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주는 국가에 의존하고 국가는 민(民)에 의존한다
-정도전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 왕조를 창건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은 바로 정도전이다.
정도전은 1342년 고려 충혜왕 3년,경상도 영주지방에서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도전이 세상에 태어날 당시 고려는 몽골족의 사나운 간섭정치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어지러운 비극의 시대에서 정도전의 아버지인 정운경은 지조를 꿋꿋하게 지키면서 청렴결백한 관직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려사』는 고려왕조의 청백리 다섯명을 꼽고 있는데, 바로 정운경이 그 중의 한명으로 기술되고 있다. 그러니 정도전의 집안은 당연히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세 아들의 이름을 청백리답게 도(道)를 전하고,도를 간직하며,도를 회복하라는 뜻에서 도전(道傳),도존(道存),도복(道復)이라고 지었다.
정도전은 장성한 뒤 아버지의 친구이며 대유학자였던 이색의 문하에 들어갔다. 이때 정도전은 정몽주,이숭인 등과 동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훗날 동문들과 전혀 다른 길을 걸으며 끝내 불구대천의 정적이 되고 말았다.
정도전은 20세가 되던 해에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당시 임명되었던 그의 관직은 통례문이라는 벼슬로서 단지 조회때 예식을 맡아보는 한직 중의 한직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부친상을 당해서 낙향해야 했고 3년간 상복을 입었다. 그는 이때 정몽주가 준『맹자』를 정독하였다.『맹자』는 덕을 잃은 군주는 그 신하가 역성혁명을 할 수 있다는,그 당시로서는 아주 놀라운 주장이 담겨있는 책이었다. 이러한 주장이 담긴 『맹자』를 훗날 온건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정몽주가 정도전에게 주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탈상 후 정도전은 정4품의 지제교로 임명되어 공민왕과 우왕에게 『대학』을 강의하고 정치현안에 대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철저한 불교 배척론자였으며, 더구나 당시 조정의 공식적인 입장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반원친명책을 주장하였다. 그는 고려왕조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버거운 급진적인 개혁주의자였다.
1. 반골 기질의 불순분자
1375년, 날로 국세가 기울어 가던 원나라는 주원장이 세운 신흥 명나라를 협공하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고려를 방문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정몽주와 정도전 그리고 이숭인과 권근 등 신진 유학자들이 들고 일어나 격렬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당시 실권자이며 친원파였던 이인임 일파는 그 의견들을 묵살하고 끝내 원나라 사신을 불러들였다. 이에 정도전 등은 아예 업무를 보지 않으면서까지 크게 반발하였다. 이인임은 당장 보복에 나서 주동자인 정몽주와 정도전을 따로따 로 유배시켜 버렸다.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자신의 결연한 심정을 시에 담았다.
죽음은 한 번뿐인 것을
목숨을 붙여 안락하게 살고 싶지 않네
천년 뒤 적막하게
영웅 열사가 가을 하늘에 벗겨있구나
정도전이 유배된 곳은 멀리 전라도 나주의 회진현에 있는 천민부락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서른 셋이었으며 그곳에서 3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그는 천민들과 어울리면서 탐관오리들이 자행하는 갖은 횡포와 힘없고 가난한 백성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설움을 몸소 겪어야 했다. 그리고 이는 그의 개혁사상을 더욱 확고하게 다져주는 계기가 되었다.
일찍이 나라가 어지러움에 처해 있는 상황을 항상 통분하던 반골기질의 젊은이였던 정도전은 진사시에 급제한 스무살에는 『원유가』라는 시를 지은 적이 있었다. 그 시에는 공민왕이 자기가 사랑했던 왕비 노국공주가 죽자 그녀를 위해 암영전이라는 화려한 집을 지은 것을 풍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한 그는 어릴 적부터 독서와 함께 검술을 익혔던 호탕한 인물이기도 했다.
어느 날 정도전은 유학자인 권근, 이숭인과 더불어 평생에 가장 즐거운 일이 무엇인가를 놓고 담소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이때 이숭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장 즐겁게 생각하는 바는 바로 조용한 산방에서 시를 짓는 것이라네.”
그러자 권근이 말했다.
“역시 따뜻한 온돌에서 화로를 끼고 앉아 미인 곁에서 책을 읽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 이겠지.”
이에 반해 정도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첫눈이 내리는 겨울에 가죽옷을 입고 준마를 타고서 누런 개와 푸른 매를 데리고 평원에서 사냥하는 것이 가장 즐겁다네.”
훗날 이숭인은 결국 큰 뜻이 없는 아주 평범한 선비로서 조용히 살았을 뿐이고,권근은 부귀영화는 누렸으나지조가 없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정도전은 광야를 달리며 천하를 경영하겠다는 그 야망을 끝내 이루게 되었다.
정도전이 작은 일에는 그리 구애받지 않는 인물이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일화로도 알 수 있다. 어느 날 정도전이 말을 타고 외출하게 되었는데 그만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길을 나서게 되었다. 사람들이 이 차림새를 보고 한 마디 거들자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한쪽 신발을 본 사람은 반대쪽 신발을 볼 수 없을 터이니 걱정 하지 말라.”
귀양살이는 끝났지만 아무도 정도전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할 수 없이 고향 영주로 돌아가 서당선생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의 불타는 정열과 포부는 그를 마냥 고향에 머물러 있게 하지 못했다.
당시 그는 한양출입조차 봉쇄되어 있던 이른바 '불순분자'였다.그래서 한양에서 제일 가까운 곳까지 가서 삼각산 아래에 삼봉재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독서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 그는 자기의 호를 삼봉(三峯)이라고 지었다. 삼각산의 산 봉우리가 세 개 있다는 데서 비롯된 호였다.
그러나 이 생활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정도전은 그땅의 소유권을 가진 권문세가에게 집을 철거당하고 쫓겨나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날부터 정처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귀양살이부터 시작하여 10년 간이나 뜻을 펴지 못한채, 아무도 자신을 전혀 알아주지 않는 가운데 불우한 생활을 기약없이 견뎌내야 했다.
2. 출생의 비밀
한편 정도전이 진사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을 때 뜻하지 않은 장애물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대간(臺諫)이 그의 신워증명을 선뜻 내주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정도전의 외조모의 출생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즉, 그것은 정도전의 외조모가 승려와 노비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모함이었다.
이 문제는 이후 그를 계속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가풍이 부정하고 천지(賤地)에서 몸을 일으켰으며, 그러한 천근(賤根)을 감추기 위해 호적을 바꿨다는 모함이 끊이질 않았다. 물론 이러한 기록은 후세에 정도전이 역적으로 몰려 숙청되었기 때문에 후대에 왜곡해서 기록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심지어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이 단양에 유람을 갔다가 새막 지키는 처녀와 눈이 맞아 정도전을 낳았다.' 는 터무니 없는 비방까지 퍼졌다.
그리고 이 문제를 정적들은 끊임없이 제기하여 그에게 상처를 입혔으며, 심지어 조선왕조가 건국된 후에도 이 문제는 계속 그의 아킬레스건이 되었다. 그가 불교를 배척했던 것도 어쩌면 이러한 사실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정도전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 창건의 중신 중에는 출생에 비밀을 갖고 있는 인물이 많았다. 이를테면 역시 개국공신이며, 태종(이방원)때의 중신인 하륜도 서얼 출신이었다. 하륜은 그 뒤 태조 7년에 자객을 보내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폭로한 자의 일족을 자그만치 70여 명이나 살해하였고, 족보도 모조리 불태워버릴 정도였다. 개국공신인 조온의 어머니도 이자춘의 비첩녀였고, 이화의 어머니도 이자춘의 비첩이었다. 또한 훗날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암살한 조영규도 서얼 출신이었다.
이렇듯 개국공신 중에는 출신에 문제가 있는 인물이 많았다. 이는 역으로 이들이 당해야 하는 신분상의 불이익 때문에 고려왕조에 대하여 불만이 가장 많았고 개혁에 대한 의지도 컸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3. 체두변발을 한 시골청년에서 국민적인 영웅으로
불우한 생활을 보내던 정도전이 마지막으로 시도한 승부는 바로 이성계를 만나는 일이었다.
‘내가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반드시 내 뜻을 펴고 말리라. 내 뜻을 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무력을 손에 쥔 인물을 잡아야 한다. 지금 저 북족에 웅거하고 있는 이성계야말로 내가 찾는 인물이 아닐까? 그는 강직하고 기개있는 장군이다. 그 사람과 내가 손을 잡고 일을 하면 반드시 천하를 얻을 수 있으리라.’
정도전은 그의 혁명사상을 실현시킬 유일한 인물로 이성계를 선택하였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1383년, 그때 정도전의 나이 마흔하나였고 이성계는 마흔 여덟이었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만나러 가는 길에 비장한 심정을 시로 읊었다.
넓은 들 하늘 아래 초목이 자라고
긴 강을 띠처럼 성을 돌아 흐르네
장군이 이땅에서 억센 오랑캐 꺾어
장수 소임 거듭 오는데도 아직 검은 머리구나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은 이성계는 수차례에 걸쳐 국내까지 쳐들어온 홍건적을 격파하였고, 또한 쌍성을 탈환하기 위해 침공해 온 원나라 대군을 함흥평야에서 대적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그 뒤 그는 동북면 도원수가 되어 원나라의 동녕부를 공격하고 나아가 북방의 요양성을 함락시켜 그간 원나라에 빼앗겼던 자비령 이북의 땅을 탈환하였다.
특히 그는 중남부 지방에 기습해온 왜구들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도전을 만나기 2년 전에는 지리산까지 침입하여 온갖 만행을 자행하고 있던 왜구들을 2년에 걸쳐 토벌전을 전개한 끝에 왜구를 오나전 소탕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 바로 황산대첩이었다. 어두운 시대에 민초들은언제나 영웅을 갈구하기 마련이다. 백척간두의 위기에 몰려있던 고려말의 어두운 시대에 놀랍게도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던 이성계는 일약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올랐다.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정도전은 스스로 멀리 북쪽 변경의 함주까지 이성계를 찾아갔다. 때는 북풍한설 휘몰아치는 차가운 겨울이었다. 그는 이성계를 만나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이만한 군대를 가지고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두 사람이 이렇게 만난지 5년 뒤 위화도 회군이 있었고, 10년 뒤에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건국하였다. 그리고 킹메이커는 바로 정도전이었다.
4. 토지공개념의 시초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것은 인간사의 변함없는 철칙이란 말인가.
고려말 위화도 회군에서 성공하고 권력을 장악했던 회군 주체세력간에는 심각한 갈등이 일어났다. 바로 누구를 왕으로 내세울 것인가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 다툼에서 결국 이성계와 대립하고 있던 조민수는 명망이 높았던 유학자 이색의 도움을 받아 우왕의 아들 창왕을 옹립하고 정권을 잡았다. 그러자 이성계와 정도전은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서서 조민수를 부정축재자로 탄핵하여 제거하였고, 나아가 권문세가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전 제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당시 토지제도는 문란할 정도로 문란해져 있었다. 귀족 등 권문세가들은 어마어마한 땅을 소유하며 강이나 산을 그 경계로 삼을 정도였다. 이렇게 하여 나라의 공전은 이제 바늘 하나 꽂을 땅도 남지 않게 될 정도였다. 반면에 농민들은 그들에게 매년 수확한 곡물 중 무려 7, 8할을 바쳐야 했다. 백성들의 생활난은 문자 그대로 도탄에 빠져 있었다. 정도전은 권세가들의 식량소비가 평민의 10배나 된다면서 그들을 '인륜을 해치는 도적들'이라고 비난하였다.
하지만 전제개혁에 대한 구세력의 반발은 거세었다. 그 얘기가 나오자마자 시중으로 있던 이색은 강경하게 반발하였다.
“가벼이 구법을 고치는 것은 세상을 어지럽히고 번거롭게 만드는 일일뿐 불가한 일이다. 더구나 국가에 공로가 많은 공신들의 생활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그런 개혁을 그렇게 간단하게 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이색의 의견에는 권근, 우현보, 이림 등 대부분의 관료들이 찬성하고 나섰다.
한편 이 무렵 고려가 명나라에 창왕의 책봉을 요청하자 명나라는 고려의 대신이 직접 와서 창왕의 즉위 사실을 설명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자 이색의 자진하여 명나라에 가서 명나라 관리를 고려에 파견하여 내정을 감시해 주도록 청하였다. 하지만 명나라가 소극적으로 나오는 바람에 이색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어쨌든 이때 전제개혁을 지지하고 나선 인물은 오직 조준, 정도전뿐이었으며 정몽주는 중립적인 입장만 취한 채 관망하고 있었다. 상황은 매우 불리해졌다. 그런데 마침내 기회가 왔다. 그것은 귀양가 있던 우왕을 복위시키고 이성계를 제거하려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칠 정도전이 아니었다. 사실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고 땡중 신돈의 사생아일 뿐이라고 그는 몰아부치면서 왕위를 도둑질했다는 죄목을 둘러 씌웠다. 결국 우왕과 창왕은 강릉에서 처형되었고, 이색은 귀양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는 고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공양왕이 추대되었다.
마침내 전제개혁이 전면적으로 실시되었다. 공양왕 2년에 산더미처럼 쌓인 토지문서들을 모조리 불태우면서 권문세가들이 가지고 있던 토지소유는 무효화되고 말았다. 그리고 과전법이 공포되어 모든 토지가 국가소유인 공전으로 편입되었다. 이렇게 하여 권문세가들은 하루아침에 모든 토지를 빼앗겼다. 이는 권문세가의 몰락을 가져왔고, 나아가 고려왕조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실 과전법이라 불리는 토지개혁은 오늘날의 토지공개념과 비슷한 토지국유제였다. 정도전은 공개념(公槪念)에 토대를 둔 일종의 국가사회주의의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고려 말기부터 고려왕조의 테두리 속에서 온건한 개혁을 시도하려는 정몽주를 비롯한 온건개혁파와 역성혁명까지 지향하면서 급진적 개혁을 시도하려는 급진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온건파는 비리의 핵심세력을 제거하고 대토지소유는 정리하되 왕조 타도나 공전제도의 토지제도 개혁 등 전면적 개혁은 반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의 사상인 성리학의 기본입장과도 일맥상통하는 논리였다.
하지만 정도전을 중심으로 하는 급진파들은 개혁이념에 있어서 성리학만이 아니라 주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국가사회주의적 이념을 표방하고 있었는데, 사실 이와 같은 이념과 정책은 중국 북송시대의 왕안석의 사회개혁사상과도 유사한 것이었다. 그들은 토지문제에 있어서 공전제도, 상업에 있어서 공상(公商), 수산업과 광업 그리고 염업과 목축업에 있어서 공영 등 모두 공개념에 입각한 국가의 산업통제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권문세가의 사유와 사영을 축소시키면서 백성들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신분제도에 있어서도 노비를 축소시키는 대신 양민을 확대시켰다. 정통 성리학자들의 신분관은 사대부를 지배계급으로 하는 사대부 - 백성의 지배종속관계를 이상으로 삼은 데 반해 급진파들은 국가가 직접 통제하는 국가 - 백성의 지배종속관계를 기본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체제는 왕도정치라는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5. 적과의 동침, 정몽주와 정도전
정몽주와 정도전, 두 사람은 운명적인 관계였다. 정도전은 일찍이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 정몽주를 만났다. 그 이후 두 사람은 둘도 없는 동지가 되었다. 그런데 정도전이 혁명론자였던 데 반해 정몽주는 언제나 점진적인 개혁론의 입장을 지녔던 인물이었다. 이것은 어쩌면 출생배경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정도전이 출생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거니와 또한 정도전의 고조 할아버지인 정공미는 기껏 고을 아전이었다. 실로 그는 '한미(寒微)한 출신'이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정몽주의 집안은 대대로 전통적인 학자 가문이었다.
두 사람의 나이는 비슷했지만 정몽주가 학문에서나 벼슬에서나 항상 앞서 나갔다. 언제나 정도전이 정몽주를 뒤에서 쫓아가는 형상이었다. 정몽주는 1360년 문과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그리고 2년 뒤 스승이었던 김득배가 홍건적 토벌에 큰 공을 세웠으나 당시의 세력가인 김용의 미움을 받아 처형당했다. 이때 그의 시체는 능지처참(죄인의 머리,팔,다리 이렇게 다섯부위를 각각 말로 연결하여 말을 힘껏 몰아 몸을 6토막내는 형. 그당시의 형벌 중 가장 악형임)되어 거리에 버려져 있었는데, 김용을 두려워한 나머지 아무도 시체를 돌보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몽주는 죽을 각오를 하고 왕에게 스승의 무죄를 호소하며 장사지내게 해달라고 청원하였다. 마침내 이에 감동한 왕은 그 청을 받아들이고 정몽주는 스승의 시신을 고향의 산에 정성껏 묻을 수 있었다.
훗날 김용은 공민왕을 시해하고 자신이 권력을 차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환관을 공민왕으로 잘못 알고 살해하게 되었고 결국 능지처참되고 말았다.그 이후 정몽주의 명성은 널리 칭송되었다. 정몽주는 1363년에 서기관으로 여진족 토벌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고 이후 그는 승진을 거듭하게 되었다.
1372년 정몽주는 명나라 사절단의 서기관으로 파견되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그만 태풍을 만나 타고 있던 배가 침몰학 되었다. 이때 배에 타고 있던 고려인 11명은 모두 익사하였는데, 정몽주만은 부서진 뱃조각에 매달려 무인도로 떠내려가다 겨우 구조되었다. 더구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험 속에서도 그는 국서를 끝까지 품에 간직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명태조 주원장은 그를 남경으로 불러 몸이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극진히 대접해 주었다.
정몽주가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된 적이 있었다. 일본에서 그는 큐슈의 막부 책임자와 해적 행위를 중지하고 평화적인 교역을 하겠다는 약정서를 교환하고 700여 명의 포로를 데리고 귀국하였다.
흔히 이성계와 정몽주가 원수지간이었던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정몽주는 일찍부터 이성계와 가까운 사이였다. 이성계가 지리산 일대에서 왜구에게 대승을 거두었던 황산대첩때 정몽주는 조전(助戰)원수라는 직함을 가지고 이성계와 함께 출전한 일이 있었다. 또한 이성계가 동북면도원수로 있을 때에도 조전원수로 함께 있었다. 따라서 이성계가 명성을 떨칠 때 정몽주의 명성도 동시에 드높았었다.
사실 정도전이 이성계를 만나게 된 것도 정몽주의 길을 좇은 셈이었다. 그리고 정도전이 이성계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 된 이후에도 오랫동안 정몽주와 정도전은 같은 길을 걸었다. 언뜻 생각해 보면 정몽주가 최영 장군과 가까운 것처럼 느끼겠지만 실상은 오히려 반대였다. 정몽주는 위화도 회군을 찬성하였던 인물이다. 단지 정몽주는 최영 장군이 고려 왕조의 공신이었으므로 절대 죽이지는 말고 유배만 시킬 것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위화도 회군 뒤에 두사람의 위치는 역전되었다. 이제 정도전은 대사성의 높은 자리에 올라 정몽주를 처음으로 앞섰다. 이때부터 정도전은 스승 이색과 친구 정몽주와의 사이에서 틈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정몽주는 우왕 처벌에 반대하며 이성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쫓겨나는 우왕에게 가서 통곡하였다.
하지만 정몽주는 여전히 정도전의 곁에 남아 있었다.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옹립시키려는 모의를 숙의할 때도 그는 이성계, 정도전과 적극적으로 힘을 합쳤다. 또한 이성계와 정도전이 위화도 회군때의 동지였던 조민수를 숙청하는 일에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도전과 정몽주가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은 공양왕이 즉위하게 된 뒤부터였다. 당시 정도전은 격렬한 척불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정도전은 사원이 소유하던 토지와 노비를 모두 몰수하였고, 일반 백성이 승려과 되는 것도 금지하였다. 더 나아가서는 이색, 이숭인 등 보수파 인사들을 축출시켰다. 이색은 그의 스승이었지만, 일단 그의 계획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되자 축출에 앞장섰다. 결국 이색은 장단, 청주, 장흥 등지를 전전하며 귀양살이를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숭인은 끝내 피살되고 말았다. 과연 정도전은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해서 스승도,친구도 모두 버려야만 했을까? 그것이 정치의 현실이었던가?
그런데 공양왕은 불교에 호의를 가지고 있던 왕이었다. 그러니 정도전의 격렬한 척불운동을 착잡한 심정으로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다. 그때 정몽주가 눈에 띄게 된 것이다. 공양왕은 언제나 점잖고 또 온건하며 합리적인 입장을 가진 정몽주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했다. 이후 공양왕은 모든 일을 정몽주에게 의지할 정도로 그를 신임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정몽주는 정도전이 심혈을 다해 추진하던 토지개혁과 척불운동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으면서 언제나 중립적인 자세만을 취하고 있었다. 정몽주는 어떻게 하든 고려왕조를 지키려고 했고, 명나라의 법률을 본받아 새로운 법률을 만든다든지 각지에 의창을 세운다든지, 또는 개경에 유학학교를 세우고 각 지방에 향교를 세우는 등 어디까지나 점진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정몽주는 불교를 반대하고 불교의 폐단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지만, 평소에 그는 불경을 즐겨 읽고 있었다. 그런 정몽주에게 정도전은 좀더 철저하게 불교를 반대할 수 없느냐며 자주 힐난하였다.
전제개혁을 실시한 이후에도 개혁은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아직 정몽주를 비롯한 고려의 구신세력이 의연히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성계 일파는 그들의 최후의 근거지로 되어있는 불교와 사워에 대한 배척운동을 일으키면서 그들을 격렬하게 규탄하였다. 그러자 어느 날 공양왕은 이성계를 불러들여 명을 내렸다.
“듣자하니 요즈음 경은 불교사원을 공격하고 신하들을 비난한다는데, 그게 사실이오? 그러한 일은 국정과 민심을 혼란시키는 것이니 즉시 중지하시오.”
너무나 화가 난 이성계는 그 자리에서 즉시 사퇴서를 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때 정몽주가 중재에 나섰다.
결국 왕은 정몽주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미 죽은 조민수의 재산을 몰수하고 일부 신하들에게 가벼운 처벌만을 내렸다. 그리고 향후이들에 대해 비난을 하는 자는 무고죄로 처벌하겠노라고 발표하였다.
이것은 정몽주의 완전한 승리였다. 이제까지 서로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상대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노력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무렵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을 하던 중에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여 중태에 빠지게 되었다. 바로 1392년 3월의 일이다. 이성계는 이미 예순하나의 노령이어서 어쩌면 다시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정도전과 조준은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몽주는 마침내 위험하기 짝이없는 파괴자, 정도전과 조준 등 이성계파를 체포하여 귀양을 보내고 만다.
정도전은 예천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때 정몽주는 곧바로 전도전을 처형시킬 심산이었다. 정도전이 막 참수형에 처해질 그 무렵, 개경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바로 이성계의 야심만만한 아들 이방원이 필사적인 반격에 나선 것이다.
이방원은 거의 학문을 배우지 못한 아버지 이성계와는 달리 1382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정식으로 관직에 올랐던 인물이다. 이방원이 과거에 합격하자 이성계는 성대한 잔치를 열어줄 정도였다. 또한 그는 1388년에는 서장관으로서 명나라 사절단에 참가하여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방원은 정몽주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정몽주를 회유하려 하였다. 저 유명한 『하여가』를 불러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기도 했던 이방원이 아닌가. 하지만 정몽주는 『단심가』로써 고려왕조에 대한 변하지 앟는 충성심을 의연하게 보여주기도 했다.
이방원은 자파 세력이 막다른 위기에 몰리자 반대파의 기둥인 정몽주를 죽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직감하였다. 그리고 즉시 자기의 심복인 조영규를 시켜 선지교에서 정몽주를 쇠뭉치로 격살시켰다. 정몽주의 나이 쉰 여섯이었고, 이방원은 스물 다섯이었다. 정몽주가 죽은곳의 이름이 선죽교로 바뀐 것은 정몽주의 선혈로 얼룩진 이 다리 위에 훗날 대나무가 피어났다는 전설 때문이다. 어쨌든 이렇게 하여 정도전은 가까스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정몽주가 죽은 지 3개월이 지난 7월, 정도전은 이방원 등 50여 명과 함께 본격적으로 이성계 추대공작을 개시하였다. 그들은 공민왕의 왕비를 찾아가 공양왕을 폐위하라고 강요하였다.
“공양왕은 아둔하고 도리에 어긋난 일을 거듭하여 이미 백성을 다스릴 덕도 사직을 지킬 힘도 잃어 버렸습니다.”
마침내 옥새를 손에 넣는 데 성공한 그들은 이성계를 찾아가 즉위할 것을 간청하였다. 이성계는 몇번이나 사양하다가 드디어 허락하였다. 이렇게 하여 고려 왕조는 왕건이 나라를 세운지 34대,475년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정몽주, 정도전 두 정씨의 승부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 뒤 태동으로 즉위한 이방원은 정몽주에게 시호를 내려 복권시키고 그의 충절을 백성들이 본받도록 하엿다. 그러나 정도전에게는 가혹한 역적의 누명을 씌웠고, 그의 무덤조차 만들지 못하게 했다. 두 사람 모두이방원의 정적으로서 그의 손에 의해 죽었지만, 죽은 후에도 두 사람의 운명은 이렇듯 달랐던 것이다.
5. 서울을 만든 사람들
인왕산에 가면 고깔에 장삼을 걸친 스님의 모습을 꼭 빼닮은 선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6백여 년 전 바로 이 바위를 놓고 때아닌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성계의 스승이었던 무학대사는 이 선바위를 반드시 서울의 도성안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정도전은 선바위를 성 밖으로 빼야 한다는 견해를 굽히지 않았다. 서울 정도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이 두 사람이 벌인 논쟁에서는 온갖 풍수지리설이 동원되었다. 하지만 논쟁이 벌어지게 된 데에는 주도권 싸움과 더불어 불교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도 내포되어 있었다.
결국 정도전은 이 논쟁에서 승리를 거뒀다. 더구나 승려의 도성출입도 철저히 금지되어 이후 5백년 조선왕조 기간 내내 승려는 서울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성계가 아직 떠꺼머리 총각일 때 묘한 꿈을 꾼 적이 있었다. 꿈에 어느 집에 들어가서 서까래 셋을 짊어지고 나왔던 것이다. 아무래도 이상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던 이성계는 용하기로 소문이 나 있던 무학대사를 찾아갔다. 무하대사는 안변 설봉산 아래에 토굴을 파고 도를 닦던 명승이었다. 그는 이성계의 꿈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이렇게 말했다.
“서까래 셋을 짊어졌으니 그것은 '王'자를 가리키는 것이오. 나라의 왕이 될 운명이니 아무쪼록 자중하시오.”
그뒤부터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스승으로 섬기게 되었다.
원래 한양천도를 처음 꺼낸 사람은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무학대사가 아니라 이성계였다. 그는 조선왕조를 건국한 지 채 한달도 안 된 1392년 8월에 한양으로 천도하는 게 어떻겠느냐면서 신하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아직 궁궐과 성곽이 준비되지 않아 민가를 빼앗으면서 조정이 옮겨 가게 되면 백성들이 갈 곳을 잃기 때문에 시기상조라 사료되옵니다.”
조준이 제동을 걸고 나왔다. 배극렴도 잇달아 조준의 주장에 찬동하였다. 결국 이성계는 한양천도를 포기해야만 했다. 뒤에 한양천도를 실질적으로 총감독했던 정도전도 처음부터 천도론자 였던 것은 아니다.
“지금 여러 사람의 의논은 모두 음양술수의 미신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구나 지금 무너진 고려왕조의 뒤를 이었기 때문에 아직 백성들이 안정되지 못한 데다가 나라의 터전이 아직 닦여지지 않은 실정입니다. 그러니 백성의 힘을 기르며 천시를 살피고 인사를 다한 뒤에 적당한 때를 기다려 도읍의 터를 알아봄이 상책일까 합니다.”
정도전은 이렇게 완곡한 어조로 천도를 반대하였다. 원래 이성계는 계령산을 도읍지로 염두해 두고 직접 갔다오기도 하였다. 하지만 판서운관사로 있던 윤신달이 이렇게 반대했다.
“계룡산을 도읍지로 하기에는 산세가 부적당합니다. 너무 좁아 저 궁궐조차 지을 자리도 없을뿐더러 종묘와 시가를 지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곳은 정씨가 도읍할 곳이라는 비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윤신달은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나라에서 도읍을 할만한 곳은 개경과 한양뿐입니다.”
한양은 고려 무종때 남경으로 승격되었고, 이미 풍수가들 사이에서는 목(木)자 성을 가진 인물이 나타나 이곳 명당터에서 백성을 구제하고 국가를 웅비시킨다는 말들이 나돌고 있었다.
이성계는 지리도참에 밝았던 하륜으로 하여금 한양천도 계획을 계속 추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2년 뒤 하륜의 한양 무악주산론(毋岳主山論)에 따라 직접 무악(현재의 신촌과 연희동 일대)과 북악을 방문하여 지세를 살펴보았다. 이때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동반하였는데, 무학대사는 북악을 본 뒤에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사방이 높고 풍치가 수려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능히 도읍으로 정할만 합니다. 빈도의 생각으로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산과 남산을 좌청룡 우백호로 삼아야 할 것으로 봅니다.”
여기에 정도전이 반박하고 나섰다.
“자고로 제왕은 남면(南面, 남쪽을 향한다는 말로서 제왕의 자리에 군림하여 신하들을 대한다는 뜻이다. 이에 반대되는 말은 北面으로서 왕을 섬긴다는 뜻이다.)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불변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이제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는다면 궁궐을 남쪽으로 앉힐 수 없기 때문에 제왕과 신하의 질서를 이룰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는다 함은 천부당 만부당한 일입니다.”
결국 정도전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무학은 크게 탄식하였다.
“나의 말을 좇지 않으면 2백년이 지난 후 반드시 후회할 날이 오리라.”
그리고 이로부터 정확히 199년 뒤인 선조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한양의 도성은 완전히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과연 우연인가, 필연인가.
정도전은 한양천도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한양의 도시설계를 마친 그는 궁궐과 종묘터를 정한 후에 그 도면을 그려서 바쳤다. 바로 경복궁과 종묘터였다. 경복궁이라는 말은 정도전이 『시경』대아편의 '술 마셔 취하고 많은 은덕으로 배부르니 군자께서는 만년토록 큰 복을 누리소서'에서 따온 것이다. 경복궁의 정문은 근정전이라하여 정사에 부지런해야 함을 강조하였고, 동서남북 네 곳의 침전 중 남쪽 침전의 이름은 정치란 언제나 심사숙고해서 행해야 한다는 뜻으로 사정전이라 하였다.
드디어 10월 25일에 한양천도가 이뤄졌다. 그리고 12월 3일 정도전은 종묘와 궁궐의 기공 사실을 황천후토(黃天后土)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면서 고하였다. 다음해 윤 9월에는 그동안 객사 건물에서 머물고 있던 왕과 정부기구가 북악산 아래에 새로 지은 궁궐로 옮겨오게 되었다.
한편 17 km에 이르는 서울의 도성은 정도전이 직접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에 올라가 실측을 하면서 만들었다. 성터의 건축과정에서 무학대사는 도성이 인왕산에서 무악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냈지만, 정도전은 인왕산에서 곧바로 남산으로 연결시키자고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4대문과 4소문도 지었는데, 그 이름 모두를 정도전이 지었다. 특히 그는 네 대문의 이름에 인의예지라는 유교의 4대 덕목을 붙임으로써 유교국가의 통치이념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이렇듯 정도전은 한양을 건설하고 그곳에서 왕조 대대로 만년의 복을 누리기를 빌었지만, 정작 그는 자신이 건설한 한양성에서 가장 먼저 제거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되었다.
6. 천하 경륜의 꿈
정도전은 유교이념에 기초하여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하고 자신이 젊었을 때부터 품어온 천하경륜의 그 원대한 꿈을 펼치려고 하였다. 바로 이것은 스스로 장량이라고 자칭했던 정도전이 장량과는 달리 계속 권좌에 눌러 앉게 된 이유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윤리를 바탕으로 한 왕도정치를 지향하였다. 그리고 유교적 정치이념은 그가 저술한 『조선경국전』 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이책에서 그는 '군주와 관리는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백성들을 친아들처럼 보호하고 경제생활을 안정시켜 주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군주는 천명에 따라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받은 존재이지만, 통치는 군주의 자의가 아니라 일정한 법률에 의거해서 행해져야 한다'면서 '군주에게 절대권이 부여될 수 없고 설사 현군일지라도 독단이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재상은 군주의 잘못을 과감히 지적하여 바로잡아야 한다. 특히 왕실경비의 지출권은 재상이 장악하여 군주의 사치와 낭비를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렇듯 정도전은 중국 주나라의 재상정치를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재상중심주의를 주창하였는데, 이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일종의 내각제였던 것이다.
또한 정도전은 ‘천자가 옳다고 해도 간관은 그르다 하며, 천자가 반드시 행해야 한다 해도 간관은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라면서 언론과 감찰기관인 대간(臺諫)의 권한과 임무를 중시하였다. 그는 대간으로 하여금 위로는 군주와 재상의 잘못을 준열하게 비판하고 탄핵하여 바로잡도록 하였으며, 아래로는 백관의 비행을 규찰하여 탈선행위를 방지하였던 것이다.
한편 그는 천민부락에서의 귀향생활과 10년에 이르는 유랑생활을 통하여 백성들이 얼마나 고통을 당하며 살고 있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백성들이 잘살 수 있도록 하는 정치가 나라의 가장 중요한 정책이라고 생각하였다. 일찍이 중국의 관중이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아는 법'이라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군현의 실질적 통치자인 수령의 역할이 중요했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수령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바로 '땅의 생산력을 높여 백성을 잘살 수 있게 하는 일'이라고 확신했다.
7. 솟아오른 용은 반드시 후회한다
정도전은 항상 자신을 한나라 고조 유방을 도와 '역발산 기개세'의 영웅 항우를 제압하고 천하를 장악하게 만든 장량과 비교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량은 '창업'이 이뤄진 후 스스로 위험한 권력의 울타리를 벗어나 자신의 몸을 지켰다. 이에 반해 정도전은 천하를 손에 쥔 이후에도 계속하여 권력의 최정상에 오르고잫 오르고자 하였다.
『주역』에 '항룡유회(亢龍有悔)'라는 말이 있다. '솟아오른 용은 반드시 후회할 날이 있다'는 말이다. 얼마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전직 대통령을 지냈던 어떤분이 자기가 항룡이라고 해서 온 국민의 실소를 자아낸 적이 있지만, 그분은 항룡은 반드시 '후회할 날이 있다'는 뒷말까지는 미처 알지 못했나 보다. 그걸 알았다면 항룡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못했을 게 아닌가.
원래 이성계의 부인은 한씨였다. 그녀는 다섯명의 아들을 낳았으나,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창건하는 것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둘째 부인은 강씨였다.
이성계가 아직 중앙무대로 진출하기 전 북쪽 변경에 있던 어느날, 곡산지방에 사냥을 나간 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아리따운 여인이 사냥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날 밤 그녀를 사냥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녀가 바로 강씨 부인이었다. 그녀는 2남1녀를 낳았다. 그 뒤 이성계가 중앙으로 진출했을 때 강씨 부인을 개경에 머물게 하였다. 마침내 조선이 건국된 이후 그녀는 정식으로 왕후가 되었다. 인간이란 늦게 둔 자식을 특히 더 아끼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닌가? 이성계는 강씨가 낳은 아들을 매우 귀여워 하였고, 특히 막내아들 방석을 애지중지 하였다.
강씨 부인은 이성계에게 애원하였다.
“방원(한씨부인의 다섯째 아들)은 방자하기 짝이없습니다. 이제까지 나를 어머니라고 불러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만약 상감께 무슨 일이라도 있게 되면 우리모자의 운명은 어떻게 될른 지요?”
한편 정도전도 방석을 적극적으로 밀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방석은 서얼출신의 왕자였다. 출생의 비밀로 엄청나게 괴롭힘을 당해야 했던 정도전은 동병상련이라 할까 웬지 서얼 출신인 방석에게 마음이 이끌리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 이성계는 정식으로 방석을 세자로 정한다는 교지를 내렸다. 정도전은 내친김에 세자의 스승이 되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게 마련인 모양이다. 정도전은 전비 소생의 왕자들과 적대적인 관계가 되어 버렸다. 특히 넷째 아들인 방간과 다섯째 아들인 방원은 정도전에게 철치부심,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그후 태조 5년에 강씨부인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정도전에게 늘 눌려 지내던 하륜과 조준 그리고 배극렴 등은 방원의 진영에 모여 들고 있었다.
이 무렵 고려왕조의 많은 사람들이 조선왕조에 제대로 협력하지 않았다. 원천석은 치악산에 들어갔고, 조준의 아우 조연은 청량산에 숨어 이름 자에 개 견(犬) 변을 붙여 연(捐)이라고 불렀다. 또한 고려의 유신이었던 신규, 임선미 등 72인은 경기도 개풍군에 있는 한 산기슭에 들어가 집단적으로 칩거생활을 시작했다. 그들은 마을 이름을 두문불출한다는 뜻에서 두문동이라고 불렀다. 이성계는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서 특별히 과거시험을 치렀으나 이들 중에 단 한 명도 응시 하지 않았다.
이때 이방원이 나섰다. 그는 측근 이숙번을 시켜 그곳에 불을 지르고 이렇게 외치도록 시켰다.
“모두 나오너라. 이제까지의 죄는 일체 묻지 않겠다.”
그러나 불타오르는 화염 속에서 소름끼치는 비명소리만 진동할 뿐 한 명도 나오지 않고 모두 타죽고 말았다.
8. 요동정벌을 향하여
정도전은 조선이 건국된 직후에 요동정벌ㅇ르 계획하고 있었다. 명나라는 이민족인 원나라를 축출한 후 중화사상으로 세계를 재편할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그 사나운 몽골족을 중국대륙으로부터 축출하고 나라를 세우자마자 '중화회복'을 기치로하여 대외정책의 기본을 조공제도의 확립에 두면서 주변국가에게 조공을 요구하였다. 이에 1369년 고려, 유구, 안남이, 1371년에는 일본, 크메르, 태국이 조공를 하였다. 결국 명나라는 가장 많은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게 됨으로써 조공제도가 형식적으로 가장 잘 정비된 나라가 되었다.
한편 조선은 건국자였던 이성계 권력의 토대가 아직 취약하였기 때문에 그의 정치적 위상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명나라로부터 승인을 받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
그리하여 이성계의 즉위 사실을 보고하는 사신을 비롯하여 각종 명목의 사신과 특산물을 보냈고, 명나라 연호를 사용하였다. 또한 명나라에게 조선과 화녕(和寧)의 두 가지 국호 중 하나를 정해 달라고 요청하여 결국 조선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주원장은 이미 조선의 실력자인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정도전이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오는 귀국길에 산해관을 지나면서 호언한 일이 있었다.
“다행히도 명나라와의 문제가 잘 풀리면 좋겠지만, 만약 잘 풀리지 않게 되면 군대를 이끌고 와서 한차례 기습공격을 하겠다.”
이 말이 명나라에까지 보고되었던 것이다.
명나라는 위화도 회군 이후 요동지방에서 압록강 이남으로 이주해온 여진인을 송환하라고 요구했으며, 조선에서 들여온 말의 품질이 좋지 않다면서 일부러 시비를 걸고 있었다. 또한 조선이 명나라에 보낸 외교문서 중에 주원장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고 트집을 잡았다. 주원장은 원래 천민출신인 데다가 얼굴이 매우 못생겼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콤플렉스가 매우 심한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주원장은 조선 사신의 입국을 거절하거나 혹은 그들을 억류하기도 하면서 협박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명나라의 태도는 기실 정도전에 의해 추진되고 있었던 요동정벌론에 대한 노골적인 불쾌감만이 아닌 동시에 그것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명나라는 계속하여 정도전을 명나라로 보내라고 조선에 압력을 가해왔다. 이렇게 되자 조선에서도 조준, 하륜 등 정도전의 정적들은 이성계에게 정도전을 명나라로 보내라고 강력히 권했다. 하지만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병이 있다는 핑계를 대면서 계속 거부하였다.
그러자 주원장은 큰소리를 쳤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도다. 이성계는 왜 그렇게 정도전이라는 자를 감싸고 도는 것인가? 내 이번 기회에 조선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고 말테다.”
하지만 당시 명나라는 개국초기를 맞아 국내외적으로 산적한 문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정벌과 같은 엄청난 일을 벌일 여력이 없었다. 오히려 주원장은 요동군사들에게 "조선이 20만의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 올 수도 있으니 단단히 경계하라"는 명령을 내릴 정도로 동방의 강적, 조선에 대하여 여전히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왕조가 건국된지 6년 1397년, 어느 날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요동 정벌을 역설하고 있었다.
“중국은 비록 지금 가까스로 천하의 제왕을 자처하고 있지만, 지난 날 변방민족으로서 중원을 제패한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거란족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 그리고 몽골족의 원나라가 바로 그들입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중원으로 웅비할 때입니다. 우리의 군사들은 폐하께서 그 사나운 왜적과 홍건적을 격파한 이래 수많은 실전을 겪은 무적의 군사들입니다. 이 군사들이라면 어떠한 일이라도 이뤄낼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명나라는 허장성세에 불과합니다. 더구나 아직 북방에는 몽골족이 웅크리고 있으면서 명나라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명나라는 우리가 요동공격을 한다고 해도 전력을 다해 싸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광활한 요동벌판은 실은 우리의 영토입니다. 고구려는 그 드넓은 만주벌판에서 말을 달리며 한족과 어깨를 나란히 겨뤘습니다. 또한 그땅은 발해의 영토였습니다. 이제 우리의 영토를 우리가 되찾아야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라고 사료되옵니다.” 이성계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다.
그러나 이튿날 조준이 입궐하였다. 조준은 당시 병이 들어 한달 째 집에서 요양 중이었다. 하지만 정도전이 이성계를 설득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태조를 만나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지금 백성들이 한양천도의 대사를 치르느라 고통이 말이 아닙니다.민심이 불안하며 식량 또한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요동정벌이 불가한 첫번째 이유입니다. 대저 군사행동이란 명분이 중요한 법입니다. 하지만 지금 정도전 등이 주장하고 있는 요동정벌은 아무런 명분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더구나 지금 요동지방은 의연히 견고할 뿐 별다른 약점이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두번째 이유가 됩니다. 요동정벌이 불가한 세번째 이유는 요동정벌을 거사해도 성공을 거두지 못하기 쉽고, 오히려 명나라로부터 큰 보복을 당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위화도에서 소국으로서 대국을 칠 수는 없는 일이라면서 군사를 돌리셨던 분은 다름아닌 폐하이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때와 무엇이 달라졌다는 말씀이신지요? 통촉하옵소서.”
결국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단념하였다. 태조는 정도전을 의흥삼군부사에서 해직시키고, 대신 조준을 그 자리에 임명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정도전 일파는 기가 막혔다. 정도전의 친구인 남은은 이렇게 투덜대었다.
“조준은 기껏 예산이나 따질 줄 알지 도대체 기발한 생각이라곤 하나도 갖고 있지 못한 자일 뿐이야.”
이때 정도전은 동북면도선무순찰사라는 외직을 맡아 좌천되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불과 7개월 뒤에 다시 중앙무대에 복귀할 수 있었다. 이성계에는 누구보다도 정도전이 옆에 있어야 했다.
그 무렵 명나라로부터 놀라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몇번이나 외교문서를 트집잡던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조선 사신 3인을 억류하더니 마침내 처형시켰다는 것이다. 조선의 조정이 들끓지 않을 수 없었다.
“폐하, 이제 우리도 오만하기 짝이없는 저들에게 계속 무릎 꿇고 살 수만은 없습니다. 그들이 우리가 보낸 사신까지 죽인 이 마당에 우리도 강경하게 대처해야 할 것으로 압니다.”
남은은 모든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강경론을 주장하였다. 비슷한 주장들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이제까지 명나라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조준 등의 온건론자들은 입이 있어도 할말이 없었다.
그런데 과연 현실론자인 정도전이 실제로 요동정벌을 추진하려고 했을까? 그것은 혹시 이방원을 견제하기 위한 논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을까?
9. 가장 큰 적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이 날부터 군사 훈련이 강화되었다. 정도전이 손수 만든 진도에 대한 학습도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이에 따라 이 전술에 익숙하지 못한 절제사나 장군들이 곤장을 맞는 일까지 자주 일어나게 되었다. 더구나 8월에 들어서 삼군절제사, 상장군, 대장군, 군관 등 무려 2백 92명이 어명에 의해 탄핵을 받는 대사건이 발생하였다. 바야흐로 무관들의 수난시대였다.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서 조선왕조 창업과정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이방원까지도 당연히 처벌대상이었지만, 그간의 공로가 참작되어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정도전은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사병혁파(私兵革罷)라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때는 바야흐로 염라선초의 난세, 장안의 내노라 하는 권세가와 실력자는 모두 사병들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그 사병들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창건할 수 있었던 힘이기도 하였다. 이방원이 사병을 동원하여 정몽주를 죽인 것은 그 본보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난세의 혼돈이 지나면 필연적으로 상하위계의 질서가 추구되는 법. 더구나 세자는 아직 어렸으나, 전비 소생의 왕자들은 막강한 사병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전광석화와도 같은 빠른 속도로 해치워 나갔다. 정도전의 불같은 성미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정도전은 왕실 세력이 강화되는 사태를 방지하고 어디까지나 유신(儒臣) 중심의 집권체제를 강화하려고 하였다. 그는 특히 이방원과 이방번의 존재를 매우 불안하게 생각하여 이 두 사람의 사병을 해체시키고 방원은 전라도로 방번은 동북면의 절제사로 좌천시키려고 생각하였다. 사실상 숙청인 셈이었다.
사병을 거느리고 있던 왕족들과 공신세력은 점차 자신들의 위치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아니 자칫 잘못되면 숙청 대상으로 지목되어 목숨까지 위태로울 판이었다.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건국의 제 1의 공신으로 자타가 공인하던 이방원 역시 그런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특히 권력이란 것은 도대체 다른 힘있는 권력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법이었다.
이방원은 고개를 흔들었다.
“정도전은 결코 만만한 자가 아니지, 아니야. 그자는 아버님에 이어 어떻게 해서라도 2인자의 자리를 내놓으려고 하지 않지. 아마 조상에 노비의 피가 섞여 있다는 부담감이 그를 무한대의 구너력욕으로 몰고 있는게 분명해. 더구나 그자의 칼날은 나에게 겨누고 있다. 내가 죽이지 않으면 그자의 칼에 내가 죽게 돼.”
하륜은 원래 방탕한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예천군수로 있던 그는 매일같이 기생만 끼고 유락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이방원의 집에서 열린 잔치에 와서는 술을 잔뜩 먹더니 갑자기 이방원에게 술잔을 끼얹는 것이었다. 이방원이 크게 화를 냈다.
“아니, 이게 무슨 망칙한 짓이오?”
그러자 하륜은 이방원을 데리고 용서를 빌 듯 따로 자리를 잡더니 문득 진지한 태도로 돌변해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 일을 벌여야 합니다. 그대로 있다가는 정도전에게 먼저 당합니다. 안산군수로 있는 이숙번이 제법 쓸만한 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를 불러 올려서 당장 칩시다.”
정도전이야말로 여말선초의 난세에서 일개 하급관리로부터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재상의 자리까지 오른 영웅 중의 영웅이었다. 그 앞에서 정몽주도 하륜도 조민수도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러나 이방원 역시 지략과 행동력을 갖춘 야심가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왕실의 실력있는 왕자였다. 결국 그와 같은 이방원과 맞서야 했던 것이 정도전에게 있어서는 피할 수 없는 비극이었다.
1398년 8월 이성계가 병석에 눕자 자나깨나 기회만 노리고 있던 이방원은 즉시 사병을 동원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이른바 '왕자의 난' 혹은 '방원의 난' 또는 '우인정사'라 불리는 피비린내나는 혈전이었다.
드디어 새벽 2시, 정도전 일파는 그 시각 남은의 첩이 사는 집에 모여 불을 환하게 밝힌 채 담소를 즐기고 있었다. 이 순간 이방원이 기습해왔다. 원래 사병이 혁파되는 과정에서 왕자들은 모든 무기를 반납해야 했다. 하지만 이방원의 아내 민씨는 그때 철창 등을몰래 감추고 있었다. 그래서 이방원의 부하들은 아쉬운 대로 그 무기들이나마 갖추고 떠날 수 있었다. 물론 하륜이 끌어들인 이숙번의 군대도 합류하였다. 그곳에 도착한 그들은 먼저 이웃집에 불을 질렀다. 그러자 정도전 등은 허겁지겁 집 밖으로 나왔다. 이방원의 부하들은 즉시 정도전을 붙잡아 이방원의 앞에 무릎을 꿇렸다.
“공이 지난번에도 나를 살렸으니, 이번에도 다시 한 번 나를 살려주시오.”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애원하였다. 지난번이란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였던 일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방원은 단호하였다. 그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흐르는 듯하더니 즉시 목을 치라는 추상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이렇게 하여 일세의 풍운아, 정도전은 비명에 죽고 말았다. 정도전의 라이벌이며 그간 눌려지내던 조준과 하륜은 이방원의 곁에서 그의 최후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때 방원은 살생부에 오른 인물인 남은, 박위, 장지화 등 정도전 파들을 모조리 살해했다. 막내아들이자 세자인 방석은 겁을 먹고 궁궐을 빠져나가 도망을 치다가 이방원 부하의 칼에 맞아 죽고 말았다. 사병혁파가 시작된 지 불과 17일 만의 일이었다. 태조는 이 사건에 크게 격노하여 왕위를 내놓았다.
한편 명나라 태조 주원장도 그해 윤5월에 사망하였다. 이렇게 하여 양국을 긴장시키던 정도전과 주원장, 두 사람은 역사의 장에서 사라졌다. 그러면서 양국의 관계도 비로소 정상화 되었다.
정도전은 역적으로 몰려 지금까지도 그의 시체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으니 그의 묘소는 전혀 찾을 길이 없다. 그러다가 그가 죽은 후 5백년이나 지나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 경복궁을 설계하였던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비로소 그를 복권시켰다.
왕자의 난에서 승리를 거둔 방원은 그렇다고 곧장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우선 둘째형 이방과를 왕위에 오르게 하는 절차를 밟았다. 그가 바로 정종이었다. 그러나 정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 역시 왕위에 강한 집념을 보이고 있던 넷째,방간은 방원을 제거하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정종이 왕위에 오른지 1년이 되었을 때, 마침내 두 왕자는 부딪쳤다. 그리하여 송도에서 때아닌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방간은 결국 체포되어 토산으로 유배되었고, 이방원이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10. 나라를 세울 적에 그의 꾀를 쓰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젊은 날의 고초가 없었던들 정도전은 그저 평범한 인물로 살다 갔으리라. 만약 정도전이 없었다면 이성계가 그토록 쉽게 천하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정도전과 이성계의 만남은 마치 유비과 공명을 얻은 것과 같았다.
정도전은 늘 자기를 장량에게 견주었다. 확실히 창업에 성공할 때까지는 두 사람의 행적이 꽤나 비슷했다. 하지만 창업 이후의 처신에 있어서는 두사람이 매우 달랐다. 그리고 결과도 달랐다.
사실 정도전도 이러한 운명을 예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는 불행히도 한나라의 여러 충신같은 인물들이 없었다. 오직 정도전만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물러설 때를 놓친 것이다.
『태조실록』에는 정도전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라를 세울 적에 그의 꾀를 쓰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국량이 좁고 시기심이 많았으며 또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해치고자 하였다. 그리고 묵은 감정을 반드시 갚으로 하였다. 자신이 건설한 한양에서 가장 먼저 죽어야 했던 조선 제1의 개국공신 정도전. 지금 그는 서울의 희뿌연 하늘에서 무얼 생각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