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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발탄에서 해방되지 않았다
이범선의 〈오발탄〉은 1959년 『현대문학』 10월호에 발표된 단편소설이다. 해방 직후 남쪽으로 내려와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한 가정의 삶을 고발해 암담했던 시절의 현실을 사실적 기법으로 부각시킨 문제작이다. 주인공 송철호는 종로에 있는 계리사 사무실에서 일하지만 적빈의 가난 속에서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돈도 벌지 못한다.
남들은 가난을 참지 못해 양심을 모두 잊고 사는데 송철호는 양심에 반하는 일은 추호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고자 했지만, 어머니의 정신질환과 양공주가 된 여동생, 남동생의 구속과 아내의 죽음은 철호를 절망에 빠뜨린다. 잘못 발사된 ‘오발탄’처럼 세상에 순응하지 못하는 철호의 모습은 부조리한 현실 속 방향타 없는 민중의 삶을 대변한다. 소설은 양심적이고 착한 주인공이 궁핍 때문에 결국 파탄 지경에 도달하는 과정을 그림으로써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한다. 철호와 영호는 부조리한 현실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대결하나 패배한다.
두 형제는 삶의 방식을 두고 논쟁하는데, 이 장면에서 남북 간의 이념 차이를 생각하게 한다. 철호는 도덕적인 방식을 고집하면서, 영호는 법률선을 넘으면서 부딪친다. 결국 부조리한 현실과 대결하려면 도덕과 법률의 선을 넘어야 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끝내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어떤 식의 삶을 선택하든 결국에는 사회의 낙오자로 전락해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쟁 후의 현실이고 이점을 고발하기 위해 이 소설이 탄생했다고 본다. 벗어나려 할수록 단단하게 조여 오는 올무의 특성처럼 그들의 삶은 얽히고설켜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소설은 힘들고 어두운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방향을 잃고 쓰러지는 주인공을 통해 더욱 비참하게 결말을 맺었다. 이범선은 이 작품 이후로 사회와 현실에 대해 더욱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오발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현실의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려 당하는 수동적 인물들이다. 육이오사변 때 용산 일대가 폭격으로 지옥처럼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고 미쳐버린 어머니는 전쟁 이전 고향에서의 행복했던 시절을 잊지 못한 채 전후의 경제적 파탄을 감수해야 했던 실향민이다. 양공주가 되어 미군과 어울려 다니면서 생활비를 버는 명숙은 생존을 위해 몸을 파는 전후 여성의 슬픈 모습이다. 전쟁에서 부상당한 동생 영호는 현실에 대해 한때 적극적으로 반항하지만 강도짓을 벌이다가 체포된다. 점심조차 사먹을 돈이 없을 만큼 가난한 남편을 둔 명문대학 출신 아내는 영양실조에 걸린 채 출산하다가 사망한다. 이들 가족의 해체는 혼돈 속 사회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도무지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 정면돌파도 우회돌진도 불가능한 것이 송철호의 가족이다. “아들 구실. 남편 구실. 애비 구실. 형 구실. 오빠 구실. 또 계리사 사무실 서기 구실. 해야 할 구실이 너무 많구나. 너무 많구나. 그래 난 네 말대로 아마도 조물주의 오발탄인지도 모른다. 정말 갈 곳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디건 가긴 가야한다.” 택시를 탄 철호는 목적지를 잃어버린 채 혼자말로 횡설수설하다가 택시 안에서 쓰러지고 만다.
송철호 가족이 사는 동네는 ‘해방촌’이다. 해방촌은 용산구 남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용산동1·2가와 후암동 고지대를 가리키는데 이런 동명洞名보다는 해방촌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다. 이렇게 이름이 붙은 까닭은 해방 이후 해외에서 돌아온 동포들과 국토가 분단되면서 월남민들이 이곳 산자락에 임시 거주처를 마련해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촌락이 만들어졌고 마을이 확장되었다.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온 전국 각지의 이주민과 해외에서 돌아온 동포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해방촌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지금의 후암동 270번지에는 조선 초기부터 소·양·말을 기르는 관청인 전생서典牲署가 있었다. 용산동 일대는 조선시대 고종 때까지 수림과 잡초가 무성했는데 이곳에 일본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1940년부터는 용산정 1·2·3·4·5·6가로 고쳐 불렀고, 해방이 되고 일본식 명칭인 ‘정’을 ‘동’으로 바꾸어 불렀다.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용산동 일대는 임진왜란까지 가닿는다. 지금 주한미군이 주둔한 용산 기지에는 임진왜란 때인 1595년 왜군의 후방 병참기지가 건설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 때는 청국 군대가 주둔했고, 1884년 갑신정변 때는 일본군이 주둔했다. 그 뒤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용산은 일본군 20사단의 차지가 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300만평을 점유했으나 용산 주민들이 강렬하게 저항하면서 118만평으로 줄어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일병탄이 일어난 1910년부터는 일제 조선군 본부가 1945년까지 주둔하면서 대륙침략의 전진기지로 사용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면서 미군이 진주해 이곳을 접수했고 미 보병7사단을 주둔시켰다. 1949년 미국은 병력을 한반도에서 철수했으나 이듬해 육이오사변이 일어나면서 복귀했고 정전협정이 체결된 뒤인 1953년 9월 15일에 다시 주둔을 시작했다.
1957년 7월 일본 도쿄에 있던 유엔군사령부가 용산 기지로 이전하고 주한미군이 창설되면서 용산 기지는 동아시아 냉전의 최전방 기지가 되었다. 이것은 21세기까지 이어지다가 용산 주둔 미군이 평택으로 옮겨가면서 400년 이상 이어진 부조리한 역사가 마감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한쪽 면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전 협정 후 용산 기지에 주둔한 주한미군이 한국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휴전 후 복구과정에서 미국은 경제원조를 통해 한국의 경제가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또한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의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래 전에 원로가 된, 1960년대에 데뷔한 가수들은 모두 미8군 무대에 섰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용산 기지 안에는 드래곤 힐 호텔이 있었는데, 이곳은 한국인들도 허가증이 있으면 들어갈 수 있었다. 호텔은 손님을 끌어들여 영업을 해야 하는데 기지 안 미군들과 한국군, 그리고 군속만으로는 영업에 한계가 있었다. 한국의 부자들이나 겉멋만 잔뜩 들어있는 허영덩어리들을 끌어들여 영업을 해야 했다. “드래곤 힐 호텔 스테이크가 일품이지.” 드래곤 힐 호텔에 드나드는 것으로도 목에 힘이 들어갈 정도였다. 그것은 서울에 국제적인 수준의 호텔에 딸린 식당들이 즐비한 최근까지도 이어졌다. 일종의 사대주의라면 사대주의이고 ‘미제라면 똥도 좋다’는 1950년대의 사회적 기류가 남아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주한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드래곤 힐 호텔도 함께 평택으로 옮겨졌다. 자가용 앞 유리에 용산기지 출입증을 붙이고 드래곤 힐 호텔을 드나들면서 으스대던 사람들이 평택까지 가지는 않을 테니 그들로서는 마음의 고향을 상실한 것일 수도 있겠다.
삶의 터전이 북쪽에 있었던 송철호 가족은 해방과 분단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왔다. 그의 말대로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큰 지주로서 한 마을의 주인 격으로 제법 풍족하게 평생을” 살았다. 북에 그대로 살았다고 해도 땅은 모두 빼앗겼을 것이다. 오히려 철호가 선택한 자유가 더 소중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철호의 생각이고 어머니에게 월남은 “나라를 찾았다면서 집을 잃어버려야 한다는 것”이었고 정말로 알 수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서울은 땅 한 조각 없는 생면부지의 낯선 타향이었고 그들이 터를 잡은 곳은 해방촌이었다.
“산비탈을 도려내고 무질서하게 주워 붙인 판잣집들이었다. 철호는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레이션 곽을 뜯어 덮은 처마가 어깨를 스칠만치 좁은 골목이었다. 부엌에서 아무데나 마구 버린 뜨물이 미끄러운 길에는 구공탄 재가 군데군데 헌데 더뎅이 모양 깔렸다.”
전쟁이 끝난 뒤 가장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것은 병사들의 식량을 담았던 레이션 곽이었다. 벽돌 한 장, 기와 한 장이 귀했던 시절에 레이션 곽은 비싼 돈을 주지 않아도 여기저기에서 구할 수 있었다. 1950년대 전후 한국에 들어선 판자촌은 전쟁의 산물로 방음도 안 되고 한겨울 추운 바람도 들이닥치고 비라도 내리면 빗방울이 천정에서 떨어지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어쩌면 신석기 시대 인류가 거주했던 움막과 별반 다를 게 없는 판자촌이 서울 곳곳에 들어섰다. 레이션 곽이 떨어지자 사람들이 찾기 시작한 것은 마침 일어난 석유화학산업이 만들어낸 천막과 비닐이었다. 그래서 서울 변두리에 천막집과 비닐하우스가 생기기 시작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아이들은 태어났고 자랐다. 전후에 태어난 아이들도 모두 예순을 넘었다. 집에 대한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제일 갖고 싶어 했던 것이 양옥집이 아니었을까 하는데, 이 소설에서도 철호의 동생 영호는 술에 취해 “근사한 양옥 한 채”에 대해 철호에게 얘기한다.
“이제 우리두 한번 살아봅시다. 제길, 남 다 사는데 우리라구 밤낮 이렇게만 살겠수. 근사한 양옥도 한 채 사구, 장기판만한 문패에다 형님의 이름 석 자를, 제길 장님도 보게 써서 대못으로 땅땅 때려 박구 한번 살아봅시다.”
그 양옥의 장기판만 한 문패에 이름을 적는 것이 서민들의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런 희망이 다가구와 연립을 거치면서 1980년대에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아파트까지 이어졌다. 굳이 부동산 투기를 말하지 않더라도 아파트는 판잣집에서 시작된 한국 서민들의 로망이었을 테다. 어쩌면 한국인들에게 형성된 집에 대한 집단 트라우마일 수도 있겠다.
판잣집에서 난방과 취사를 겸할 수 있는 연료는 연탄이었다. 한국에서 많이 나는 석탄은 무연탄이었다. 이것을 가루로 만들어 점토와 섞어서 틀에 찍어 말리면 연탄이 된다. 연탄은 일본 큐슈 지방에서 목탄 대신 쓰기 위해 석탄 덩어리에 여러 개의 구멍을 뚫은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구멍을 뚫은 까닭은 바람이 통해 연탄이 잘 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에서도 연탄은 20세기 초부터 사용됐으나 당시에는 부자들만 살 수 있었다. 그러다가 1950년대부터 정부에서 산림 황폐화 대책으로 연탄을 장려하면서 연탄 때는 집이 늘어났다. 구공탄은 연탄에 구멍을 아홉 개 뚫은 것이다. 사료史料를 찾아보았다. 1932년 동아일보에 구공탄 광고가 난 것을 보면 구공탄은 1932년 이전에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에는 구멍 수가 더 늘어난 제품들이 판매됐다. 구멍 수가 많으면 화력이 강해지지만 타는 시간이 짧아진다. 반면 구멍 수가 적으면 타는 시간이 늘어나지만 화력이 약해진다. 연탄의 전성기는 1960년대와 70년대였다. 아파트가 점차 보급되고 가스가 들어오면서 연탄아궁이나 연탄보일러 대신 취사와 난방 연료로 가스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연탄의 가장 취약점은 일산화탄소에 따른 가스 중독이었다. 게다가 판잣집은 공기 차단이 쉽지 않았기에 밤에 자다가 참변을 당하는 이들이 많았다.
판잣집은 근본 대책 없이는 완전히 해결하기가 불가능했다. 농어촌 주민이 유입되면서 서울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도시로 온 이들이 거주할 곳은 판잣집밖에 없었다. 그들은 낮에는 일터에서 일하고 밤에는 틈틈이 모아놓은 판자로 집을 지었다. 그들이 지은 돼지움막 같은 집은 나중에 효자노릇을 톡톡히 했다. 서울시는 남의 땅에 지은 판잣집은 강제로 철거하고 새로운 정착지에 이주시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교외에 국공유지를 확보해 가구당 열 평 안팎의 땅을 불하拂下해 집단적으로 정착시켰다. 정부로서도 최선을 다한 조치였을 것이다. 이들 정착지는 대부분 변두리 구릉지에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들 정착지 옆에 무허가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1960년대 경공업으로 시작된 경제개발은 공장 노동자를 필요로 했고 이들 정착민들이 있어야 공장이 가동됐다. 그러니 정부로서도 무허가건물을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가락동·거여동·공릉동·도봉동·번동·봉천동·사당동·상계동·시흥동·신림동·쌍문동·염창동·오금동·정릉동·하계동 등지에 마련된 정착지에는 어김없이 무허가건물들이 들어섰다. 그것이 1960년대 한국의 모습이다. 이 무허가건물들이 재개발을 시작한 때는 1990년대에 들어서이다. 지금의 상계동·하계동·공릉동 지역의 아파트들도 1990년대에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지역에는 어김없이 재개발을 통해 아파트가 들어섰는데 거의는 서민아파트였다. 하지만 집값의 높고 낮음을 떠나 이 지역에 수십 년을 산 사람들에게 그나마 인생의 후반부에 번듯한 아파트라도 한 채 생겼으니 그것만으로도 행복하지 않았을까. 반면에 해방촌은 아직도 다가구 주택들로 빼곡한데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대로 변할 것 같지 않은 동네로 보였다.
철호의 다섯 살 난 딸은 삼촌이 구두를 사준다고 했다며 그것을 신고 엄마와 화신 구경 간다고 좋아했다. 삼촌이 술에 취해 들어온 날 아이는 빨강 신발을 품에 안았다. “어린 것은 조그마한 손을 베개 너머로 내밀었다. 거기 가지런히 놓아둔 신발을 만져보았다. 안심한 듯이 다시 베개를 베고 누웠다.” 잠든 줄 알았던 아이는 다시 신발을 만져보다가 발에 대보다가 아예 일어나 앉은 채로 그것을 신고 방바닥을 디디었다. 새신을 가진 것도 그것을 신고 화신에 갈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이는 기뻤다. 몇 번이나 신발을 만지고 확인한 어린 것은 “오물오물 담요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화신은 지금의 종로 2가 종로타워에 있던 화신백화점을 가리킨다. 당시 화신백화점은 1937년에 준공된, 그때로서는 서울에서 몇 안 되는 매우 큰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육이오사변 전란에도 용케 살아남았고 서울 사람들이 구경하고 싶은 쇼핑 타운이었다. 화신백화점은 1970년대 후반까지 존속하다가 문을 닫았고 1987년경 철거되었다. 조선인 박흥식이 일제의 견제를 뚫고 세운 건물에 대한 보존 여론이 많았으나 무엇이든 무너뜨리지 않으면 배기지 못하는 한국인의 속성상 오래 된 건물을 보존한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한 발상이다. 그래서 서울의 오래 된 건물은 경복궁이니 창덕궁이니 하는 고궁이 대부분이고, 한국은행 본관, 옛 조흥은행 등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가 남아 있다.
해방촌 거리를 오른다. 녹사평역에서 남산3호터널로 가다가 왼쪽으로 돌면 용산 기지 담벼락과 붙은 길 초입 왼쪽에 한신옹기가 보인다. ‘서울미래유산’으로 명명된 한신옹기는 1967년에 문을 열었으니 오발탄이 태어날 때는 존재하지 않았다. 녹사평에서 회현동으로 뚫린 남산3호터널과 장충동으로 뚫린 남산2호터널도 마찬가지이다. 당시 서울 시내에서 해방촌까지 가는 시내버스가 있었다. 해방촌이 종점이었는데 이제는 그 버스 노선도 사라졌다.
신흥로를 따라 계속 올라가면 해방촌 오거리가 나온다. 이곳은 남산순환도로인 소월로와 닿아 있고 오거리에는 용산2가동 주민센터가 있다. 신흥로는 수많은 작은 골목들과 이어진다. 어느 골목이든 경사는 매우 급한데 그곳에 세워둔 자동차들은 언제라도 기어가 풀려 미끄러질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은 해방촌을 처음 가본 사람들의 생각이고 이곳 사람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비좁은 골목에 묘기를 부리듯 아슬아슬한 주차를 하는 장면을 여러 차례 목격할 수 있었다. 겨울에 눈이 오다가 얼면 저 자동차들은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자동차를 편하게 주차할 곳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 해방촌이 들어설 때 자동차는 꿈도 꾸지 못했을 테고 그 뒤로 집을 새로 지을 때 역시 대지가 좁다 보니 차고를 만들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곳저곳을 헤매다가 용케 발견한 주차장은 용산2가동 주민센터에 있는 공영주차장이었다. 그마저도 공간이 부족해 꾸역꾸역 옥상 주차장까지 올라가 겨우 차를 댈 수 있었다.
해방촌으로 가는 길은 녹사평역에서 가는 길 말고도 용산중·고등학교를 지나서 가는 길, 그리고 후암동 쪽에서 가는 길이 있다. 용산중학교를 지나 직진하면 108계단이 나온다. 이 계단이 가파르다 보니 그 옆에 에스컬레이터가 만들어졌다. 계단을 걸어서 오른다. 이름은 108계단인데 실제로는 107계단이라고 해서 세어보니 정말로 그렇다. 공사를 새로 하면서 계단 1개가 사라졌다고 한다. 원래 이 계단은 일제강점기 때 신사神社를 오르던 계단이었다.
일제는 신사를 해방촌에 짓고 이름을 ‘초혼사’라고 붙였다. 이 신사는 1943년에 완공됐는데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하는 바람에 전사자들을 한 명도 합장하지 못했다. 초혼사를 헐어버린 자리에 보성여자고등학교가 들어섰다.
보성여자중고등학교는 1907년에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에 의해 평안북도 선천에 세워졌다. 이름은 예수교보성여학교였다. 3·1운동 때 선천 신성학교와 함께 시위를 벌여 사상자가 여럿 생기기도 한 여학교이며, 항일운동에 앞장서서 활약하기도 했다. 1935년 보성여학교로 이름을 바꾸었고, 1942년 일제에 의해 경영권이 박탈되었다.
1950년 4월 서울로 이전해 보성여자중고등학교로 다시 문을 열었으나 전란 속에 부산 피난 교사에서 수업을 받다가 1953년 9월 서울 영락교회의 부속건물을 교사로 사용했다. 그리고 1955년 4월 지금의 자리인 해방촌에 터를 잡았다. 보성여자고등학교가 이곳에 들어설 수 있었던 까닭은 서북 지방 사람들이 월남해서 대거 해방촌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1950년 보성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개교할 때 이사장에 한경직 목사, 교장에 김양선 목사가 취임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숭실중고등학교도 해방촌 용산동2가 2번지, 지금의 국방홍보원 자리에 있다가 1975년 은평구로 이전했다.
서북 지방은 한반도에서 기독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이다. 그 영향이 해방촌에까지 미쳐 해방촌에는 두 개의 기독교 학교는 물론이고 해방교회·해방성당·신흥교회 등 유서 깊은 교회들이 세워졌다. 월남인들은 해방촌이라는 매우 열악한 곳에 살면서도 그들이 고향에 살면서 가졌던 믿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마도 그런 것이 해방촌의 긍지였을 터이다.
이곳에서 또 한 곳 의미 있는 시설은 영락보린원이다. 영락보린원은 쉽게 말해서 보육원인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한경직 목사가 1939년 신의주에서 세웠다. 해방 후 월남하면서 원아들을 함께 데리고 내려왔고 충무로2가와 제주도를 거쳐 1951년 후암동 해방촌에 다시 문을 열었다. 그 시설은 2000년 한경직 목사가 소천한 뒤에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고 보니 한경직 목사가 거두지 못한 가족은 송철호 가족이 유일하지 않았나 싶다.
해방촌에는 1960년대부터 편물編物을 하는 가내수공업체들이 많았다. 지리적으로 남대문시장이 가깝고 편물은 큰 자본이 필요 없는데다가 기술만 익히면 어렵지 않게 시작할 수 있었다.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월남한 서북인들이 큰돈을 만지지는 못해도 생계를 유지하기에는 적절한 직업이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다가구 주택들이 들어섰고 편물점들은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그 자리를 물려받은 업종이 소규모 디자인과 예술이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IT 산업에서 필요한 홈페이지 디자인 등의 회사들도 이곳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런 분야의 산업이 들어설 수 있었던 까닭은 해방촌이 도심에 위치해 있으나 임차료가 비교적 쌌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이태원 등지에서 영업하던 카페가 젠트리피케이션에 밀려 길 건너 해방촌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이제 한신옹기에서 신흥로를 따라 올라가는 길에는 소소한 카페들이 여럿 들어섰다. 용산2가동 주민센터 근처 신흥시장을 둘러싼 곳에도 크고 작은 카페를 쉽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그 카페를 방문하는 젊은 손님에게서 해방촌의 고단함을 찾아볼 수는 없다. 해방촌 또는 해방이 들어간 카페를 보면서 젊은 손님들은 무엇으로부터 해방되려는 것일까라는 뜬금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았다.
도로변에서 보면 시장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지만 건물과 건물 사이로 들어서면 1960년대 모습을 한 크지 않은 시장이 나타난다. 해방촌 사람들은 이곳에서 장을 보며 삶을 살찌우려했을 것이다. 과거의 영화는 이미 녹슬어 사라졌다. ‘신흥’시장은 새롭게 흥한다는 뜻을 갖고 있는데, 요즘 들어 그런 이름은 무색해져버렸다.
곳곳에 디자인과 예술 계통의 소규모 오피스들이 들어와 있다. 그들이 이곳까지 들어온 까닭은 그들의 예술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일 것이다. 시장에서 잘 팔리지 않는 예술을 하거나 가진 자본이 없어 이곳까지 밀려왔을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해방촌이라는 지역의 특성을 살려 예술적 콘텐츠를 키우기 위해 정부의 보조를 받아 정착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다. 이런저런 이유를 유추한바, 그들 역시 해방 이후 이곳으로 몰려든 이주민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여 그들을 보는 나도, 거기 서 있는 나도 같은 마음이 들어 기분이 쓸쓸했다. 예술이라는 게, 그리고 내가 하는 문학이라는 것이 어렵고 힘든 길인데 우리는 왜 이 일을 계속하려 하는 것일까, 다시금 묻게 되었다. 오히려 그곳에 있는 생맥주점이 실속은 더 있어 보였다. 하지만 내가 갔던 해저물녘에는 그곳에도 손님이 없었다.
나는 해방촌 사람들한테서 세상의 다툼으로부터의 해방을 발견했다. 뒤처져서 출발했고 도시로부터 소외된 것 같은 동네이지만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도시로부터 해방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정착한 동네가 이제는 복잡한 도시로부터 해방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곳에는 느릿함이 존재한다. 언덕을 오르는 사람도 자동차도 모두 느릿느릿하다. 그런 느릿함이 이들의 마음을 넓게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되었다. 좁은 길은 사람의 마음을 여유롭게 하는 아이러니를 가지고 있다. 넓은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가 속도를 더 내듯, 좁은 도로는 말 그대로 ‘그러려니’ 하며 기다리는 미덕이 있다. 나 역시 이곳을 운전하면서 교행交行하는 차들이 좁은 도로를 어떻게 슬기롭게 비껴가는지를 여러 번 체험했다. 그들은 차가 막혀도 경적을 울리지 않고 풀릴 때까지 기다렸다. 길게 늘어선 줄이 갑갑해 보이지도 않았다. 있다 보면 모든 것은 해결되었다. 송철호도 지금의 해방촌 사람들도, 그들대로의 공식 안에서 그들의 생활에 익숙해진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매우 소중한 체험이었고 내게는 새로운 지혜를 안겨준 경험이었다.
철호가 살았던 집이 어딘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는 저녁을 먹고 나서 집 뒤 산등성이에 있는 바위로 올라간다. 그러나 철호가 오른 곳이 두텁바위는 아니다. 두텁바위는 후암동 84번지에 있었으며 지금은 사라졌다. 후암은 한자로는 厚巖, 이 동네 사람들은 이곳을 대대로 두텁바위라고 불렀다. 두텁바위는 이곳의 길 이름으로도 쓰이는데 천주교 후암동 성당 일대의 길을 두텁바위로라고 부른다. 철호가 집 뒤 바위에 올랐다는 것을 볼 때 그의 집은 해방촌에서도 높은 곳에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해방촌 건너편은 이태원이다. 지금 이태원은 한자로는 梨泰院인데, 원래 한자는 異胎院이었다. 다른 아이를 뱄다는 뜻이다. 임진왜란 때 용산에 들어선 왜병들이 계곡 너머 있던 운종사(雲鐘寺)에 들이닥쳐 여성들을 겁탈했고 아이들이 태어나자 다른 씨앗이 잉태되었다 하여 異胎院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왜병들의 피가 섞인 동네라는 뜻이다. 지금은 국제적인 지역으로 바뀌어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 남녀 간의 만남이 자발적이지만 그때는 강제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태원이든 해방촌이든 분명한 것은 상처가 많은 역사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철호의 집은 해방촌이고 직장은 종로이다. 교통수단은 전차이다. 그는 신용산선과 을지로선을 탔을 것이다. 철호가 명숙이가 미군 지프에 올라타는 것을 본 곳이 을지로 입구 전차 안이다. 을지로선은 남대문 - 을지로 입구 - 을지로 6가 구간을, 신용산선은 신용산-남영동-남대문 구간을 운행했다. 그러니까 철호는 갈월동 즈음에서 타고 남대문에서 환승해 을지로 쪽으로 향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소설에서 배경은 해방촌 말고는 분명한 곳이 없다. 철호의 직장, 명숙이가 잡혀있던 경찰서, 영호가 구금된 경찰서, 아내가 입원해 사망한 병원들이 어디인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아내가 입원한 병원이 S병원으로 적혀 있는 것으로 볼 때 지금의 서울역 앞 연세빌딩에 있던 세브란스병원이 아닐까 한다.
영호가 구금된 경찰서가 어디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남대문경찰서는 1959년 11월 25일에 문을 열었다. 소설의 발표 시점인 1959년 10월보다 나중이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이른 봄이므로 2월이나 3월인 것이다. 시간을 계산할 때 서대문경찰서나 용산경찰서 또는 중부경찰서일 가능성이 높다. 철호는 오후 두 시가 넘어 전화를 받고 경찰서에 갔고, 영호를 만난 뒤 경찰서를 나와서 어디를 어떻게 걸었는지 알 수 없지만 집으로 갔다. 다시 아내가 입원한 병원을 들렸다가 나와서 걷다가 치과 두 군데를 들려 이를 뽑고 설렁탕을 먹으려다가 도로 나와 걷다가 택시를 탔다. 반나절에 이루어진 철호의 동선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이것이 실제로 일어나려면 그날 오후 송철호는 화장실에 갈 틈도 없이 여기저기를 내달렸다.
이범선은 이 소설에서 1950년대 전후의 피폐한 현실 속에서 가진 것 없는 적빈赤貧의 사람들이 어떻게 위기를 맞고 고난의 사투를 벌이다가 가족의 해체 또는 개인의 죽음에 이르는지를 알리려고 했다. 그래서 상징적으로 해방촌을 선택했고 부농이었으며 대학을 졸업한 지식인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다. 아내도 유명한 여대를 졸업했지만 그런 부조리한 현실 속으로 함몰되는 불쌍한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고자 했을 것이다. 사회라는 거대한 쓰나미는 개인이 아무리 뛰어나도 모두를 함몰시킬 수 있는 굉장한 ‘무엇’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오랜 식민지 생활로 수없이 수탈을 당했고 해방 후 남겨진 것은 별로 없었다. 육이오사변으로 인해 국토가 황폐화되고 경제도 초토화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에 따라 철호가 찾아 나섰던 자유마저도 무색해졌다. 이런 것을 모두 일컬어 우리는 폭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폭력 속에서도 철호는 사회적 규율을 지키려 하고 영호는 그것을 넘으려 한다. 하지만 그에게도 인정선이 있어서 강도 행각이 미수에 그친다. 지키는 자도 실패하고 넘은 자도 실패했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유일한 승자는 명숙이가 아닐까. 철호가 병원에 있는 아내에게 가려는 순간 입원비를 건넨 이는 명숙이다. 그 돈은 미군을 상대로 한 매춘에서 벌었을 테니 철호는 자신이 그렇게도 못마땅해 하던 명숙의 삶에 신세를 지게 된 것이다. “철호의 눈이 명숙의 발뒤축에 머물렀다. 나일론 양말이 계란만치 구멍이 뚫렸다. 철호는 명숙의 그 구멍 뚫린 양말 뒤축에서 어떤 깨끗함을 느끼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철호는 명숙에 대한 오빠로서의 애정을 느꼈다.” 사람도 극한에 몰리면 절대 선으로 모시던 도덕을 버릴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인간은 사회의 부조리와 폭력에 순응하든 저항하든 같은 결말에 이르는 것 같다. 소설은 철호의 삶처럼 목적지를 모르고 비틀거리다가 끝을 맺는다. 난산 끝에 아내가 죽었음을 알면서도 그는 슬프지 않다. 그저 그가 겪은 슬픈 일들에 슬픈 일 하나가 더해진 것일 뿐이고 이제는 슬픔이 무엇인지조자 잊어버린 것 같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몰라 “흐청흐청 걸어서 널따란 현관으로 나왔다.” 큰일 하나를 끝마친 것 같기도 하고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그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이제 더는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을 안고 우두커니 서 있다. 그러다가 이를 뽑는다. 하루에 두 개 이상 뽑을 수 없다는 의사의 말을 무시하고 다른 병원을 찾아 다른 쪽 이를 마저 뽑는다.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잃어버린 “철호가 탄 차도 목적지를 모르는 대로 행렬에 끼어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가는대로 따라서 간다. 철호의 입에서 흘러내린 선지피가 흥건히 그의 와이셔츠 가슴을 적시고 있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채 교통 신호등의 파랑 불 밑으로 차는 네거리를 지나갔다.”
궁핍한 삶의 현실 속에서 방향을 잃어버린 철호의 휘청거림은 틈만 나면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어머니의 염원과 성격이 다르지 않다. 이 둘은 현재의 삶을 부정하고 있다. 하지만 철호의 비틀거림도 어머니의 외침도 제자리걸음일 뿐,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한다. 전쟁이 안겨준 시대의 비극은 오발탄이란 제목을 배경으로 그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덫으로 상징했다. 택시기사의 비웃음을 들으며 깊은 잠에 빠진 철호의 얼굴이 어두운 밤 서울 어딘가를 구부정한 모습으로 헤매고 있을 우리들의 아버지 모습으로 겹쳐진다.
〈오발탄〉이 발표된 지 60년이 지났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 오발탄들은 완전히 사라졌을까? 나는 해방촌을 내려오면서 이 같은 물음을 던져보았다. 띄엄띄엄 나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은 “아직도, 오발탄은 남아 있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