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세 철거민의 유서.
전단지 뒷면 빼곡히 쓴 글을 한 자 한 자 다 읽고 나니 가슴이 답답하다. "3번의 강제집행으로 모두 뺏기고 쫓겨나 이 가방 하나가 전부", "저는 이렇게 가더라도 어머니께는 임대 아파트를 드려서 저와 같이 되지 않게 해 달라"라고 썼다.
"추운 겨울에 씻지도 먹지도 자지도 못하며 갈 곳도 없다"며 "3일간 추운 길에서 보냈고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려워 자살을 선택한다"고 했다.
.
매섭던 어느 겨울밤
인철이 아부지 술 취해 산동네 호령하며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슬픈 곡조 뽑으며 돌아와
석유 한 되 몸에 부은 뒤 성냥 갖다 댔다
언덕 아래 시궁창에서 범벅이 되어 건져 올려진
다음 날 아침 새까만 주검 앞에 인철이 엄마
길길이 날뛰며 어디론가 가버리고
남 씨 아재 앞장서 절간 옆 양지바른 곳
이름도 없이 죽은 아들 곁에 묻었다
열 달 산고 끝에 꼼작거리는 핏덩이 들어내
씻지도 않고 파묻은 그곳에
불꽃으로 떠난 애비 묻고 나니
미친 인철이 엄마 풀 질겅질겅 씹으며
히죽히죽 웃고 다니며 채 보름이 되었을까
몹쓸 약이라도 주워 먹었는지
두 눈 못 감고 시퍼렇게 세상 떴는데
모깃불 피운 마당에 앉으면
가난이 죄라며 노래 부르던 인철이 엄마
후여 후여 하늘 가거레이
돌무덤 셋 앞에 이승골 사람들 고개 떨구었다
연작 '이승골 노래'에서
재개발이란 이름으로 자행된 타살, 이는 물량주의로 무장한 토건족과 겉만 번드르르하면 되는 행정기관과 권력의 합작으로 저지른 명백한 사회적 살인이다.
50년 전쯤, 수정동 초량동 산동네에 몰려든 술 취한 용역 깡패들은 괴물처럼 마을을 부수었고, 온몸으로 저항하다 손목이 날아간 남씨 아재가 피범벅이 된 채 실려가며 울부짖던 그 날의 절망이, 오십 년을 건너 37세 철거민의 유서에서 스물스물 기어 나왔다.
.
돈 벌러 미국 가는 재숙이 누나가
한복 차려입고 울며 인사하던 앞마당이며
어슴푸레 기억에서 사라지는
그 아득한 따개비집의 불안이 그립다
연작 '이승골 노래'에서
쑥대밭이 된 마을을 뒤로하고 모두 반송으로, 만덕으로 뿔뿔이 흩어져 인간의 모든 추억과 관계가 파괴된 무수한 개인은 꾸역꾸역 고난의 시대를 온몸으로 견뎌야 했다.
재개발, 이건 체제의 성장중심주의가 만들어낸 가장 악질적인 민중 파괴 프로그램이다. 번드르르하게 치솟은 도시가 체제를 향한 광범위한 동의 체계를 구축하니 권력에도 좋고, 수익률이 높아 일확천금을 만질 수 있으니 토건 집단에도 좋으며, 자나 깨나 전매차익을 상상할 수 있어 입주민도 좋으니 쫒겨나는 사람들만 억울하고 분해 시너를 뿌리거나 투신한다.
살던 곳에서 내쫓지 마라!
돈에 사람이 무너지면
그 사람에 사람이 무너진다
골목마다 뛰놀던 아이들이 인사 한마디 없이 마을을 떠나자 대추나무들은 절명의 의지로 시멘트벽 파고들며 줄기의 겉켜를 벗었고, 재개발의 악령이 마을을 덮칠 때 돈에 무너진 사람들 하나둘 보따리를 쌌다
용달차가 마을 어귀 들어설 때마다 소꿉질하던 꼬맹이들 지켜보던 늙은 석류나무와 모과나무도 슬피 울었을 것이다
사십 수년 전 고향 산동네에서 용역과 싸우다 손목 날아간 남 씨 아재도 칠십 노인이 되어 "나라와 싸워봐야 본전도 못 찾아." 하며 자조의 보따릴 쌌을 테고 태용이도 미숙이 누나도 뻗대다 그리 쫓겨났을 것이다
그 아득한 고향 떠나온 내 형제 새끼들 아우성이 가슴팍에 스미자 하염없이 눈물 흐른다
아침이면 골목마다 섰던 차들 시동 걸고, 책가방 메고 햇살 그득한 언덕배기 오르며 학교 가던 올망졸망한 꿈과 희망이 어느 날부터인가 담벼락의 벌건 '단결!‘, ’투쟁!'이란 구호가 되어 내 집에서 살겠다며 남은 이들의 핏빛 절규가 되었다
낡은 자판기에서 커피 빼먹는 이웃에게 큼직한 평상 내놓은 슈퍼 아줌마의 마음을 단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토건족, 걸핏하면 개발이익 돌려주겠다고 공갈치는 아파트의 유령이 만덕 5지구를 배회하고 있다
돈에 떠난 사람들 돈이 아니고선 돌아오지 않을 터
열일곱 평 4호 연립, 스물여섯 평 2호 연립, 그 순박한 뜰 둘러선 미닫이문 안의 삶이 떠나고, 밤마다 고기 구워 한 잔 땡기던 아재들과 술 깨면 여기저기 해끗해끗한 벽화 그리던 극장 간판장이 아재도 떠나니 그림 따라 줄기 뻗던 늙은 담쟁이덩굴도 시름시름 앓고 있다
월부책 장수 냄비장수가 골목에 오면 샘나 수떠는 사람들로 한바탕 뒤집어지고, 앞집 옆집에 뭐가 있는지 다 아는 마을
옹기종기 소박한 공동체 이루며 쪽문 열고 살아도 내 집이니 행복했던 이곳을 누가 이리 만들었는가
집집이 옥상에 드러누우면 아랫집이 초록의 정원이 되는 이곳을 누가 야만의 마을로 만들었는가
이제 만덕 5지구 대추나무골은
도회의 고독을 치유하는 마을이어야 한다
떠난 아이들이 골목으로 돌아와
버려진 화단의 꽃과 나무와 어울려
딱지치기하는 곳이어야 한다
비 오면 처마 물 떨어지는 소리에
바람 불면 나무 떠는 소리에
눈 오면 온 동네 골목마다 눈사람이 서 있는
처연하고 다복한 마을이어야 한다
저 치솟는 아파트의 으름장 앞에
낮은 곳에서 어울려 사는 게
얼마나 고결한지 가르치는 학교여야 한다
이 언덕배기에 사람이 있다
끝까지 내 집에서
내 방식으로
살 비비며 살 수 있게
대추나무골 만덕 5지구로 가자
그림쟁이도 와서 그림 그리고
시인도 들어와 시 쓰고
조그만 교회도 들어와 주일 아침엔
아이들 손 잡고 종소리 들으며 기도하자
제 살던 곳에서
햇살에 기대어 사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순명의 시간인가
더는 살던 곳에서 내쫓지 마라!
시집 '조까라마이싱'에서
수정동 초량동에서 쫓겨난 이주민이 만든 아름다운 마을, 대추나무골의 가난도 참혹하게 파괴되었다.
2018년 12월, 37세 철거민의 죽음에 재건축 사업 관리·감독 책임이 있는 마포구청과 서울시는 책임을 규명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라!
살던 곳에서 내쫓지 마라! 좀! 씨발!
작은 마당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대추나무골의 아래쪽 4호 연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