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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黑風令 제2권 제14장 天世夜皇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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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슬…… 부슬……
밤(夜)은 깊어 삼경인데 가랑비(細雨)가 내리고 있었다.
안개처럼 소리없이 내리는 밤비(夜雨)는 메마른 낙엽 위로 축축하
게 젖어들었다.
작은 지류(支流)가 모이는 대하 강변의 한 이름없는 갈대 밭.
"푸……"
잔뜩 부풀은 개구리 배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그 괴이한 소리와
함께 우거진 갈대밭 사이의 물결을 가르며 무엇인가 서서히 움직
이고 있었다.
들쑥날쑥……
불규칙적으로 오르락 내리락하며 물살을 가르는 것은 수면 위로
한뼘 가량 솟아 오른 가느다란 죽통(竹筒)이었다.
헌데 손가락보다 가느다란 그 세 개의 죽통이 냇물가에 다다르는
순간 검푸른 물 속에서 느닷없이 시커먼 물체가 불쑥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칠흑같이 어두운 밤.
더군다나 사위는 쥐죽은 듯이 고요한데 인적도 없는 갈대밭에서
일어나는 이 괴사건은 머리털이 곤두설 정도로 공포스러운 광경이
었다.
허나 나직한 말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그들은 분명 사람이었다.
체구가 거대한 인영이 입에 물고 있던 죽통을 갈대숲 멀리로 던져
버리더니 말했다.
"…… 저는 속히 소 떼가 흩어진 곳을 찾아봐야겠습니다."
"곧 뒤따라 갈게."
멀어지는 거한의 등에 대고 말한 인영은 환우령이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안개비 사이로 황노산의 떡 벌어진 어깨가 희끄
무레하게 멀어져갔다.
"녀석, 할아버지께서 내주신 소떼가 많이 없어졌을까봐 걱정되는
모양이예요."
"염려할 것 없다. 황가(黃家) 삼부자(三父子)만큼 소 떼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잔잔하게 미소짓는 황보는 곁에 선 아들을 지긋한 눈길로 주시하
며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에 보니까 네 녀석의 무공이 눈부시게 발전했더구나."
환우령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제 황궁근위무사 따위는 백 명이 한꺼번에 덤벼도 자신 있어
요. 헌데…… 죽었다가 살아난 기분이 어떠세요?"
"이 녀석아, 누가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이러는 게냐?"
환우령의 입에서 시큰둥한 음성이 흘렀다.
"제가 구출해 내지 않았다면 황보는 이미 저승에 가서 골머리를
싸매고 있을 거예요."
"아비가 왜?"
"염라대왕의 보물창고를 어떻게 털 것인가 한참 고민하고 있을 테
니까요."
일순 황보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어둠 속에 흩어졌다.
"허허허…… 네 녀석이 한두 달 못 본 사이에 무공하고 키만 큰줄
알았더니 입은 더욱 매서워졌구나."
그러다가 문득 환우령이 시종일관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
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아비의 얼굴이 못생겨서 불만이냐?"
환우령은 심각하게 말했다.
"황보가 정말 천세야황(天世夜皇)이예요?"
황보는 느릿하게 시선을 돌리며 걸음을 옮겼다.
"아비를 그렇게 존경스러운 눈길로 쳐다볼 필요없다. 너도 얼마든
지 천세야황이 될 수 있으니까."
허나 이어지는 환우령의 음성은 전혀 엉뚱한 말이었다.
"저는 황보의 아들이 아니죠?"
예기치 못한 질문 탓인지 황보의 안색이 암울하게 변하며 한동안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돌연 환우령은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며 다그치듯 물었다.
"어서 대답해 봐요. 황보는 제 아버지가 아니죠?"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지?"
"제 나이가 열 아홉인데 황보의 연세가 일흔 둘인 것은 차지하고
라도……"
"……"
"황보와 저는 닮은 데가 손톱만큼도 없으며, 게다가…… 엄마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말씀해 주신 적이 없잖아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대략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난 후에야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우령아, 네 나이가 지금 몇 살이지?"
"한 달만 더 지나면 스물이죠."
환우령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며 가볍게 흥분되기 시작했
다. 요 근래에 황보의 안색이 이토록 심각하게 굳어지는 것을 처
음 봤기 때문이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밤비(夜雨)……
"이제, 우령이 너도 인연(因緣)이 무엇인가를 알만한 나이가 됐구
나."
황보의 음성은 빗소리만큼이나 축축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인연이라니……?)
"아비는 본래 역마살(驛馬殺)을 타고 났는지 늘 부평초(浮萍草)처
럼 떠돌아 다니기를 좋아했다."
"……"
"워낙 방랑생활(放浪生活)을 좋아했던터라…… 남들처럼 사랑하는
아내를 맞아 가정을 꾸미고 자식을 낳는 따위는 나를 속박하는 족
쇄일 뿐이라고만 생각했다."
내리는 비 탓일까? 환우령의 마음은 덩달아 우울해졌다.
"허나, 아비 또한 사내로 태어난 만큼 누군가를 불꽃처럼 사랑
(愛)해 보고 싶다는 갈망이 젊은시절 내 마음 한 구석에 숯불처럼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지. 풀잎 위에 맺힌 아침 이슬처럼 청초(淸
楚)한 여인을 말이다."
두 사람은 비에 젖은 나무 밑둥지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나 아비의 일생에는 그런 행운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지 나
이 서른이 될 때까지도 그런 여인을 만날 수 없었단다."
"……"
"결국 어느 한 사람을 불꽃처럼 뜨겁게 사랑하기보다는 만나는 모
든 사람과 숯불처럼 은근한 정(情)을 나누는 천세야황의 길을 걷
게 된 게야."
"그럼 저는 어디서 태어났죠?"
문득 황보의 눈가에 짙은 그늘이 깔렸다.
"이십 년 전, 그러니까 아비 나이 오십하고도 다섯인 노년(老年)
나이의 어느날이었다. 아비는 황산(黃山)을 넘어 금릉(金陵)으로
발길을 향하고 있었지."
"……"
"산 속에서 밤을 맞게 되어 이슬을 피할 곳을 찾던 아비는 돌연히
끊어질 듯 희미하게 들리는 신음소리를 들었다. 아비는 덤불 속에
쓰러져 있는 한 인영을 발견한 순간, 그만…… 아찔한 충격에 돌
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환우령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왜요, 그 사람의 몰골이 너무나 처참해서요?"
황보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란다. 그 인영은 살아나기 불가능할 정도로 상처가 극심하기
도 했지만…… 아비가 놀란 이유는, 그 여인(女人)이 바로 아비가
젊은 시절 항상 마음 속으로 그려보던 여인의 모습과 너무나도 흡
사했기 때문이었다."
새삼스럽게 가슴이 떨리는 듯 황보의 동공 깊숙이 추억(追憶)의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아비는 어렵게 동굴 하나를 찾아서 그녀를 옮겼다."
"……"
"극진히 상처를 치료한 덕에 그녀의 상태는 나날이 호전되어 갔지
만 아비의 마음은 우울해졌지…… 단 열흘 뿐이었는데도 아비는
밤마다 그녀의 꿈을 꿀 정도로 극심한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었던
게야……"
"……"
"삼십여 년 간 막연히 품어왔던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이 뚝 터진
강물처럼 그녀를 향해 흘러가는 열정(熱情)은 아비 힘으로는 주체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문득 환우령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아비가 주책스럽게 느껴지냐?"
"아니요. 황보의 그때 심정을 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순간, 황보는 아들의 머리를 꽁 소리가 나도록 쥐어 박았다.
"이 녀석아! 네가 남녀간에 대해 뭘 안다고 고개를 까딱거리고 있
는 게야."
"쳇, 저도 다 안단 말이예요."
"뭘 말이냐?"
"마른 장작에 불이 붙으면 화력(火力)이 더 좋다는 것 쯤은……"
환우령은 자신있게 말했다. 또 한 번 머리 위에 떨어지는 둔탁한
충격을 느껴야 했다.
"이 녀석아! 아비같은 경우에는 고목나무에 꽃(花)이 피면 더 아
름답다라는 비유를 해야 적당한 게야."
환우령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마른 장작이나, 고목나무나 그게 그거죠. 뭐……"
천세야황 환유담.
풀잎 위에 맺힌 아침 이슬처럼 순백의 영혼을 지닌 여인을 비로소
찾기는 했으나 자신은 이미 오십 오 세에 달하는 노인이 아닌가.
그녀의 나이는 꽃다운 이십 일 세.
결국 황보는 하고 싶은 말들을 모두 가슴속에 묻어버릴 수밖에 없
었다.
"헌데, 사람의 인연이란 실로 묘하더구나."
황보의 얼굴에 빛바랜 미소가 스쳤다.
"한 달이 넘도록 일어나 앉을 수도 없는 설평(雪平)을 놔두고 내
상(內傷)을 치료하는 약재(藥材)를 구하기 위해 꼬박 하루 만에
돌아왔을 때였다."
"그 여인의 이름이 설평인가요?"
"그렇다. 바로 너를 낳아준 어머니이기도 하지."
(설평…… 설평……)
환우령은 그 이름을 몇번이고 되뇌여 보았으나 떠오르는 얼굴이
없었다.
"크크…… 제게도 어머니가 있긴 있었군요."
그러나 어머니라는 말이 여전히 생소하게 느껴지기는 마찬가지였
다.
"아비가 돌아와 보니까 설평은 음양쌍두사(陰陽雙頭蛇)에게 물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뱀에게 물렸다고요?"
"그 음양쌍두사라는 것은 춘약(春藥)보다 열 배나 강한 춘독(春
毒)을 지니고 있는데…… 그 독성을 제거하는 길은 오직 남녀의
합방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
"그 후 일 년 간은 정말 아비의 칠십 평생 가장 행복한 나날들이
었다. 끼니를 굶어도 배고프지 않았고, 비록 지푸라기 뿐인 동굴
에 보금자리를 꾸몄지만…… 나이를 초월한 우리의 순수한 열정으
로 인해 황량한 산속 생활이 별천지보다 아름답게만 느껴졌지."
"어머니도 황보를 좋아했었나요?"
"허허허…… 배가 만삭이 되어서야 그 사실을 고백하더구나."
그러다가 돌연 황보의 안색이 침중하게 굳어졌다.
"허나 설평은 갓 태어난 너에게 젖 한 번 물려보지 못하고 끝내
저세상으로 떠나고 말았지……"
황보의 음성은 천근 바위처럼 무겁게 환우령의 가슴에 스며 들었
다.
"왜죠?"
"내상이 완쾌되지 않은 상태에서 너를 임신했고, 산후병(産後病)
까지 겹쳐서…… 달리 손을 써볼 사이도 없이 너의 작은 손(手)을
꼭 잡고 눈을 감았단다."
(내 손을 꼭 잡고 임종했다고…… 어머니가!)
환우령은 순간 전율같은 감동과 슬픔을 맛보았다.
그는 독백처럼 나직이 중얼거렸다.
"제길…… 이놈에 청승맞은 비는 왜 구질구질하게 자꾸 온담."
"녀석, 울고 있구나……"
환우령은 옷소매로 눈가를 거칠게 문지르며 말했다.
"울긴 누가 울어요. 빗물이 눈에 들어가서 그렇지……"
일순 황보의 두 눈에도 뿌옇게 물안개가 서리고 있었다.
"이 녀석아…… 숨길 필요없다. 남자도 때로는 눈물을 흘리는 게
야."
"……"
"사내는 좀처럼 울지 않는다. 허나…… 남자의 눈물은 피(血)보다
진한 게야."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죠?"
"이슬보다 맑고 배꽃보다 청초(淸楚)한 여인이었지. 한 가지 다행
한 것은 네 녀석이 설평을 쏙 빼닮았다는 사실이다."
"생김새 말고 어머니의 가문(家門)이나 신분내력 같은거요."
이때였다. 황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
"무슨 사연 때문인지 설평은 자신의 과거라든가 출생신분에 대해
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아비가 아는 것은 그녀의 이름 두
자와 품 속에 지니고 다니던…… 선무옥녀상(扇舞玉女像) 뿐이
다."
"선무옥녀상이라면 황보가 생각날 때마다 꺼내서 어루만지던 그
백옥미녀상 말인가요?"
"설평은 그 백옥미녀상보다 더 아름다왔지."
그러다가 문득 환우령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가서 노산이가 소떼 모으는 거나 도와줘야겠어요."
황보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녀석아, 아비에게 아직 한 가지 말하지 않은게 있지 않느냐."
"뭘요?"
"네가 지난 두 달 동안 어디를 갔었나 하는 경과보고."
환우령의 입에서 퉁명스러운 음성이 흘렀다.
"또 들고 나가서 몽땅 없애려고 그러죠. 하지만…… 이번에는 허
탕쳤어요."
황보는 고개를 저었다.
"이 녀석아…… 아비의 눈은 못속인다."
"마음대로 하세요. 집을 헐어낸다 해도 아무것도 안나올 테니까."
환우령은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황보와 계속 같이 있으면 자꾸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 생각이 날 것 같았다.
추적…… 추적……
안개처럼 내리는 차가운 가을비가 어두운 벌판을 달리는 환우령의
얼굴 가득히 자꾸만 자꾸만 부딪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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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즐감하고 갑니다..~`
즐감!
ㅈㄱ~~~~~~~~~`````````````````````
즐....
고맙게 잘보고 있어요~~~
즐감~~^*^
ㄷ ㅗ ㄱ~
넘 재밌네요^^
감사,
즐감요
즐감합니다
즐독
ㄳㄳ
,
항상 감사드리면서

,독,하고 있읍니다 
싸 
감사합니다...
ㅈㄷ
즐겁게 보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