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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낫기를 원하느냐?(요 5.1-9a)
하나님은 가끔씩 우리에게 찾아와 질문을 던지시곤 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고 동산 나무 그늘아래 숨어있을 때, 하나님은 찾아와 물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시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동생을 쳐죽인 가인에게 찾아와 하나님은 물으셨습니다.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예수님도 역시 자주 질문을 하셨습니다. 풍랑에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의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물으셨고, 사람마다 예수님을 판단하고 평가할 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모두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이며 지금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지, 자신의 실존을 돌아보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예루살렘성 동북 쪽에 ‘양문’이라고 불리는 문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많은 수의 양들이 필요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양이나 비둘기 같은 동물들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는 양들을 끌고 들어오는 문이나, 양을 팔고 사는 시장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서에 보면, 당시의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제사장들과 함께 이 ‘양문’을 건축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3:1). 이 문 곁에는 베데스다라고 하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는 문자적으로 ‘자비의 집’이란 의미이고, 때로는 ‘물이 흘러나오는 곳’이라는 뜻으로도 쓰이는 말입니다. 거기에 행각 다섯이 있었는데, 그 행각에는 수 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그들이 거기 모여있는 이유는 한 가지였습니다. 이 베데스다 연못 바닥에는 물이 솟아나는 샘이 있었는데 그 샘은 간헐천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이 샘에서는 물이 솟구쳐 올라오고, 그 때마다 연못 물이 동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그 연못 물이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의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휘젓기 때문이고, 그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연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든지 낫게 된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본문에 보면 이러한 전설의 내용이 괄호 속에 들어있습니다. 아주 오래된 성경 사본들 모두가 이 구절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본에서는 이 구절이 빠져있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늘날의 성경에서는 괄호 안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것은 당시에 민간에 전해져 온 전설로서, 말하자면 민간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거기에 모여있는 사람들은 당시 의술로는 고칠 수 없거나, 너무나 가난해서 의사의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사정이 절박한 환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 어느 곳에서도 희망을 발견할 수 없고, 질병의 고통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 환자들은 오로지 병 낫기만을 사모하면서, 이 곳에 모여서 연못 물이 동할 때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가 수술을 받고 병원에 입원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2인실에 계시다가 다인실로 옮기셨는데, 같은 병실에서 여러 날을 지내는 동안, 환자들은 오래 사귄 친구나 가족들처럼 서로 격려하고, 도와주고, 병에 대한 정보도 함께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2인실에서 이틀을 같이 지냈던 젊은 부부는, 퇴원하면서 일부러 찾아와 인사를 하고 위로와 격려의 말을 전해주고 갔습니다. 동병상련입니다. 서로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서로를 안타깝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수술을 잘 마치고 회복해서 먼저 퇴원을 하게 되면 부러워는 할지언정 질투하지는 않습니다. 진심으로 퇴원을 축하해 줍니다. 그리고 머지 않아 나도 병이 나아서 퇴원을 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베데스다 연못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언제 물이 동할는지 알 수가 없고, 물이 동할 때 제일 먼저 그 물 속에 들어가는 사람만 고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모든 사람은 다 경쟁 상대일 뿐입니다. 누구도 서로를 위해 자리를 내어주거나 순서를 양보할 의사가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치열한 경쟁의식과 팽팽한 긴장감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38년이라는 긴 세월을 병마로 고생하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나이도 알지 못하고, 그가 무슨 병을 앓았는지, 언제부터 아팠는지, 이 베데스다 연못에는 언제 왔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3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가 병으로 신음하고 있었다는 것과, 그는 병 낫기를 소원하여 이 베데스다 연못까지 찾아왔다는 사실뿐입니다. 그러나 오랜 기간 병으로 앓다 보니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그였기 때문에, 물이 솟아오를 때 다른 사람보다 먼저 연못에 달려 들어가야 하지만, 그는 그 경쟁에서 날마다 뒤쳐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경쟁에 이기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지만, 그는 그 누구로부터도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다 자기가 먼저 들어가려고 애를 쓸 뿐, 그에게 도움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자비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연못조차도 그에게는 냉혹한 경쟁의 자리요 절망의 자리였습니다. 그곳에서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이 베데스다 연못가를 지나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 모여있는 수 많은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의 눈에 들어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눈에 보기에도 그는 오랜 병마로 인하여 지쳐있었고 절망에 잠겨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38년이라는 긴 세월을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의사들을 만나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병에 좋다는 약이나 음식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마지막 희망을 걸고 찾아온 곳이 바로 이 베데스다 연못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곳 베데스다 역시도 그에게는 ‘자비의 집’이 아니었습니다. 물이 솟아오를 때 마다 제일 먼저 물 속에 들어가려고 애를 썼지만, 언제나 일등은 다른 사람들 차지였습니다. ‘다음 번에는 반드시 나에게 행운이 오리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기대를 걸어봤지만 그러나 결과는 언제나 마찬가지였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게는 절망과 분노만 쌓여 갔습니다. 쇠약하고 무기력하여 번번히 실패하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고, 아무런 도움도 주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 분노만 쌓여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했던 걸까요? 이 사람은 그 질문에 엉뚱한 대답을 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그 환자라면 뭐라고 대답하셨겠습니까? ‘뭐, 괜찮습니다. 그냥 이렇게 살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셨겠습니까? ‘예, 당연하지요. 제가 간절히 낫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대답하셨겠습니까?
이 병자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연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물 속에 들어가기 전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연못으로 들어가곤 합니다” 왜 이렇게 쓸데 없이 대답이 깁니까? 낫기를 원한다는 겁니까? 원하지 않는다는 겁니까? 지금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절박한 바로 그 문제에 관하여 예수님은 물어보시는데, 왜 이 사람은 이렇게 쓸데 없는 하소연을 늘어놓고 있습니까?
문제는, 지금 이 사람은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절실한 삶의 과제를 잊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안타까운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대답에는 회복할 길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그 기회를 잡을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안타까운 속 마음이 배어 있습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하는 절망감입니다.
또 하나, 그의 속 마음에 담겨있는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하는 마음입니다. 그가 이곳에 온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지만, 38년이나 병을 앓고 있으니 아마도 꽤 오래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에 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기회를 얻기 위하여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하는데, 번번히 자기를 제치고 물 속으로 먼저 들어가 버리는 다른 사람들이 원망스럽고,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고 도와주지도 않는 가족이나 이웃들이 또한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그 원망과 분노가 삶의 목표와 의미까지도 삼켜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예수님은 물으시는데, 이 사람은 ‘예, 낫기를 원합니다’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과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만을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나에게는 힘이 없고, 다른 사람들은 그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 현실 속에서, 그가 붙잡을 수 있는 희망의 끈이란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체념과 분노만 그에게 남았습니다. 낫고자 하는 의지도 없이 하루 하루 불평과 원망 속에 살아가며, 그래서 ‘주님, 제가 낫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주님, 아무도 저에게 도움을 줄 사람이 없습니다. 주님이 저를 좀 도와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지도 않습니다. 주님을 만났는데도, 주님을 대면하고 있으면서도, 도와달라는 말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이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언제나 형통합니까? 늘 건강하고, 늘 성공하고, 늘 편안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려움도 당합니다. 병이 걸리기도 합니다. 낭패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 때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요. 제가 아픕니다. 제가 힘이 듭니다. 제가 낫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하고, 주님이 도우시는 지혜와 능력과 은사로 치유 받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순간 순간 주님을 대면하고 주님께 기도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좌절하거나 실망에 빠져서, 하나님께 기도하지도 않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지도 않고, 불평과 원망 속에 살아간다면 그것은 성숙한 신앙이라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체념과 원망의 자리에 누워있는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말씀은 세 개의 동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일어나라’는 말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치유의 기적을 행하실 때 자주 사용하신 단어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병들어 숨졌을 때 예수님은 그 소녀의 손을 잡고 ‘아이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가 일어났습니다. 나인성에서 외아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슬퍼하는 여인을 본 예수님은 그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8년을 앓아 누워 거동조차 불편한 이 사람, 그래서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언제나 뒤쳐질 수밖에 없고, 그러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절망하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이 사람에게 주님은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기대하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거나, 실망감에 젖어 원망하지 말고, 내 말에 의지하여 너 스스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를 도와줄 다른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만 바라보고 사람만 의지하면 실망하게 되고 원망만 남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고 ‘지금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치유의 희망이 주님께 있고, 치유의 능력이 주님의 말씀에 있는 것입니다.
그는 다행스럽게도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가 만약 ‘나는 38년이나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어떤 의사도 나를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일어날 수 없습니다’라고 생각했다면 그는 결코 치유의 은총을 경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한계와 고정적인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치유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니 믿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일어나기로 결단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자리를 들어라' 일어났다면 이제 먼저 할 일은 누워있던 자리를 거두는 것입니다. ‘자리’라고 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침대 대신 사용하던 매트를 의미합니다. 이 매트는 지난 38년 동안 그가 누워있던 자리를 상징합니다. 오랜 기간 앓아왔던 질병의 고통, 실망과 좌절의 아픔이 배어있는 자리입니다. 자신의 한계에 대한 체념과 다른 사람에 대한 분노가 남겨있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걷어 들고 걸으라는 것입니다. 활기차게 마음껏 걸어 다니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의 매트를 거두어야 합니다. 자신의 한계에 대한 실망과 고정관념, 그리고 이웃들에 대한 분노, 그 모든 원망과 상처를 그대로 두고는 온전한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진정한 치유는 연못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구원의 길은 연못 물에 남보다 빨리 들어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치유는 다른 사람의 호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진정한 구원은 예수님과의 만남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의 자리에 찾아오십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기로 결단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베데스다는 어디입니까? 고칠 수 없는 질병과 같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구원의 날을 기다리는 우리들의 삶의 자리가 곧 베데스다입니다.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실패하고 실망에 젖어있는 삶의 자리, 아무리 둘러봐도 도와 줄 친구나 이웃이 없는 고독한 자리, 자신에게 실망하고 스스로의 한계에 좌절하는 바로 그 자리가 베데스다입니다. 그 자리에 예수님은 찾아오십니다.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일어나라.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 실망과 좌절, 분노와 아픔, 모두 다 거둬 들고 일어나라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아가라”.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와 말씀하시는 주님만 바라보고, 말씀에 의지하여 자리를 떨치고 일어날 때 우리는 온전한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