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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곡정제두 ,이건창으로 이어지는 정인보선생의
우리역사서...... 우리들의 필독서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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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년간 조선의 얼
조선사연구上(朝鮮史硏究)
지은이 | 정인보(鄭寅普)
역주자 | 문성재(文盛哉)
펴낸이 | 이세용
펴낸곳 | 우리역사연구재단
초판 인쇄 | 2012년 10월 22일
초판 발행 | 2012년 10월 29일
판형 | 신국판(152×225)
면수 | 848면
ISBN | 978-89-961975-8-4 94910 03910
가격 | 40,000원
책임편집 | 정재승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의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
《조선사연구》는 1935년 1월 1일부터 1년 7개월간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란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국학자 정인보의 한국고대사 저술이다. 저자인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1893~1950)는 대대로 조정에 출사(出仕)한 집안 내력과 조선 양명학을 대표하는 ‘강화학파(江華學派)’의 영향으로 오랜 기간 유가경전과 제자백가를 위시하여 불교, 역사, 언어, 민속 등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섭렵하여 ‘한국학의 독보적인 거성’으로 추앙받은 학자였다. 그는 일제 강점기인 1923년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의 전임교수를 맡은 이래 주로 한문학과 양명학 등 사상사 방면의 강의, 연구에 주력하면서 《조선고서해제(朝鮮古書解題)》(1931)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1933) 등 관련 저술들을 차례로 선보이는 한편 정약용(丁若鏞)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등 선인들의 문집 편찬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동양의 전통적인 지식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문, 사, 철(文史哲)에 두루 관심을 가지고 또 그 경계를 넘나드는 글쓰기를 즐겼으며 우리 역사 또한 깊이 연구하였다.
위당의 역사연구 참여와 《조선사연구》 저술의 배경
위당은 1915년쯤에 상해에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를 처음 만난 이래 직․간접적으로 교류를 가지면서 그의 고대사 연구에 지지를 보내고 그 자신 역시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실재, 고조선(古朝鮮) 및 한사군(漢四郡)의 위치, 전삼한과 후삼한에 대한 이원적 접근, 낙랑(樂浪) 유물의 진위 여부, 백제의 요동 진출 등에 대한 고증, 연구를 통하여 그 역사 주장들을 계승․발전시키는 데에 적극적이었다.
당시 일본의 관변 역사학자와 그들과 ‘맞장구’를 쳐 대는 국내 식민사학자들은 한일 합병 직후부터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구관제도조사(舊慣制度調査), 고적조사(古蹟調査), 고전복간(古典復刊) 등의 사업을 펼치는 등 식민사관에 입각하여 한국 고대사를 멋대로 재단하고 왜곡․조작함으로써 한민족의 역사와 ‘얼’을 말살하기에 바빴다. 1913년 일제의 고적조사단이 평남 용강군 해운면에서 이른바 ‘점제현 신사비(秥蟬縣神祠碑)’를 발굴하자 당시 일본인 식민사학자 금서룡(今西龍, 이마니시 류)이 “해당 비의 발굴은 한사군이 한반도 안에 있었다는 증거”라고 강변한 일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915년 3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펴낸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는 일제에 의한 역사 조작과 왜곡의 결정판이었다. 자신들이 멋대로 개발해 낸 식민사관에 힘입은 식민사학자들은 몇 년 후 평양을 낙랑군의 치소로 단정하고 그 후부터 공공연히 한민족의 역사를 타율․정체․당파적인 폐습의 본보기로 선전하고 나섰다. 당시 일제의 조선사 왜곡과 음모들에 대한 위당의 심경은 다음의 술회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나는 국사를 연구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내 선친께서 늘 “우리나라 역사책을 좀 잘 보아 두어라. 남의 것은 공부하면서 내 일은 너무들 모르더라”라고 말씀하셨건만 다른 노릇에 팔려 많은 세월을 허비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해인가 우연히 일인들이 《조선고적도보》랍시고 낸 ‘첫 책’을 보게 되었는데 그 속장 두세 쪽을 넘기기도 전에 벌써 ‘분’이 터지면서 “이건 가만히 내버려 둬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또 어느 해인가는 일인들이 이른바 “한일 병합 몇 주년”이랍시고 《경성일보(京城日報)》인지 《매일신보(每日申報)》인지에다 기념호를 내었는데 거기에 이른바 ‘점제비(秥蟬碑)’ 사진이 최근 몇 년 내의 대표적인 대사건의 하나로 올라왔다. …… 그것을 보고 나는 일본 학자들의 조선사에 대한 고증이라는 것이 저들의 총독정책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으며 그들의 음모를 “언제든지 깡그리 부셔 버리리라”라고 다짐하게 되었다.
위당은 그 일련의 날조극들이 조선사를 왜곡․조작하려는 일제의 식민정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판단에 따라1935년 1월 1일을 기하여 《동아일보》에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라는 제목으로 한민족의 역사를 소개하는 글을 연재하게 된다. 이 연재물은 원래 단군조선으로부터 이씨조선까지 5,000년을 관통하는 한민족의 역사를 전부 개괄한다는 야심찬 계획에 따라 1년 7개월 동안 총 282회에 걸쳐 계속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일장기 말쇄사건’을 빌미로 민족운동을 탄압하면서 1936년 8월 29일 《동아일보》는 강제로 정간되고 〈오천년간 조선의 얼〉의 연재 역시 중단되고 말았다.
《조선사연구》의 선행 판본
위당이 동아일보에 연재한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 독자들에게 다시 선을 보인 것은 민족해방을 맞은 후였다. 1946년《서울신문》에서는 위당의 동의를 얻어 1년 7개월 동안 연재되었던 내용을 단행본으로 묶어 《조선사연구》라는 제목으로 출간했고(이하 ‘서울본’) 당시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 두루 읽혔다.”
1983년 10월 31일 연세대학교 출판부에서는 《담원 정인보 전집(薝園鄭寅普全集)》(전6권)을 간행하면서 《조선사연구》(이하 ‘연세본’)의 상․하권을 해당 전집의 제3권과 제4권으로 출간하였다.
《조선사연구》에 나타난 위당의 ‘얼’ 역사관
위당은 《조선사연구》의 서문 격인 제1장 〈서론〉에서 고조선 역사 연구의 근본을 단군조선 이래로 5,000년간 면면히 이어져 온 ‘얼’에서 찾고 한민족의 역사는 바로 이 ‘얼’의 역사임을 강조했으며 ‘국학(國學)’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국학 연구의 기초를 실학(實學)에서 찾았다.
그는 이 ‘얼’이야말로 주체적인 자아이자 보편적인 인간 존재의 ‘고도리(가장 중요한 본질)’이며 빈 것과 찬 것,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가치의 척도라고 보았다.
위당은 역사 연구를 이 같은 보편타당한 진리이자 가치로서의 ‘얼’을 탐구하는 과정으로 인식하고 5,000년 한민족의 역사에서 민족의 ‘얼’을 찾아내고 가려내어 외세로부터 자아를 지킬 역량으로 승화시켜야 하며 그 낱낱의 역사적 자취들을 탐구하여 역사의 골간을 이루는 얼의 큰 줄기를 찾는 것이 역사학자의 소명이라고 보았다. 그의 ‘얼’ 사관은 “동시대에 서유럽의 역사 발전 법칙을 한국사에 기계적으로 적용한 사회경제사학이나, 민족정신과 신념을 도외시하고 개개의 사실 규명에 치중한 실증주의 사학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위당은 이 같은 인식에 따라 《조선사연구》에서 한국의 역사를 한민족과 이민족의 투쟁을 중심으로 인식․기술하면서 그 투쟁의 역사 속에서 의연히 살아 있는 민족의 ‘얼’을 찾으려 했고, 또 일제의 타율성론을 타파하기 위한 애국적, 민족적 목표를 가지고 한국고대사 연구를 실천으로 옮겼던 것이다. 나라를 빼앗겨도 정신만 굳게 지키면 언젠가는 국권을 회복할 수 있다고 역설하는 이러한 역사관은 어떤 의미에서는 박은식(朴殷植)의 ‘국혼(國魂)’, 신채호의 ‘낭가사상(郞家思想)’, 문일평(文一平)의 ‘조선심(朝鮮心)’ 등의 민족주의 정신사관과도 일맥으로 상통하고 있다.
위당의 역사 접근방법
① 문헌고증에는 정조(正祖)시대 이래로 조선 실학이 사용해 온 훈고학적 방법론을 원용하고 ② 기존의 전쟁사, 교섭사 중심의 역사 접근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 풍속, 언어, 문예 전반에까지 시야를 넓혔다.
③ 자신의 해박한 학식과 현지 답사의 경험을 무기로 삼아 단순한 문헌고증으로 그치지 않고 언어학, 지리학, 금석학적 분석까지 병행함으로써 보다 객관적이고 다각적인 검증을 지향함으로써 초기 민족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④ 문헌고증에 사용되는 사료는 선택과정에서부터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야사, 소설 등 허구성이 강한 문헌자료들은 지양하는 반면 정사, 지리지 등 공신력이 높은 사료들을 주로 활용함으로써 고증의 객관성, 엄정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⑤ ‘실증주의’를 전가의 보도처럼 떠드는 식민사학자들의 도발을 회피하지 않고 당대의 어느 학자보다도 치열한 열정과 노력으로 문헌고증에 최선을 다하였다.《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삼국사기(三國史記)》 등 역대 국내외 사서와 문집들은 물론이고 멀게는 황종희(黃宗羲), 고염무(顧炎武), 증국번(曾國藩) 등의 명․청대 학자들로부터 가깝게는 양계초(梁啓超), 장병린(章炳麟) 등의 당대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자들의 “줄잡아 130여 종류가 넘는” 방대한 저술과 주장들을 고증에서 활용하고, 출전(出典)도 확실히 밝히는 등 마무리에까지 각별한 신경을 쓴 것은 그 같은 노력의 일환이었다.
위당 사학(史學)의 치밀한 문헌 고증과 유물 검증
위당은 약 1년 7개월 동안 〈오천년간 조선의 얼〉을 연재하면서 단재에 의하여 처음 제기되었던 주요한 역사 주장들, 즉
① 고대사 인식체계를 기존의 ‘단군-기자-위만/삼한’이 아니라 ‘고조선-부여-고구려’ 구도로 이해한 점,
② 중국 사서의 주신(州愼), 숙신(肅愼), 직신(稷愼), 식신(息愼)을 ‘조선’과 동일한 이름으로 이해한 점,
③ 권람(權擥), 홍여하(洪汝河), 신경준(申景濬), 이익(李瀷) 등의 학맥을 이어 고조선의 강역과 ‘한사군(漢四郡)’의 소재를 한반도가 아닌 요동(遼東)지역으로 파악한 점,
④ 한나라 무제[漢武帝]를 전후하여 예맥조선(濊貊朝鮮)과 위만조선(衛滿朝鮮) 2개의 조선이 병립했다고 본 점,
⑤ 고조선 여러 겨레들의 언어가 서로 일치하고 통했다고 본 점,
⑥ ‘북삼한(北三韓)’이 고조선의 해체로 한반도로 남하하여 ‘남삼한(南三韓)’을 이루었다고 본 점,
⑦ 백제의 요서(遼西) 경략을 주장한 점 등에 대한 논의를 발전시키는 한편, 거기서 더 나아가 그 주장들을 실증적으로 뒷받침하는 데에 매진하였다.
《조선사연구》에서 위당이 분석, 고증에 주력한 쟁점들은
① 단군의 위상 문제:
위당은 첫 장을 열면서 “조선의 시조 단군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었다”라고 선언하였다. 그의 이 선언은 일제의 단군조선 부정론(檀君朝鮮否定論)에 대항하기 위한 것으로 신화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단군(조선)을 역사의 범주로 귀속시켜 본격적인 역사 연구의 대상으로 재인식하였다. 그는 ‘단군’이 특정인의 이름이 아니라 ‘천제의 아들[天帝子]’에 비견되는 최고 통치자에 대한 존호이며, 그 ‘역년(歷年)’ 역시 특정인의 생물학적 수명이 아니라 해당 왕조 전체의 존속기간을 가리킨다고 해석하였다.
②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 부정:
위당은 기자의 무덤이 박현(薄縣), 몽현(蒙縣) 등 중국 하남성(河南省)에 있음을 근거로 기자가 조선으로 건너왔다는 기자동래설을 정면으로 부정했으며, 기자가 주나라 무왕[周武王]의 책봉을 받아들여 ‘조선후(朝鮮侯)’가 되고 주나라에 입조했다는 《사기》의 기자책봉설(箕子冊封說)에 대해서는 은(殷)나라에 대한 절개를 목숨보다도 무겁게 여겼던 기자의 위인이나 원수의 나라인 주나라와 모든 관계를 끊고 떠난 기자가 그 먼 거리를 다시 되돌아갔다는 말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이 같은 주장들 자체가 《사기》나 기타 중국 문헌들의 사료로서의 공신력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보았다. 조선의 도읍 왕검성(王儉城)에 대해서는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요동군의 험독(險瀆), 즉 지금의 요녕성(遼寧城) 해성현(海城縣)으로 비정하였다.
③ 삼한의 성격:
‘삼한(三韓)’은 지명이 아니라 ‘한(汗)’이나 ‘간(干)’처럼 ‘크다’ 또는 ‘임금’이라는 뜻을 가진 일종의 존호이며 이것을 지명으로 오해하여 고조선과 별개의 정치세력으로 봄은 잘못이라 하였다.
④ 요수난하설(遼水灤河說):
위당은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요수(遼水)’를 지금의 하북성 영평(永平) 일대를 흐르는 난하(灤河)로 비정하였다. 위당의 이 같은 ‘요수난하설’은 1960년대에 북한의 역사학자 리지린에 의하여 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보충, 개진되었다.
⑤ 한사군 설치 시점 및 위치:
위당은 《사기》, 《한서》, 《후한서》 등의 기록 검토를 통하여 원봉(元鳳) 6년(기원전 111) 이전에 낙랑(樂浪), 현토(玄菟), 임둔(臨屯) 3개 군이 먼저 설치된 뒤를 이어 진번(眞番)이 설치되었으며, 그 위치 역시 진번은 대릉하(大凌河) 부근, 임둔은 초자하(哨子河) 인근, 현토는 우북평(右北京) 부근으로 모두가 한반도 너머에 있었으며 낙랑도 그 치소를 요동의 험독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위당은 관할 지역이 수시로 변동되었던 한사군은 고정된 땅을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한서》〈지리지(地理志)〉에 열거된 수많은 한사군의 군현들은 “이름만 있고 실체는 없었다[有名無實]”라고 주장함으로써 한사군이 한반도를 400여 년 간 지배했다는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위당이 한사군의 조선 점유를 “한사군 전쟁[漢四郡役]”으로 고쳐 부른 것도 바로 이 같은 이유에 따른 것이었다.
⑥ 봉니 조작:
⑦ 용강 석비 이동 가능성:
⑧ 효문묘 동종 조작, 이동 가능성: 그는 ‘진나라 때의 창[秦戈]’, ‘오수전(五銖錢)’, ‘임회태수(臨淮太守) 관인’ 등을 예로 들면서 출토된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아무리 진품이라 해도 낙랑군의 유물이라고 섣불리 단정을 내리기 전에 쌍방의 문헌을 면밀히 참조해서 “그것이 원래 있던 자리가 한반도가 아니라면 일단 최종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옳다”라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그러면서 그런 최소한의 검증도 없이 무턱대고 그것을 역사적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학자의 자세가 아니라고 질타하였다.
《조선사연구》에서 발휘된 역사언어학적 안목
《조선사연구》에서 단연 이채를 띠는 부분은 역시 고조선과 한사군, 삼한 소국들, 삼국시대의 지명, 인명, 관명에 대한 독특한 역사언어학적 접근, 분석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조선’이라는 이름에 대한 고증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위당은 국내외의 다양한 전적을 섭렵함으로써 축적된 정보들을 바탕으로 중국 사서 속의 ‘식신(息愼), 숙신(肅愼), 직신(稷愼), 주신(珠申)’ 등과 마찬가지로 ‘조선’이 우리말의 ‘뜻[訓]’을 옮긴 것이 아니라 ‘발음[音]’을 전사(轉寫)한 이름이라는 결론을 도출해 내고 만주어와의 비교분석을 통하여 ‘조선’이 ‘관경(管境)’을 뜻하는 만주어 ‘주신’과 계통적으로 친연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졸본(卒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연해주(沿海州) 우수리스크(Usurisk) 근처의, 지금은 그 지역을 흐르는 강과 함께 ‘수분(하)’로 불리는 이곳은 해당 지역을 지배하던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대 이후로 솔빈(率賓)-솔빈(率濱)-휼품(恤品)-소빈(蘇濱)-속빈(速頻)을 거쳐 지금의 수분(하)(綏芬河)로의 변천을 거쳤으나 이 이름들은 서로 다른 한자를 차용하고 있지만 초성(初聲)이 동일한 치조음(齒槽音) 계열의 [s-]이거나 [ʃ-]이고, 중성(中聲) 역시 우리 독음으로는 [-o-]이지만 중국에서는 보통 [-u-]로 읽혀져서 서로 간에 큰 차이가 없다......
위당의 고대사 연구서 《조선사연구》의 의의
위당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사연구》의 저술과 신문 연재, 대중을 상대로 한 여러 차례의 역사 강연 등을 통하여, 일제의 역사왜곡으로부터 우리의 역사, 우리의 ‘얼’을 지키고자 진심으로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였다.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역사학계는 이웃나라의 역사 왜곡으로부터 우리의 역사와 ‘얼’을 지키기 위하여 과연 얼마만큼 노력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반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본문: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上〉
- 다시 한 번 더듬어 보라. 고조선이 다스리던 강역이 저토록 광대한 데다 대대로 이어진 정치제도 역시 군사를 훈련시키고 세제를 정비함에 있어 서로 다른 발전의 길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풍속도 일치하고 언어도 같았다는 증거들이 이처럼 잘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지금 눈으로 그려 보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에게는 당시의 광경들이 뇌리에 역력하게 되살아나리라.(제4장)
- 숙신은 바로 조선이다. 숙신은 초기에 ‘조선’의 발음을 한자로 옮긴 것으로 고조선의 발상지 즉 고조선의 옛 도읍 일대를 가리키므로 웅심산과 압록수 즉 백두산과 송화강에 해당한다. (제7장)
- (주몽이) 졸본에 도달하기 전에 모둔곡을 지났다고 했는데 여기서의 '모둔'은 '모단'이라는 발음이 변형된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모둔곡의 '곡'은 비류수를 '비류곡'이라고 쓴 것처럼 하천을 뜻하는 말이다. 말하자면 모둔곡은 바로 모단강을 가리키는 셈이다. (제7장)
- 고조선의 일부 지역만 지배했던 위씨조선을 마치 고조선 전역을 지배하기라도 한 것처럼 곡해한 결과 “그 땅을 네 군으로 삼았다”는 부분을 조선이 사방으로 단 한 조각 땅도 남기지 못한 것으로 착각하고 한사군의 위치를 고증할 때에도 억지로 그 억측에 끼워 맞추기에만 급급하였다. (제9장)
- 한무제조차도 동쪽으로 가장 멀리까지 간 곳은 갈석이 고작이었다. 그러니 그보다 훨씬 동쪽에 있었던 한반도, 그것도 지금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평양에 한나라 황제를 기리는 묘당을 세웠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제9장)
- (《한서》가 저술되던) 당시만 해도 요동만의 바다 면적이 그다지 넓지 않아 동쪽과 서쪽이 서로 마주보일 정도로 가까워서 번갈아 바다를 건너가 영유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중국의 역사가들은 이 같은 내막도 모르면서 진나라 장성의 기점까지 압록강 동쪽으로 끌어당기려고 헛수고를 한 셈이다. (제9장)
- 남의 말을 쉽게 믿는 우리 학자들은 근래에 평양, 봉산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철석같이 믿으면서도 고문헌 속의 수많은 증거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들을 통하여 그 진위를 구명하면 얼핏 진실처럼 보이는 부분들도 각문에 언급된 내용만 자세히 살펴도 ‘평양은 낙랑이고 봉산은 대방’이라는 식의 허튼 주장은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제9장)
- 백제의 요해 출병은 남북의 온 조선이 한나라에 공동으로 대적하고자 했던 우리 겨레의 유구한 역사에 비추어 볼 때 대단히 중대한 사건이었다. 백제는 이 출병이 있은 후로 한편으로는 요서를 점령하고 한편으로는 오월(吳越)을 공략하는 등, 반도의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중국 땅까지 영토로 개척하고 원격통치를 하였다. 그러니 이 얼마나 기특한 일인가? 그 같은 기백도 따지고 보면 바로 이 요해 출병에서 비롯된 셈이니 그것 하나만으로도 대서특필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할 것이다. 물론 이처럼 훌륭한 백제의 기백은 저 ‘유구한 역사의 혈맥[久遠脈]’이 끊임없이 힘차게 약동한 결과이리라. (제16장)
• 지은이 소개
정인보(鄭寅普, 1893~?)
근대 국학자, 민족사학자, 독립운동가, 시조시인, 언론인, 정치인. 본관은 동래, 호는 담원(薝園), 위당(爲堂).
1893년 서울 출생. 한학 수학 후 1910년 조선 강화학파의 거두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의 제자가 되었다. 1910~1914년 중국 안동, 봉천, 서간도, 상해 등을 수시로 다니며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김규식, 문일평, 홍명희 등과 교유. 독립운동 비밀결사조직인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였다. 1920년대 연희전문 교수와 동아일보, 시대일보 논설위원으로 활발한 저술활동 벌였다. 1930년대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역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우리고대사 왜곡과 말살에 분노, 1935년~1936년 동아일보에 <오천년간 조선의 얼> 제목으로 우리역사를 집필, 연재하였다. 위당은 고조선의 전역사를 우리민족사로 체계화하였으며, 단재(신채호)사학을 계승, 발전시켰다. 해방 후 국학대학 초대학장, 대한민국 초대감찰위원장을 지냈다. 삼일절, 광복절, 개천절, 제헌절 등 주요 국경절의 노래말을 지어주신 분이다. 1950년 6.25동란으로 납북.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저서: 《조선고서해제》(1931), 《양명학연론》(1933), 《조선사연구상하권》(1946-1947), 《담원시조집》(1948), 《담원국학산고》(1955), 《담원문록》(1967), 《담원정인보전집》(1983), 《담원문록(번역본)》(2006).
• 역주자 소개
문성재(文盛哉)
1965년생. 1988년 고려대 중문과 졸업 후 1997년 중국 남경대에서《심경 극작 연구》로, 2002년 서울대에서 《원간잡극 30종 동결구조연구》로 각각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역서로는 《중국고전희곡 10선》, 《동아시아 기층문화에 나타난 죽음과 삶》,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한국의 책 100 《고우영 일지매》(중문, 1-4), 한국학술진흥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도화선》,《진시황은 몽골어를 하는 여진족이었다》, 지만지판 《간전노》, 《회란기》, 《경본 통속소설》, 《한국의 전통연희》(중문), 《정역 노자》(근간) 등이 있으며 케이블 T채널에서 제작한 《북방대기행》(5부작)에 학술자문으로 출연하였다. 논문으로는 〈현대중국의 연극무대〉, 〈중국의 종교극 목련희〉, 〈명대 희곡의 출판과 유통〉, 〈안중근 열사를 제재로 한 중국연극 ‘망국한 전기’〉, 〈원대 잡극 곡백에서의 ‘래’〉,〈원대 잡극 속의 몽골어〉, 〈원대 잡극에서의 정도부사 ‘쇄’ 용법〉,〈근대중국어의 ‘S'O'(야)사’ 비교구문 연구〉 등이 있다.
• 차례
조선사연구上 (朝鮮史硏究)
〈우리국학총서(國學叢書)〉를 펴내며
해 제
일러두기
1. 서 론
2. 시조 단군
3. 고조선의 큰 줄기
4. 특수한 상고시대의 정치와 풍속
1. 고조선의 정치제도
2. 국방과 재정
3. 풍속
5. 단군조선의 전쟁사
6. 처음 겪은 흥망
1. 진개(秦開)의 내침
2. 비왕(否王)과 요동
3. 위만의 난
4. 준왕의 순국과 ‘말한’의 남하
7. 조선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부여
1. 천제의 정통성을 계승한 부여
2. 해모수를 왜 단군이라고 했는가?
3. 세계(世系)와 판도
8. 예인의 수복운동과 한나라·위만조선의 교체
1. 위씨조선과 한나라의 대립
2. 조선 수복을 위한 예인들의 지난한 노력
1) 한나라와의 직접 통교를 통한 이간책
2) 남려(南閭)의 항복 3) 한·위의 전쟁
3. 성기(成己)의 살신성인
4. 최후의 승자 한나라
9. 한사군 전쟁
서 론
1. 한사군 초기의 진상
2. 한사군의 위치
1) 진번 2) 임둔 3) 현토 4) 낙랑
5) 점제현신사비의 실체 6) 평양에서 출토된 와당과 봉니의 실체
7) 황해도 봉산(鳳山) 출토 묘전(墓塼)의 실체
8) 봉니, 와당 조작의 이유
【부록】 ‘효문묘 동종’ 변증
10. 풍운이 이는 삼국
1. 삼국 건국 직전의 조선
2. 고구려의 건국
1) 동명성제 2) 고구려 초기의 강역과 백성
3. 신라
1) 진한 육부와 혁거세왕 【부록】 신라 화백(和白)제도와 시조 혁거세왕
2) 신라의 국명과 금성의 유래 3) 동옥저와의 내왕
4. 백제의 건국
1) 비류와 온조의 남하 2) 온조왕의 업적
12. 마한의 멸망과 주근(周勤)의 죽음
1. 말한의 유지를 품고 사라져 간 후예들
2. 꺼진 불씨를 되살리려 애쓴 주근(周勤)
13. 고구려의 발흥
1. 유리왕의 왕위 계승과 고구려의 상무정신
2. 고구려의 민정과 군정
1) 선비족과의 충돌 2) 부분노(扶芬奴)의 지략
3) 고구려의 오부 4) 고구려의 기병
5) 형법 6) 관등제도
3. 고구려의 영토 개척
1) 건국 초기의 양상 2) 천도
4. 패퇴당하는 한군
5. 부여를 연파하다
14. 성장하는 신라
1. 선정과 양위의 미덕
2. 도구의 제작과 농상업의 발전
3. 신라의 전장제도
1) 육부의 정비 2) 관등제도
3) 염찰법(廉察法)과 원죄(原罪) 관련 법규
4. 국방 혁신과 살신애국의 기상
15. 가야국
1. 건국 설화
2. 강을 사이에 둔 신라와의 충돌
1) 최초의 충돌 2) 가야 국명의 유래
16. 백제 초기의 영토 확장
1. 더욱 굳어진 내부 결속
2. 백제의 국가제도와 상무정신
1) 고구려와 공통된 오부제도 2) 농업 생산력 발전
3) 백제의 영토 확장 4) 와산 전투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200열사’
5) 기루왕의 왕위 계승과 나·제 국교 회복 6) 백제의 관등제도
17. 고구려의 대한(對漢)전쟁과 여제(麗濟)연합
1. 모본왕의 웅대한 경략
1) 대무신왕 이래의 대한 관계 2) 한인의 추방
3) 모본왕의 즉위와 치적 4) 재위 6년 만에 명성을 떨친 모본왕
【부록】 《후한서》 〈제동전〉 고증
2. 요서에 쌓은 10개의 성
3. 태조대왕은 어떠한 군주인가
4. 을사년의 요동 전쟁
1) 중국 사서에만 전해지는 태조대왕의 전적
2) 을사년 전쟁의 득실
5. 한사군의 대퇴각
1) 화려성의 위치 2) 험지 선점의 문제
3) 한군(漢軍) 격퇴
6. 백제 기루왕의 요해 출병
7. 부여왕의 배반
8. 태조대왕 최후의 업적
쉽게 풀이한 《조선사연구》 뒤에
번역을 마치면서
위당 선생 연보
찾아보기
출처..http://www.bongwoo.org/xe/board/4882
오천년간 조선의 얼
조선사연구 下(朝鮮史硏究)
지은이 | 정인보(鄭寅普)
역주자 | 문성재(文盛哉)
펴낸이 | 이세용
펴낸곳 | 우리역사연구재단
초판 인쇄 | 2013년 4월 1일
초판 발행 | 2013년 4월 5일
판형 | 신국판(152×225) 양장
면수 | 959면
ISBN | 978-89-961975-9-1 94910
가격 | 45,000원
책임편집 | 정재승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의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
한글역주본 완간
1. 《조선사연구》 하권의 체제상의 특징
하권에서는 1936년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쇄사건으로 위당 선생이 ‘오천년간 조선의 얼’의 원고 집필을 중단할 때까지 연재되었던 제17장 〈기루왕 이후 백제와 신라〉로부터 제25장 〈신라의 내정과 외치〉에 이르는 고구려․백제․신라 관련 역사를 수록하고, 추가로 세 나라의 종교․학문․제사․예문․불교의 유래와 발전에 대하여 문화사적 관점에서 접근을 시도한 〈전고 갑〉을 제27장에 수록하고 있다. 또, 그동안 초고 형태로 보관되었던 〈고구려의 패업과 영락태왕〉 부분을 제26장으로 새로 배치하였다. 그리고 부록의 형식으로 위당 선생이 고대사 연구에 투신하게 된 계기와 일제의 역사왜곡을 경계하는 당부의 말을 담은 〈조선사연구 부언〉, 광개토대왕 능비 비문에 대한 연구논문이라고 할 수 있는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릉 비문 석략〉, 고구려 관명에 대한 글인 〈태대형․대형․소형에 관하여〉를 모두 수록하였다. 역자는 이와 함께 최초의 발견 이래 위당 선생을 거쳐 100여 년이 흐른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도 주요한 관심사가 되고 있는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릉 비문〉에 대하여 문법학․어원학적 측면에서 분석․보완한 역주 내용을 추가로 수록하였다.
하권에서 체제상으로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무엇보다도 지금 이 순간까지도 여전히 논란이 거듭되고 있는 광개토대왕과 그 능비에 관한 내용이 집중적으로 소개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본서 제26장 〈고구려의 패업과 영락태왕〉과 순한문체 연구논문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릉 비문 석략〉, 그리고 역자가 새로 역주한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릉 비문〉이 그것이다. 위당 선생이 단재 선생 이후로 유일하게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우리 역사 왜곡․조작에 맞서 이 일련의 논문을 집필하여 반론을 제기한 이래로 70여 년이 지나는 동안 한․중․일 세 나라에서 광개토대왕과 그 능비에 대한 연구와 비문 해석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양적․질적으로 많은 진전이 있었다. 따라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의 발견이라는 측면에서는 〈고구려의 패업과 영락태왕〉과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릉 비문 석략〉에서 특기할 만한 내용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몇 가지 부분에 있어서는 지금에 와서도 주목할 만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고구려의 패업과 영락태왕〉에 관하여
위당 선생의 《조선사연구》는 〈동아일보〉 일장기 말쇄사건으로 제25장 〈신라의 내정과 외치〉를 마지막으로 사실상 중단되었다. 이 〈고구려의 패업과 영락태왕〉 부분은 원래 위당 선생이 〈동아일보〉에 연재해 온 ‘오천년간 조선의 얼’의 기고문으로 집필된 것이다. 그러나 1936년 8월 29일 갑작스러운 〈동아일보〉의 정간으로 ‘오천년간 조선의 얼’의 연재가 중단되면서 초고 상태로 다른 곳에 보관되었으나, 1947년 〈서울신문〉을 통하여 그동안의 연재 내용을 《조선사연구》라는 제목으로 정식 출판할 때에도 미처 수록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83년 무렵 연세대학교에서 위당 선생의 저술․시작들을 수집하여 엮고 《담원 정인보 전집》이라는 제목으로 정식 출판할 때 《조선사연구》의 마지막 장으로 수록되면서 비로소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이 장의 기술 내용은 고국원왕 시기의 국내외 정세, 고구려의 서진과 부여회복군의 동진, 신라와의 외교관계, 영락연간의 업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광개토대왕에 관한 기술 부분의 경우 ‘영락’이라는 연호의 역사적 의의와 함께 그의 대외정벌, 백제 정벌, 거란 토벌 등의 대외 정벌 활동을 기술하는 한편 그 이동 경로를 고증하는 데에 역점을 두어 지금의 학계에서도 참조할 만한 내용들이 많다. 단적인 예가 광개토대왕의 정벌 경로를 확인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단서가 되는 ‘염(나)수’의 위치에 대한 고증이다. 위당 선생은 염(나)수가 지금의 눈강인데 사학자들이 그 위치를 고증하는 과정에서 혼선을 빚게 된 결정적인 이유로 역대 중국 역사가들이 요동 쪽 해구의 존재만 알고 북동해 저편 해구의 존재는 전혀 알지 못했던 점을 꼽고 있는데, 지금의 학자들도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다고 본다.
3.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릉 비문 석략〉에 관하여
위당 선생은 이 무렵 〈고구려의 패업과 영락태왕〉과는 별도로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릉 비문 석략〉이라는 제목의 고구려사 연구논문을 집필하였다. 위당 선생의 제자이자 연세대 교수였던 민영규 선생의 논문에 따르면, 위당 선생이 이 논문을 집필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1930년대 당시 식민사관에 입각한 일제 관변 학자들의 광개토대왕 비문에 대한 억지해석에서 찾을 수 있다.
위당 선생은 이 논문에서 능비 비문의 문체상의 특징에 대해서 먼저 소개한 후 문헌 고증과 현지 지형에 주의하면서 해당 비문을 총 7개 단락으로 나누었다. 여기서 그는 “來渡海”, “百殘聯侵新羅”, “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등 그 후로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는 주요 쟁점들에 대하여 정밀한 분석을 시도하고 말미에서는 일제 관변학자들의 이 같은 억지해석이 “세상이 어지러운 데다 예문의 법도가 사라져 이런 글을 읽는 일이 드물어지고 거기다 편견과 사심까지 끼어들어 멋대로 재단하다 보니 문맥이 뒤틀리고 의미도 딴판으로 변해 버리고 만 것”이라고 질타하였다.
이 논문은 능비 비문의 문구 해석을 놓고 그 후로 많은 학자들에게 계발과 논쟁의 여지를 남겼다.
4. 〈전고 갑〉에 관하여
당대 최고의 국학자로서의 위당 선생의 위상이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전고 갑〉 부분이다. 위당 선생은 여기서 한․중․일 세 나라의 고금의 문헌․전적들을 폭넓게 활용하여 문화사적 측면에서 고구려․백제․신라 세 나라의 전통신앙․교육제도․국가제의․문학예술․천문역법․문자언어․불교신앙 등의 문화적 현상과 제도들의 유래 및 발전 양상에 대하여 상당한 지면을 활용하면서 심도 있는 탐구와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중국의 ‘삼론종’ 확립에 큰 역할을 한 고구려승 도랑, 불교를 신라에 전파한 아도 등, 당시까지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던 불교 승려들과 불교 경전 및 교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그의 학문적 깊이와 통찰력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5. 〈정무론〉- 우리 고대사 조작을 비판하다
하권에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부분은 ‘조작을 바로잡는 글’, 즉 〈정무론〉이다. 위당 선생이 한국 고대사 연구에 나서게 된 동기는 일제 치하의 어용학자들이 식민사관에 입각하여 우리 역사를 조작하려 하는 시도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물론 《조선사 연구》 자체가 그 같은 위당 선생의 역사적 인식을 반영한 책이지만 이 같은 인식이 집중적으로 반영된 부분이 바로 〈정무론〉이다. 위당 선생은 당시의 관변 학자들이 낙랑 유물을 조작했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정무론〉을 써서 일제 식민사관 사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조작․왜곡을 경계하였다. 위당 선생은 중국 송대에 옛 비석을 옮기거나 관중 땅의 당대 ‘석경’이 강남의 필원에게 소장된 일, 북조시대의 조각상이 강남의 손성연에게 소장된 일, 촉 땅의 조각상이 남조에 전해진 일 등을 예로 들어 운반․이동이 가능한 물건들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수시로 위치 변동이나 ‘원산지 조작’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에 지금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그것을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다고 믿으면 곤란하다고 보았다. (“그 글귀가 하도 반반해서 그 돌을 옮겨 왔다는 것이 너무도 티가 나는데도 그저 ‘여기가 옛 점제이다’라느니 ‘여기가 점제현의 치소 자리이다’라느니 하고 우기고 있으니 어쩌면 이다지도 방자하고 거리낌조차 없을 수가 있단 말인가!”) 위당 선생은 또 이런 말로 유물 조작의 가능성을 경계하였다.
“…… 사방팔방으로 나가서 그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 언덕이나 고랑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그 속에 위조물이나 조작거리를 슬쩍 끼워 놓은 다음 자기 궤변을 합리화하려고 든다. 심할 때에는 일부러 그런 것들을 묻어 놓고 남들이 발굴하게 하기도 하고 일부러 그런 것들을 버려 놓고 남들이 발견하게 하기도 한다. 또, 어떨 때에는 일부러 그것에 묻은 흙을 털고 닦은 다음 그 글귀를 판독하는 척하다가 뛸 듯이 기뻐하면서 ‘정말 이 땅에서 이런 물건이 나왔네?’ 하고 떠들어 댄다. 그렇게 하면 그 광경을 보는 사람은 청동기나 비석 따위가 줄줄이 쏟아지는 것을 지켜보다 보면 아무리 ‘안다 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전혀 의심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 불순한 목적으로 그런 짓을 벌이다 보니 오로지 자신의 그런 목적을 이루기에만 바쁠 뿐 옳고 그르고는 아예 따지지도 않는 것이다.”(842-843)
“아무 영문도 모르는 사람들은 저들의 작태를 보면서도 저(어용학자)들의 작태를 보면서도 그저 ‘옛 것을 찾는 고생을 하는구나’, ‘역사 고증을 할 준비를 하나 보다’ 하고 여기면서 되려 그들 편을 들어 ‘남들은 우리 역사를 찾는 데에 돈과 공을 이 만큼이나 쏟아붓고 있는데 예전에 이런 일에 종사한 우리네 학자들은 대체 해 놓은 것이 뭐야?’ 하고 개탄만 할 뿐 저들이 그 일에 매달리는 것이 남의 옛 역사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남의 옛 역사를 허물려는 짓이며 남의 역사를 고증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남의 역사를 없애려는 짓인 줄은 모르기 일쑤이다.”(844)
6. 끝으로 하는 말
과학과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과 변화를 거듭하는 21세기를 살면서 새삼 느끼는 것은 우리가 그동안 ‘불변의 진실’이라고 굳게 믿던 사실이나 가치들도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의 세계도 그러하다.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는 유물이나 역사기록만을 역사적 진실 그 자체라고 단정하는 것쯤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진정한 역사학자라면 거기에서 머물지 않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것들이 ‘누구’에 의해 ‘어떤 경로’를 통하여 ‘그 자리’에 존재하게 되었는지 거침없이 반문하고 또 기존의 결론과 정설에 끊임없이 도전할 줄 알아야 한다.
위당 선생은 《조선사연구》에서 역사는 곧 민족 ‘얼’의 발현이라고 보았다. 그동안 우리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주로 역사방법론에만 집착하여 위당 선생의 ‘얼’ 사관이 “민족 내의 계급투쟁을 간과했다”라거나 “극단적인 정신사관이었다”라고 비판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물론, 《조선사연구》에서 위당 선생이 제기한 주장이나 관점들 중에서 문제나 논란이 되는 부분이 있다면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조선사연구》로 상징되는 위당 선생의 한국 고대사 연구와 그 성과들은 그것이 위당 선생에 대한 긍정이었든 부정이었든, 심지어 위당 선생에 대한 표절이었든 간에 이후의 남․북한 학자들이 역사관을 정립하고 방법론을 모색하는 데에 많은 계발과 자극을 주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당 선생은 훌륭한 역사학자이며, 또 역사학자로서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으니, 그의 ‘얼’ 사관과 연구 업적에서 수용하고 계승할 것들이 있다면 당연히 그것들을 오롯이 인정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우리 이웃나라는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라거나 “독도가 일본 땅이다”라는 식의 강변을 서슴지 않고 있다. 거기에는 학자로서의 자존심도 객관성도 보이지 않는다. 자신들이 정한 행동강령에 따라 우리 역사를 자의적으로 왜곡하고 또 그것을 기정의 사실로 만들려고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위당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오천년간 조선의 얼’ 집필과 신문 연재, 역사 강연 등을 통하여, 일제의 역사왜곡으로부터 우리의 역사, 우리의 ‘얼’을 지키고자 진심으로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였다.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역사학계는 이웃나라의 역사 왜곡으로부터 우리의 역사와 ‘얼’을 지키기 위하여 과연 얼마만큼 노력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반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글: 문성재)
• 지은이 소개
정인보(鄭寅普, 1893~1950)
근대 국학자, 민족사학자, 독립운동가, 시조시인, 언론인, 정치인. 본관은 동래, 호는 담원(薝園), 위당(爲堂).
1893년 서울 출생. 한학 수학 후 1910년 조선 강화학파의 거두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의 제자가 되었다. 1910~1914년 중국 안동, 봉천, 서간도, 상해 등을 수시로 다니며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김규식, 문일평, 홍명희 등과 교유. 독립운동 비밀결사조직인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였다. 1920년대 연희전문 교수와 동아일보, 시대일보 논설위원으로 활발한 저술활동 벌였다. 1930년대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역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우리고대사 왜곡과 말살에 분노, 1935년~1936년 동아일보에 <오천년간 조선의 얼> 제목으로 우리역사를 집필, 연재하였다. 위당은 고조선의 전역사를 우리민족사로 체계화하였으며, 단재(신채호)사학을 계승, 발전시켰다. 해방 후 국학대학 초대학장, 대한민국 초대감찰위원장을 지냈다. 삼일절, 광복절, 개천절, 제헌절 등 주요 국경절의 노래말을 지어주신 분이다. 1950년 6.25동란으로 납북.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저서: 《조선고서해제》(1931), 《양명학연론》(1933), 《조선사연구상하권》(1946-1947), 《담원시조집》(1948), 《담원국학산고》(1955), 《담원문록》(1967), 《담원정인보전집》(1983), 《담원문록(번역본)》(2006).
• 역주자 소개
문성재(文盛哉)
1965년생. 1988년 고려대 중문과 졸업 후 1997년 중국 남경대에서《심경 극작 연구》로, 2002년 서울대에서 《원간잡극 30종 동결구조연구》로 각각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역서로는 《중국고전희곡 10선》, 《동아시아 기층문화에 나타난 죽음과 삶》,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한국의 책 100 《고우영 일지매》(중문, 1-4), 한국학술진흥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도화선》,《진시황은 몽골어를 하는 여진족이었다》, 지만지판 《간전노》, 《회란기》, 《경본 통속소설》, 《한국의 전통연희》(중문), 《정역 노자》(근간) 등이 있으며 케이블 T채널에서 제작한 《북방대기행》(5부작)에 학술자문으로 출연하였다. 논문으로는 〈현대중국의 연극무대〉, 〈중국의 종교극 목련희〉, 〈명대 희곡의 출판과 유통〉, 〈안중근 열사를 제재로 한 중국연극 ‘망국한 전기’〉, 〈원대 잡극 곡백에서의 ‘래’〉,〈원대 잡극 속의 몽골어〉, 〈원대 잡극에서의 정도부사 ‘쇄’ 용법〉,〈근대중국어의 ‘S'O'(야)사’ 비교구문 연구〉 등이 있다.
• 차례
조선사연구下 (朝鮮史硏究)
〈우리국학총서(國學叢書)〉를 펴내며
해 제
일러두기
17. 기루왕 이후 백제와 신라
1. 장령, 사도의 방어시설
1) 장령(長嶺) 2) 사도(沙道)
2. 신라의 지속적인 내치 정비와 사치 금지령
1) 징병 2) 군사 편제 3) 병기 관리
3. 이때의 백제
1) 양국의 장단점과 그 원인 2) 나·제 충돌의 재개
3) 나·제의 거듭된 공방과 수시로 뒤바뀌는 승부
4) 말갈의 침입을 제지 5) 고이왕의 법제 개혁
18. 명림답부의 반정
1. 고구려 태조대왕의 양위와 차대왕의 폭정
1) 직언자의 수난 2) 태조대왕의 변함없는 우애 3) 왕위 선양
2. 요해(遼海)의 정세 변화
1) 국경 방어선의 후퇴 2) 강성해지는 선비(鮮卑) 세력
3) 백성들의 폐위운동
19. 고구려의 부흥
1. 요동 출병과 좌원(坐原) 대첩
1) 요동 출병 2) 좌원 싸움의 경과
2. 고국천왕(故國川王)의 치적
1) 국경을 침범한 공손도의 군사를 대파하다
2) 세습귀족제도의 붕괴와 을파소의 등용 3) 진대법의 시행
3. 발기의 자결
1) 고국천왕의 국상과 왕위계승 문제 2) 발기의 원군 요청과 자결
20. 수많은 전쟁 속에 개척된 강토
1. 동천(東川)의 왕위 계승
1) 동천왕의 생장과 그 사람됨
2. 활발한 대외정벌과 복잡한 외교관계
1) 동천왕 초기의 국력 2) 요동 토벌과 위, 오와의 교류
3. 위나라 관구검의 약탈
1) 서안평 싸움과 그 관계 2) 낙랑국 통치 문제
3) 대격돌을 앞둔 양측의 준비와 부여의 국론 분열
4) 비류수, 양맥곡에서의 위군의 연전연패
5) 동천왕의 몽진과 유유의 살신 구국
4. 반도 내의 한인 세력 제거
1) 과거의 정세 2) 백제의 요해 기습 3)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
5. 평양 천도와 동천왕의 붕어
1) 대동강 위에 세워진 또 다른 왕성 2) 9월의 국상
6. 고구려의 성진(城鎭) 확대와 잇따르는 외란
21. 요해 수복
1. 첫 단계의 현토 토벌
1) 미천왕의 왕위 계승 2) 전쟁의 시작
2. 점차 수복되는 옛 강역
1) 서안평 수복 2) 낙랑, 대방 두 군의 수복
3) 극성 출병 4) 난하 부근에서 잇따르는 충돌
22. 백제의 해상 진출
1. 요서 패권 쟁탈전
1) 책계왕과 분서왕의 전사2) 산동의 백제 유적
3) 녹산에서의 부여 습격 4) 모용씨와의 전쟁 5) 비류왕의 즉위
2. 요서에 ‘진평’군을 두다
1) 모용, 우문, 단료의 각축 속에 점차 확장되는 백제의 영토
2) 전쟁 속에도 이어지는 통상
23. 고구려와 모용연
1. 의도된 화친과 석조와의 제휴
2. 북부의 피습
1) 고국원왕 이후의 국력 2) 북도(北都)와 우문씨의 관계
3) 모용연의 침입 4) 무의 북도 대첩과 모용황의 창황한 퇴각
3. 볼모들의 복수
1) 고구려의 볼모 2) 이후의 고구려와 부진의 관계
24. 아아, 대외 진출이 내부 분쟁으로
1. 고구려의 남도(南都)와 백제
1) 고구려와 백제의 대립 2) 남도에 집중하다
2. 치양(雉壤) 싸움에서 평양 공방전까지
1) 전쟁의 서막 2) 고구려군의 연패와 고국원왕의 전사
3) 백제의 한수 이북으로의 천도
25. 신라의 내정과 외치
1. 어진 임금의 왕위 계승
2. 심화되는 정치 개혁
1) 국법 적용에는 친소와 귀천을 따지지 않다
2) 화백 전통의 제도적 확충 3) 관리의 임용
4) 중농정책의 지속 5) 호민(豪民)과 외래 민호의 정착
3. 신라의 해상 방위
1) ‘동우(東憂)’의 시작 2) 각간 우로의 죽음
3) 유례왕의 일본 정벌 4) 변방의 성들
5) 강세(康世)의 농성과 내물왕의 섬멸전
26. 고구려의 패업과 영락태왕
1. 고국원왕 전쟁 이후의 국내외 정세와 상호관계
1) 거란의 당시 위치 2) 후연(後燕)의 두 도읍 화룡과 계의 위치
2. 고구려군의 서진과 부여 회복군의 동진
3. 신라와의 관계 회복
4. 영락 연간의 업적
1) 즉위와 연호 사용 2) 사방으로 펼쳐진 정벌
3) 관미성 정벌과 그 위치 4) 거란 토벌의 장거(壯擧)
27. 전고갑(典故甲)
1. 종교와 학문에 관한 전고들
1) 우리 겨레 공통의 종교와 그 종지 2) 학관(學官)제도와 학교시설
2. 제사에 관한 전고들
1) 천제(天祭) 2) 국사(國社)와 산천 3) 시조묘
3. 예문(藝文)에 관한 전고들
1) 저술과 문헌 2) 문자
3) 문자의 발전단계 4) 과연 누가 그렸을까
4. 불교에 관한 전고들
1) 부진과의 교류와 불교 수용 2) 백제 불교와 인도 승려 마라난타
3) 도랑(道朗)의 삼론종(三論宗) 확립
부록1. 조선사연구부언(附言)
<부언의 서두>
1. 정무론(正誣論) 상편 2. 정무론(正誣論) 중편
3. 정무론(正誣論) 하편 4. 정무론 원문
<부언의 결어(結語)>
<부언에 다시 덧붙임(附言補遺)>
부록2.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릉 비문 석략
부록3.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릉 비문
부록4. 태대형, 대형, 소형에 관하여
쉽게 풀이한 《조선사연구》 뒤에
번역을 마치면서
위당 선생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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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단군조선의 전삼한이 와해되고 남삼한의 성립과정이 상세히
기록된 것 같네요. 중국과의 역사충돌과 역사왜곡이 가장 심한 부분이기도 하죠.
조선 상고사를 좀더 보완한 것인가요? 아뭏든 보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