이다.(p163)
☞ 우리가 갈망하는 것은 하느님 안에서의 영원한 충만이다.
회의하는 인간(베론하르트 크라우터) : 코헬 3,1-8
인간이 원하고 계획하고 행하고 완성하는 모든 것은 그의 판단에 의하면 허무한 것이다. 곧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모두 남아 있을 가치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히 의미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신뢰할 만한 것도 없다는 것이다.(p167)
☞ 바둥거리다, 삶의 끝자락에서 서서, 빈 손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보라.
하느님께서는 우주와 역사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시다. 그분의 활동은 영원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코헬렛은 우리에게 분명한 가르침을 준다.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코헬 12,1)
☞ 최고일 때 최악을 생각하라. 어디 영원한 즐거움이 있으랴! 주님을 생각하며 살아라!
인생을 즐겨라(루트거 풍케) : 코헬 9,7-10
머릿속에서 상황을 파악하여, 매일 다가오는 자신의 일 속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다. ‘오늘을 즐겨라.‘라는 말은 그날을 유익하게 지내라는 뜻이다.(p173)
☞ 그냥 ‘엔조이’하라는 말이 아니다. 오늘을 보람차게 지내라는 말이다.
현재 순간을 즐기는 것은, 곧 삶을 즐기는 것은 각자가 책임을 지고있는 삶의 바탕인 믿음을 그 원천으로 하고 있다. “이것이 네 인생과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너의 노고에 대한 몫이다.”(코헬 9,9) (p174)
☞ 믿음 안에서 삶을 즐기는 것. 삶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즐기라고 주신 선물이다. 삶은 고역이 아니다.
우리가 가족이나 직장, 공동체 안에서 (절대적 구원), 완전함을 실현하려고 할 때, 우리는 삶을 지옥으로 만들기도 한다.(p175)
☞ 있는 대로, 내 능력대로 살자. 최소한 삶을 지옥으로 만들지는 말자.
에르하르트 캐스트너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산다면 어떻게 그날에 소중한 것을 얻을 수 있겠는가! 작은 것도 거둘 수 없다!”(p176)
☞ 매일 매일을 생각하며 살자. 생각없이 무의미하게 지내는 하루는 하루가 아니다.
늙어가는 과정의 신비로움(마르티나 블라스베르크) : 코헬 11,9-12,7
그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일회적이고 짧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요구한다. 그리고 가능한 한 현재의 삶을 즐기고 기쁘게 살도록 요구한다.(p182)
☞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짧고도 한 번뿐인 삶. 어떻게 살 것인가. 기쁘게 즐기며 살도록 노력하자. 그것이 하느님의 뜻일 것이다.
삶을 기뻐하고 즐기는 것은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이 늙음과 죽음의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늙음과 죽음은 젊은 시절의 기쁨과 마찬가지로 삶에 속하기 때문이다.
☞ 생노병사(生老病死) 다 하느님이 주신 삶이라는 선물이다.
외치는 용기(크리스텐 슈벨렌바흐) : 이사 40,6-8
그분은 만발한 꽃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꽃은 언젠가 시들기 때문이다. 그분은 풀과 같이 모든 생명이 멸망하리라고 보는, 그래서 두려움에 떠는 사람을 선택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말하는 일에 도무지 자신이 없는 사람을 당신의 대변인으로 삼으시어 대중 앞에서 외치도록 하신다.
☞ 그분은 인간적인 능력보다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선택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이사 40,8) 제2이사야는 헛된 것이 아닌 것, 영원히 계속되는 것, 우리를 넘어서는 것이 살아남는다고 말한다.(p197)
우리에게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게 했던 체험들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삶을 통해 지속되게 얻게 되는 체험이다. 내가 체득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과 함께 한 체험으로 나 자신을 넘어선다. (p197)
☞ 내가 하느님을 만난 체험을 기억하자.
그분은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신다(게르하르트 라이츠) : 이사 40,26-31
“너희는 하느님께서 지쳐있고 더 이상 너희를 생각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느냐?” 이어서 그는 모든 절망을 거슬러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한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분이시다. 그분은 피곤한 사람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p201)
☞ 나에게 힘을 주시는 하느님. 나를 결코 잊지 않으시는 분.
우리 각자에게는 피곤에 지치고 혼란스러운 순간, 시간,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나의 말을 귀담아들어주고,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을 원했을 것이다. 나와 함께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체험을 생생하게 들려주고, 내가 다시 용기를 얻어 일어설 때까지 계속 나와 동행해 줄 그런 사람을 원했을 것이다.(p203)
☞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미래의 표징(헬가 콜러-슈피겔) : 예레 32,1-3.6-15
예레미야는 닥쳐오는 멸망의 의미를 미리 밝히려고 했다. 백성은 규정된 모든 종교적 실천, 곧 예식, 기도, 성전에서의 제사, 안식일 계명 들을 단지 형식적으로 지키고 있었을 뿐 마음으로 이행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p206)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식을 잘 준수하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보호해 주시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런 잘못된 종교적 안전장치가 파괴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p206)
☞ 이스라엘 멸망의 원인은 형식적인 예배에 있었다.
경고의 메시지와 기쁨의 메시지(에리히 가르하머) : 에제 8~11장; 40~-48장
예언자 에제키엘이 우리에게 분명히 제시한 것은, 교회에 대한 비판은 항상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비판을 통해 행동하고 열매를 맺는 그래서 세상을 치유하는 교회를 이루어 나갈 수 있다. 살아있는 교회는 인간의 삶에 물을 적시어 그 생명을 자라게 하고 숨을 쉬게 하며 생동감을 넘치게 한다.(p213)
☞ 교회도 잘못할 때 비판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세상을 치유할 수 있다.
갑자기 사람 손가락이 나타나더니(올리히 뤼케) : 다니 5장
다니엘의 이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가 얼굴 없고 귀먹은 우상들, 마음과 감정과 이성이 없는 우상들을 섬기고 있지는 않은지 묻고 있다. 이미 하느님을 망각하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드높이고 과시하려는 우상에 사로잡히지는 않았는지 스스로 묻게 한다.(p218-219)
☞ 하느님보다는 돈 우상, 권력 우상, 쾌락 우상에 빠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현실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삶의 날수도 이미 헤아리셨다. 어쩌면 우리의 많은 행동도 심판을 받을 것이고, 선행과 사랑의 관점에서 그 무게가 모자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긁어모은 것은 나누어져 다른 사람들에게 분배될 것이다. “므네 므네 트겔, 파르신”은 우리에게도 해당된다.(p219)
☞ 나의 모든 것도 이미 하느님 앞에서 헤아려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 삶의 의미와 방향과 구원을 주는 것은,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심을 인정하고 우리의 삶을 그분께 내맡기는 일뿐이다. 그분은 ‘우리의 목숨을 손에 잡고 계시며 우리의 모든 길을 쥐고 계신 ’하느님‘이시다.(p219)
어머니 같은 하느님의 얼굴(마르티나 크라이틀러-코스) : 호세 11,1-9.11
“내가 에프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내 팔로 안아 주었지만 그들은 내가 자기들의 병을 고쳐준 줄을 알지 못하였다.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호세 11,3-4)
☞ 엄마 같은 하느님의 모습.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사랑과 연민이 가득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예언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모든 것을 허용하신 다음에도, 그러니까 인간이 제 멋대로 행동한 다음에도 우리의 하느님이시기를 바라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신의 아이에게서 결코 떨어지지 않는 어머니와 같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만일 하느님께서 정의의 원칙을 고수하셨다면, 그분은 우리와 결별하셨을 것이다.(p225)
☞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이 상상할 수가 없다. 그저 그 사랑을 믿고 맡길 뿐이다.
이제 더 이상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지속될 수 없다고 생각한 바로 그곳에서 예언자는 그 관계가 지속되리라고 선포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어머니가 갓난아기에게 행하는 것처럼 우리를 보호하시고, 돌보시고, 먹이시고, 기르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우리 한 가운데 계신다.(P225)
☞ 얼마나 위로를 주시는 말씀인가!
예배의 투쟁적 차원(파울-게르하르트 뭘러) : 아모 5,21-27
성경은 아무 생각 없이 행하는 예배를 하느님을 거스르는 행위라 폭로하고 그 어리석음을 인정사정없이 들추어낸다.(P226)
성경 본문에서는 주 하느님께서 친히 일인칭으로 말씀하신다. “나는 너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배척한다. 너희의 그 거룩한 집회를 반길 수 없다.”(아모 5,21) 왜 하느님께서는 아름다운 전례와 축제를 반대하시는가? 왜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마련한 이 축제를 기뻐하지 않으시는가? (P228)
예배는 세상과는 무관하게, 세상의 공정과 정의에 고립된 채 사제들의 만족과 유흥을 위해 거행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예배는 세상의 정의를 위한 길을 아무 것도 제시하지 못한 채 교회 공동체의 자기만족을 위한 전례 프로그램으로만 머물고 있었다.(P228)
☞ 하느님은 화려한 전례보다 세상의 정의를 더 기뻐하신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세상과는 동떨어진 채 드리는 이런 경건한 예배에 대해 차가운 반응을 보이신다. 그들의 헛된 예배를 반기지 않으시고, 더 더욱 그런 축제를 배척하시며, 장엄한 집회 역시 더 이상 받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P229)
그런 제물과 봉헌은 그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살진 짐승들을 바치는 친교 제물도 거들떠보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교회의 합창단과 음악도 마찬가지다. 하느님께서는 시끄러운 노래를 집어치우라고 하시며 수금 소리도 더 이상 듣지 않겠노라 하신다.(P229)
☞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의 마음을 모르는 지……
참된 예배는 오히려 정의와 공정이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이 공정과 정의가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그리고 공동체와 교회로부터 결코 마르지 않는 샘처럼 흘러나와 세상과 사회 속으로 흘러들어 가야 한다고 성경은 말한다.(p229)
☞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성경의 전통에 따르면, 참된 예배 안에서 이루어지는 참된 신앙은 가난한 사람, 억압당하는 사람, 고아, 과부, 착취당하는 사람, 박해를 받는 사람,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 등의 권리와 해방을 옹호하는 데서 나타난다. 세상의 고난과 권력의 희생을 외면하면서 참된 예배는 거행될 수 없다.(p229-230)
참된 예배는 세상의 정의를 세우고, 가난한 피조물의 해방과 고통받는 피조물의 구원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기에 예배는 비폭력을 지향하지만 항상 정치적·사회적 정의를 위한 투쟁적 차원을 지니고 있다.(p230)
☞ 악에 투쟁하는 것은 참된 예배의 본질이다.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는 권력이나 이익, 특권을 고려하기보다 공정을 세우고, 정당한 평화를 보존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교회는 공정을 왜곡하는 모든 사람, 잔인한 권력자, 뇌물과 착취의 모든 형태를 거슬러 대응해야 한다. (p230)
"아 너희, 공정을 쓴흰쑥으로 만들어 버리고 정의를 땅바닥에 내팽개치는 자들아!“(아모 5,7) 교회는 이 말씀을 항상 되새겨야 한다. 사회 정의, 가난한 사람의 보편적 해방, 어두운 구석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과의 나눔과 연대 등을 위해 헌신하지 않는 예배는 고약한 쓴흰쑥처럼 하느님을 비위 상하게 하는 역겨운 것이다.(p230)
☞ 정말 나는 너무도 성경을 모르고 신앙생활을 했구나.
전례가 세상에 대한 책임을 잃어버린 채 단지 예배적 공연으로 끝아 버린다면, 이는 그 의미를 잃게 된다.(p231)
예언자들은 하느님께 드리는 모든 예배에는 항상 정의와 이웃 사랑에 대한 윤리가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p231)
☞ 정의와 이웃 사랑이 빠진 믿음은 신앙이 아닌 껍데기일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발 씻김의 장엄한 행위에서, 당신께서 신앙의 순종을 타인을 위한 봉사로 이해하고 계심을 보여 주셨다. 그리스도 예배는 의기양양한 자기 과시나 정치 권력적인 연출이어서는 안 된다. 모든 전례 음악을 동원하여 장엄하고 정성되이 거행하는 그리스도교 예배의 핵심은 항상 가난한 사람과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 구체적인 현실 세계의 공정과 정의를 위해 투신하는 하느님을 명확하게 대변하는 데 있다.(p231)
우리는 타인을 위해, 많은 이를 위해 존재함을 그분께 고백하며 성찬례를 거행한다.(p232)
☞ 타인을 위한 봉사가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지야 할 십자가다.
부자들의 탐욕(앙겔라 카우프) : 미카 2,1-11
부자들의 뇌물과 권력 남용에 대한 미카 예언자의 진술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제기되는 문제이다. 부자들은 세금을 포탈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원조금은 정해진 곳에 올바로 사용되지 않는다. 정치가들은 불법으로 재산을 축적한다. 부정한 일들은 오히려 권력가나 높은 봉급을 받는 사람들에 의해 그런 식으로 자행되고 있다. 미카서 말씀 그대로다.
“탐이 나면 밭도 빼앗고 집도 차지해 버린다. 그들은 주인과 그 집안을, 임자와 그 재산을 유린한다.”(미카 2,2)
☞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하느님과 맞서는 불의한 자들이다.
지금 다른 사람의 숨통을 죄는 사람의 목에 하느님께서 친히 올가미를 치실 것이다. 그들이 이웃을 파괴하는 것처럼 그들 자신도 몰락할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마지막에는 정의가 세워진다는 뜻이다.(p234)
☞ 정의의 하느님이시다.
미카는 나에게, 우리 각자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가? 우리는 과연 작은 사람들의 편에 분명하게 서 있는가?(p234)
☞ 솔직하게 물어보자. 나는 하느님의 편인가, 악의 편인가!
미카는 자신의 특권을 남용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태도를 고치라고 호소한다. 곧 회개하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는 대재앙이 닥치리라고 경고한다. 하느님께서 친히 멸망을 계획하신다는 것이다.(p236-237)
이제 행동하는 일이 필요하다. 내 삶의 주변에서 내 모든 능력을 다하는 행동이 요구된다. 그러면 새로운 문이 열리고, 지금 현재를 변화시킬 수 있다. (p239)
☞ 세상이 신음하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귀를 열어야 한다.
하느님께 반항하는 도성의 단죄(프란츠 트라우트만) : 스바 3,1-8
우리는 성경을 항상 우리의 현재 안에서 읽어야 하고, 오늘의 시점에서 ‘오래된’ 문헌을 되새겨야 하며, 성경 본문 안에서 우리 자신을 찾아야 한다.(p247)
☞ 성경은 죽어있는, 박제된 책이 아니다.
스바니야는 하느님 앞에 머물러 있기 위해서 먼저 가난해야 한다고 결코 주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난 그 자체’는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바니야는 예루살렘의 부자들이 하느님의 뜻대로 살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했다.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닥칠 것이다.(p249)
☞ 부자들이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다면 심판을 받는다고 말한다.
스바니야서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그리스도교 교리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도 ‘하느님을 배반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미사에 참례하고 교무금을 잘 내는 사람이라도 ‘불행하여라. 너희 고집 세고, 더럽고, 폭력을 휘두르는 예루살렘아!’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p250)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타오르는 분노를 모조리 쏟아 붓는’ ‘거짓 신자’로 단죄하실지, 아니면 의인으로 인정하실지 지금은 알 수 없다. (p250)
☞ 하느님께서는 나를 어떻게 보실까? 거짓 신잔가? 아니면 의인인가? 솔직히 자신이 없다.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콘라드 바움가르트너) : 즈카 8,20-23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셨다. 사람들은 그분과 함께 길을 걸었고 그분 곁에 머물렀다. 사람들은 그분에게서 ‘하느님이 그분과 함께 계시며, 또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체험했다.(p253)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 움직이는 이들, 그분 백성으로 모이는 이들, 그분의 가르침과 길을 따르는 이들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서 동일한 것, 곧 ‘하느님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다.’라는 사실을 체험하게 하는 일이다.(p253)
우리가 삶에서 그분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그분께 돌아서면, 우리가 그분을 향해 삶을 살아간다면, 그분은 먼저 우리 곁에 와 계신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분은 항상 이것을 바라신다.(p254)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공동체의 어떤 그리스도인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이 물음을 우리 각자에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그분의 일을 설득력 있게 증언해야 하기 때문이다. 곧 다른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복음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움직이며, 신앙의 결단을 내리도록 초대하고, 늘 함께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복음이 되어야 한다. (p255)
☞ 내 안에 하느님이 계신가? 나는 다른 사람에게 과연 복음이 될 수 있는가?
허무와 희망의 긴장 속에서(베른하르트 뤼버링) : 말라 3,13-22
“주님이 주의를 기울여 들었다.”(말라 3,16)하고 성경은 말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했을 당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것과 같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탈출 3,7)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고통을 무심하게 대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고통 중에 있는 인간을 보시고, 주의를 기울여 그들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위해 개입하신다.(p259)
"부모가 자기들을 섬기는 자식을 아끼듯 나도 그들을 아끼리라.“(말라 3,17) 이것은 기쁜 소식이다! 하느님의 이런 자비심을 통하여 억압받는 이들은 공정과 정의가 실현됨을 분명히 체험할 것이다.(p259-260)
하느님의 첫 번째 목적은 악인들의 심판과 형벌이 아니라 “의로움의 태양”(말라 3,20)을 통한 인간의 해방이다.(p261)
말라키서는 우리 삶의 긴장감을 보여준다. 우리의 삶은 한편으로는 허무를 체험하고,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에 의해 개시된 하느님의 종말론적 희망하기 때문이다. 이런 허무와 희망의 긴장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과 기도로써 하느님 안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니.”(p262)
☞ 허무와 긴장의 반복이 우리 삶의 현실이다.
3. 이 책을 읽고 앞으로 내 삶에서 실천할 것
성경 통독을 할 것
내가 얼마나 성경을 모르고 있는 지 이 책을 읽으면서 절감했다. 30년 신앙생활 동안 아직도 성경을 통독을 한 적이 없다는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언제가 될 지 장담은 할 수 없지만 성경을 통독하기를 자신에게 약속한다.
첫댓글 책읽기에 열심한 마음지기님, 결심한 것 잘지키시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신앙은 유혹과 오류, 심지어는 타락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보여 주기 위해서다." 마음지기님 좋은책 소개 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힘들때 하느님께서 우리와 동행하고
계심을 신뢰하라고 가르친다.
주님께로 가는 길에 도움되는 글들 간추려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태만과 안락, 이기주의와 좌절, 일상의 다양한 죽음 등을 멀리할 때 우리의 삶은 새로운 시작과 변화된 시각을 향해 열리게 된다. 우리의 삶에 요구되는 발걸음을 우리는 내디딜 수 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