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로버트 스콧이 로알 아문센에게 패배했다.
이는 아문센이 언제 돌아서야 할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극점으로 가는 길 스콧은 맥머도 만에 있는 로스 섬에 기지를 세웠다. 맥머도 만은 이전에 두 영국 탐험대가 출발점으로 삼았던 곳이다. 그중 한 탐험대는 스콧 본인이 이끌었고, 다른 하나는 어니스트 섀클턴이 대장이었다. 스콧은 섀클턴이 지나간 경로를 따라갔다. 아문센은 남극점과 보다 가까운 경로를 택한 대신 미지의 땅에서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했다. 두 탐험대 모두 보급품을 미리 갖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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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ationalgeographic.co.kr/feature/map.asp?seq=89&artno=406
"(1911년) 9월 12일 화요일. 시계(視界)에 들어오는 것이 별로 없음. 영하 52℃의 날씨에 남쪽에서 부는 매서운 바람. 개들이 추위에 힘들어하는 게 여실히 보임. 대원들은 옷이 얼어붙어 몸이 뻣뻣하게 굳었지만 맹추위 속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더니 어느 정도 만족한 상태임…. 날씨는 누그러질 것 같지 않음."
이 간결한 일기를 작성한 사람은 노르웨이의 탐험가 로알 아문센(Roald Amundsen, 1872?1928)이다. 그는 이미 5년 전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가는 북극의 전설적인 북서항로를 최초로 항행하여 명성을 얻었다. 이제 그는 당시 탐험계에서 가장 인정받는 영예로 남아 있던 남극점 정복을 목표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남극 대륙에 와 있었다. 이 대담한 모험은 그의 성격대로 치밀하게 계획됐지만 우연의 산물이기도 했다. 2년 전 아문센은 북극해 탐험의 범위를 넓혀 북극점으로 항행하려던 계획에 몰두해 있던 중 로버트 피어리가 먼저 북극점을 정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훗날 아문센은 그 순간 ‘방향을 정반대로 돌려 남극에 가기로 결심했다’라고 회고했다. 만약 자신이 사상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다면 명성은 물론이고 향후 탐험에 필요한 자금도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북극 탐험을 준비하면서 은밀하게 남극 탐험을 계획했다.
그러나 사상 최초의 남극점 정복은 쉽게 장담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영국의 남극 탐험대 역시 로버트 팰컨 스콧(Robert Falcon Scott, 1868-1912) 대령의 지휘 아래 요란한 선전과 함께 남극으로 향하고 있었다. 9월 12일자 일기에서 드러나듯 아문센은 경쟁자를 몹시 의식했다. 스콧에게 패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던 아문센은 남극에 봄이 찾아와 날씨가 풀릴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성급하게 일찍 출발했다. 그 결과 개들이 목숨을 잃고 대원들은 발에 동상에 걸려 한 달간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런 명백한 실수들은 곱씹어 볼 가치가 있는데, 이는 아문센의 흠을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랫동안 그를 따라다녔던 한 가지 낭설을 일소하기 위해서다. 바로 아문센의 남극점 정복은 열정도 없이 그저 전문적인 지식과 냉혹한 야심을 활용한 것에 불과하며, 따라서 아문센은 개성 없는 탐험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평가는 스콧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는 현저히 대조된다. 스콧은 용감한 대원들과 함께 전진하는 매 순간 사투를 벌이며 근성과 용기를 보여주다 빙원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탐험가로 여겨졌다.
1911년 9월 아문센의 그릇된 출발이 빚은 사건은 위험천만한 극지 탐험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아문센은 성격이 꼼꼼하고 치밀하기도 했지만 엄청난 야심가이기도 했다. 모든 탐험가로 하여금 야생의 세계에서 죽음을 무릅쓰게 만드는 위험한 꿈과 충동에 휘둘리기 쉬운 사람이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계속되는 그의 일기에서 드러나듯 아문센의 위대함은 그런 충동적 욕구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능숙하게 제어했다는 데 있다. 아문센은 성급하게 출발하고 나서 나흘 뒤 탐험대의 상황을 냉정하게 평가한 다음 결정을 내렸다. ‘서둘러 돌아가 봄을 기다리기로 했다. 일단 출발했으니 탐험을 계속하겠다고 고집을 피워서 대원들과 동물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게임에서 이기려면 말을 제대로 움직여야 한다. 한 치라도 잘못 움직이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개인적인 꿈같이 짜릿한 무언가를 추구하다 균형 감각을 되찾고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은 귀한 자산이다. 다른 위대한 탐험가들처럼 아문센도 언제 돌아서야 할지를 알고 있었다.
경주가 시작되다 로알 아문센이 이끈 노르웨이 탐험대는 1911년 1월 14일 남극대륙의 훼일스(고래) 만에 도착했다. 그들은 개썰매를 갖추고 영국 탐험대와 남극점 정복 경주를 할 준비를 했다. 아문센이 타고 간 프람 호는 당대 최고의 극지 탐험선이었다.
아문센 늑대털 외투 차림으로 노르웨이의 자택 근처 설원에서 당당하게 자세를 취한 아문센. 이 사진은 그의 회고록과 강연들에 자주 사용된 인기 있는 홍보용 사진이었다.
스콧의 탐험대 영국 탐험대(로버트 팰컨 스콧, 가운데)는 모직 의류를 입었고 썰매를 끌기 편하도록 바람막이 튜닉을 착용했다. ‘내가 볼 때 어떤 탐험이든 털가죽으로 만든 옷이 없다면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다.’ 아문센은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숙명적 선택 스콧이 타고 간 테라 노바 호는 시베리아 산 개들과 만주 산 조랑말들을 실었는데, 녀석들은 엄청난 양의 사료와 세심한 보살핌을 필요로 했다. 조릿대 줄기를 꼬아 만든 스칸디나비아식 설피가 일부 조랑말들에게 도움이 됐다. 설피가 없는 조랑말들은 무릎까지 빠지는 눈 속을 그냥 걸어가야 했다. 최고의 운송 수단을 둘러싼 많은 논의가 있었다. 가령 아문센의 북극 탐험 계획 원안에는 북극곰을 이용한 썰매 끌기가 포함돼 있었다.
모터의 위력 스콧은 개를 이용해 썰매를 끄는 것은 영예롭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도움을 받지 않는’ 탐험의 이상적인 모습은 인간이 직접 보급품을 끌고 가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전동 썰매는 기꺼이 사용했다.
개의 위력 개에 대한 아문센의 신뢰는 개를 이용하면서 점차 깊어졌다. ‘오늘 눈발이 많이 흩날렸지만 개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개들은 애초에 아문센이 택한 알래스카식보다 그린란드식을 따라 하니스(harness)를 목에 걸고 부채꼴로 썰매에 묶이는 방식을 좋아했다.
생사가 걸린 비축물 극지 탐험용 식량을 비축하는 작업은 행군이 시작됐을 때 두 탐험대가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한 조치였다. 아문센이 기록한 대로 탐험대는 남위 80°에서 ‘멈춰 보급품을 내려놓았다. 개 사료용 페미컨(쇠고기를 말린 후 과실과 지방을 섞어 빵처럼 굳힌 것) 12상자, 바다표범 고기 약 30kg과 비계 50kg 및 초콜릿 20팩, 그리고 마가린 한 상자와 썰매에서 먹을 비스킷 두 상자.’
승리와 패배 1911년 12월 14일, 아문센과 4명의 대원들은 목적지에 도달했다. 그들은 남극점의 정확한 위치를 확증하기 위해 천측을 하면서 사흘을 보냈다. 스콧이 이끄는 5명의 탐험대는 그로부터 34일 후에 도착했는데, 마지막 몇 킬로미터 구간에서 노르웨이 탐험대의 흔적과 마주쳤다.
승리와 패배 그들은 패배감으로 망연자실하며 자신들이 그 같은 노고를 마다하지 않은 이유는 ‘사상 최초로 그곳에 도착하고 싶어서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