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 소요산(逍遙山) 단풍 산행
오늘은 날씨가 너무도 청명 하고 상쾌 하여 카메라 하나 메고 동두천에 있는 소요산 산행을 한다.
소요산 (逍遙山)은 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에 위치 한 해발 559 m 산으로서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석영반암의 대암맥이 산능선에 노출되어 하백운대(440m),중백운대(510m),상백운대(559m), 나한대
(571m), 의상대(587m), 공주봉(526m)의 여섯 봉우리가 병풍처럼 성벽을 이루고 있는듯하여, 경기의
소금강(小金剛)이라고도 한다. 주봉(主峰)은 의상대(義湘臺/587m)이다.
소요산(逍瑤山)의 이름은 신라 말기의 고승 원효대사(617~686)가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기 위해 큰 배를 구하여 당항성(唐項城)을 통해 바다를 건너가려고 계획하였다.
*당항성(唐項城)은 지금의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구봉산(九峰山) 위에 있는 삼국시대의 석축 산성 으로
당항성(唐項城) 또는 당성(唐城)이라 부르며 이곳은 신라가 황해를 통해 중국과 교역을 하였던 중요한
출입구 구실을 한 성 이다.
당항성 으로 가던 도중에 갑자기 험한 비를 만나게 되었다.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겨우 토굴을
찾아 길옆의 토감(土龕) 사이에 몸을 피해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굴속에서 잠을자다 몹시 갈증이
나 마침 곁에있던 바가지에 담긴 물을 달게 마셨다한다.다음날 잠결에 달게 마신 그 물이 해골에 담겨
있던 물임을 발견 하곤 원효 대사는 토하고 말았다. 그리고 크게 깨우친 바 있어 원효는 말했다.
“마음이 일어나면 온갖 법이 발생하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굴과 무덤이 다르지 않구나.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뿐이고, 모든 현상이 인식[識]일 뿐이구나. 마음 밖에 아무 것도 없는데, 따로 무엇을 구
하겠는가? (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龕墳不二 三界唯心 萬法唯識 心外無法 胡用別求) 아, 그러니
좋아 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나에게 달려있는 것이지, 물(水)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로구나.”
“마음을 일으키면 가지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을 멸하면 삶과 죽음이 둘 아닌 것을.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한다.”원효는 그 길로 당나라 유학을
포기한 채 신라로 되돌아와 『화엄경(華嚴經)』을 주석하였다.그후 홀로 수행을 하다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둘째딸인 요석공주와의 사이에 설총을 낳고 파계승이 되어 대중 불교 전파에 힘 썼다.
그후 645년 요석 공주와 사랑에 빠졌던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인연을 끊고 소요산에 개산(開山) 하여
자재암(自在庵)을 세운 이후,974년(고려 광종 25) 서화담 양달래와 매월당 김시습이 자주 소요하였다
하여 소요산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중대암(中臺庵),소운암(小雲庵)소요암(逍遙岩),영원사(靈源寺)
등의 사찰과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소요산(逍遙山)은 기암 괴석이 절묘하게 봉우리를 이루어 놓아 만물상을 연상케 하고 봄에는 진달래
와 철쭉이 장관을 이루며, 여름의 녹음과 폭포, 계곡, 가을 단풍 또한 유별 날 뿐만 아니라 원효대사와
요석 공주의 애뜻한 사랑등 수많은 전설이 많은 명승지를 품고 있고. 동두천역에서 약 4㎞ ,서울에서
북쪽으로 44km,수도권에 있어 거리도 가깝고 교통편도 좋다. 입구에는 넓은 주차장과 눈썰매장, 수영장
등이 있어 수도권 지역의 일일관광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1981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지하철 1호선 소요산역에서 그립던 학교 친구를 만나 소요산 산행 시작하다
우리 일행은 10:00 소요산 역 에서 만나 큰길을 건너 우츨 으로로 조금 이동 하니 소요산
가는길 입구 이다.먹거리 골목을 지나 주차장 입구에 들어서니 가는 날이 장날 이라고
국화 꽃 축제가 한참 이다.축제장을 이리 저리 돌며 꽃 구경을 하고 인도 따라 오른다.
소요산 관리 사무소
요석 공주 별궁지
매표소
건강 오행로를 지나며 주차장 관리사무소를 지나 요석공주 별궁지에 닿는다.
이곳이 조선지지(朝鮮地誌)에 나오는 요석궁(瑤石宮)의 옛터가 아닌가 싶다. 요석궁은
원효가 요석공주(瑤石公主)와 관계를 가졌던 곳이며, 나중에 원효가 이곳에서 설총(薛聰)을
길렀다고 한다.요석공주가 설총과 함께 지내며 원효대가 에게 삼배를 올렸단다.단풍길 따라
매표소를 지나 조금더 오르니 ‘경기 소금강’ 소요산 자재암(逍遼山 自在庵) 이라 쓰인
현판이 걸린 일주문에 닿는다.
100m 지하수 샘물
원효 굴
원효 폭포
속리교
일주문을 들어서자 100m밑에서 솟아 오르는 지하수 샘이 있고 한참 들어가니 기암절벽 사이에
원효폭포가 눈에 든다. 이곳은 원효 대사가 원효대에서 고행 수도중 자주 내려와 휴식을 취 하던
곳이라 하여 원효 폭포라 한다.
그 옆으로 원효스님이 수행했다는 원효굴로 나한전 석굴암.이라고 불리는 자그마한 굴이 있다.
그 아래 속리교(俗離橋)가 있고 속리교를 건너면 두 갈래 길이 나타난다.오른쪽 계곡길로 오르면
의상대에 이르고, 왼쪽은 108계단 길로 계속 오르면 거대한 바위 절벽 위에 원효대가 있다.
108 계단
해탈문
원효대
108계단을 오르고 오른다 108 계단 왼쪽 으로 해탈문을 지나면니 원효대(元曉臺)가 솟아 있다.
원효가 도를 닦아도 깨우치지 못하자 원효대에 올라가 수십길 아래로 뛰어내리려는 순간, 문득
득도하였다는 높은 대이다. 원효대(元曉臺)에 오르니 조망이 터지고 내려 보는 경치가 비경 이다
굳게 문이 닿인 팔각 지붕 백운암/자재암의 선방(별원)
자재암(自在庵)
청량폭포
나한전
원효대를 내려서니 세심교가 나오고, 이곳에서 백운암 돌담 옆을 지나 계속 숲길을 오르면 이내
자재암에 이른다.자재암(自在庵)은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末寺)
로써,신라 선덕여왕 14년(645) 원효대사가 창건한 유서깊은 사찰로서 수행 도중 관세음보살과
친견하고 자재무애의 수행을 쌓았다고 하는 데서 그 이름이 자재암(自在庵)이라 유래되었다.
자재암(自在庵)의 유래를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효는 AD667년 문무왕 7년경에 태종 무열왕(김춘추)의
두째 딸 요석공주와 만났다.요석공주(瑤石公主)는 첫 남편을 백제전투에서 잃고 홀로 되었다. 그 후로
불심이 깊었던 바, 공주는 화랑시절 백제전투에도 참가했던 원효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얼마후 요석공주(瑤石公主)는 원효대사와 인연을 맺어 설총(薛聰) 낳았다 한다.
원효 성사께서 요석공주와의 인연이 있은 후 이곳 소요산 으로 들어 와 오로지 수행 일념으로 인적이
두절된 심산 유곡을 찾아 산자 수명한 아름다운 이곳에 이르러 초막을 짓고 용맹정진(勇猛精進) 하여
높은 수행을 쌓았다
수도 하던 어느날 비가 억수로 퍼붓는 여름낭 밤 원효가 암자 에서 혼자 수도 할때 심야에 약초를 캐다가
길을 잃은 안여자로 화현(化現)한 관세음 보살(觀世音菩)께서 하루밤 묵고 갈것을 청 했고 중생 구제의
구실을 붙혀 수도 일념의 심지(心地)를 시험 하였으니 원효대사 이르기를 "心生則種種法生"이요 "
心滅則種種法滅" 이라 마음이 생한즉 옳고 그르고 크고 작고 깨끝하고 더럽고 있고 없는 가지 가지
모든법이 생기는 것이요 마음이 멸한즉 상대적 시비의 가지 가지 법이 없어지는 것이니 나 원효에게는
자재 무애의 참된 수행의 힘이 있노라 하는 법문에 그 여인은 미소를 지었다.그때 그 여인은 더 이상
여자가 아니라 금빛 찬란한 후광(後光)을 띤 관세음 보살이 되어 폭포 위로 살아 졌다.
원효대사는 관세음보살의 화현임을 알았고 그 후 지극한 정진으로 더욱 깊은 수행을 쌓았으며 후학을
교제할 생각으로 정사(精舍)를 지었다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고 자재무애의 수행을 쌓았다는 뜻에서
이곳에 정사(精舍)를 짓고 이름하여 자재암(自在庵)이라 했다고 한다
자재암 옆에는 나한전이란 암굴이 있는데 .굴 바로 우측 에는 아주 맛있는 물이 솟아나는 원효샘물이
최고의 차맛을 내기로 유명하여 이곳은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의 담론과 산책을 유도한 우리나라
차문화의 산실이다. 그 옆에는 높이 20여 미터의 청량폭포(淸凉瀑布)가 있다.
하백운대와 선녀탕 갈림 삼거리
선녀탕 갈림 삼거리(선녀탕 300m)
선녀탕 /폭포는 어린애 오줌줄기 같고 소(沼)는 단풍에 샇인 독탕 이다
자재암을 뒤로하고 급경사 나무사다리 계단 길로 오른다.조금 오르니 하백운대와 선녀탕
갈림 삼거리 이다.우리 일행은 선녀탕 방향 으로 산행을 이어 간다.
등로는 이내 급경사 암벽 계곡으로 향 한다.암벽 타고 내리니 계곡과 만난다. 계곡 따라
너덜길 오르고 오르니 선녀탕 입구 삼거리 이다.우리 일행은 선녀탕 방향으로 산해을
이어간다.어렵게 찾아 간곳 선녀탕 이다.폭포는 어린애 오줌 줄기 같고 선녀탕(沼)도
독탕 처럼 조그만 하고 단풍이 소(沼)에 차 있어 사진 에도 표시가 잘 안난다.
우리 일행은 오른길 뒤 돌아 선녀탕 삼거리로 이동 한다
우리 일행은 선녀탕 삼거리 에서 잠시 휴식후 칼바위 방향으로 산행을 이어 간다.
등로는 계곡 길로 돌길 따라 만산 홍엽(滿山紅葉) 단풍 구경 으로 어려움을 달래 본다.
한참을 오르니 칼바위 와 나한대 갈림 길 이다.우리 일행은 나한대 방향 으로 산행을
이어간다.삼거리 에서 나한대 까지는 아직도 600m 남았다.
한참을 오르니 능선길 칼바위 와 나한대 갈림 삼거리 이다.이곳에서 하백운대,중백운대,
상백운대, 칼바위 코스로 산행 하는 산객들을 만난다.등로는 더욱 활기 차다.
등로는 정비된 나무 계단길로 변한다.돌길 밟아 오른길 보다는 훨씬 편 하다.급경사
계단길 따라 오르고 또 오르니 나한대 정상 이다.
나한대는 소요산의 두번째로 높은 봉우리(571m)로 나한이란 의미는 불교를 수행하여 해탈의
경지에 이른 수행자를 이르는 명칭으로 신라시대 원효에 창건되고 고려초에 나옹 등 여러
고승들이 수행하였던 장소이고 특히 조선 태조가 이절에 머물며 절의 면모를 일신한 후
자재암이 크게 번성하자 절을 둘러싸고 잇는 주위 봉우리들을 불교와 관련된 명칭으로 부르게
되고 이곳을 나한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나한대에 오르니 포천시가지가 한눈에 들고
의상대가 코 앞이다.조망도 너무도 좋다.
나한대를 지나 5분 거리에 철다리를 지나 10분 더 올라가면 정상인 의상대에 닿는다.
의상대(義湘臺 587m)는 소요산 정상봉이다. 정상봉답게 사방으로 전망이 훌륭하다. 정상은
바위로 둘러싸여 있고 빙 둘러 철제 난간을 설치했다.
의상대의 이름 유래는 조선 태조가 소요산에 머물며 자재암을 크게 일으킨 후 자재암을 둘러싼
소요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불교와 관련된 이름으로 불렸는데 자재암을 창건한 원효의 수행
동반자인 의상을 기려 소요산의 최고봉을 의상대라 부르게 되었다 고 한다
의상대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단풍 조망이 일품이다. 서쪽으로는 공주봉이 멀리의 마차산,
감악산과 함께 시야에 와닿는다. 북쪽 아래로는 소요산역에서 자재암으로 들어오는 계곡이
눈에 든다.
의상대를 돌아나와 전망 좋은 곳에 자리를 하고 하산주겸 간식을 한다.
대전 까지 가는 친구가 있어 산행길을 재촉 한다.우리 일행은 샘터 갈림길(0.75Km)
에서 구절터(2.2Km)로 하산 하기로 하고 산행을 이어 간다.
공주봉과 샘터 갈림길 삼거리 에서 샘터 방향 으로 산행을 이어 간다.등로는 급경사 계고
내림 길 이다.계곡길 치고는 순한 흙길 이다.오색 찬란 단풍 길이다.내리고 내리니 공주봉
에서 하산 하는 등로와 만난다.
구절터에 도착 한다.구절터는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고귀한 사랑의 흔적이 묻어 나는 곳이다
원효대사의 부인 요석공주는 신라 제29대 왕인 무열왕의 딸이다. 요석공주는 일찍이 홀로 된
몸으로 요석궁에 머물렀다. 이때 원효라는 스님이 노래를 부르며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그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주겠는가?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 원효의
노래는 무열왕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노래를 들은 무열왕은 ‘이 스님이 필경 귀부인을
얻어서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라며 요석공주와 짝을 이루게 하였다.
요석공주와 원효대사 사이에서 설총이 태어났는데, 이후 원효는 파계승이 되어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던 중 소요산 원효대에 정착하여 수행에 전념하였다. 요석공주는 원효를 사모하는
마음에 아들 설총을 데리고 와 소요산 아래에 조그만 별궁을 짓고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원효가
수도하는 원효대를 향해 예배를 올렸다고 한다. 구절터는 이런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고귀한
사랑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구절터를 지나 속리교 원효굴 방향으로 하산 포장 도로 따라 내리다 맛거리 음식점에
들려 하산주겸 식사를 하고 귀가길을 재촉 한다.
옛날 잔치국수로 점심을 먹다. 65세이상은 1,000원 활인해준다나~~~
2017.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