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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F. Kennedy
존 F. 케네디
Lt. Kennedy on his navy patrol boat, the PT-109
젊은 날의 케네디,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남태평양에서 PT-109 고속 어뢰정의 해군 장교로 근무했는데, 자신의 배가 일본군에게 격침되자 위협을 무릅쓰고 동료를 구한 것으로 영웅이 되었다. 피티109의 이 사진 한장은 병약한 케네디를 가장 젊고 진취적이며 용감한 미국인으로 포장하는데 성공했다.
John and Jackie Kennedy campaigning in Applet!on, Wisconsin, March 1960
케네디와 영부인 제클린이 대통령 선거전에서 위스콘신에서 선거운동을 하고 있는 모습
John F. Kennedy
존 F. 케네디
존 피츠제럴드 "잭" 케네디(John Fitzgerald "Jack" Kennedy,
1917년 5월 29일~1963년 11월 22일)는 미국의 제 35대 대통령이자,
미국 대통령 중에서 유일한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라는 점과 상류사회에서 잉글랜드계에 밀리던 아일랜드계 혈통 때문에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반발과 논쟁을 불러온 인물이다.
싱클레어 루이스의 풍자소설 엘머 갠트리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 엘머 갠트리의 논쟁장면에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출마한 것에 대해 보수적인 개신교 신자들이 못마땅해하는 내용이 있다. 주인공 엘머 갠트리는 부흥회를 제니스 시에서 할 것인가하는 논쟁을 제니스 시 개신교 신자들과 벌이는데, "신도들이나 제니스시의 교회 평의회(Council of Churches)와 무관하게 내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겠습니다. 믿음은 사업이 될 수 없어요.부흥운동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요.난 반대요."라며 부흥회에 반대하는 강직한 목사에게 기독교 근본주의자 조지 배비트가 "거리에 나가보시오. 온통 방황하는 젊은이들 천지요. 위험천만한 무신론과 무정부주의가 판 치고 있소. 역대 미국 대통령들이 모두 개신교도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그러니 이제 로마 가톨릭 교회교인이 대통령 후보로 나서고 있는 지경이라는 말이오. "라며 부흥회를 열어아 햔다고 주장한다. 《신을 찾는 사람들》-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엘머 갠트리〉리처드 브룩스,김진수 지음/예루살렘 p.148
그는 1961년부터 1963년에 암살당하기까지 겨우 2년 동안 대통령직에 있었지만 미국의 자유주의에 대한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남태평양에서 PT-109 고속 어뢰정의 해군 장교로 근무했는데, 자신의 배가 일본군에게 격침되자 위협을 무릅쓰고 동료를 구한 것으로 영웅이 되었다. 케네디는 1946년부터 1960년까지 미 의회에 있었으며, 1960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케네디는 대통령직에 고작 2년밖에 있지 않았지만, 그의 임기 동안에 피그스 만 침공, 쿠바 미사일 위기, 베를린 장벽, 우주 경쟁, 베트남 전쟁 간접 개입, 미국 민권 운동 등 많은 일이 일어났었다. 서투른 명문가 도련님이라는 우려도 받았으나 역사가들은 케네디를 링컨, 루즈벨트, 워싱턴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
19세기 후반 아일랜드에 닥친 대기근으로 인해 케네디 가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로 이주하였다. 그는 개신교가 사회의 주류여서 직업선택 등에서 차별받던 로마 가톨릭 교회 집안의 형제 중에서 한명쯤은 대통령이 나오기를 원했던 대(大) 조셉 P. 케네디의 아들로 태어나 1940년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태평양 전쟁 중에 해군에서 복무했었다. 1950년대를 전후하여 민주당 정치인으로 두각을 드러냈고 1960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최연소 당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유세 도중 그는 미국이 소련보다 핵무기 개발 경쟁에서 뒤졌기 때문에 '미사일 격차'를 줄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1963년 11월 22일 리 하비 오스왈드에게 암살당했다.
Meeting Nikita Khrushchev in 1961
과거 소련 연방의 후르시쵸프와의 회담
유럽에서의 베를린 위기와 카리브 해에서의 쿠바 미사일 위기가 그에게 부담이 되었으나
극복하였으며,
핵 실험 금지 조약을 성사시켰다.
서 베를린 연설
1963년 6월 26일, 서베를린을 방문하여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연설을 하였다.
베를린 장벽 설치를 공산주의의 실패의 증거로 삼으며 이렇게 말했다.
“ 모든 자유인은 그들이 어디에 있건 베를린 시민이라 할 수 있으므로
저 또한 자유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독일어: Ich bin ein Berliner.).'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
서베를린 시민의 5/6이 거리에 나왔으며 케네디 자신도 놀랐다고 하였다.
링컨과의 연관성
존 F. 케네디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과 일치하는 점이 많으며, 다음은 공통점의 일부이다.
두 대통령은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는 점,
두 대통령을 암살한 범인은 재판 없이 의문사를 당했다는 점,
그의 부인은 백악관에서 자식을 잃었다는 점,
두 대통령이 하원의원에 당선된 때와 취임한 때가 1846년, 1946년이라는 점,
두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 때와 취임한 때가 1861년, 1961년이라는 점,
두 대통령은 테쿰세의 저주를 당했다는 점,
그의 후계자의 성이 존슨이라는 점,
그의 부인은 프랑스어를 할 줄 안다는 점,
두 대통령은 모두 달러의 주화에 초상이 그려진 점.
링컨 대통령은 포드 극장에서, 케네디 대통령은 포드 자동차 회사에서 만든 링컨 컨티넨탈 차를 타고 가다가 암살당했다는 것
John F. Kennedy Assasination Suspiction
케네디 대통령 암살 의혹
케네디 대통령 암살 의혹 (John F. Kennedy Assasination Suspiction) 은 미국의 대통령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을 둘러싼 의혹.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한 범인은 리 하비 오스월드였다. 그러나 항간에서는 쿠바의 보복설, CIA의 음모설, FBI의 개입설 등이 많이 제기되었다.
President Kennedy in motorcade in Ireland on June 27, 1963
1963년 6월 2일 케네디 대통령 자신이 댈러스에서 자동차로 모터케이드를 막 떠나기 직전 모습
비밀공작설
CIA(또는 일부 과격한 요원?)는 케네디가 「빨갱이」에 굴복해 CIA를 해체하려 한다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거기에 CIA는 바로 암살 전문가들. 그래서 소련에 망명한 적이 있는 오스월드를 고용해 범행을 맡긴 것이라는 설. 오스월드는 「위장」에 사용됐을 뿐 실제로는 다른 장소에 배치된 저격의 명수에게 케네디를 저격하도록 했다는 설도 있다. 오스월드는 전문 살인청부업자가 아니며 「위장용」으로 이용한다 해도 조금도 빈틈없이 준비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
최근에 부각된 암살의혹 중에 UFO 사실폭로와도 관계가 있다. 케네디가 미국 정부와 외계인의 접촉을 국민들에게 알리려 하자 외계인과의 이익관계가 있는 집단들이 암살했다는 설이 있다.
마피아주모설
케네디가 대통령 선거, 카스트로 암살계획, 마릴린 먼로와 정사 스캔들 무마 등에 범죄조직의 힘을 빌렸으면서도 오히려 조직범죄 단속을 강화하자 마피아가 그를 배반자로 간주했다는 설. 오스월드에겐 마피아에 숙부가 있었고 루비에게도 마피아에 친구가 많았다. 이들과 같은 「조무래기」를 이용하는 편이 조직의 개입이 드러나지 않아 유리하다고 생각한 마피아 우두머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대통령 암살이라는 위험한 일을 과연 '조무래기'가 맡으려 했을까. 어떤 방법으로 루비에게 오스월드를 살해하도록 설득했는지도 불분명. 루비가 입을 열어 꼬리가 잡힐 위험도 있었을 것이다.
쿠바음모설 (1)
CIA가 후원한 1961년 4월의 피그스만 침공 실패로 케네디에게 배반당했다고 느낀 반카스트로파 망명 쿠바인의 계획으로 보는 설이다. 오스월드는 친카스트로파인 셈인데 웬일인지 반카스트로파가 된 갱 친구를 만나러 쿠바에 간 적이 있다. 망명 쿠바인들이 공산주의에 물든 백인 오스월드를 신용했을까? 오스월드를 이용하는 복잡한 음모를 비밀리에 꾸미는 것이 그들만으로 가능했는지도 의문이다.
쿠바음모설 (2)
카스트로는 미국이 사회주의혁명이후 반미정책을 실시한 자신의 암살을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보복을 위해 케네디 암살을 지령했다는 설이다. 암살은 음모였다고 믿은 린든 존슨 전 대통령이 열심히 지지한 설이다. 오스월드는 자칭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친카스트로파였다. 그는 암살 2개월 전에 맥시코시티의 쿠바 대사관을 방문했다.
그러나 암살지령을 내리는 바보같은 짓은 하지 않는다고 카스트로 본인이 말한 적이 있다. 설령 상대가 신원이 탄로나기 쉬운 오스월드가 아니라 해도 암살지령을 내리는 것은 분명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다.
쿠데타설
올리버 스톤 감독이 영화 'JFK'에서 제시한 이론(그보다는 픽션)이다. 미국 기성 체제의 악한들(베트남 철수를 저지하려 한 군부나 무기상들)이 손을 잡고 케네디 암살을 기도했다는 것이다. 확실히 역사는 그들의 소망대로 진행된 듯하지만, 암살집행부대, 검시팀, 워렌 위원회 등 진상 은폐 협력자들이 이 정도 많았다면 왜 일부러 치밀한 계획을 세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퍼레이드에서 암살할 필요가 있었을까.
실수설 (1)
메릴랜드에 거주하는 탄도학 전문가 하워드 도나휴가 제기한 설이다. 후속 차에 타고 있던 경호원이 실수로 방아쇠를 당겨 그 총알이 대통령에게 명중했다는 것이다. 도나휴는 오스월드의 발포음을 듣고 경호원이 총을 꺼내들었을 때 오발했다고 보고 있다. 당시 암살 현장은 발사음이 뒤섞이기 쉽기 때문에 총을 쏜 당사자도 몰랐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문제의 차에 타고 있던 당사자를 제외한 9명 중에서 발사음을 들었다고 증언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점이 문제다. 오발했다고 간주되는 당사자는 당연히 도나휴의 질문에 응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실수설 (2)
오스월드의 처 마리나는 남편이 사실은 동승한 텍사스 주지사 존 코널리를 저격하려 했는지도 모른다고 증언. 해병대에서 불명예 제대처분당한 오스월드는 무사고 만기제대자에 수여되는 명예제대증을 신청했다가 기각되어 당시 해군 장군이었던 코널리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그가 루비와 함께 코널리 암살을 모의하는 것을 엿들었다는 댈라스의 변호사도 있다. 표적을 벗아난 것치고는 오스월드(또는 다른 누군가)의 총탄은 너무나 정확히 케네디에게 명중했다. 사격이 서툴렀다 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JFK, Jackie, and the Connallys in the Presidential limousine before the assassination
케네디와 제클린이 대통령 전용 승용차에서 암살 되기 직전의 모습이다. 이 잔인한 사진이 보여주는 평화로운 장면은,
불과 몇초 뒤에 세기적 미궁의 암살사건이 자행된다.
그리고 제키는 몇년뒤 미국인의 열망과는 다르게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와 재혼한다.
케네디가의 저주
케네디가의 저주은 미국의 대통령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일가에게 적용되는 연속되는 불운을 말한다.
저주가 적용된 사람 목록
소(小)조지프 P. 케네디-대(大) 조지프 P. 케네디의 장남이자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형이다.
1944년 2차 대전 서유럽 전선의 공중전에서 전사하였다. 유해마저 수습하지 못했다.
캐슬린 케네디 캐번디시-케네디 대통령의 누이동생이다.
1948년 프랑스에서 비행기 사고로 남편(2차 대전에서 전사함)의 뒤를 따랐다.
1963년 케네디 대통령 자신이 댈러스에서 암살되었다.
로버트 케네디-케네디 대통령의 큰 동생으로 형에 이어 대통령감으로 촉망받았으나
1968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선거활동 도중 암살범 시르한 바샤라 시르한의 저격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이 밖에도 케네디가의 많은 가족들이 사망하였다.
에드워드 케네디-저주의 촛점이 된 사람 중에 대표적인 생존자.
케네디 대통령의 막내동생으로 여비서의 의문사가 이후로도 줄곧 그에게 부담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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