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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1970년.53X73cm. |
당시 MITSUBISHI CORPORATION 서울지사장이었던 일본인 나카가와의 안목에 그의 꽃과 소녀 그림들이 빨려들면서부터 발진은 시작된 것이다. 그 전시에서 그림을 몇점 구입하면서 나카가와는 임직순의 세계에 단박 반해버렸다.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안목을 키웠지만 색채와 조형, 음악성이 한꺼번에 갖춰진 그림들은 드물었던 것이다. 잦은 교류를 가지면서 일본화단에 신비하고 아늑한 작품들을 숨가쁘게 일본화단에 소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1972년 12월에 동경 교바시(京橋市)의 시모무라화랑(下村畵廊)에서 개인전을 가지면서 일약 일본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아버렸다.
이후 1973년 5월부터 프랑스에 체류, 그곳에서 전시회를 가지며 일약 세계적 작가로 발돋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에 머물며 그는 쉴 새 없이 자신의 목표로 삼았던 피에르 보나르의 그림을 찾아 화랑가와 뒷골목을 헤매었다.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뇌리에는 늘 이런 고뇌가 피어올랐다.
누드 드로잉. 1975년. 공간 이동시킨 문제의 작품.
"이제 우리에게 기술적인 문제는 거의 없다. 그런데도 어딘지 모르게 일보직전이라는 생각이 드는 까닭은 무엇인가. 아마 그것은 자아 없는 창조의 경쟁이기 때문이리라.
서구 거장들의 작품 모두가 독특한 자아의식으로 이룩되었음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유태계의 애수(哀愁), 프랑스계의 정애(情愛), 그렇다면 그들에 비교한 우리 동양은 한마디로 형(形)의 구속감에서 초월해 있는 품위와 격조인 것이겠지. 우리는 진정 이것을 잃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수없는 박물관과 화랑가와 뒷골목 전시장까지 샅샅이 뒤지는 어느 순간, 불쑥 그림에 대한 보이지 않는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왔다.
마침내 파리의 뒷골목 화랑에서 보나르의 진품 유화 한 점을 구입할 수 있었고, 보나르가 죽기 직전, 말년에 질러댔던 비명같은 절규가 가슴을 울렸던 것이다.
"눈먼 채로 태어나서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떴으면 한다. 그러면 눈앞에 있는 것이 도대체 눈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 그리게 될 테니까."
이 무서운 절규가 가슴에 되살아나며 갑자기 개안(開眼)이 되버린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어떤 편견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채 가장 최초이며 가장 최고인 색채로 그림을 그려내고 싶다는 절규가 아닌가. 그리는 이의 편견으로 이뤄진, 거짓된 색채를 죽어도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단말마. 임직순은 세계 최고색채화가의 단말마적 경탄 앞에서 이런 결심을 새삼 굳히고 말았다.
"눈 먼 자의 최초의 개안. 나도 그 빛과 색채의 만남으로 건강한 생과 자연에 대한 헌사(獻詞)를 그림으로 그리고 싶다."
이런 개안과 결심의 내면을 지닌 채 임직순은 서둘러 고국으로 돌아왔고, 현대화랑 박명자씨는 안목 빠른 초대전으로 임직순의 도약 발판을 깔아줬던 것이다.
현대화랑의 초대전 출품작들은 그 시점에서 화단의 경이였다. 하야시 다케시의 인상주의에서 시작한 그의 그림 세계는 피에르 보나르의 색채주의를 넘어서 한국의 남도적 오방색으로 무르익어 승화돼버린 것이다. 이때부터 자연을 묘사한 모든 그림은 현장에서 완성되어야 한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자연에 대한 애정 어린 대화 없이는 어떤 한국적 아름다움에도 도달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 가슴을 쳤다. 물론 그것은 모델이나, 정물을 앞에 놓고 그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림을 그릴 때 소녀의 얼굴을 보면서 그녀의 이야기를 그려야 한다. 소녀는 소녀대로, 처녀는 처녀대로, 중년은 중년대로의 이야기를 나는 얼굴에서 들어야 한다. 대화하지 않으면 붓이 리듬을 타지 못하기 때문에."
이처럼 그에게 그림을 그리는 일은 대상과 영혼의 대화를 나누는 일이었다. 황홀한 남도의 태양빛에 넋을 싣고 순간의 풍경을 영원의 풍경으로 지상에 세워놓는 일이 그의 소명임을 자각했던 것이다.
그가 자연 앞에 캔버스를 펼치면 영혼이 어느새 초록빛으로 아늑해진다. 비탈에 선 낱낱의 나무들이며 남도의 태양 아래서 환하게 벙그는 꽃들, 날마다 새롭게 늙어가는 아름다운 풍경들에게 은밀히 말을 건넨다. 가슴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대화는 화폭에서 교향악으로 되살아난다.
내밀한 빛의 갈기를 모으고, 풍경의 숨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는 현란한 색채를 지휘해나간다. 빛깔들이 관악기의 통주저음처럼 깊고 아늑해지는 어느 순간, 영혼의 부유감이 황홀히 되살아나는 순간이 온다. 초록빛 관능의 바람이 감각판 위에서 떨리며 지나간 뒤, 아름다운 풍경의 냄새가 피어난다.
사랑의 집중으로 끌어당겨진 한국의 오방색들이 붓끝에서 풀려나며 풍경들이 자유로워진다. 현실과 꿈의 틈새에서, 그 틈새의 긴장감을 지탱하며 꿈은 자연의 선율을 타고, 순간의 풍경에서 영원의 풍경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화가는 떠나도 남도빛 색채는 남아… / 74년 초대전 대히트
서양화 돌풍 일으켜 / 96년 고요히 눈감아
꽃. 1985. 캔버스에 유채. 90.4×72.7㎝
임직순의 1974년 일본전시와 서울현대화랑에서의 초대전 성공은 한국화단에 서양화 돌풍을 일으키는 서막이었다. 70년대 이전의 한국 가옥구조는 한국화에 어울리는 구조였고, 또 그림이라고 하면 으레 한국화를 떠올리게 마련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양화는 다소 낯설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임직순의 현대화랑 초대전 성공 이후 갑자기 한국화단에 서양화 돌풍이 불어닥친 것이다.
70년대 건설붐이 일면서 빌딩과 아파트들이 급격히 들어서기 시작했고, 서구식 건물구조에는 화려한 색감의 서양화가 제격이라는 것이 인식됐던 것이다.
임직순의 현란한 격조의 그림들이 단박에 인식력을 일깨워주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한국화는 서서히 퇴조하고 서양화가 빌딩의 딱딱한 콘크리트 벽면과 아파트의 구조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콘크리트와 인공 광선의 공간에서는 생명력 넘치는 자연광선의 그림이 걸려야만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임직순은 74년 이후 하루종일 그림 그리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건축구조가 급격히 뒤바뀌면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임직순류의 그림을 원했고, 임직순은 생명력 넘치는 산소같은 그림들을 현대인들의 가슴의 벽에 걸어줘야만 했던 것이다.
그토록 중요한 생명의 빛을 자신의 그림에 흡입하기 위해 임직순은 밤낮으로 연구하고 실험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림에서 빛의 구사에 대해 이렇게 털어놓았다.
"그림을 그릴 때, 우선 빛이 형태에 작용한 결과를 측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빛을 받은 물체의 기복은 거기에 비친 빛이 어떤 방법으로 나타나는지에 따라서 일련의 서로 다른 값의 감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빛은 곧 사물의 영혼과 같이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곧 알 수 있다. 빛은 우리들의 영혼 그 자체의 상징이 된다. 비물질적이며 측정할 길 없으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은, 말할 수도 없는, 어려운 상징처럼 제공된다."
빛을 곧 생명이라고 생각하며 그림을 그리는 그의 자세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사람들에게 생명의 태양빛을 나눠주는 일과 후학들을 기르는 일은 그의 유일한 사명이었다.
서울과 광주를 오가며 그림과 강의를 병행하던 그는 74년에 이어 77년 다시 한번 일본 자생당화랑(資生堂畵廊)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급격히 현대화된 일본 역시 임직순의 아늑한 태양빛 그림이 그리워 열화같은 요청이 빗발쳤던 것이다.
77년도의 일본 전시 그림을 보고 일본의 유명한 평론가 다치카 겐조((田近憲三)는 이렇게 평했다.
"예술가는 대체로 자기의식이 강한 편이다. 그런데 한국의 저명한 이 화가처럼 겸손하고 다정다감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예술에의 의지와 예지, 그리고 감각은 누구 못지않게 충실하다.
이것을 몸짓으로 나타낼 때 그는 껴안을 듯한 정을 주는 것이 되고 그의 예술 또한 마찬가지로 정겨웁다. 인상을 정확히 관찰해서 표면적인 미에 빠지지 않고 광선을 읽는 정확한 회화기법과 미의 세련된 구사에서 어루만지고 싶은 분위기를 만드는 묘사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놀라게 한다."
1984년 임직순은 마침내 24년간의 조선대 교수생활을 마감했다. 정년퇴직을 한 것이다. 그는 퇴직금으로 장호원의 과수원을 매입하여 그곳에 작업실을 꾸몄다.
그 곳에서 여생을 작품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말년의 불타는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노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루 7~8시간 작업에 몰두했다. 틈틈이 꽃도 가꾸고 농사도 지었다. 그림은 나날이 원숙해져 갔다. 늘 현장에서 살아 있는 그림을 그려야 하는 그는 그곳에 모델을 상주시켰다. 그 시절 그의 그림 속 '꽃과 여인'은 단연, 터질 듯 농익었다.
몇년을 그렇게 작업에 몰두하던 어느날, 그 고요한 장호원 작업실에 도둑이 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도둑이 들어 그림과 물건들을 훔쳐 가버린 것이다. 그 사건 이후 그는 더 이상 장호원에 머물 수 없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갑자기 무서움증이 정신을 덮쳐 버린 것이다. 그는 짐을 정리해서 다시 서울로 돌아와 워커힐호텔 옆 오피스텔에 작업실을 꾸몄다.
그때는 이미 체력이 바닥이 나버려 소품 위주의 작업밖에 할 수 없는 상태였다. 95년 무렵에는 거의 하루 한두 시간 정도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그는 이렇게 자신이 해온 그림 작업에 대해 제자들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순수성을 갈고 닦는 창조의 작업은 뼛속을 뚫는 고독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예술가에게는 타분야의 종사자보다 고독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용기와 인내가 필요하다. 설익은 솜씨라도 진실된 자기를 찾아야 한다. 이 같은 작가의 자세만이 주위의 사랑을 받게 되며 그에 따른 고독은 고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1996년 임직순은 갑자기 심장병이 발생해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그곳에서 고요히 눈을 감았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이미 오래전 가톨릭에 귀의했던 것이다. 향년 76세. 화가는 가고 남도 빛의 색채만 곳곳에 남아 오래도록 피어있다.
설악동이 보이는 풍경. 1990.캔버스에 유채. 90.9 ×65.1㎝.
임직순은 한국서양미술이 근대에서 현대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한 획을 그었다. 그가 없었다면 근대와 현대 사이의 괴리는 블랙홀처럼 오랫동안 입을 벌리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는 야수파에서 시작해 인상파와 색채주의를 한꺼번에 뛰어넘어버렸다. 그리고는 한국남도풍의 색채주의를 완성시켜준 것이다. 신의 작품인 자연을 인간의 예술품으로 전환시키며 현란한 색채의 선율로 탄주해 이 땅에 걸어놓고는 그는 본질로 돌아간 것이다.
임직순이 즐겨 그린 ‘꽃과 소녀’는 임직순의 아니마(Anima)다. 아니마는 남성 속에 깃든 여성성이며, 아니무스(Animus)는 여성 속에 깃든 남성성이다.
모든 예술가는 남성과 여성으로 분리되기 이전의 상태를 추구한다. 그곳이 생명의 본질자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외로움은 분리감에서 비롯된다. 분리되기 이전의 상태가 복원되면 외로움은 치유된다. 영혼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의 원동력은 외로움이다. 외로움은 그리움을 부르고 그리움은 끝없이 아니마나 아니무스를 복구해내기에 혼신의 열망을 불태우는 것이다.
임직순의 가슴에 불을 지른 것은 진명여고 교복을 입은 한 소녀였다.
운창(雲昌) 임직순은 1921년 4월 19일 충북 괴산군에서 몰락한 집안의 3남으로 태어났다. 선친은 개화된 사람으로 도청에 다니는 공무원이었다. 집안은 몹시 어려웠지만 가족은 화목했고, 부모의 금슬은 평생 싸움 한 번 하지 않을 정도로 좋았다. 그의 순박한 마티엘과 밝고 온화한 색감은 이런 태생적 환경에서 연유됐다.
독서하는 여인. 1990년대. 캔버스에 유채. 38×65.5㎝.
그는 어렸을 때부터 막연히 그림이 좋아 혼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디에든 앉기만 하면 무작정 그림을 그려대곤 했다. 1931년 2월 온가족이 서울로 이주했을 때 그는 초등학교만 졸업한 채 점원으로 취직을 해 집안을 도와야 했다. 점원생활 틈틈이 신문 등을 들여다보며 그림을 모사해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슴에 외로움이 도발되면서 그 가슴이 그리움으로 가득 차버리는 순간이 왔다.
진명여고 교복을 입은 아름다운 소녀가 그의 시선에 예고 없이 뛰어든 것이다. 그 소녀로 인해 그의 아니마에 대한 그리움은 도발된 것이다.
"남의 집 점원생활을 하면서 신문지상에 그림이 보도되거나 사진이 게재되면 그려보곤 하던 시절이었어요. 그 모습에 반해서 어떻게든 어울리는 상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구요. 일본으로 가는 도강증(渡江證)을 어렵게 끊어 일본으로 가는 배에 오르는 계기가 됐지요. 그때가 17세였는데 일제식민 치하에 있을 때여서 시대가 변하더라도 꾸준히 할 수 있는 것이 미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임직순의 일본유학시절은 오직 그리움을 채우기 위한 열망으로 가득 찬 나날이었다.
가난을 견디며 온갖 힘든 일을 감내해야만 했다. 고국에서는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부칠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인 집에서 화장실 청소까지 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럴 수록 가슴 속 그리움은 더욱 빛났다. 이 무렵, 일본 야수파의 거장 하야시 다케시(林武)의 지도를 받아 가며 꼬박 밤을 새우곤 했다. 강렬한 원색과 거친 터치는 이때에 익혔다. 루오 전시회가 열릴 때에는 하루 종일 전시장에 머물곤 했다.
Y양의 상. 1978. 캔버스에 유채.
그는 스승 외에도 견문을 넓히기 위해 다양한 화가들에게 망설이지 않고 배움을 구했다.
마침내 1941년과 42년 19회, 20회 일본 선전에 출품해 일본미술학교 재학생으로서는 유일하게 연달아 입선을 했다.
그는 일약 일본화단의 유망주로 떠오른 것이다. 이때 출품한 작품은 정물이었고 그 대상은 꽃이었다. 이때부터 '꽃과 소녀'는 그리움을 채우기 위한 주된 소재가 되었다.
마침내 1943년에 귀국했고 그때부터 주로 여고의 미술교사생활을 하며 생활을 영위해나갔다. 미술교사로서의 임직순의 인품에 대해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숙명여고 49회 졸업생이라고 밝힌 '이영구'씨는 사후 10주기 전시장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선생님은 우선 인품이 좋으셨고 수업시간도 자유롭고 편안했어요. 그리고 실습시간에 누가 봐도 신통치 않은 제자의 그림을 보시고도 '넌 참 재미있게 그렸구나' 하시며 추켜세워 주시곤 하셨어요" 이처럼 모든 제자들에게 따뜻하고 친숙하게 대해준 예술가였다. 1957년 제6회 국전 때 대통령상을 수상했던 작품은 이때의 숙명여고 여학생을 모델로 그린 것이었다.
구름과 산. 1977. 캔버스에 유채. 38x45.5㎝.
"여자의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보지 못하는 생명의 힘을 나는 본다"
이 말은 자신의 '꽃과 소녀' 그림에 대한 비밀 고백이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빼어난 미인은 아니고 오히려 평범해 보인다. 그는 여성 내면에 잠재해 있는 생명의 힘을 포착해 이를 화폭에 옮기고 그곳에서 삶의 원형을 발견하는 것이다.
1960년 4ㆍ19가 일어나기 전 임직순은 용산에 화실을 두고 있었다. 개인전을 열 예정이어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다. 개인전이 끝나면 경제적으로도 조금 안정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임직순과 가족은 모두 단칸방에 살 정도로 가난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4ㆍI9 혁명이 일어나 개인전을 포기해야 했다. 그때 용산 화실도 정리해야 했다. 그림을 둘 곳이 없어서 그때 그린 많은 그림들을 아는 사람의 집에 맡겼는데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잃어버린 그림들에 대해 혈육을 잃은 것처럼 못내 아쉬워 했다. 그림은 그에게 생명 이상의 것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1961년 조선대학교 교수로 초빙돼 광주로 내려와 그의 남도시절이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어느 정도 규칙적인 생활 안에서 안정감을 가지고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그림을 그린 뒤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학교로 출근하는 생활이 시작됐던 것이다. 그 시절 임직순은 광주 무등산과 목포 유달산, 해남 대흥사, 정읍 내장사, 고창 선운사, 장성 백양사 등의 산천을 주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아니마가 소녀와 꽃에서 또 다른 형태로 옮겨간 것이었다. 즉 또 다른 '꽃과 소녀'였던 것이다.
드로잉. 1970.10.27. 파리에서.
이 시기가 남도 땅에서 그가 가장 풍성한 아니마를 추수하던 시기였다. 마침내 1967년에 한국문예상 미술본상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이듬해 신세계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그때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해 준 한 인물을 만났다. 당시 일본 미쓰비시 서울지사장이었던 나카가와씨였다. 나카가와 지사장은 임직순과 꾸준하게 교류하면서 작품을 제작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그림을 늘 현금으로 사서 궁핍한 가정생활에 숨통을 터줬고, 일본에서 개인전을 열도록 주선해주었다.
그렇게 마련된 일본 자생당화랑(資生堂畵廊) 전시는 대성공이었고, 그곳의 전시가 끝나자 임직순은 아내에게 '가난이여 안녕.'이라고 편지를 쓸 정도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세계적인 작가로 뻗어나갈 수 있도록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 언덕에 거처를 마련해주고 김치까지 조달 해 줄 정도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최고의 작가에게 바치는 당연한 대접이라는 찬사와 함께.
그렇게 프랑스에 머물던 어느날 한 제자에게 편지가 왔다. "선생님을 루르드에 초대 합니다." 수녀가 된 제자였고, 임직순은 루르드에서 일주일간 머물며 그림을 그렸는데 그것이 가톨릭 에 귀의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국으로 돌아와 조선대 퇴직 후 그는 장호원에서 마지막 열정을 불태웠다. 이 시절의 그림은 겉으로는 한없이 평온하고 그윽하면서도 안으로는 바닥까지 가 닿을 정도로 깊어 있었다.
그러나 그 경지에서마저도 그는 끊임없이 빛과 색에 대해 고민했다.
그 시절의 한 인터뷰에서 "빛과의 만남에 따라 수없이 변화하는 색깔을 추구하는 것이 나의 오랜 작업이다. 그러나 이제는 색채 자체에 변화하지 않는 영원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연이 보여주는 색이 아니라 본질적인 색을 찾고 싶다"고 고백한 것이다.
그 시절 급성간염으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는데 쉬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도 불구하고 캔버스와 물감을 병실로 옮겨와 환자복을 입은 상태로 그림에 몰두하곤 했다.
"화가가 매너리즘에 빠지면 그 생명이 끝"이라며 끊임없이 노력해 자신의 완성된 내면을 더욱 원숙하게 그림 속에 담아내곤 했었다.
그 무렵 제자들에게 "성실하게 살아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체력이 허락하지 않자 국전 개막식 테이프를 끊을 가위를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었다. 1996년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신부로부터 고해성사를 마지막으로 그는 마침내 그토록 그리워하던 자신의 원형을 복원해낸 뒤 비로소 본질의 세계로 돌아갔다. 임직순의 회화는 3단계의 변화를 거치며 우리의 시야에 축복처럼 펼쳐졌다. 1941년, 42년, 일본 선전 19회, 20회를 연달아 입선하던 시절부터 73년 프랑스 전시기간 까지가 첫 단계다.
이 시절 그는 어디선가 느닷없이 튀어나온 선물처럼 한국화단을 감동시켰다.
한국화단에 느닷없이 신색채주의를 선사한 것이다. 그 프랑스 전시이후부터 그는 색채를 더욱 그윽하게 이끌면서 형태를 더욱 단순화시켜나갔다. 추상의 형태를 약간 가미하면서 색채를 안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프랑스 전시 이후, 보나르의 진품을 손에 넣고서부터 감각과 색채가 더욱 무르익었다.
이 기간을 두 번째 단계로 부를 수 있다. 이 시기를 거쳐 조선대 퇴직 후 장호원 시기는 색채의 본질을 탐구하던 시기다. 이 시기에는 색채와 조형에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았다. 비로소 색채와 조형에서 자유로워진 것이다.
이 단계가 마지막 세 번째 단계다. 임직순은 이 세 단계를 거치며 한국화단의 안목과 목표지점을 단박에 격상시켜준 것이다.
임직순은 한국서양미술이 근대에서 현대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한 획을 그었다. 그가 없었다면 근대와 현대 사이의 괴리는 블랙홀처럼 오랫동안 입을 벌리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는 야수파에서 시작해 인상파와 색채주의를 한꺼번에 뛰어넘어버렸다. 그리고는 한국남도풍의 색채주의를 완성시켜준 것이다. 신의 작품인 자연을 인간의 예술품으로 전환시키며 현란한 색채의 선율로 탄주해 이 땅에 걸어놓고는 그는 본질로 돌아간 것이다. 시인ㆍ문예비평가
출처 : http://www.jnilbo.com/ 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