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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회]
날이 밝고 따뜻한 빛이 무림맹의 전각들 위로 비추었을 때는 이미 모든 싸움이 끝난 후였다.
밤새 치열하게 싸웠던 전투의 흔적은 이미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흑우와 백무는 새벽이 밝아올 무렵 동료들의 시체를 모두 회수해 조용히 사라졌다.
흑우가 물라갈 때 백무는 더 이상 그들을 잡지 않았다. 그들의 피해도 막심할 뿐더러, 추격하는 일은 그들의 임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임무는 요인들을 지키고 적들을 물리치는 것. 그들은 훌륭히 임무를 수행한 것이었다.
흑우가 물러간 후 무림맹 내부에 대한 철저한 수색이 시작됐다.
한 두 명도 아니고 백 명이 넘는 무리들이 숨어있을 만한 공간은 얼마 없었기에 그들은 곧 흑우를 발견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로 숨었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무림맹 내부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흑우의 행방에 제갈문이 어이없어했다.
감히 자신의 안마당에서 살인을 자행한 후 사라지다니.
“무림맹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녀석들을 찾아라.”
그의 지상 명령이 무림맹의 각 조직에 전해졌다.
한편 제갈문은 끝까지 흑우를 쫓지 않고 날이 밝자 돌아온 백무의 책임자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 했으나, 그날 동원됐던 백무의 책임자는 할 말이 있거든 대장에게 말하라,
하고 그들의 거처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명백히 제갈문을 무시하는 태도였으나 제갈문은 그에 무어라 항의 할 수 없었다.
백무는 오직 맹주만이 부릴 수 있는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운용할 수 있는 것은 백무의 극히 일부뿐이었다. 그 이상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정말 마교가 출현한 것인가?’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었다. 이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제갈문은 자신의 계략을 수정해야 함을 인정해야 했다.
그는 급히 무림맹에서 호의적인 무림문파들을 소집했다.새벽부터 제갈문의 거처에서는 급박한 회의가 벌어졌다.
간밤에 있던 일과 상관없이, 오늘은 신병쟁탈전의 본선 대결이 이루어지는 날이었다.
사람들은 간밤에 그토록 치열한 혈전이 있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오늘 벌어질 조 추첨과 대결에 온통 눈과 귀를 집중시키고 있었다.
덕분에 무림맹의 아침은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차게 시작됐다.
신황이 머무는 별채의 아침도 그랬다. 홍염화와 무이가 아침부터 부산하게 움직이며 소란을 떨었고, 그에 팽가의 사람들과 신황마저 정신이 쏙 빠질 정도였다.
“빨리, 빨리!”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봐.”
“채대는 어디 있어요?”
“아, 아! 잠깐.”
홍염화보다 무이가 신이 났다. 무이는 홍염화가 깜빡 잊어버린 것들을 챙겨주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 모습에 팽가의 무인들은 웃음이 절로 나, 그저 귀엽다는 얼굴로 무이를 바라보았다. 그들 역시 오늘부터 시작될 본선 대회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적엽진인과 혁련후는 그런 무이와 홍염화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정말 보기가 좋군.”
“후후~! 둘이 딱 어울려.”
“이제 어떻게 할 건가?”
“몰라서 묻는 건가?”
적엽진인의 말에 혁련후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휴~! 자네의 호기심은 아직도 사그라지지 않았군.”
“하하하~! 자네가 너무 나이든 티를 내는 거야. 어젯밤의 그 소동을 보고도 호기심이 동하지 않는단 말인가?”
혁련후가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호들갑을 떠는 무이와 홍염화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살귀(殺鬼)들이 움직였어. 그것도 다름 아닌 무림맹에서 말이야. 이런데도 어찌 궁금하지 않는단 말인가?”
“자네...........?”
“자네는 이곳에서 무림맹의 움직임을 관찰하게나. 나는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해봐야겠어.”
혁련후의 의지가 너무나 확고했다.
마도의 절대자라 불리면서도 세력에 의존하기보다 그 자신의 몸으로 모든 역경을 헤쳐 나왔기에 그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더욱 컸다.
“무림맹주 백무광은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네.”
“훗! 난 마도의 절대자라 불리는 사람이네.”
“하는 수 없군.”
“금방 다녀옴세.”
자신만만한 웃음을 짓는 혁련후를 보며 적엽진인은 결국 긴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함께 대륙십장의 수위를 차지하는 친구이기에 그 능력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는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참, 오늘 내 딸 아이도 신병쟁탈전의 결선을 치를 테니 자네가 잘 돌봐주게나.”
“여부가 있겠는가! 자네의 딸이라면 나에게도 딸이나 마찬가지인데.”
“고맙네! 잠시만 기다리게나. 내 백무광이 도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철저히 파헤쳐줄 테니까.”
혁련후는 자신 있는 미소를 지었다.
이미 백 세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혁련후의 자신감은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그때 무이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할아버지, 식사하시래요.”
마침내 무림맹의 중앙에 설치된 비무장이 개방됐다.
약자들은 모두 떨어져 나갔고, 남은 이들은 누가 봐도 인정할 수 있을 정도의 강자들이었기에 대회를 바라보는 군웅들의 눈에는 승부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다.
비무대의 뒤쪽에는 구대문파와 오대세가 등의 수뇌를 위한 관람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제까지 예선에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던 무림의 거물들이 본격적인 신병쟁탈전을 앞에 두고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붙은 관람대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 서서 구경을 해야 하는 일반 무림인들과 달리, 그들은 넓은 천막 아래서 편안하게 구경을 하는 특권을 누렸다.
관람대에는 팽가의 자리도 마련되어 있었다.
팽주형은 가주의 자리에 팽만우를 앉게 하고, 자신은 그 뒤에 앉았다. 중상을 입었던 팽만우의 상세가 많이 좋아져 이제는 밖에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팽만우의 옆쪽에는 무당파를 위한 좌석이 있었다. 우연인지 아니면 무림맹의 배려인지 모르지만, 덕분에 팽만우와 적엽진인은 같이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백부님.’
무이는 팽만우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었다. 하지만 무이의 곁에 신황은 없었다. 그의 자리는 관람대의 제일 뒤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무이는 신황과 같이 있지 못하게 돼서 볼이 퉁퉁 부어있었다. 하지만 워낙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있었기에, 무이는 그런 표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신황의 자리는 일행과 따로 동떨어져 관람대의 제일 뒤쪽에 있었다.
그곳은 점창파와 청성파의 사이였는데, 그들 사이에 오직 신황만 혼자 앉아 있었기에 무척이나 썰렁해 보였다.
그것은 마치 망망대해에 홀로 떠있는 무인도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신황의 주위에 있는 각 문파의 수장들은 자신들끼리는 웃고 떠들면서 신병쟁탈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신황에게는 그 누구도 말을 걸지 않았다.
팽가의 사람들과 무당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지만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에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신황은 예의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어 속마음이 어떤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때 제갈문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는 웃는 얼굴로 군웅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여덟 명의 결선 진출자가 모두 가려졌습니다. 이제부터 추첨을 통해 이분들의 상대를 결정하겠습니다.”
“와아아~!”
그의 말에 군웅들이 함성을 질렀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그들이 기다리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제갈문이 자신의 앞에 놓인 나무 상자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 안에는 각 참가자의 이름과 조가 적혀있습니다. 각자 나오셔서 순서대로 나무패를 뽑으면 자신의 상대가 결정됩니다.”
군웅들은 제갈문의 설명에 귀를 기울여 집중했다.
적엽진인은 무대 위에 오른 여덟 명의 인물들을 보며 옆자리에 앉아있는 팽만우에게 이야기했다.
“염화나 문수, 혜아는 우리가 아는 사람들이지만 나머지 인물들은 전혀 모르는 인물들이군요.”
“그렇군요. 저 덩치 큰 젊은이나 나머지 사람들은 하나도 모르겠군요.
그래도 신병쟁탈전의 결선에 올랐으면 어느 정도 이름이나 명성이 알려졌어야 하는데 저 다섯 명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허~어! 아무리 세상에 숨겨진 인재가 많다고는 하나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는지.......”
사실 적엽진인이나 팽만우의 견식 정도라면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무인들 정도는 복장이나 생김새를 보는 순간 즉시 떠올릴 수 있어야 옳았다.
하지만 그들의 기억 어디에도 백용후나 그 외 네 명의 무인들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그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들이 모른다면 팽가나 무당파에서도 저들을 모른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팽만우나 적엽진인뿐 아니라 이곳 관람대에 있는 문파의 수장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백용후와 네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백용후의 정체는 오직 신황만 알고 있으니 그렇다 쳐도, 나머지 인물들은 신황 역시 짐작이 가질 않았다.
혹시 백용후의 부하가 아닐까, 잠시 생각해봤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젓고 말았다. 그가 아는 백용후는 부하나 타인에 의지할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들은 백용후와는 전혀 연관이 없는 인물들일 것이다.
커다란 대감도를 들고 있는 인물은 동철산이라고 했다.
그는 패도적인 도법으로 이제까지 적수들을 모두 물리치고 올라온 남자였다.
껑충하게 큰 키에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마른 남자, 그는 하무위라는 이름의 남자였는데 눈부신 쾌검을 쓴다고 했다.
또한 멋스러운 콧수염을 기른 남자는 채찍을 무기로 쓰는 남자로 이름은 서도문이라고 했다.
신랄하면서도 독사처럼 날카로운 그의 채찍 앞에 수많은 무인들이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마지막 인물은 백무광 못지않은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는 인물이었는데, 권을 주 무기로 쓴다고 했다. 그의 이름은 냉한수, 이름만큼 눈빛에 차가운 빛이 감도는 인물이었다.
신황은 그들의 소개를 들으며 눈을 빛냈다. 그의 눈은 날카롭게 네 명의 인물을 훑어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잘 단련된 인물들.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결코 평범하지가 않다.’
그의 느낌이었다.
신황의 능력이라면 사람의 외적인 부분에 현혹되지 않고 내적인 부분을 어느 정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저들에게서는 그 어떤 것도 읽히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능력이 신황의 눈을 속일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나거나 아니면 자신의 마음을 감추는데 아주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한 사람이나 두 사람 정도라면 이해하지만, 셋이나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니.
꿈틀!
신황의 눈이 찌푸려졌다.
그의 눈이 앞쪽에 앉아있는 백무광의 얼굴을 향했다. 그러자 묘한 웃음을 흘리고 있는 백무광의 표정이 보였다.
얼핏 보면 그저 무대 위에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대견스러워 웃음을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그와는 느낌이 전혀 다른 웃음이었다.
‘무슨 생각인가?’
단순히 비무를 보면서 즐거운 것인지 아니면 다른 숨겨진 속셈이 있는지 오직 그만이 알 것이다.
무대 위에서는 제갈문이 결선진출자들과 함께 추첨을 하고 있었다.
순간 신황의 눈이 반짝였다.
수많은 군웅들 속, 유난히도 눈에 띄는 인물 때문이었다.
근처에 있는 군웅들보다 최소한 머리 둘 정도는 더 위로 나와 있는 남자, 순박한 얼굴에 웃음을 짓고 있는데 묘하게도 그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음...........’
신황은 그가 왠지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잠깐 시선을 돌린 사이 덩치 큰 남자는 이미 그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남들보다 덩치가 크니 금방 눈에 띄어야 정상인데 그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누구? 설마..........’
그는 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냈다. 하지만 이미 덩치 큰 남자는 모습을 감춰 거의 생각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홍염화는 나무통에 손을 넣고 잡히는 나무패를 잡아 밖으로 꺼냈다. 그녀가 거낸 나무패에는 서도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서도문이라....., 분명 채찍을 무기로 쓴다고 했었지.’
홍염화는 나무패에 적힌 이름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자신은 채대를 주 무기로 쓴다. 물론 만화미인수라는 걸출한 절학이 있지만 완벽하게 익히지 못했기에 승부수로만 쓸 뿐이다.
때문에 그녀의 주 무기는 채대였다. 그런데 상대도 무기가 편(鞭)을 쓴다고 하면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서도문은 홍염화가 자신의 이름이 적힌 나무패를 잡자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에 홍염화가 발끈했다.
“이익!”
그녀는 사나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서도문을 바라봤다.
하지만 서도문은 자신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의 눈싸움은 시작됐다.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기세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이어 서문수가 나무패를 뽑았다. 그의 상대는 동철산이라는 남자였다.동철산은 서문수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명백한 비웃음, 서문수의 눈에 노기가 서렸다. 그러나 동철산은 예의 웃음을 거두지 않고 노골적으로 서문수를 바라봤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적엽진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쯧쯧! 도발에 저리 쉽게 넘어가서야...........”
상대의 도발에 넘어가 발끈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절로 한숨이 나오는 적엽진인이었다.
한편 혁련혜는 하무위의, 백용후는 냉한수의 비무 상대로 정해졌다.
그렇게 상대가 정해지자 장내의 공기는 더욱 달아올랐다.제갈문은 웃음을 지으며 군웅들에게 말했다.
“자, 이제 상대가 정해졌습니다. 오늘은 일 차전이 벌어질 겁니다. 그리고 오늘의 대결의 승자가 내일의 대결을 벌이게 됩니다. 그리고 모레, 대망의 결승 대결이 펼쳐집니다.”
“우아아아~!”
“아쉽다. 오늘 다 대결하면 좋을 텐데.”
함성과 아쉬움이 교차했다.
이런 대결을 보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보니 군웅들은 모든 대결이 오늘 진행됐으면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했다. 대결을 벌이는 이들의 체력이 무한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제갈문은 군웅들의 반응을 하나하나 눈으로 확인한 후,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환영루의 홍염화 소저와 서도문 소협이 대결을 벌이겠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장병(長兵)을 쓰기 때문에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하리라 생각합니다. 두 사람을 박수로 환영해주십시오.
제갈문의 말에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를 했다.
“와아아~!”
“홍소저다.”
“첫 대결부터 화염화(火炎花)의 대결이라니. 오늘 눈 복이 터졌구나!”
홍염화의 등장에 남자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혁련혜와 더불어 무림맹의 인기를 양분하고 있는 인기인, 홍염화였다.
“헤헤~. 기분이 그리 나쁜 건 아닌데......?”
홍염화는 자신을 보며 소리 지르는 남자들을 보며 코를 문질렀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쳇! 조금만 더 신경 써주지.”
정작 중요한 사람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못내 아쉬운 홍염화였다.
군웅들의 시선이 비무대회에 몰려있는 사이, 혁련후는 은밀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미 그를 감시하던 무림맹의 눈은 멀리 따돌린 지 오래였다.
그들 딴에는 감시를 한다고 하였지만 그들과 혁련후의 차이는 너무나 컸다. 때문에 혁련후는 너무나 간단히 그들을 따돌리고 무림맹의 비처로 숨어들었다.
‘혈뢰옥(血牢獄), 무림맹의 중죄인들을 가두는 곳.’
그는 나무 그늘에 숨어 눈앞에 보이는 칙칙한 건물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무림맹에서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다면 혈뢰옥이 가장 가능성이 클 것이라 생각했다.
혈뢰옥은 무림맹에서 중죄인을 가두기 위해 만든 곳으로, 원래부터 존재하던 지하의 거대한 공동(空洞)을 이용한 천연의 감옥이라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문에 불과할 뿐, 실제 혈뢰옥의 구조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혈뢰옥에 들어간 사람은 있어도 나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철저히 비밀에 싸여있는 혈뢰옥, 그러나 최근 이십 년 동안 누군가 혈뢰옥에 수감되었다는 이야기가 들린 적은 없었다.
이십 년 동안 비어있던 혈뢰옥.
이십 년 동안 비어있었다. 그것은 바꿔 말하면 이십 년 동안 누군가를 집어넣을 여력이 없었다는 말이 되지 않을까?
혁련후는 그런 가정 하에 움직이고 있었다.
‘백무광이 무림에 등장한 것도 이십 년 전, 그렇다면 분명 횔뢰옥에 무언가 있을 것이다.’
그는 조용히 혈뢰옥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타다다다~!
그들은 치열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넓은 비무대를 십분 활용하며 홍염화와 서도문은 자신들의 무기를 격렬하게 휘둘렀다.
파바방!
채대와 채찍이 허공에서 엉켰다 풀어지는 것을 반복하며 공기 터지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마치 독사처럼 영활하게 움직이면서 치명적인 요혈을 노리는 서도문의 채찍과, 나비처럼 가볍게 움직이며 서도문의 채찍을 하나하나 해소해내는 홍염화의 채대.
주르륵~!
홍염화의 뺨으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찌릿!
손아귀가 저려왔다.
채대와 채찍이 부딪칠 때마다 엄청난 충격이 느껴졌다. 동시에 지독하게 음습한 기운이 채대를 타고 흘러들어왔다.
웃고 있는 얼굴로 지독한 음한기공(陰寒奇功)을 쓰고 있는 남자.
겉과 속이 다르다는 말은 아마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구경하는 사람 중, 그 누구도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홍염화는 만화미인수를 암암리에 끌어올렸다. 그녀는 왠지 서도문의 웃고 있는 얼굴이 가면 같다고 생각됐다. 웃고 있는 가면.
‘흥~! 누가 질 줄 알고.’
혈영신도(血靈神刀)에 특별히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선다는 것은 그녀의 강한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파파팟~!
순간적으로 홍염화와 서도문의 신형이 교차했다.
섬전처럼 움직이며 홍염화는 만화미인수의 초식 중 요 근래 가장 능숙하게 펼치는 대라염을 펼쳐냈다.
화르륵!
그녀의 손에서 일어나는 거센 화염.순간 서문도의 채찍이 요동치며 푸른빛이 넘실거렸다.
‘강.....기(?氣)? 말도 안돼!’
홍염화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채찍으로 강기라니. 다루기부터 쉽지 않은 채찍으로 강기를 펼쳐낸다는 것은, 검이나 도로 강기를 만들어내는 것보다 배는 더 어려웠다.
때문에 강호에서 도강(刀?)이나 검강(劍?), 권강(拳?)을 펼치는 고수는 심심치 않게 있어도 편강(鞭?)을 펼칠 수 있는 고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예전에는 존재했을지 모르지만 최근 이백 년 간은 아무도 편강을 펼쳐내지 못한 것이 확실했다.
그런데 지금 홍염화의 눈앞에 이백 년 만에 편강을 만들어낸 고수가 나타난 것이었다.
촤~하~학!
채찍에서 일어난 편강은 홍염화가 만들어낸 불꽃을 반으로 가르며 날아왔다.
“이런!”
홍염화가 급히 채대를 휘두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서도문이 맹렬한 속도로 그녀를 따라왔다.
여전히 곡선을 그리며 웃고 있는 눈 모양,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눈동자는 마치 유리알처럼 완전히 정지되어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홍염화는 이제야 알았다. 눈앞의 남자가 웃는 모습은 단지 표정뿐이라는 것을. 웃고 있는 얼굴은 단지 가면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그때 영원히 열릴 것 같지 않던 서도문의 입이 차갑게 열렸다.
“이쯤에서 떨어져라. 넌 내 목표가 아니니까.........”
“뭐?”
콰콰콰콰~!
홍염화가 채 의문을 표시하기도 전에 또다시 편강의 세례가 그녀에게 쏟아졌다.
허공을 온통 푸르게 물들이며 다가오는 채찍의 폭풍, 그녀는 그 속에서 흔들리는 한 줄기 낙엽과도 같았다.
“이야앗! 혈류연(血劉連).”
거센 폭풍 속에서 홍염화는 자신이 알고 있는 최고의 초식을 풀어냈다.
그녀의 손에서 일어나는 핏빛 붉은 고리. 그것은 홍염화가 익힌 만화미인수의 최후의 초식이었다.
파천황의 위력을 가졌지만 그저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심득을 깨우친 미완의 초식, 그것이 바로 혈류연이었다.
이제 깨달음이 미숙해 실전에서 써먹을 수 없었으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휘이잉!
그녀의 손에서 일어난 핏빛의 고리가 서도문이 펼쳐낸 편강에 작렬했다.
콰~아~앙!
일순 환한 대낮의 하늘을 붉고 푸르게 물들이는 불꽃의 향연.관람하던 군웅들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서도문이 설마 강기를 쓸 줄 아는 고수일 줄은 미처 짐작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퍽~!
순간 누군가 불꽃의 벽을 뚫고 밖으로 튕겨 나왔다. 뒤이어 또 하나의 그림자가 그를 쫓았다.
쉬아악!
다시금 허공을 가르는 채찍의 그림자. 또다시 가공할 편강이 펼쳐진 것이었다.
“홍소저가........”
“홍소저!”
그 광경에 군웅들이 경악했다.
정신을 읽고 비무대 밖으로 떨어지는 것은 분명 홍염화였다.
그리고 서도문은 그런 그녀를 향해 가차없이 편강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아무런 감정도 없던 서도문의 눈동자에 한 줄기 기운이 떠올랐다.
그것은 쾌감, 살인을 할 때 짜릿하게 올라오는 쾌감을 몸이 기억하고 반응하는 증거였다.
“아.........!”
“안 돼!”
정신을 잃은 상대에게 편강을 날리는 모습에 비명이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순간 그림자 하나가 홍염화와 서문도 사이를 끼어들었다.
콰콰콰콰!
그 순간 허공을 가득 뒤덮었던 편강이 그림자와 홍염화에 작렬했다.
“언~니!”
그 광경에 무이가 절규하다시피 소리쳤다. 그런 무이를 팽만우가 안아주며 다독였다.
“괜찮다. 염화는 괜찮을 게야.”
“하...지만, 하지만.......!”
“괜찮다. 저기를 보렴.”
팽만우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는 무이의 눈가를 닦아주며 편강이 작렬한 곳을 가리켰다.
“아.......!”
순간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땅거죽이 일어나며 초토화가 된 곳, 그곳에는 고슴도치처럼 일어난 장포를 두른 신황이 홍염화를 감싸고 있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신황이 중간에 끼어든 것이었다.
그의 품 안에 있는 홍염화는 이미 정신을 잃고 있었다. 미동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중상을 입은 것 같았다.
그때 홍염화에게 중상을 입힌 서도문이 미안한 표정으로 신황에게 말했다.
“이거, 내가 너무 흥분해 손을 좀 과하게 썼구려. 미안하오! 큰상처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는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신황은 미안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고 있는 그의 얼굴 뒤 유리처럼 차가운 눈동자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운이 좋군.”
신황은 차갑게 그에게 말을 내뱉고는 축 늘어진 홍염화를 안고 관람대를 향해 몸을 날렸다.
서문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이 마음을 먹고 날린 편강을 단지 몸으로 막아내다니, 자존심이 상한 것이었다.
만약 신황이 월영갑을 익히지 않았다면, 또한 월영인을 극성으로 익히지 않았다면 분명 서문도의 공격에 낭패를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월영인으로 대부분의 공격을 막아내고, 월영갑으로 이차 충격까지 해소해냈기에 신황은 거의 충격을 받지 않았다.
단지 폭발에 시야가 가려 서도문이 신황이 월영인을 펼쳐내는 것을 보지 못했을 뿐이다.
만약 방금 전의 상황이 비무가 아니었다면 신황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나, 다행히도 좀 전의 싸움은 비무였다.
홍염화와 서도문 사이에 벌어진 비무. 그래서 참는 것이었다.
신황이 서도문을 향해 운이 좋다고 한 말은 바로 그런 의미였다.
‘신.....황!’
서도문은 그 의미를 깨닫고 신황의 이름을 나직이 곱씹었다.
순간 하무위, 그리고 냉한수의 눈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그들과 서도문의 눈빛이 왠지 닮아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느낀 사람은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신황은 관람대로 돌아와 홍염화의 상태를 살폈다.
“백부님, 언니는 어때요? 크게 다친 건 아니죠?”
“괜찮다. 정신을 잃은 것뿐이다.”
다행히도 홍염화는 격돌시의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을 뿐,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물론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었지만, 그 정도라면 초관염이 거뜬히 고쳐줄 것이었다.
신황은 울먹이는 무이에게 홍염화의 간호를 맡기고 비무대를 바라봤다.
어느새 비무대에는 제갈문이 올라 서도문의 승리를 선언한 후 다음 대결을 소개하고 있었다.
다음 대결은 서문수와 동철산의 대결이었다.
무당의 대제자인 서문수와, 대감도의 달인인 동철산의 대결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서문수는 무당의 철학인 양의검(兩儀劍)을 극성으로 익혔다. 거기에 적엽진인의 심득마저 이어받았기에 그는 이번 대결에 자신이 있었다.
‘상대는 이름 없는 낭인, 단숨에 끝을 내고 체력을 비축한다.’
그는 동철산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비록 동철산이 결선까지 올라왔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검에 자신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적엽진인은 혀를 찼다.
“쯧쯧! 상대를 경시하고 있구나.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니거늘.”
그는 동철산이 결코 가벼운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뭐, 저러다 지더라도 나름대로 약이 될 테지.”
그는 승부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았다. 비록 승부에서 지더라도 배우는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무당은 이제까지 그렇게 발전해왔다.
“그나저나 이 친구는 잘하고 있나 모르겠군.”
적엽진인은 지금쯤 무림맹의 금지로 들어가고 있을 친우를 생각하며 잠시 걱정스런 얼굴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대결에 집중을 해야 할 때였다. 그는 곧 비무대로 시선을 집중했다.
‘저놈들!’
그 순간 비무대 한쪽에 앉아있는 백용후의 눈빛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아까부터 자신의 신경을 긁는 눈빛 때문이었다.
비무대 위에 올라있는 동철산을 제외한 하무위와 서도문, 냉한수가 그를 향해 은은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완벽하게 정지된 눈동자, 이성과 감정이 완벽하게 제거된, 감성이 전혀 없는 눈빛.
그는 이런 눈빛을 본 적이 있었다. 다름 아닌 그의 부하들에게서. 흑우에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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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잘보고 갑니다~~
잘 봤습니다...감사! ^ ^
감사합니다.
잘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너무 잼납니다.
고맙게 잘보고 있어요~~~
감사
블독
ㄳㄳ
즐독
잘봅니다
즐감 하구 갑니다
감사합니다
즐감
백용후는 과연 저인가???아니면 ?? 아니길...
즐감하고 갑니다.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 하고 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