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튀르키예는 한국전쟁 때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약 1만5천 명)을 보낸
나라이다. 그리고 누구나 중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돌궐(突厥)이란 말을 들었을 것이다.
이는 투르크(Turk)를 지칭하는 한자이다. (투르크는 영어 발음이라기보다는 독일어 발음에
가깝다) 한때 고구려와 돌궐은 적대관계에 있었으나 돌궐과 고구려가 각기 당나라의 적이
된 이후로는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편의상 국가나 민족을 말할 때 터키 대신 투르크를
써도 되고 현재는 튀르키예를 써도 무방하다 하겠다.
튀르키예의 역사학자에 따르면 투르크라는 말은 형용사로서 “힘센, 용감한”이라는 뜻을
가졌다고 한다. 또한 한자 돌궐은 고대 투르크족의 본거지인 몽골의 알타이 지방에서는
돌궐이란 병사들이 머리에 쓰는 투구(兜㿡)를 뜻한다고 한다. 이는 돌궐족이 철을 잘
다루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우수한 철제 무기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몽골의 오르혼강 주변에서 발견된 돌궐의 오르혼 비(碑)에는 돌궐족의 중국에 대한
적대감이 잘 드러나 있으며 고구려와의 “형제 동맹”을 언급하고 있는데 고구려를
"벡클리(우리말 발음으로 하면 맥구려로 추정)"라고 불렀다. 그들은 자신들을
괵투르크(하늘의 용감한 투르크)라고 불렀다. 오르혼비의 비문은 돌궐어와 중국어가
같이 새겨져 있으며 지금은 1만 킬로이상 떨어진 튀르키예의 남쪽 지방인 가지안테프
지역에 있다고 한다. 이 지역은 공교롭게도 참혹한 피해를 주고 있는 지진의 진앙지
이다. (참고로 오르혼비는 1709년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포로가 된 스웨덴 장교 스트라
흐렌베르그에 의해 유럽에 전해졌으며, 1893년 덴마크 언어학자 톰센이 그 난해한
돌궐문의 판독에 성공했다)
기원전 4세기-1세기에 고대 중국을 괴롭혔던 흉노, 6세기-8세기의 돌궐, 셀주크
터키 (1077-1308) (1299-1922년) 오스만 터키가 그들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이동
하며 건설한 수많은 왕조 중에 대표적인 것들이다. 셀주크 터키는 이슬람교도의 사라센
제국을 멸망시켰지만 몽골의 침략으로 무너졌으며 오스만 터키는 1차대전 때 독일의
동맹국으로 참전하였다가 패전국이 되어 1922년 술탄(황제)이 강제로 퇴위당함으로써
종말을 고했다. 극히 최근인 1933년 동투르기스탄 공화국으로 반짝 독립을 선언했다
다시 중국의 수중에 떨어진 인구 2,600만(2020년) 신강(新疆)성 위그루족도 이들의 일파
이다.
“형제의 나라”에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튀르키예와 러시아와의 관계이다.
이것은 술탄(투르크의 황제)와 짜르(러시아의 황제)의 상대에 대한 질시와 경쟁심에 기인
하는 측면도 있다. 1568~70년 벌인 1차 러시아-터키 전쟁을 시작으로 1914~18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카프카스 전투까지 약 450년 동안 오스만과 무려 12차례나 전쟁을 치렀다.
잦은 전쟁은 오스만 몰락을 촉진했다. 또한 오스만 터키는 1529년과 1683년 두 차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인(독일어 비엔나) 공방전을 벌여 전 유럽을 떨게하였다. (1차는
오스만 승리; 2차는 유럽연합군 승리) 그리고 1923년 1차대전의 영웅 아타 튀르크
(게말 파샤)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오늘의 튀르키예 공화국에 이른다.
옛날 당나라와 그리고 근세 이후 러시와의 적대관계가 튀르키예로 하여금 한국전쟁 때
그렇게 많은 병력을 파견한 이유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