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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운
《 한 강문학》(2018) 시조부문 등단, 평론부문 등단(30호, 2023, 신년호),
《한강문학》 편집위원, 한강문학회 총무이사
번역을 위한 방편
- 오역도 번역이다
〈서론〉
오늘날의 글로벌 시대는 과거처럼 외부와 폐쇄된 세상에서 사는 것이 아니다. 국가는 국가대로 타국과의 다양한 교류를 하고, 문학 또한 다양한 교류를 나눈다. 이는 시 분야에서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옛날 한자 문화권에서도 시는 4언의 전통시에서 5언의 시로 바뀌면서 2구, 4구의 라임을 맞추는 방법으로 발전하고, 또 훗날 그리스의 작법도 페르시아를 거쳐 불교문화가 유입되어, 절구에 1구, 2구, 4구에 라임을 맞추는 방식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또한 이 작법이 우리 나라에도 들어와서 한시 읽는 법에서 향가가 파생되고, 또 시조로 발전하기도 했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에는 이태리의 시 작법이 영국으로 전래되어 셰익스피어 쏘네트로 발전하기도 했다. 이때 프랑스의 전통 민요 작법도 영국으로 도입되기도 했다.
이렇듯이 시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하는 것이기에 시의 교류차원에서 ‘시를 번역하는 방법’이 중요하게 대두되는 것이다.
우리 문화가 해외로 진출하려면, 필히 번역 과정이 필요하듯이, 우리 시를 해외에 알리기 위해서는 ‘우리 시 번역 방법’이 제일 중요하다.
〈시인들의 착각〉
우리나라 시인들은 상당수가 번역을 할 때는 “우리 언어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하는, 다소 국수적인 사고에 빠져 있는 경우가 있다.
우리의 아름답고 다양한 의성어, 의태어를 어떻게 번역으로 살려낼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너무 깊게 빠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말의 아름다운 특성을 그대로 번역해야 제대로 된 번역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많다. 즉 우리글의, 우리 시의 아름다움에 대해 과도하게 몰입되어, 정작 제대로 번역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우리의 시를 접할 수 있는 외국인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능동적으로 한국어를 배웠다 하더라도 대부분은 자신들의 비즈니스, 취업 등의 필요성에 따른 한국어 습득이기에 외국인들 중 극소수만이 한국 시를 읽어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이 한국시를 영역하는 까닭은 결국 많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시를 소개하고자 한 것인데, 영역된 한국시를 접한 대다수의 외국인들 중 상당수는 원문(한국어)도 읽고 싶어 하게 될 것이다. 그런 욕구가 커지면 커질수록 한국어로 쓴 시에 관심을 갖는 인구가 늘어날 것이다.
즉 한국의 아름다운 시를 해외의 다양한 언어로 번역하여 소개하고, 이를 통해서 점진적으로 한국 시의 팬이 확장될 터인즉 이 점이 바로 우리 시를 외국어로 제대로 번역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가 되는 것이다.
〈어떻게 시를 번역할 것인가〉
지금도 해외의 많은 시인들 사이트에 가면, 시를 번역할 때는 원시의 내용이 정확이 번역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과, 번역된 시가 번역된 언어로 제대로 시가 되도록 번역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나라 시인들 중 대다수는 첫 번째 항목을 중시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다. 아름다운 우리말 시를 정확이 번역해야 한다. 아름다운 우리의 시어를 번역해야 한다는 점에 중점을 두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필자는 후자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번역 된 언어로 ‘시가 될 수 없도록 번역’되었다면 그 번역은 바람직한 번역이라고 할 수 없다.
〈언어에 따라 각각 시의 특성이 있다〉
우리 시는 리듬의 장단음을 활용해서 리듬을 잡아가는 방식으로 시를 쓰는 경우가 많다.
영시의 경우에는 강약의 발음을 적절하게 배치해서 리듬을 잡아가는 방식으로 시를 쓴다.
그래서 아무리 훌륭한 우리 시를 번역하더라도, 번역하는 과정에서 영시의 기본 리듬의 형식을 맞추지 않고 시를 쓴다면, 그저 좋은 문장이나 구절을 나열하는 형식의 글이 될 가능성이 많다.
좋은 글을 적당히 보기 좋은 정도로 행을 나누어 배치했다고 시가 되지는 않는다.
이렇게 번역된 글을 시라고 내 놓았을 때, 외국 현지인들의 입장에서 굳이 읽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번역을 한다면, 제대로 된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외국어로 번역한 시가 그 언어로 경쟁력을 가지지 못한 다면 제대로 된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유시와 정형시〉
우리는 그동안 한시와 시조는 ‘정형시’, 그 외 모든 시는 ‘자유시’라고 가르치고 배우는 오류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김소월의 시, 박동환의 시 등 상당수는 영미시의 분류 방식으로 볼 때는 정형시에 속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비슷한 음보를 갖고 있고, 적절하게 운을 맞추려 노력한 시들은 시조가 아니라 하더라도 정형시로 분류하는 것이 맞다.
김소월(1902~1934)의 〈진달래꽃〉을 예시로 보면.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 〈진달래꽃〉 전 문
김소월의 시의 음조는 기본적으로 7.5조의 음절을 기본으로 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단 2연에서는 5,4음조로 7.5 음절의 변형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우리는 김소월의 시를 그동안 자유시로 분류하고, 또 그렇게 배워왔다. 그리고 3음보의 형태라고 배웠으나 요즘의 감성으로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다 보면 4음보로 분류하는 것이 리듬에 더 잘 맞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한시의 7언 절구 형태와 음보가 같게 된다. 7언의 한시를 2글자씩 일박, 일박으로 세 번 읽고, 마지막 한 글자를 읽고 쉬는 시간을 갖고 낭송한다면, 4음보로 읽을 수 있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의 창법으로는 2글자씩 세 번을 읽고 마지막 글자를 읽고, 토를 붙이면서 자연스럽게 읽어 가면 4음보로 읽게 된다.
음보를 맞추다 보면 하나의 연이 3구로 이루어진 시이지만, 앞 두개의 연을 4음보로 같이 맞춘다면, 1개의 구로 읽을 수 있고, 전체적으로 2개의 구를 가진 연을 4개를 사용한 8구의 시로 읽을 수도 있게 된다.
또 이 경우 각 2, 4, 8구의 뒤의 음보는 ‘우리다’라는 동일한 운을 사용해서 운을 맞추었다. 이 스타일은 7언 절구의 1, 2, 4구의 운을 붙이는 방식과 동일한 방식이다.
김소월의 스승인 김억 시인이 한시에도 상당히 능한 분이었고 한시를 한글로 번역하기도 했으며 구미의 시를 번역도 한 분이라 그의 시 작법의 여러 방식들이 자연스럽게 김소월에게 전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에는 김동환(1901~1958)의 〈산 너머 남촌에는〉을 읽어 보자.
산 너머 南村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南으로 오데
꽃 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긔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릿 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오리
南村서 南風불제 나는 좋데나.
- 〈산 너 머 남 촌에는〉 전 문
파인 김동환은 김소월보다 일 년 전에 태어났으니, 동시대 사람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며 학교 다닐 때부터 일본의 영향을 받아 7. 5조 풍으로 시를 썼던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김동환의 시를 3음보의 자유시로 알고 있고, 또 그렇게 배웠다. 그러나 글자 수가 정확히 7. 5조로 일치되며, 또 각 연은 영미시의 정형시 형태에 준하는 운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3구 4구는 정확히 한시 율시의 대우법을 그대로 채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꽃 피는<-->밀 익는, 사월이면<-->오월이면, 진달래 향기<-->보릿 내음새 등의 對偶(대우)를 사용하여 두보 식의 율시의 정격을 그대로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1구의 살길래(라+이), 2구의 오데(더+이), 3구의 내향긔(그+이), 4구의 내음새(사+이)로 couplet 형태의 4음보 시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아쉽게도 5구와 6구는 운을 맞추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보았을 때, 우리가 과연 파초의 〈산 너머 남촌에는〉을 자유시라고 분류하는 것이 과연 맞는 분류 방식인지 의문이 든다.
영미시의 정형시를 살펴보면,
〈To His Coy Mistress〉
Andrew Marvell(1621~1678)
Had we but world enough and time,
This coyness, lady, were no crime.
We would sit down, and think which way
To walk, and pass our long love’s day.
Thou by the Indian Ganges’ side
Shouldst rubies find; I by the tide
(이하 생략)
이 시는 48행의 긴 시로 각 구의 끝의 음을 운으로 잡았다. 1, 2구 3, 4구 식으로 홀수 구와 짝수 구를 운으로 잡았다.
흔히 이런 스타일로 라임을 잡은 방식은 서사시에 많이 보이는 경향이 있다.
이 시 또한 각 구는 정확히 4보체로 구성되어 있다.
〈그대 수줍은 애인에게〉
우리에게 넉넉한 세계와 시간이 있다면,
이 수줍음은 죄가 되지 않으리, 여인이여.
우리는 앉아서 어떤 길을 걸을까 생각하며
우리의 기나긴 사랑의 날을 걸으리라.
(이하 생략)
영미시에도 정형시가 당연히 있다. 그러나 흔히들 우리는 ‘영미시는 자유시’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유시라는 하나의 착각에 빠져서 번역할 때도 그냥 시의 뜻만 정확히 번역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정형시적인 요소가 많은 시들도 그냥 자유시 형태로 뜻을 정확히 번역한다는 생각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곤 한다.
물론 영미권의 20세기 시들은 압도적으로 자유시들이 많이 발표되고 있다. 그러나 오랜 기간 독자들에게 살아남는 시들은 정형시 계열이 많이 있다. 즉 아직도 우리에게 오래도록 사랑받는 시들은 정형시 계열로 쓴 시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시 번역시 시조나, 정형시적 요소가 많은 시들은 가급적 번역된 시들이 그 언어로도 정형시적 요소를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 시들은 언어의 압축적인 묘미를 중요시 한 시들이 많이 있으나, 영미 시들은 일정한 리듬에 의한 음악적인 요소를 드러낸 시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번역하면서, 다소 군더더기처럼 느껴지더라도 반복 또는 다른 단어를 추가해서 리듬을 줄 수 있도록 번역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정형시를 강조하는 것은 시의 정형성을 위해 음보를 맞추기 위해 불필요한 단어를 줄이기도 하고 또 필요시에는 반복이 되더라도 단어를 추가하기도 해야 한다. 한시의 경우에는 글자 수를 맞추기 위해 반복 되는 글자를 넣거나, 또는 빼는 경우가 많고 운을 맞추기 위해 완곡하게 표현하는 경우도 많다.
정형시가 운을 맞추고 음보를 맞추기 위해 군더더기 같은 느낌이 들더라도 글자를 추가하고, 도치하고, 은유법을 사용하여 글자를 맞추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번역을 할 때도 이런 점을 살려서, 원시에 없더라도 시상을 살릴 수 있는 다른 단어로 치환하거나 도치하거나, 은유법 등을 사용하는 등의 기법을 사용해야 할 경우도 많이 있다.
〈고유명사의 번역에 대한 생각〉
옛 한시들을 보면 해외를 나간 적이 없는 시인들도 長安, 泰山, 江南 등의 고유 명사를 쓴 시들이 많이 있다. 이는 당시 우리의 시인들의 주요 시장이 대륙이었기에 그들이 쉽게 감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고유 명사를 많이 사용했다고 추측된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현실에 대해 쓴 시지만, 당시 불필요하게 쓴 외래 지명들 때문에 다소 불편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많이 있다.
예를 들면 김소월의 〈진달래꽃〉에 등장하는 ‘영변의 약산 진달래 꽃’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The azalea of the Young-Byun’s Yag-Mountain’ 이라고 번역할 것인가?
한국에 대해 좀 아는 영미권 사람들에게는 ‘영변’하면 ‘영변의 핵 시설’을 생각할 텐데, 과연 그런 식으로 번역했을 때 김소월의 시의 맛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한 번 김소월의 〈진달래 꽃〉을 번역해 보았다.
〈The Azalea〉
Because you‘re tired of me,
And if you leave me,
Then no the words, I’ll send you off, neatly.
In the Airlie Gardens, the azaleas,
Pick the armful of the flowe‘s,
And I’ll scatter them on th'road you're going, politely.
At every step and step to depart,
On the road no cart.
Please tread on the flowers which're placed, lightly.
If you leave me,
Because you're weary of me,
Then I’ll not shed the tears, even if wither lonely.
(Jun., 2020, Translated by Kinsley Lee)
원시에서 4연을 낭송할 때 각 연의 1, 2구를 4음보, 3구를 4음보로 읽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번역시는 1, 2구를 합치면 대략 5 feet 정도로 읽히고, 3구는 5feet 정도로 읽힐 수 있도록 번역해 보았다. 그리고 각 연의 1, 2구는 라임을 잡아 보았고, 각 3구는 각 연의 끝으로 ~ly로 맞추어 보려고 했다. 그리고 라임과 feet 수를 맞추려고 다른 단어를 추가하여 보았다.
우리의 옛 한시나 시조에도 태산이란 지명이 많이 등장한다. 태산은 분명히 우리나라에 있지도 않은 산이 등장하는 것은 중국인들에게 한시를 소개할 때 그들을 위한 배려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가 태산을 영역한다면 영미권이나 유럽인들에게 좀 더 친숙한 ‘Mont Blanc’으로 번역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태산가〉
양 사 언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은
사람이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The Song of the Mont Blanc〉
Sah-Eon, Yang
Even the Mont Blanc is high,
But the limit is the sky
If man goes up and up again
Then there's no reason not to gain
The persons
Can climb but not try,
And saying the peak's overly high.
(Translated by Kinsley Lee)
그리고 시조가 우리나라의 정형시이기에 번역도 정형적으로 읽힐 수 있도록 1구와 7구, 2구와 6구 3구와 4구의 라임을 맞추어 보았다.(시조의 번역에 대해서는 필자의 “시조의 세계화“에 영역에 대해 제안한 내용 참조)
또 우리 옛 시를 영역하면서 姜太公이란 인물을 영역할 때 어떻게 번역을 할 것인가? 나는 예전에 Izaak Walton이라고 번역을 한 적이 있었다. 강태공이란 단어에서 동양인들은 낚시에서 ‘유유자적’, ‘기다림’ 등의 감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나, 아무래도 영미권 사람들에게는 수동적이고 진부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영국의 낚시 전문가이며 정치인이였던 Izaak Walton이란 인물의 이름을 쓰는 것도 좀 더 실감이 나게하는 한 방편이 도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래의 한시 번역 예를 들어 본다.
〈春江上年喜悦 춘강상년희열〉
漢水邊居二十年 春來暗霧夜燈鮮 한수변거이십년 춘래암무야등선
不知呂尙情魚放 何憶東峰意世捐 부지려상정어방 하억동봉의세연
汝島高堂汚臭滿 龍山陋屋爽風傳 여도고당오취만 용산루옥상풍전
昔時大夢今衰小 故友維招買酒宣 석시대몽금쇠소 고우유초매주선
(七律壬寅五月桑谷)
〈봄강에서 나이 드는 즐거움〉
한강 가에 산지 이 십년
봄이 오니 어두운 안개 속에 밤 등만 아름다운데,
강태공이 물고기를 놓아준 정을 알지 못하는 데
김시습이 세상을 버린 뜻을 어찌 기억하랴?
여의도의 높은 집에는 오염된 냄새가 가득하지만
용산의 누추한 집에는 상쾌한 바람이 전해오네.
옛날의 큰 꿈은 지금 줄어서 작아졌지만
옛 친구만 오로지 날 불러서 술을 사는 구나.
(2022. 5. 상곡)
〈The Joy with Aging at the Spring River〉
Near the Han-River, I’ve been for twenty years,
In spring dark, the fishing floats’re bright on the weirs.
Not knowing why the Walton’s rushing to the fishing, calm douce.
Then how can we remember the reason Diogenes'd been a recluse.
The big and Green building in Yeouido where it stinks, but my lousy
Maisonette in Yong-San, always the river winds blow clearly
Now, it become diminished my ambition in young days,
Often, the old friends invite me to the saloon, these days,
(Apr. 17th, 2024, Kinsley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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霧-안개 무, 捐-버릴 연, 陋-더러울 루, 누, 宣-베풀 선, 呂尙-태공망 여상, 東峰-김시습의 호, 매월당, 동봉, Walton, Izaak Walton-낚시에 관한 수필(1653)을 쓴 영국 유명 낚시꾼, 영국의 강태공, Diogenes(?~323 B.C.)-그리스의 철학자, 평생을 은거했던 철학자, douce-[주로 스코]조용한, 침착한, 착실한[영·방언], 붙임성 있는, recluse-은둔자, weir-둑(강물의 흐름을 돌리기 위해 낮게 막은 것)
한시 함련의 입구(3구)와 출구(4구)에 대우를 맞추기 위해 강태공과 김시습이란 인명을 등장시켜서 대비해 보았다. 그러나 문제는 강태공과 김시습이란 인물을 영미권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알 수 있는 가 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영국의 정치인 중에 낚시광으로 소문났고, 낚시에 관한 서적도 출간한 적이 있는 인물, 그리고 동몽 김시습처럼 평생 은거하며 살았던 그리스 철학자의 이름을 이용하여 번역해 보았다. Kang Tae-Gong, Kim Si-seub 등으로 그들에게 생소한 이름으로 번역하기 보다는 좀 더 그들에게 친숙한 이름을 차용하는 것이 좀 더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번역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오역도 번역이다〉
노벨상 수상작가 ‘한강’ 작품, 영역에 대해 오역문제가 대두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오역에 관계없이 그 번역된 소설로 번역가 상을 받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한강의 다른 작품이 번역되기 시작하고, 결과적으로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오히려 오역이 없었더라면 상을 받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역을 영미권 사람들에게 더 잘 어필할 수 있도록 오역이 되었더라면, 그 자체로 원본보다도 더 좋은 번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젊었을 때 TV에서 본 영화, 대략 30년 전 영화로 생각된다. 브래드 피트가 젊었을 때의 영화이니, 〈The Legends of The Fall〉이란 제목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번역된 제목은 〈가을의 전설〉이였다. 이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은 한 가정이 전쟁의 와중에 몰락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인데, 주위 배경이 아주 서정적이고 목가적이었다. 그러나 ‘가을의 전설’은 분명히 오역이었다. ‘몰락의 전설’ 또는 ‘몰락의 이야기’ 등이 좀 더 정확한 번역이 될 것이다.
그러나 뜻을 정확히 표현한 제목보다는 ‘가을의 전설’이 성공한 번역으로 느껴진다.
영화의 서정성과, 한 가정이 가을로, 하나의 떨어지는 나뭇잎 등이 연상되면서, 좀 더 사람들에게 다가 올 수 있는 제목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래 시는 6.25 때 전사한 캐나다 왕립연대 병사가 쓴 시이다. 그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전사하기 하루 전에 남겨 놓은 시로 병사의 절절한 마음이 들어 있는 시이다.
〈한국〉
한국의 산하에는 붉은 선혈이 서려있다
용기있는 이들의 붉은 희생
캐나다 국기 아래
함께한 25사단 전우들
쓰러진 적군을 넘어서서
한국의 평화를 위해 진격할 때
그들은 조국의 명령을 기억한다
‘이 땅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굳은 표정 단호한 얼굴로 서서
그들은 느낀다
다시는 되찾을 수 없을지도 모를
한국 영토 방위를 책임지고 있다는 것을
두고 온 아내와 아이를 생각하며
두고 온 사랑하는 연인을 생각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면서
경건한 기도를 읊조린다
한국의 산하에는 선혈이 어려있다
이는 자유를 향한 숭고한 희생의 선물이며
그들의 이름이 영원히 영광 속에서 빛날지니,
그들의 영혼은 하늘에서 안식을 찾을지어다.
(한국 땅에 서서 1951년 5월 29일, 패트릭 윌리엄 오코너)
이 시를 번역한 역자譯者를 아쉽게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원시와 비교하다 보면 여기 저기 오역이 눈에 띈다. 그래서 필자가 좀 더 원시에 맞도록 다시 번역 해 보았다.
〈한국〉
한국의 산 위에는 피가 어려있네
용기 있는 이들과 진실한 이의 피
그 곳에는 25여단의
적, 청, 백의 깃발아래 함께 싸웠네
적군이 누워있는 그 언덕을 향해
한국의 들판을 넘어 행진하듯 가네
그들은 여단의 명령을 기억했네
이 산들을 오늘 점령해야 하네
웃지 않는 굳은 얼굴을 앞으로 하고
그들은 알고 있네. 산허리를 밀어 붙일 때
몇 몇은 결코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몇 몇은 그들의 처와 어머니를 생각하며
몇 몇은 그들의 연인, 그들에게 갈 것을 생각하며
몇 몇은 걸으며 또 비틀 거리며
그들은 경건하게 기도를 읊조린다
한국의 언덕 위에는 피가 어려있네
그것은 그들이 사랑하는 자유의 댓가이네
그들의 이름은 영광 속에 영원히 살아남으리
그들의 영혼은 저 위 천국에서 안식하리.
(한국 땅에 서서 1951년 5월 29일 패트릭 윌리엄 오코너)
막상 번역을 해 놓고 보니, 병사가 처자식을 본국에 남겨 놓고 전사하기 하루 전에 쓴 시로 작자의 절절한 감정이 많이 떨어진다.
차라리 오역이라고 생각한 시에서, 더 작자의 마음, 전쟁터에서 전사하기 하루 전에 썼던 유언과도 같은 시를 더 잘 표현하고 있다.
오히려 번역자가 고의적으로 오역을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역을 통해서 번역을 생생하게 더욱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가 번역한 시와 작자 미상의 번역된 시를 약간 첨삭하여 AI 작곡 프로그램에 넣어보니 오역을 했다고 생각되는 시가 훨씬 더 비장한 느낌이 드는 것 같다.
오역도 전체적인 시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오역은 새로운 창조라는 생각이 든다.
아래는 참조로 원시를 첨부하였다.
〈Korea〉
By Patrick William O’Connor
There in blood on the hills of Korea
This the blood of the brave and true.
Where the 25th Brigade battled together
Under the banner of the Red,
White and Blue.
As they marched over the fields of Korea
To the hill where the enemy lay.
They remember'd the Brigadier's orders:
"These hills must be taken today."
Forward faces unsmiling and stern,
They Knew as they charged the hillside
That some would never return.
Some thought of their wives and mothers,
Some thought of their sweethearts to fair
And some as they plodded and stumbled,
Were reverently whispering a prayer.
There is blood on the hills of Korea,
It is the gift of freedom they love,
May their names live in glory forever,
And their souls rest in Heaven above.
(In the field, Korea May 29, 1951,
The Royal Canadian Regiment
Killed in Action May 30, 1951)
문학적인 글, 시 등은 원시의 감상을 잘 전달 할 수 있다면, 약간의 오역 등은 오히려 번역에 있어서 약이 될 수도 있다.
계약서, 협정서, 조약 등은 후에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정확한 번역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학적 감성이 들어간 글들, 특히 시는 원작자의 감성이 실린 번역을 해야 할 것이다. 그 번역을 위해서는 적절한 오역도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론〉
번역은 원시를 다른 언어로 변환하는 단순한 과정이 아니다.
시 분야의 번역은 특히 그 원시에 흐르는 감성을 전달해야 한다.
문장을 정확히 번역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원시 전체에 흐르는 시인의 감성을 외국어로 옮겼을 때 그 감성을 살아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하여야 번역한 시도 번역한 언어로 경쟁력을 갖추어야 한다.
지금 세계적으로 일 년이면 수 천만 수의 시들이 발표되고 있다. 그리고 새로 등장하는 시인도 수십 만 명이 넘는다. 한국의 번역된 시들이 매년 발표되는 새로 등장하는 많은 시 속에서 경쟁력이 있는 시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시가 세계적으로 소개되어야 하고, 또 그 시들을 통해서 해외의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 시에 관심이 있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외국인들에게도 ‘잘 읽힐 수 있는 시로 번역’ 하는 것이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점이라고 생각된다.
번역된 시가 잘 읽힐 수 있는 시로 번역하였을 때, 우리 언어의 아름다움, 우리 시의 아름다움을 그들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이 말의 참뜻은, 우리 시의 아름다움을 전달하여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서 번역을 하는 것보다는 번역된 시가 번역된 언어의 시 중 제대로 읽힐 수 있는 시로 번역되었는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야 번역된 시를 통해 우리 시에 대한 관심을 높일 수 있게될 것이기에, 장기적으로 그들이 ‘한국어로 씌어진 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를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