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대 철종실록]
1. 농부에서 제왕이 된 강화도령 원범
철종 시대는 순조 대부터 시작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절정을 이루던 때였으며, 세도
정치로 인한 탐관오리들의 전횡으로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해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안동 김씨가 계속 실권을 잡게 되는 배경에는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는 손자인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조대비의 척족인 풍양 조씨 일파가
왕위를 세울 것을 염려하여 재빨리 손을 썼다. 그도 그럴 것이 헌종의 6촌 이내에 드는 왕족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7촌 이상의 왕족은 몇 명 있었다.
후대의 왕은 본래 항렬로 따져 동생이나 조카벌이 되는 자로 왕통을 잇게 하는 것이 원칙이다.
왜냐하면 종묘에서 선왕에게 제사를 올릴 때 항렬이 높은 이가 항렬이 낮은 이에게 제사를
올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법도 때문이다. 그러나 안동 김씨 척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헌종의 7촌 아저씨벌이 되는 강화도령 원범이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했다. 이렇듯 안동 김씨 척족들은 기왕에 잡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왕가의
법도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전횡을 저지른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이자 정조의 아우 은언군의 손자이다.
사도세자가 죽고 정조가 세손이 되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세력들이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 자기들의 위치가 위험할 것이 염려되어 새 왕자를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이 일이 발각되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막내아들 은전군은 자결하고 은언군과 은신군은
제주도에 유배되나, 은신군은 제주도에서 병사하고 은언군은 강화도로 유배지를 옮긴다.
사도세자와 숙빈 임씨 사이에서 태어난 은언군 인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다. 큰아들인 상계군
담은 1779년 정조 3년 홍국영의 음모로 모반죄로 몰려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자살하였다. 한편
은언군의 아내 송씨와 큰며느리 신씨는 1801년 순조 1년에 천주교 신자로 사사되면서 은언군
인도 사사되었다.
그러던 중 1844년 헌종 10년에 민진용이 반역을 도모하였다. 순조 말기부터 김유근과 김홍근에
의해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이루어지다가 헌종 10년에 이들이 물러나자 권력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틈을 이용하여 반역을 꾀한 민진용은 우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의술로
은언군의 아들 이광과 은언군의 손자 원경의 신임을 받고 있던 이원덕을 포섭하였다.
그들은 은언군의 손자이자 이광의 아들인 원경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모의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모두 능지처참을 당하고 마는데, 이것을 '민진용의 옥'이라 한다.
여기에 연루되어 전계대원군 이광의 첫째아들 원경이 사사된다. 여기서 둘째아들 경응과
셋째아들 원범만이 살아남는데 이들은 또다시 강화도로 유배된다. 이리하여 천애고아가 된 두
사람은 강화도에서 나무를 하고 농사를 짓는 농사꾼으로 살던 중 5년여가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원범에게 왕통을 이으라는 교지가 내려진다.
그가 바로 후에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는 철종이다. 이때 그의 나이
19세였으며 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부였다.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별안간 명을
받은 원범은 봉영 의식을 행한 뒤 6월 8일 덕완군에 봉해지고 이튿날인 6월 9일 창덕궁
희정단에서 관례를 행한 뒤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리고 학문을 연마한 바 없다는
이유로 1851년까지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철종이 21세 되던 1851년 9월에는
대왕대비의 근친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게 되었다. 그 뒤 김문근이 영은부원군이 되어 국사를
돕게 되니 순조 대부터 시작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계속되는 셈이었다. 여기서 의문이 되는
것은 둘째를 제치고 셋째인 원범이 왕위에 오르게 된 내력이다. 남아 있는 기록이 없어서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으나 둘째 경응은 아마도 강화도에서 병사하지 않았나 싶다.
2. 세도 정권하에서의 철종의 친정
(1831-1863, 재위 기간 1849년 6월-1863년 12월, 14년 6개월)
세도 정권의 막강한 힘과 독단 앞에 선 철종은 자신의 뜻을 마음대로 펼 수 없는 불우한
왕이었다. 빈민 구제책이나 이재민 구휼에 남다른 열정을 보이기도 하지만, 짧은 학문과 얕은
경륜에 대한 철종 자신의 자격지심과 순조 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막강한 세도 정권의 바람을
막아내고 삼정의 문란을 혁파할 개혁의 방도를 찾지 못한 채 임술민란 등 전국적인 위기 상황을
맞게 된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이며 전계대원군 광과 용성부대부인 염씨 사이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변, 초명은 원범, 자는 도승, 호는 대용재였다.
철종은 즉위 3년 후인 1852년부터 친정을 하게 되지만 정치의 실권은 여전히 안동 김씨 일족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철종은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도
민생을 돌보는 데 남다른 애정과 성의를 보였으며, 철종 말기에 일어난 민란의 수습과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친정을 시작한 다음 해인 1853년 봄에는 관서 지방의 기근 대책으로 선혜청전 5만냥과
사역원삼포세 6만 냥을 민간에 대여해주도록 하였고, 또 그 해 여름에 가뭄이 심하자 재물과
곡식이 없어 구휼하지 못하는 실정을 안타까이 여겨 재용의 절약과 탐관오리의 징벌을
엄명하기도 하였다. 1856년 봄에는 화재를 입은 1천여 호의 민간에 은전과 약재를 내려 구휼하게
하였으며, 함흥의 화재민에게도 3천 냥을 지급하였다. 그 해 7월에는 영남의 수재 지역에
내탕금 2천 냥, 단목 2천 근, 호초 200근을 내려주어 구제하게 하는 등 민빈 구제에 성의를
다했다.
그러나 여전히 정치의 실권이 안동 김씨 일파에 있었고 그들의 전횡으로 탐관오리가
득실거리고 삼정(전정, 군정, 환곡)이 문란해져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1862년(철종13년)에 드디어 진주에서 탐관오리의 학정에 반발하여 민란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철종은 삼정이정청이라는 특별 기구를 설치하여
민란의 원인이 된 삼정구폐를 위한 정책을 시행하게 하는 한편, 모든 관리에게 그 방책을
강구하여 올리게 하는 등 민란 수습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우선 세도 정치의 뿌리를 뽑아야 하는데 안동 김씨의
강고한 세도 앞에 그 뜻을 펴지 못한다.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이 절정에 달해 있던 철종 대는
그들에 도전할 만한 다른 정치 세력의 성장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었다.
안동 김씨 일문은 왕족 중에서도 나중에 왕위에 올라 자신들의 권력에 위협이 될 만한 자가
있으면 미리 처단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대원군의 형 이하전의 죽음이 바로 그런 예라고 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당시 철종은 이미 세도가의 첩자 등이 온 궁중에 퍼져 있었을 것으로
믿었고, 자칫하면 임금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철종은 이렇듯 계속되는 안동 김씨 일파의 전횡에 마땅히 대항할 방법이 없자, 자연히 국사를
등한히 하고 술과 궁녀를 가까이 했다. 술과 여색에 빠지게 되자 본래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었던 철종은 급속도로 쇠약해져서 1863년 12월 8일 재위 14년 만에 33세를 일기로 죽고
말았다. 혈육으로는 숙의 범씨 소생의 영혜옹주가 하나 있어 금릉위 박영효에게 출가시켰다.
철종은 죽은 뒤 경기도 고양의 희릉 오른편에 예장되었으며 능호를 예능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