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처음 비장한 마음으로 도피적 성격으로 미국행에 올랐던 이후 이러저러한 일로 미국을 20여 번 드나들었지만 돈을 쓸 일도 돈이 생길 일도 없는, 거의 무전여행수준의 일정이었다. 그런데 호주에 와서는 한국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미국을 더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왜냐하면 한국행 비행기표에 조금만 더 추가하면 미국까지 표를 끊을 수가 있어 경제적으로 크게 부담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20여 차례의 미국 생활에서 가장 강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2001년 9.11 사태였다.
9.11 사건이 난 화요일에 나는 뉴욕 근처의 고속도로에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과 수다를 떨면서 뉴욕을 빠져 나가면서 반대쪽 고속도로를 꽉 메우고 움직이지 않는 차들을 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했다. 라디오를 틀었으면 사태를 파악 할 수 있었을 터인데 오래 만난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느라고 그럴 생각을 못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TV로 무너져 가는 쌍둥이 빌딩을 보면서 미국의 전성기가 끝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주의 토요일 아틀란타 시내에 나가보니 소수의 사람들이 “아랍인들을 희생제물로 삼지 마라.”, “전쟁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었다. 윤리적 상상력이 발달한 사람들은 벌써 앞 일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음날 테네시 주 네쉬빌에서 기가 막힌 경험을 했다. 유학생들이 대부분인 교회였는데 지구가 뒤집어지는 사건이 발생한 주일에도 지구와 전혀 상관이 없는 외계인들처럼 복음 성가만 부르고 있었다.
나는 평소에도 소위 CCM 이라는 복음송가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날은 정말로 기가 막혔다. 내게는 ‘경배와 찬양’ 스타일은 마취, 자기도취의 모습으로 보일 때가 있다. 나는 흔히 기성교인에서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사랑, 은혜, 평화’ 등등의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설령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도 잠시 이웃의 고통을 잊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현상은 현실을 망각하거나 호도하는 ‘개념 없음’의 상징일 뿐이다. 도대체 자기가 만든 세상의 한 쪽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이 맞아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고 있는 사실을 모르고 ‘예수는 나의 왕 어쩌꾸.... ’ 하는 찬양을 과연 하나님이 좋아할까? 대부분의 경배와 찬양의 가사들은 사람들을 무뇌아적인 기독교인으로 만들기에 참으로 딱 알맞은 가사들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날 설교 시간에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아는가? 이제 당신들 중에 전쟁에 나가서 미국 때문에 죽을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실제로 그 후 윤장호 병장이 아프칸에서 전사하여 슬프게도 예언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서부의 사나이가 되어 총을 쏜 일도 미국에서의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서부에 있는 워싱턴 주의 주립대학이 있는 풀만이라는 서부의 소도시에 갔을 때였다. 주일 예배를 끝내고 점심을 먹는 시간에 우연히 총 이야기가 나왔는데 주립대학 생화학연구소 소장으로 있는 강 교수가 "목사님! 총 쏘아보고 싶으세요?"라고 물었다.
“그럼요."라고 했더니 "그러면 제가 집에 좀 갔다 오겠습니다."하고 일어났다.
30분 후에 돌아온 강 교수는 갈 때는 승용차를 타고 갔는데 픽업트럭을 타고 나타났다. 나는 험한 산길을 가려고 픽업트럭을 타고 왔으려니 생각을 했는데 웬걸? 오래가지도 않고 15분쯤 가더니 야트막한 야산 하나를 돌아가서 차를 세웠다. 화물칸에 실린 박스를 여니 분대 병력의 화력에 해당할 만한 실탄과 여러 종류의 총이 담겨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아니? 이것들을 다 빌려 왔습니까?"
"아녜요. 다 제 것이에요. 제가 가진 총을 다 모으면 여기 경찰서 화력보다 셀걸요."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총 수집이 취미입니까?"
"그런 것은 아니고 제가 데리고 있는 연구원들이 스트레스가 쌓일 때마다 한 번씩 데리고 나서서 사격을 하다가 보니까 이렇게 많이 모으게 되더군요."
"위험하지 않습니까?".
"한 번 멍청한 녀석 때문에 사고가 날 뻔해서 지금은 안 합니다"
총알 값이 비싸서 전에는 실험실에서 직접 만들어 썼는데 요즘은 사격을 잘 안 해서 그럴 필요가 없단다. 강 박사가 총을 나누어주기 전에 나와 한진희 목사를 번갈아 쳐다보고 "두 분 사이에 무슨 원한 관계없으시죠?"해서 한바탕 웃었다. 우리는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각자 무장을 하고 사격장을 향했다. 소총을 들자마자 긴장이 되어서 자동적으로 '앞에 총'하고 있는 내 자세를 보더니 한 목사가 "월남 참전 용사 자세가 딱 오시네."해서 또다시 웃었다.
한 목사는 사냥꾼 자세로, 나는 '앞에 총' 자세로, 강 박사는 막대기 든 자세로 각자가 총을 들고 메고 약간 후미진 곳으로 가니 땅바닥에 탄피가 무수하게 깔려 있었다. 정식 사격장이 아니라 주민들이 심심하면 와서 사격을 하는 간이사격장인 셈이었다. 종류가 각기 다른 소총 4자루와 권총을 차례로 쏘는데 군대에서 '누워 쏴' 자세만 해봤는데 지형지물이 전혀 엎드릴 형편이 못 되어서 '서서 쏴'자세로 하려니 조준하기가 너무 힘이 들어서 많이 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