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열왕 직계 자손들의 전제 왕권은, 경덕왕 때에 오면서 진골 귀족 세력의 반발을 받아 기울기 시작하였으며, 전제 왕권을 뒷받침하던 김유신계 후손들도 몰락하여 갔다. 그런 가운데 경덕왕은 왕권 강화를 위한 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였지만, 혜공왕때에 다시 그 이전의 상황으로 복구되었다. 아울러 혜공왕때에 와서는 귀족들의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고, 그런 와중에서 왕이 피살되면서 마침내 전제 왕권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때부터 하대 약 150여 년 간 신라 조정에서는 왕위 쟁탈전이 전개되어 왕이 자주 교체되었다.
진성 여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가 더욱 문란해져서 수습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고, 잇단 천재 지변으로 민심이 흉흉하였다. 이에 살기가 어려워진 농민들은 귀족이나 사원의 노비로 전락하거나, 각처에서 도적이 되어 도둑질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부는 고구려나 백제의 부흥을 내세우면서 저항하였다. 후고구려를 새롭게 부흥시키려한 사람은 궁예였으며, 후백제를 새롭게 부흥시키려한 사람은 견훤이었다. 이 중 우리 지역출신인 견훤에 대해 알아보고 견훤이 세웠다는 견훤산성이 왜 상주 지역에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농촌 출신 견훤은 군 졸로 서남해(현 나주, 영암등 영산강 일대와 진주지방) 방술에 부임하였다. 농민 반란시 공을 세워 서남 해변을 방비하는 비장이 되었다. 진성 여왕 3년(889년)농민 반란때 견원은 무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무진주(현 광주)를 점령, 그 후 완산주 (현 전주)를 근거지로 의자왕의 원한을 갚는다는 명분으로 후백제를 건국(892년)하였다.
견훤이 처음 군사를 일으킬 당시 현 화북, 농암, 가은 등은 견훤의 관할지라고 생각된다. 이 때 고려 태조 왕건(927년)은 현재의 용궁 일원과 근품성(현재 산양면) 일대를 점령했을 것으로 본다. 견훤은 고려 왕건이 점령했던 근품성을 탈취하였고, 고을부(현 영천)를 점령 후 경주를 공격 신라 경애왕을 죽이고 족제(族弟)인 김부(경순왕)를 왕으로 내세웠다. 경순왕 3년(929년) 견훤의 고향인 가은 현을 회복하기 위해 가은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한다. 이로 보아 견훤과 왕건은 화북, 농암, 가은 일대에서 서로 뺐고 빼앗기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고 생각되며 이는 현 문경지방을 점령하면 한강과 낙동강을 지배 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당시 교통으로 보면 수로와 육로뿐인데 수로는 한강과 낙동강을 택했을 것이고 육로는 견훤 성지에서 북으로는 괴산, 충주, 청주로, 서쪽으로는 상주, 화북, 보은으로 서남쪽은 영동, 무주, 전주를 남으로는 함창, 풍양을 동으로는 가은, 마성, 예천, 안동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유적으로는 궁기리에 대궐터, 연천리의 마암, 농암리 성재산의 산성, 화북면 동관리 비지재 산성, 극락 정사 위산, 화북면 장암리 견훤 산성이 있으며, 유물로는 차력 바위, 주춧돌, 연못터, 솥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쌍룡 계곡과 궁기리 계곡은 당시의 견훤이 종횡으로 다니던 길이었음을 짐작해 알 수 있겠다.
첫댓글 어릴적 절골이란곳에 밭이 있어서 할아버지를 따라서 다녔는데 밭옆에 기와장이 많았어요.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옛날에 사찰이있었던게 아닌가..아님 그자리가 옛궁터가있었는지? 가본지가 너무도 아득하네요.이글을 읽어내려오면서 내고향(궁터) 향수에 아련히 젖어봅니다.좋은글 감사합니다...건강한 하루가 되소서~~~
글 내용으로 고향을 중심으로 견훤의 활동 내용을 알게 되는것 같습니다,,,,출생지는 어디입니까?,,,, 지렁이 사건은 재미있는 내용입니다
견훤이 상주 사람이라함은 당시 농암이 상주고을(상주목) 함창현(가서면)에 속해 있었답니다. 그리고 일설에는 궁기에 본체를 두고 청주에가서 식량을 조달(강탈해 왔다는 설도 있습니다)했다고 합니다.
아자개는 가은 아채에서 살았다고 하구요. 그 당시는 가은도 상주목에 소속되어 있었지요.
제가알기로는 집궁에 터기 (宮基)로 알았지만 사극역사에 보면 견훤이가 큰 꿈을 가기고 궁터에서 비밀리에 군사훈련을 했던장소로 알고있습니더................제가 잘못알았나요..잘못알았다면죄송합니다 고향이 궁기라서요^^
지렁이로 비하시킨것은 전승국(후고구려:고려)의 횡포일 것입니다. 아마도 거꾸로 후백제가 통일을 시켰다면 견휜의 신비로운 위상은??? 그리고 우리 고향은? 명마를 구한 말바우와 그 명마가 뛰어놀던 벌마(연천) 그리고, 그 명마가 요절한 아채의 뒷산~~~
온누리님의 말씀대로 삼국시대때 부터 우리 문경은 경제(물류교류)와 군사적 요새였던것 같습니다. 당시에 영남과 기호지방의 가장 중요한 교통로는 하늘재(계립령)와 죽령이 있었으나 거의 모든 왕래는 교통이 편리한 하늘재를 통해서 교류가 이뤄진것 같더군요
고향의 유서깊은 역사 유적지와 사연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돼서 감사 드리고 새삼 고향이 더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좋은 자료 잘보았네 나는 역사에는 문외인이라 아무턴 이렇게라도 알게 되었으니 감사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