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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풍,다,우,주(風,茶,雨,酒).. 술(酒) 그리고 인생(人生).... 원문보기 글쓴이: 훈풍
유구역루(維鳩驛樓)와 간신거국도(諫臣去國圖)
공주시의 북쪽에 위치하고 아산시와 접해 있는 유구읍은 인구도 고작 1만 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읍이다.
(2010년 12월말 현재 9,176명)
그러나 이 작은 소읍 유구는 정감록비결에 나오는 전쟁이 나면 그 난을 피할수 있는 전국 10곳의 피난지중 ("維麻之間 萬人可活之地") 한곳이기도 하고 과거 왕조시절에는 조정의 주요 문서를 전달하는 전령들이 말을 갈아 탈수 있는 역말이 었고, 많은 사람들이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큼지막한 역루가 있었으며 서해안의 해산물과 내륙의 산물이 교류되는 장터이기도 했다.
또한 경기 이북지역에서 전라도로 가는 길목이자 충청도에서 각지로 길을 나설 때 오갈 수 있는 교통의 요지로서 전국적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역이 생기기 이전에도 신라 선덕여왕 9년(640) 자장율사에 의해 마곡사가 창건된 후 신도들이 삼대같이 빽빽이 들어섰다고 해서 절 이름을 마곡사(麻谷寺)라 지을 만큼 이 지역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었다.
고려 의종 때 왕에게 충간하다가 노여움을 받고 고향으로 내려가던 충숙공(忠肅公) 문극겸(文克謙)이 이곳 역루에 시 한수를 지어 걸어 놓았는데, 10여년이 지난 후 역관을 수리하던 한 화공이 이 시의 내용과 글쓴이의 처지를 역루 서쪽 벽에 벽화로 그렸다.
50여년이 지난 후 그림을 알아 본 송광사의 혜심스님이 그림 옆에 "간신거국도(諫臣去國圖)"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를 기리는 시 한수를 지어 걸어 놓게 된다. 이 그림과 글이 유구역을 지나가던 관속이나 많은 과객들의 입을 통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어 고려시대 뿐 아니라 조선조의 시인 묵객들까지도 이곳을 들려 시와 그림을 감상하고 감상 시를 지어 걸어 놓아 더욱더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해서 이런 "유구역루"의 역사와 그곳에 그려져 있던 "간신거국도"에 대해 다시 한 번 살펴봄도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유구역루(維鳩驛樓)
유구역이 정확히 언제부터 세워지고 운영되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유구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취락을 이루었던 교통의 중심지로 수많은 사람들과 문물이 오고 가는 지역이었고, 백제 시대에는 군마를 키우는 지역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연히 이 지역에 객사가 자리잡게 되었지 않나 생각한다.
고려시대의 기록에 충숙공 문극겸이 의종 17년인 1163년에 유구 역루에 시 한수를 지어 걸었다는 기록과 고려시대 문신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에 1173년에 역루를 보수했다는 기록으로 보아서 천여 년 전부터 역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의 유구역에 대한 기록은,
1484년 완성된 "동국여지승람" 제 17권 "공주목 역원조"에 유구역이 소개 되었는데 유구역은 신풍(新豊)서쪽 8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조연간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공주목 읍지" 역원조에는 유구역은 부(府) 서쪽 50리 되는 신상면(新上面)에 있으며 기마(驥馬) 5필, 복마(卜馬)5필, 노(奴) 29명, 비(婢) 17명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23년 간행된 공산지(公山誌) 역원조에는 유구역은 주(州)서쪽 7리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없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말이 10여필에 남녀종이 46명이 있었다는 정조시대의 기록을 본다면 이 역에 묵어가는 과객의 숫자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46명의 시중꾼이 필요했다면 적어도 이 숫자 이상의 과객이 늘 있지 않았나 추정할 수 있으며, 이로써 유구역이 상당히 큰 역사였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중에 유구 역루가 불타 없어졌다면 정조 때의 기록은 역루가 없어졌음에도 유구역이 상당한 규모로 존재 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고, 이 기록으로 추정컨대 임진왜란전의 유구역은 훨씬 더 규모가 컸었지 않나 추측된다.
"樓"라 함은 사방이 탁 트여 있는 건축물로 서울의 "경희루"와 남원의 "광한루" 등을 대표적인 누각으로 꼽을 수 있고, 이런 누(樓) 비슷한 건물로 손님을 재우던 옛 시설로는 경남 통영의 "세병관"을 들 수 있다.
세병관은 이런 류의 목조 건물로는 우리나라 최대 건축물인데 바닥은 마루로 되어 있는데 아마 많은 손님들을 주막 같이 작은 방들을 만들어 숙식케 함이 어려웠음으로 일행 모두가 마루방에 함께 기거토록 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유구역루도 보한집에 벽화가 침실 서쪽 벽에 그려져 있다고 한 점을 비추어 보면 통영의 세병관과 같은 형태의 큼지막한 건물이 아니었나 추정된다.
이렇듯 번창했던 유구역도 역루는 임진왜란에 불에 타 없어지고, 그나마 남아 있던 역(驛)도 역제도가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없어진 듯하다.
더욱 아쉬운 것은 그 유구 역루가 어디에 소재하고 있었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참으로 애석한 일로 후학들의 이에 대한 자료 수집과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간신거국도(諫臣去國圖)"
간신거국도(諫臣去國圖)는 유구 역루 서쪽 벽에 그려져 있던 벽화 이름이다.
그림 내용은 흰 옷을 입은 한 선비가 삿갓을 쓰고 말을 타고서 고삐를 늘어트린 채 산길을 따라 천천히 가는 처연한 모습과 그 뒤를 따르는 종들이 넘어질듯이 힘없이 손을 잡고 따라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였다고 한다.
이 그림은 고려시대 의종과 명종 때에 충직한 신하로서 널리 알려져 있던 재상 충숙공 문극겸(1122 ~1189)과 관련된 그림이라고 한다.
문극겸이 좌정언(左正言)으로 있던 고려 의종 17년(1163)에 상소를 올린다.
"내시 백선연(白善淵)이 상과 벌을 주는 임금의 권한을 제멋대로 휘두르고 궁녀 무비(無比)와 은밀히 추한 짓을 했습니다. 점쟁이 영의(榮儀)는 옳지 못한 도를 가지고 임금께 총애를 받아 백순(百順) 관북 (館北) 두 궁전을 지어 사사로이 재물을 비축하고 복을 빌거나 제를 올리는 비용을 횡령했습니다. 또 영의는 백선연과 함께 정무를 관장하기까지 하며 권한을 남용했습니다. 추밀원지사 최포칭(崔褒稱) 또한 중요한 직책을 맡아 조정내외에 세도를 부리고 자기파가 아닌 사람들을 중상모략하여 치부를 일삼았으므로, 내시 백선연와 궁녀는 목을 베고 점쟁이 영의는 추방하여 소치는 사람을 만들고 최포칭은 파직하여 온 나라에 사죄케 하소서."
그러나 이들은 모두 향락을 즐기던 의종의 무리여서 왕은 상소를 불태우고 문극겸을 황주판관으로 좌천시켰다.
"고려사" 열전기록에는 문극겸이 좌정언으로 상소한 위의 사실만 기록되어 있으나 "충숙공실기"에 보면 상소를 올린 의종 17년에 황주판관으로 좌천되기 이전에 잠시 관복을 벗고 고향집으로 돌아간 사실이 있었다고 한다. (상소에 대한 왕의 처분을 기다린 듯하다)
이 때에 조정이 있던 개성에서 고향인 전라도로 내려가면서 유구역을 들리게 되어 여기서 하루를 묵으면서 시 한수를 짓게 된다. 이 시가 그 유명한 "간신거국도(諫臣去國圖)"를 그리게 한 시이다.
朱雲折欄非建譽 袁盎當車蚩爲身
一片丹誠天未照 强鞭羸馬退逡巡
주운이 난간 분지름은 명예 구함이 아니었고
원앙이 수레 막음은 어찌 자신을 위해서랴
한 조각 붉은 정성 임금이 몰라주니
여윈말 채찍하여 머뭇거리며 물러 왔네
*주운(朱雲).... 한나라의 성제 때 충신이다, 성제의 스승 장우가 군주를 바로 잡지 못하고 아첨만 일삼으며 봉록만 축내고 있으니 그를 베어 나머지 무리를 경계함이 옳다고 상소하자 황제가 노하여 그를 끌어내라고 하자 주운이 신은 지하에 내려가 용방과 기간을 좇아 함께 노닐면 족하지만 이 조정은 어떻게 될 것인지 그것을 알 수 없다고 하며 난간을 부여잡아 난간이 부러졌다고 한다.
좌장군 신경기가 올바른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그를 벌줌은 옳지 못하다 하여 황제가 용서한 후 부러진 난간을 보수하려 하였으나 황제가 충신을 행적을 그대로 남기라 해서 수리하지 않았다 함.
원앙(袁盎)... 원앙도 한나라의 충신이다. 한나라 효제가 외출 시에 총애하는 환관 조동을 함께 마차에 태웠다. 원앙이 수레 앞에 엎드려 황제의 수레에 함께 탈수 있는 자는 천하의 영웅호걸이어야 한다고 알고 있는데 어찌 거세한 환관을 태울 수 있느냐고 말해 그 말을 들은 황제가 조동을 수레에서 내리게 했다 한다.
문극겸은 이 시를 통하여 주운과 원앙이 충심으로 간언했던 옛 고사를 인용해 이들의 충심과 자기의 충심이 동일하였음을 말하고 이러한 충심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여윈 말에 채찍질하여 조정을 떠나면서 머뭇거린다는 자화상을 노래했다.
유구역루에 써 놓은 문극겸의 이 시는 그 후 오가는 관속들과 사람들의 입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가 그림으로 그려진 것은 그 후 10여년이 지나서이다. 이 때의 일이 고려 때의 문신 최자(崔滋)의 (1188~1260) 저서 "보한집(補閑集)"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에 따르면 명종 3년(1173년) 겨울에 정산현(定山縣) 유구역(維鳩驛)의 공관을 새롭게 수리하고 화공을 불러 벽에 채색을 할 때에 이 일에 종사하게 된 당시의 화공 박씨가 그 시를 보고는 역루 서쪽 벽에 한 폭의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화공 박씨는 비록 천인이었으나 뛰어난 화공이었던 듯하다. 그리고 글을 알아 그 시대의 흐름에 따른 백성들이 우러러 보는 문극겸의 시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이 시가 이미 지역의 모든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한 화공에 의해서 그려진 유구역루의 그림은 그 후에도 50여년이 흐르는 세월 동안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 후 50년의 세월은 유구역의 한쪽 벽에 잠들어 그 색깔이 변했던 그림이 松廣寺의 무의자(無衣者)라는 승려의 눈에 뜨여 빛을 보게 된다. 송광사(松廣寺)의 불승 무의자(無衣者)는 북쪽 금나라군이 의주로 침공해와 승려들을 이끌고 서경인 청주로 가는 길에 유구역에 들렸는데 이 그림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한참동안 탄식하며 바라보다가 ‘이 그림이 바로 간신거국도(諫臣去國圖)로다’ 하고는 시를 써서 그림 곁에 붙였다고 한다.
壁上何人畵比圖 諫臣去國事幾乎
山僧一見尙惆愴 何況當塗士大夫
벽 위에 이 그림은 뉘가 그렸는고
간하던 신하가 개경을 떠나니 일이 위태롭네
산승이 이 그림을 보고 서러워하거늘
하물며 벼슬하는 사대부야 그 어떠할까
무의자(無衣者)....수선사(修善社) 제2대 사주인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의 호이다.
속명은 최식(崔寔)이며, 1210년에 보조국사 지눌의 뒤를 이어 수선사 제 2대 사주가 되었고 1216년 대선사로 추대된 사람이다. 청년시절 유학을 공부하여 사마시에 합격하고 태학에 입학하여 유학과 문학을 공부하다가 모친 별세 후 출가한 스님이다.
따라서 수도만 한 승려가 아니라 240여수가 담긴 무의자 시집을 남길 만큼 문학과 유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그림을 보자마자 문극겸의 시를 그린 것을 단박에 알아 봤을 것이다.
무의자가 벽화 옆에다 시를 써놓은 뒤에(1222), 이 그림과 시는 더욱 유명해졌다. 문극겸이 충간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복을 벗고 조정을 떠나는 그림이라는 것을 모두 알게 된 것이다.
그 뒤 여러 사람들이 유구역에 들리게 되면 반드시 이 벽화를 보게 되었고 글과 그림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뒤에도 여러 시인들의 시가 쓰여진다.
曲突前言不早圖 焦頭後悔可追乎
何人畵比諫臣去 滿壁淸風激瀨夫
구들을 굽게 놓으라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다가
머리털이 탈 때 뉘우친들 무엇하리
그 누가 이 간신이 가는 모습 그렸는가
벽 위에 가득한 청풍이 나약한 사내 울려놓네
이 시는 작자를 알 수 없지만 앞날을 미리 알고 경계한 문극겸의 충간을 찬양하고 어리석은 의종을 풍자한 시이다.
** 한서에 실린 이야기로, 구들을 굽게 놓지 않아 불이 날 것이라는 충고한 이의 말을 듣지 않아서 불이 났는데, 불을 끈 다음에 불 끌 때의 공과만 논하는 것을 보고 왜 불이 날 것이라고 충고한 이의 공은 잊느냐고 한 고사를 말한다.
白衣黃帶諫臣圖 是屈原乎微子乎
未正君非空去國 不須毫底費工夫
흰 옷에 누른 띠 간신의 이 그림
이 사람은 정녕 굴원인가? 미자인가?
임금의 잘못을 바로 잡지 못하고 헛되이 나라 떠나니
붓글에 새긴 솜씨 허비하여 무엇하리
이 시도 작자 미상이다. 시인은 이 그림을 보면서 임금에게 충간하다가 쫓겨나는 신하들을 연상하였다.
굴원(屈原)이 충간하던 초나라의 회왕(懷王)이나 미자(微子)가 충간하던 은나라 주(紂)는 결국 충간을 듣지 않고 나라를 어지럽게 다스리다가 임금 자리에서 쫓겨났다. 고려의 의종도 결국 정중부의 난을 당하고 거제도로 유폐되는데, 이를 풍자하며 임금이 어두울수록 더욱 노력하여 임금을 잘못을 바로 잡자는 다짐을 한다.
인간의 위대함은 생존 시에도 중요하지만 죽은 뒤의 평가도 대단한 위치를 차지한다. 충숙공 문극겸이 선하고 바른길을 걷던 선비였음은 후대 사람들이 평했으나, 문극겸의 간언을 듣지 않고 향락을 일삼다가 무신의 난에(정중부의 난) 왕위를 잃고 거제도로 유배된 의종은 떠나는 길 마상에서 탄식을 하며 "내가 문극겸의 말을 들었던들 어찌 이러한 욕을 당했으리오" 하고 후회한 것을 보아도 문극겸은 당시 상항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간언했음을 알 수 있다.
유구역의 "간신거국도"는 유구 역말이 번창할수록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던 그림이었으나 그 벽의 보존에 대한 관심은 없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시대 성종 때 대제학에 올랐던 서거정(徐巨正, 1420~1488)이 유구역루에 남긴 시 한수를 보더라도 이 같은 사정을 금시 알아볼 수 있다.
破壁塵昏一畵面圖 摩娑試問定誰乎
行裝草草衣冠古 知是前朝諫大夫
틈이 간 벽 먼지 낀 곳에 있는 한 폭의 그림
어루만지며 묻노라 정말 이 누구인가
간소한 행장에 의관조차 낡았으니
그러나 이분이 곧 전 왕조의 간대부라네
서거정이 이 시를 남기게 되었을 때는 유구역루에 "간신거국도"가 그려진지 30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벽화의 그림은 많이 퇴색하였을 것이고 벽에 금이 가고 먼지도 끼었을 것이다.
서거정의 시 서두에 틈이 간 벽 먼지낀 곳에 있는 한 폭의 그림... 이란 시구가 "간신거국도"의 당시 보전 상태를 말해준다.
유구역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중기 까지는 많은 인마가 왕래하는 활발한 역이 되어 갔다.
정치가 안정되면서 한양으로 오고 가는 충청도 전라도 사람들뿐만 아니라 말을 갈아타기 위해서 이곳을 오가는 관속들과 길손들이 쉬어 가는 장소가 유구역이었으며 사방으로 장꾼들이 모여들어 문물이 교류되던 곳 또한 유구역이였다.
유구역의 유숙객들이 늘어나면서 벽에 그려져 있던 "간신거국도"는 더욱 퇴색해 갔지만 선조 임금 때 까지도 희미하나마 그림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는 되었던 같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우리나라에 원군으로 왔다가 여기를 지나갔던 한 명나라 장수도 유구역의 "간신거국도"를 보고 시 한수를 걸어 놓는다.
自古人臣多便圖 誰知身後史書乎
成仁取義文丞相 日月孚光乃丈夫
옛부터 신하된 사람 그 많기도 하지만
죽은 뒤에 역사 기록 그 누가 생각하랴
인을 이루고 의를 취한 문승상이여
해와 달과 같이 빛나는 장부되셨구려
** 명나라 장수가 공주지역을 지나갔다면 임진왜란 때 밖에 없다. 명나라 유격장 남방위(藍芳威)가 공산성에 유격부를 설치했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 이여송(李如松)과 위관 임제(林濟) 남방위(藍芳威)를 기리는 "명삼장비(明三將碑)"가 세워졌다는 걸 보면 이 세 장수중 하나였거나 휘하의 장수가 지은 것으로 보인다.
유구역루에 걸린 찬시의 기록은 여기까지이나 이곳에 와 보지도 않고 유구역루의 그림을 생각하며 지은 시가 하나 있다.
吾知孝直有令行 諫札丁寧不世情 雷礮豈知終日怒 電幡猶照寸心明
維鳩驛裏龍眠活 徒鰐城邊馬步輕 大丈夫身比寂寬 一時評叱亦殊榮
........................................ <丹月驛餞 靜菴赴謫>
효직이 이번 길 떠날 줄 내 알았으니
간하는 글이 정녕 세상인정과 달랐네.
천둥치며 하루 종일 노하실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번개가 일편단심을 밝게 비추네.
유구역 안의 그림이 아직도 살아 있어
귀양가는 말 걸음이 가볍기만 하네.
대장부 신세가 적막치 않으니
한세상 평판이 자못 영광스럽네.
이 시는 중종에게 충간하며 도학 정치를 실현하던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기묘사화에 얽혀서 능주로 귀양가게 되자 조세구가 충주 단월역까지 따라가서 배웅하며 지어준 시이다.
이 시를 보아도 당시 유구역과 간신거국도는 나라 안에 널리 알려졌음을 보여 준다.
이러 저러한 기록으로 볼 때 "간신거국도"는 임진왜란의 전화가 한창일 때까지는 유구역의 벽루에 그려져 있었던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으나 그 뒤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기록에 없다.
"간신거국도"가 그려져 있던 유구역루는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 역루가 불타 버렸다고 하는 학설이 가장 유력하고 유구역도 일본에 의해 나라가 망하면서 조선시대의 역계가 폐지되면서 역사(驛舍)마저도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후일담이지만 유구역루의 "간신거국도"는 보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명화로서 이후 수 백여 년을 거치며 이에 따른 연작시가 게시되어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알려졌다.
그리고, 이를 본떠서 전국의 역사의 벽에는 이와 비슷한 시와 그림들이 쓰여지고 서로간의 연락 서한들이 어지럽게 게시되면서 역사의 벽이 흡사 대자보와 같은 언론 구실까지 하게 되는 민심의 소통지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기원이 유구역루에서 비롯되었지 않았느냐는 설이 있다.
유구역과 "간신거국도"에 대한 연구나 유적복원 같은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
*******참고 문헌
1. 충남지역 누정문학 연구(2000.8):.... 지은이: 허 경진
2. 공주시 발행 “내고장 으뜸가꾸기 리지(里誌) (2)...1992년
3. 공주군지...1988년
4. 기타 공주관련 서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