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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리틀야구팀 자이언트을 창단해 25년간 수많은 야구선수를 배출한 김경덕 전 단장(사진 왼쪽부터)과 자이언트 리틀야구단 출신의 유지현 전 LG 내야수가 함께 찍은 기념사진(사진=김경덕) |
[1편 ‘30년 전 유리벽을 깼던 야구소년들’에 이어]
1985년 세계리틀야구대회에서 우승한 순간. 한국야구계는 ‘2연패 신화’를 잊고 있었다. 전해 카퍼레이드로 리틀야구 대표팀의 기적을 환영했던 야구계는 1985년 우승을 차지했을 땐 카퍼레이드는 고사하고, 별도의 행사도 생략한 채 한국 리틀야구의 세계 제패를 당연한 듯 받아들였다. 하지만, 당연할 것 같던 세계 제패는 그 뒤로 재현되지 않았다. 되레 쓰디쓴 패배와 좌절만을 되풀이했다.
1980~2000년대 중반까지 리틀야구 현장을 지켜봤던 한 야구인은 “한국야구계가 세계대회 2연패에 도취한 사이 국내 리틀야구는 몰라보게 쇠퇴했다”며 “해마다 극동 예선에서 타이완, 일본에 패해 본선진출이 좌절됐지만, 누구 하나 이를 이상하게 보거나 대책을 세우는 이가 없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야구인은 “심지어는 세계리틀야구대회에 출사표조차 던지지 않은 적이 많다”며 “리틀야구가 대한야구협회와 서울시 야구협회에서 떨어져 나온 뒤엔 사정이 더 어려워져 극동 예선전조차 불참하는 사태가 벌어졌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어째서 한국 리틀야구는 세계리틀야구대회 2연패 이후 ‘급가속’ 대신 ‘역주행’을 거듭한 것일까. 그 이유를 알려면 리틀야구의 기원과 한국 리틀야구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품성, 용기, 정직’을 구호로 내건 리틀리그(Little League) 1939년 칼 스토츠(사진 맨 뒷줄 가운데)가 그해 리틀리그에서 우승한 '라이코밍 낙농장' 소년야구팀과 찍은 기념사진
리틀야구의 기원은 193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시자는 칼 스토츠.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윌리엄스포트에서 태어난 28살의 청년 스토츠는 고향에서 재목(材木)창고의 서기로 일했다. 그는 야구를 무척 좋아했는데, 주말마다 어린 조카들과 캐치볼 하는 걸 삶의 낙으로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스토츠는 조카들과 야구를 하다가 그만 라일락 덤불에 걸려 다릴 다치고 말았다. 아픈 다리를 주무르며 현관 계단에 앉아 조카들의 캐치볼을 지켜보던 스토츠는 자기도 모르게 “유니폼과 모자, 새 공과 너희 사이즈에 맞는 배트를 들고 정식 야구팀에서 뛰면 어떻겠니?”하고 조카들에게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그거 좋죠. 삼촌”이었다.
장난처럼 주고받은 대화였지만, 스토츠는 그 길로 행동에 나섰다. 아내와 친구들을 설득해 소년야구팀 창단에 나선 것이다. 특히나 스토츠는 ‘아이들의 체격과 눈높이에 맞는 구장 규격과 규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랜 연구 끝에 홈플레이트에서 마운드까지의 거리를 46피트(14.02m)로 줄이고, 루간 거리를 60피트(18.28m)로 조정하는 ‘최초의 리틀야구장 규격’을 고안한다.
여름 동안 동네 아이들을 끌어모으는 데 성공한 스토츠는 드디어 소년야구팀을 창단하고, 소년야구장 규격에 이어 소년야구 전용 규칙도 창안해냈다.
순풍 가도를 달리던 즈음. 스토츠의 발목을 잡은 게 있었으니 바로 돈이었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았던 스토츠와 그의 친구들은 소년야구단 운영비 조달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하지만, 스토츠는 낙담하지 않았고. 재목 창고 일이 끝나면 곧바로 스폰서가 될 만한 이들을 찾아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결국 56번의 거절 끝에 ‘라이코밍 낙농장’으로부터 30달러를 후원받은 스토츠는 감격 어린 표정으로 배트 두 자루, 포수 미트와 신가드, 그리고 4개의 베이스를 샀다. 그러고도 남은 돈으론 유니폼 10세트를 구입해 어린이 야구부원들에게 나눠줬다.
후원에 고무된 스토츠는 1939년 다른 마을에 두 개의 소년야구단을 더 창단했다. 그리고 ‘런디 재목’과 ‘점보 프레첼’ 두 회사로부터 후원을 받아 기존 ‘라이코밍 낙농장’ 소년야구팀을 포함해 3개 팀이 참여하는 야구 역사상 최초의 리틀리그를 만든다.
그해 6월 6일. 스토츠는 대망의 첫 리그 경기(런디 재목 대 라이코밍 낙농장)를 윌리엄스포트의 보우먼 구장 외야 펜스 뒤쪽 공터에서 개최했다. 결과는 런디 재목의 23대 8 승리였다.
미국 리틀야구 초창기 경기 장면 |
‘품성, 용기, 정직’을 구호로 내건 소년야구단은 시간이 흐르며 ‘리틀리그(Little League)’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리틀리그는 깜짝 놀랄 만한 속도로 미국 전역으로 퍼졌다. 그리고 마침내 1947년. 미 전역에서 출전한 소년야구팀들이 자웅을 겨루는 제1회 리틀리그 월드시리즈가 열렸다.
리틀리그 위상도 빠르게 커졌다. 애초 소년야구리그로 출범한 리틀리그는 1964년 7월 16일 미국의 린든 B. 존슨 대통령에 의해 연방정부 법인으로 승인되며 ‘보이스카우트’ ‘청소년 적십자단’과 함께 대표적인 3대 사회 활동단체로 격상했다.
현재 리틀리그는 전세계 7천400리그에 등록된 240만 명의 선수와 110만 명의 자원봉사자가 참여하는 매머드 리그로 성장해있다.
충격이었던 타이완 리틀야구팀 금룡의 내한 1970년대 세계리틀야구대회 극동 예선전에 출전한 한국 대표팀 야수들이 타이완 주자를 태그하려는 장면
그렇다면 한국 리틀야구의 역사는 어떻게 될까. 중·고·대학·실업·프로야구는 그나마 역사를 설명해줄 자료라도 남아 있지만, 리틀야구는 자료가 거의 전무한 상태다. 증언해줄 이도 극소수다. 한국 리틀야구가 얼마나 야구계로부터 소외되고, 천대받았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기자는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의 과거 신문과 서적 그리고 원로 야구인 및 전·현직 리틀야구 관계자들을 탐문 취재하며 한국 리틀야구의 뿌리를 추적했다. 다음은 열흘 넘는 취재 속에서 찾아낸 한국 리틀야구사(史)다.
한국야구계에 리틀야구가 처음으로 소개된 건 1970년이었다. 1969년 리틀리그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 타이완 금룡 팀이 친선 경기 차 1970년 8월 내한한 게 계기였다. 당시까지 국내 야구계에서 ‘리틀야구’는 생소한 단어였고, 많은 야구인은 금룡을 ‘국민학교(초등학교) 대표팀’쯤으로 인식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리틀야구처럼 클럽 운동부 중심으로 학생 체육이 활성화한 미국, 타이완과 달리 1970년까지 한국은 일본의 영향을 받은 까닭에 학교 운동부 중심으로 학생 체육이 번성했다.
이는 야구도 마찬가지여서 한국에서 어린이 야구는 철저하게 국민학교(해방 이전 소학교) 야구부 중심으로 운영됐다. 당연히 ‘방과 후 클럽’으로 운영되는 리틀야구팀이 있을 리 만무했고, 학교 야구부에 입회하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야구선수의 꿈을 키우는 게 불가능했다.
하지만, 한국야구계는 금룡의 내한을 기점으로 리틀야구의 묘미를 맛보며 어째서 리틀야구가 세계적 인기를 끄는지 확인한다. 특히나 금룡과 한국 소년야구팀의 친선경기가 지상파로 중계되며 일반인들이 ‘리틀야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크나큰 소득이었다.
어쨌거나 금룡이 내한하며 대한야구협회는 금룡과 맞설 국내 선발팀을 조직해야만 했는데, 이 팀이 바로 한국야구 사상 최초의 국외팀 상대 국민학교 대표팀인 ‘서울선발팀’이었다.
44년 전 서울선발팀의 일원이었던 고양 원더스 김광수 수석코치는 “초교 6학년일 때 ‘세계리틀야구대회에서 우승한 타이완 대표팀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서울선발팀에 뽑힌 덕분에 금룡과의 친선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 수석은 44년 전의 일이지만, “금룡 선수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금룡은 말이 리틀야구팀이지 무슨 대학팀 같았다. 그만큼 선수들의 체격 조건이 좋았다”며 “당연히 실력도 뛰어나 서울선발팀을 상대로 펄펄 날았다”고 회상했다.
김 수석이 놀란 건 그뿐이 아니었다. 경기구(球)를 보고서 다시 한 번 놀랐다.
“지금이야 리틀야구도 경식공을 쓰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국민학교는 연식공, 중학교는 준경식공, 고교 이상부터 경식공을 사용했다. 그런데 금룡과의 친선경기에선 ‘홍키공’, 즉 경식공이 시합구로 사용됐다. 속으로 ‘타이완은 어린 선수들도 어른들이 쓰는 홍키공을 시합구로 사용하는구나’ 싶어 꽤 놀란 기억이 난다.”
일본의 영향으로 국민학교에서 연식공을 사용하던 당시 한국 야구계는 금룡 선수들이 경식공을 쓰는 걸 보고서 비로소 ‘한국야구가 세계야구 흐름에 역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1970년대 한국은 리틀야구팀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세계리틀야구대회 본선에 진출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최정예 팀을 보내고도 타이완, 일본의 벽을 넘지 못하고 무너졌다 |
몇몇 야구인을 주축으로 ‘리틀야구 활성화와 연맹 창립 논의’가 전개된 것도 금룡과의 친선경기가 끝난 직후였다. 연맹 창립 논의는 급물살을 탔고, 각고의 노력 끝에 1970년 9월 한국 야구 사상 최초의 리틀야구 조직인 ‘한국리틀리그’가 창립한다.
한국리틀리그는 대한연식야구협회 소속이던 전국 16개 국민학교 야구부를 회원으로 받아들이며 안정적인 기틀을 다졌다. 반면 리틀리그에 많은 팀을 빼앗긴 연식야구협회는 이때를 기점으로 빠르게 위세를 잃어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한야구협회로 흡수통합 됐다.
따지고 보면 한국리틀리그 역시 흡수통합 되긴 마찬가지였다. 1972년 1월 전국 국민학교 야구연맹(국교연맹)이 발족하자 대한야구협회는 “어린이 야구협회가 난립할 이유가 있느냐”며 한국리틀리그와 국교연맹의 통합을 지시했다. 국교연맹의 초대 회장이 김종락(작고) 당시 대한야구협회장이었음을 상기할 때 한국리틀리그는 사실상 대한야구협회에 흡수통합 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어쨌거나 김 회장은 1972년 세계리틀야구연맹에 국교연맹을 가입시킨 뒤 리틀야구 활성화에 노력했고, 이때부터 한국 리틀야구는 세계리틀야구대회의 높은 벽에 도전한다.
국제대회에 도전한 한국 리틀야구팀에 내려진 특명, ‘전학으로 뭉쳐라!’
1985년 한국 리틀야구 대표팀이 세계리틀야구대회에서 멕시코를 꺾고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는 신문 기사. 신문엔 한국의 결승전 상대가 멕시코로 써져 있지만, 실제 상대는 멕시코가 아니라 미국 서부 대표팀이었다. 그만큼 30년 전엔 언론도 리틀야구에 대한 관심과 이해도가 높지 않았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이를 위해 협회는 서울지역 국교생 및 중학교 1학년생 가운데 특출난 실력을 뽐내는 소년들을 모아 대표팀을 조직했는데, 명실공히 한국 최초 리틀야구 대표팀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SK 와이번스 박철영 2군 배터리 코치는 당시 대표팀의 일원이었다. 박 코치는 “한국 리틀야구 대표팀 멤버로 뽑혀 1972년 7월 괌에서 열린 세계리틀야구대회 극동 예선전에 참가했다”며 “대회 참가를 위해 서울 소재 국민학교로 전학까지 갔다”고 귀띔했다.
사연은 이랬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계리틀야구대회 규정상 극동 예선과 본선엔 지역리그 대표 리틀야구팀이 출전해야 한다. 하지만, 당시 국내엔 리틀야구팀이 한 팀도 없었다. 리틀야구팀이 없으니 리틀리그가 존재할 리도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협회는 부득이 국민학교 야구부를 중심으로 대표팀을 구성해야 했는데, ‘지역(리그) 대표팀’이 참가해야 한다는 조항 때문에 서울지역 국민학교 야구부를 중심으로 대표팀을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서울지역에 뛰어난 국민학교 학생선수가 부족했다는 것. 따라서 협회는 인천·경기지역의 우수 학생선수를 서울로 전학시켜 ‘서울지역 대표팀’을 꾸리는 편법을 써야만 했다. 박철영과 최계훈 등 4명의 인천·경기 지역 학생선수가 6학년으로 올라갈 때 ‘야구부 창단 2년 차’의 서울사대부속 국민학교로 전학 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실제로 당시 자료를 보면 15명의 대표팀 멤버 가운데 11명이 서울사대부국 소속이었고, 나머지 4명은 한양국민학교 소속이었다.
한국 리틀야구 대표팀 멤버로 사상 처음 국제무대를 밟은 박 코치는 “다른 나라 대표팀과의 실력 차는 크게 느끼지 못했지만, 처음 접하는 리틀야구 환경에 꽤 애를 먹었다”며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당시 한국은 국민학교 야구부에서도 나무 배트를 사용했다. 공은 당연히 고무 재질의 연식구였다. 하지만, 세계리틀야구대회 극동 예선에 나갔더니 다른 나라 대표팀 아이들은 전부 알루미늄 배트를 들고 있었다. 게다가 공도 어른들이 쓰는 하드볼(경식구)이었다. 알고 보니 리틀야구는 알루미늄 배트와 경식구 사용이 원칙이었다. 처음 쓰는 알루미늄 배트와 하드공에 적응하느라 진땀을 흘린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첫 국제대회 출전이라는 부담감과 낯선 야구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한국 리틀대표팀은 극동 예선에서 패배를 거듭했다. 하지만, 극동 예선 참가는 훗날 한국야구 변화에 적지 않은 기영향을 줬다. 바로 배트의 교체였다. 이 대회에 참가했던 리틀야구 선수들이 알루미늄 배트를 국내로 들여오는데, 이때를 기점으로 국내 아마추어 야구계는 나무 배트 대신 서서히 알루미늄 배트를 쓰기 시작한다.
리틀야구 최강팀이던 타이완은 세계대회에서 많은 우승을 차지했지만, 상대팀으로부터 "나이를 속여 출전한다"는 의심을 샀다. 실제로 1990년대 들어 세계리틀야구연맹은 "타이완 야구계가 상습적으로 리틀야구 선수들의 나이를 고의로 낮춰 출전시킨다"며 이의 시정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사진은 큰 체격의 타이완 리틀야구 선수 |
이후로도 협회는 국민학교 대표팀을 꾸려 극동 예선에 도전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아 번번이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야구계에 ‘리틀야구 강국 타이완과 일본이 버티는 한 한국 리틀야구팀의 본선 도전은 바위에 계란 던지기’라는 식의 패배주의가 광범위하게 퍼진 것도 그즈음이었다.
흥미로운 건 그토록 오랫동안 세계리틀야구대회 본선 진출을 노렸던 한국이건만, 정작 리틀야구팀을 창단하거나 유소년 야구를 활성화하려는 의지나 노력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1981년 4월 1일. 한국 야구사가 지금껏 간과했던, 그러나 한국 야구사에 반드시 기록돼야 할 역사적 사건이 벌어진다. 바로 한국 최초의 리틀야구팀 ‘자이언트’가 창단한 것이다.
야구계가 잊고 있던 ‘한국의 스토츠’ 김경덕 선생 1980년대 중반 김경덕 옹이 '소년동아일보'에 낸 리틀야구단 선수 모집 광고
(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1981년 학원에서 수학강사로 일했던 김경덕 옹은 용산고 시절 잠시 학생 야구선수로 뛰었다. 그때의 기억을 평생 안고 살던 그는 아들 김훈이 야구를 시작하자 적극 후원했다. 덕분에 낙후한 유소년 야구의 현실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그의 시선을 끈 건 ‘아이들의 꿈을 수용하기엔 태부족한 국민학교 야구부 수(數)’와 ‘아이들을 야구기계로 키워내는 학교 운동부의 기형적 운영’이었다.
특히나 당시 국외 잡지를 자주 읽었던 그는 ‘어째서 다른 나라 유소년 야구는 전부 리틀야구 위주의 클럽식으로 운영되는데 유독 한국과 일본의 유소년 야구만 국민학교 야구부 위주로 운영될까’하는 의문을 품었다.
덧붙여 김 옹은 수업도 거른 채 온종일 뙤약볕에서 야구만 하는 국민학교 학생선수들을 보며 ‘우리도 국외처럼 유소년 야구부가 클럽식으로 운영돼야 저런 폐단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리틀야구의 창시자’ 칼 스토츠처럼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데 주저하는 이가 아니었다. 김 옹은 지인들과 의기투합해 1981년 ‘소년동아일보’에 작은 광고를 냈다.
“그땐 지금처럼 인터넷이 없었어요. 리틀야구팀을 창단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막상 시작하고 보니 초대 부원을 모집할 홍보수단이 마땅치 않았다오. 그래 궁리 끝에 어린이들이 자주 보던 ‘소년 동아일보’에 담뱃갑 만한 크기의 광고를 내기로 했어요.”
리틀야구에 대한 대중적 인지도가 매우 낮았던 시기라, 김 옹은 ‘몇 명이라도 찾아와 망신만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편하게 마음먹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그때 장충 리틀야구장에서 공개 모집을 했는데 400명 정도의 어린이들이 몰렸을 거외다. 아이들을 따라온 학부모까지 포함하면 야구장이 꽉 찼을게요. 우리나라에 이렇게 야구를 좋아하고, 야구선수의 꿈을 키우는 아이들이 많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김 옹은 400명의 아이를 상대로 ‘달리기’ ‘멀리 던지기’ 등 각종 테스트를 했다. 지원자 전부를 야구부원으로 받을 수 없었기에 테스트를 통해 아이들을 걸러내야만 했다. 50명의 아이를 최종 선발한 김 옹은 이 아이들을 중심으로 ‘자이언트 리틀야구단’ 1기를 출범했다.
“막상 리틀야구단을 만들긴 했는데 주변 여건이 참 열악했다오. 다행히 장충 리틀야구장을 월 5만 원에 빌리긴 했는데, 당시 5만 원이면 적은 돈이 아니었어요. 글러브, 배트, 포수 장비부터 시작해 공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오. 그렇다고 누가 도와주는 사람이 있나. (33년 전 일들이 떠오르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공을 하루에 몇개씩 꿰맸는지 모르오. 집에 오면 일과가 공 꿰매는 거였소. 하루에 50개씩 꿰맸나. ‘그깟 공 사면 되지’하고 쉽게 말할지 모르지만, 공값은 다 누구 지갑에서 나오는 거겠소. 죄다 부모님들 부담이란 말이오. 어려운 학부모들 부담을 최소화하려면 자이언트 단장인 내가 공을 꿰맬 수밖에 없었어요.”
1981년 국내 최초의 리틀야구단 '자이언트'가 창단한 1년 뒤. 서울에선 각종 리틀야구대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사진은 제1회 미쉬린(미쉐린)쟁탈기 리틀구락부야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자이언트 단장 김경덕 옹이 상장을 받는 장면(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그나마 장비 부족은 김 옹과 아이들의 열정으로 극복 가능했다. 가장 김 옹을 힘들게 한 건 리틀야구를 바라보는 야구계의 편견과 냉대였다.
“우리나라 야구는 참 희한합디다. 프로가 생기면 아마추어 야구가 더 활성화해야 하는데, 그 반대였던 말이외다. 야구계가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프로만 챙길 줄 알았지, 꿈나무를 키워야겠다는 생각은 하질 않았어요. 그래도 그건 참을 만 했소. 정말 참기 어려운 건 대한야구협회의 괄시였어요. 협회 사람들이 대놓고 ‘국민학교 야구부가 정통이고, 너희 리틀야구는 정통이 아니다’라고 말하는데 거 참. 휴우-. 그뿐이 아니오. 협회에선 대회를 개최해주긴커녕 리틀야구팀을 ‘외인구단’ 취급했다오. 리틀야구는 무늬만 대한야구협회 소속이지, 실제론 어디에도 소속돼 있지 않은 ‘무소속 야구단’이었소.”
김 옹은 대한야구협회 전무이사 집까지 쫓아가 “아이들이 좋아하는 야구를 계속 할 수 있게 협회가 비빌 언덕이 돼달라”며 간곡하게 요청했다. 협회 소속이 돼야 공식 대회에 참가할 자격이 주어지고, 리틀야구팀 소속 아이들도 리틀야구 대표팀에 뽑힐 수 있기 때문이다.
정성과 노력이 통했는지 대한야구협회는 자이언트를 소속팀으로 받아줬다. 김 옹의 노력이 결실을 보자 제2, 제3의 리틀야구단이 창단했다.
김 옹은 “자이언트 이후 ‘잠실 리틀야구단’ ‘청룡 리틀야구단’ ‘어린이회관 구락부’ 등이 잇따라 창단했다”며 “아이들 사이에 리틀야구팀이 꽤 인기가 높다는 소문이 돌자 서울 여기저기서 우후죽순처럼 리틀야구팀이 창단해 순식간에 30개 팀으로 늘었다”고 회상했다.
리틀야구팀의 잇따른 창단은 대회 창설로 이어졌다. 김 옹은 “유명 회사에서 스폰서를 맡아주며 1982년부터 각종 리틀야구대회가 열렸다”며 “마땅히 상대할 팀과 대회가 없을 땐 매일 훈련만 하며 지루해하던 아이들이 갑자기 대회들이 생겨나자 생일이라도 맞은 것처럼 뛸 듯이 기뻐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리틀야구는 여전히 야구계로부터 ‘서자(庶子)’ 취급을 받았다. 프로구단들은 아마추어 야구계의 눈치를 살피며 리틀야구 지원에 미온적이었고, 대한야구협회는 ‘적자(嫡子)’인 국민학교 야구부를 챙기기 바빴다.
야구계의 무관심과 냉대는 ‘막’ 싹을 트려는 리틀야구계엔 치명타였다. 리틀야구계는 1983년 대한야구협회에서 서울시 야구협회로 소속을 옮기며 부활을 꿈꿨다. 당시엔 리틀야구팀이 서울에만 있었기에 리틀야구인들 사이에선 ‘서자 취급을 하는 대한야구협회 소속으로 있느니 차라리 우리 입장을 잘 이해하는 서울시 야구협회 소속으로 있는 게 낫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터였다.
1980년대 김경덕 옹이 작성한 '방학기간 지방 전지훈련 하루 스케줄표'. 김 옹은 훈련시간은 타협해도 아이들의 공부시간은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
대한야구협회 김우덕 전 사무국장은 1970~80년대 아마추어 야구사를 가장 잘 아는 이다.
김 전 국장은 “대한야구협회가 관장해야 할 아마야구 부분이 너무 많다 보니 리틀야구가 서울시 야구협회로 이관돼도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제기됐다. 가뜩이나 당시 지방엔 리틀야구팀이 없고, 서울에만 있어 대부분 서울지역 리틀야구팀은 서울시 야구협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며 “리틀야구가 서울시 야구협회 소속으로 전환할 때 야구계 대부분이 ‘잘 됐으면 좋겠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회상했다.
표면적으로 리틀야구가 서울시 야구협회 소속으로 들어간 건 ‘잘한 일’이었다. 1983년 서울시 야구협회 소속이 된 리틀야구는 다음 해 세계리틀야구대회에서 사상 첫 우승 트로피를 안았고, 1985년에도 역시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당시 세계대회 2연패를 기억하는 이들은 “그건 서울시야구협회와 리틀야구계와는 별 상관없는 우승이었다”며 “세계대회 출전 선수 대부분은 대한야구협회가 서울지역 국민학교·중학교 야구부에서 뽑은 아이들이었다”고 증언했다.
한마디로 당시 협회가 요즘 유행하는 ‘으리(의리)’를 내세워 리틀야구팀 출신보다 국민학교·중학교 야구부원 중심으로 대표팀을 구성했다는 뜻이다.
되레 서울시 야구협회로 소속을 옮긴 건 리틀야구의 쇠약을 가져온 악재로 작용했다. 서울시 야구협회는 대한야구협회보다 재정적으로 빈약했고, 협회 마인드도 떨어졌다. 그나마 대한야구협회 소속일 땐 김종락 회장이 리틀야구를 음지에서라도 지원했으나, 서울시 야구협회는 그럴 만한 사람도, 예산도 없었다.
김 옹은 “1980년대 후반 들어 30개에 달하던 서울지역 리틀야구팀이 10개 밑으로 줄고, 대회도 1년에 기껏해야 2, 3개만 열리면서 경기에 뛰지 못하고 훈련만 하는 아이가 대다수였다”며 “‘또 훈련이에요?’하며 지루해하다가 야구팀을 탈퇴하는 아이들이 속출했다”고 회상했다.
리틀야구팀에서 아이들이 떠나며 가뜩이나 어려웠던 리틀야구는 고사 직전에 몰린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결심한 김 옹은 리틀야구계 인사들과 힘을 합쳐 1990년 9월 1일 한국리틀야구연맹을 만든다. 1970년 9월 한국 야구 사상 최초의 리틀야구 조직인 ‘한국리틀리그’ 이후 21년 만에 만들어진 리틀야구 통할(統轄) 단체였다.
'한국의 스토츠' 김경덕 옹과 아들 김훈. '엘리트 야구인' 출신의 김훈 씨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2009년부터 '종로 리틀' 감독을 맡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연맹 초대 전무이사를 맡은 김 옹은 필사적으로 리틀야구를 살리려 동분서주했고, 지방 도시에 잇따라 리틀야구팀들이 창단하며 회생의 기미가 보였다. 하지만, 한번 기울어진 리틀야구는 좀체 제자리로 돌아올지 몰랐다. 그리고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열리며 리틀야구는 ‘핵 펀치’를 맞게 된다. 다음은 김 옹의 증인이다.
“야구 인기가 말이외다. 1995년을 정점으로 서서히 떨어졌어요. 2001년까지 리틀야구는 그야말로 간신히 호흡만 하는 상태였어요. 그러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열리면서 리틀야구가 최대 위기를 맞게 됐어요. 이유? 아이들이 야구 대신 죄다 축구로 몰려갔거든. ‘자이언트 리틀야구팀’도 한창땐 부원이 58명이나 돼 4개 팀으로 나눠 대회에 출전했는데, 한·일 월드컵이 끝나고 났을 땐 3분의 1도 남지 않았다오. 여전히 야구계는 리틀야구를 소 닭 쳐다보듯 했고. 솔직히 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어요.”
김 옹은 마지막까지 자이언트를 지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2006년. 김 옹은 자신의 분신과 같던 자이언트와 영원한 작별을 고해야 했다.
“2006년이었을 거외다. 리틀야구가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때였는데. 남은 팀원이 몇 명이었는지 압니까? 10명, 11명밖에 없었소. ‘아, 이제는 어쩔 수 없겠구나. 여기서 접어야겠구나’ 싶더군. (떨리는 목소리로) 결국 2006년 말까지 운영하다가···자이언트를 역사 속으로···떠나보내야 했어요.”
AFKN(미군방송, 현 AFN)에서 메이저리그 중계를 즐겨봤던 젊은 시절의 김 옹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처럼 좋은 팀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리틀야구단의 이름을 ‘자이언트’로 붙였었다.
특히나 그는 리틀야구팀 본연의 성격에 충실하고자 ‘공부와 야구를 병행한다’는 자신만의 원칙을 고집스럽게 지켰다. 그래서 아이들이 수업을 모두 끝낸 다음 운동장으로 모이도록 했고, 월요일엔 훈련 없이 학교 친구들과 어울려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여기다 방학기간에 지방으로 전지훈련을 떠날 때면 반드시 하루 2시간씩 산수 공부와 숙제를 하도록 했는데, 산수 실력이 부족한 아이들은 수학강사 출신답게 자신이 직접 지도했다.
자이언트 소속 야구부원들에게 산수 지도를 하고 있는 김경덕 옹 |
그렇게 25년 동안 자이언트를 이끌며 김 옹은 수많은 야구선수를 키워냈다.
김 옹은 “현재 삼성에서 뛰는 이영욱, NC에서 뛰는 이종욱, LG 코치로 있는 유지현이 모두 자이언트 리틀 출신”이라며 “그 외에도 자이언트에서 꿈을 키운 많은 선수가 아마와 프로에서 맹활약했다”고 뿌듯해 했다.
그 가운데 김 옹이 지금도 잊지 못하는 학생선수는 유지현이었다.
“(유)지현이 집이 구로구 개봉동이었을 거외다. 훈련에 참가하려면 장충동까지 와야 하는데 그게 꽤 먼 거리였소. 그런데 초교 4학년 때 우리 팀에 들어온 뒤 충암중에 진학할 때까지 3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니 지각 한번 하지 않고 정시에 장충 리틀야구장까지 도착했어요. 경기에 졌을 때도 다른 아이들은 모두 구장을 떠났지만, 지현이는 ‘씩씩’ 거리면서 그라운드에 혼자 남아 배팅 연습을 했소. 그걸 보고 예감했지. ‘저놈은 뭘 해도 될 녀석이다. 프로에 가면 크게 성공할 거’라고 말이외다.”
평생의 노력과 눈물이 담긴 자이언트를 자신의 손으로 해체하게 된 배경은 부원 감소 때문만은 아니었다. 2006년. 김 옹은 뇌경색으로 한쪽 눈을 실명하고 만다.
“공 던지는 덴 이상이 없는데 받는 게 쉽지 않습디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공이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겠더군. ‘이 몸으로 아이들과 함께할 수 없다’는 게···너무 슬펐다오. 아이들에게 더는···더는 폐를 끼쳐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 자이언트를 끝낼 수밖에 없었어요.”
한국 최초의 리틀야구팀을 창단하고, 한국리틀야구연맹이 출범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김 옹은 마땅히 야구계로부터 박수를 받으며 퇴장해야 할 인물이었다. 그러나 2006년 김 옹은 감사패 하나 받지 못한 채 쓸쓸히 리틀야구계를 떠나야만 했다. 그리고 ‘한국 리틀야구의 개척자’임에도 여태껏 아무 조명도 받지 못한 채 그라운드를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
20여 개 남짓했던 리틀야구팀. 8년 만에 188개팀으로 증가한 이유 한국리틀야구연맹 한영관 회장. 한 회장은 ' 한국리틀야구팀의 첫 세계대회 동반진출'이란 쾌거를 달성했지만, 미국에서 열리는 세계대회 모두 한국에서 지켜볼 예정이다. 연맹 관계자는 "회장님께서 '내가 미국에 가느니 미국 유소년 야구를 보고 배울 수 있는 유능한 지도자가 가는 게 낫다. 그렇게 하는 것이 연맹 돈을 가치 있게 쓰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며 "김훈 종로 리틀 감독 겸 연맹 '연구 감독'이 회장님 대신 미국에 갈 것"이라고 귀띔했다
(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자이언트가 해체한 2006년. 리틀야구계는 “세상엔 기쁨도, 사랑도, 빛도, 확실성도, 평화도, 고통을 피할 방법도 없다”고 노래한 19세기 영국 시인 매튜 아널드를 연상시킬 만큼 종말론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하지만, 누가 그랬던가. 끝은 곧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김 옹은 “리틀야구가 사라질 것 같던 2006년이, 돌아보면 리틀야구 부흥의 출발점이었다”며 “모두가 애써 외면한 리틀야구를 한 사람이 맡기 시작하면서 놀라운 변화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여기서 ‘한 사람’은 과연 누구를 지칭한 것이었을까. 이상일 KBO(한국야구위원회) 전 사무총장도 비슷한 증언을 했다.
이 전 총장은 “그분이 연맹을 맡으면서 리틀야구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며 “2006년 스무 개 남짓하던 전국의 리틀야구팀이 8년 만에 8배 가까이 늘어난 것도 따지고 보면 그분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컸다”고 강조했다.
‘한사람’과 ‘그분’은 동일인이다. 바로 한영관 현 한국리틀야구연맹 회장이다.
(주)삼화수지 회장이자 프로골퍼 한희원의 아버지로 유명했던 한 회장은 2001년부터 2005년까지 6년 동안 미국에서 딸을 뒷바라지했다. 그러던 2006년. 딸이 야구선수 출신의 손혁 MBC SPORTS+해설위원과 결혼하자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청년 시절 야구선수로 활약했던 한 회장은 귀국 뒤 막역한 사이였던 하일성 KBO 사무총장과 이광환 KBO 육성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뜻밖의 제안을 받는다.
한 회장은 당시를 떠올리며 “난데없이 두 이가 ‘너는 천생 야구인이다. 사업도 성공하고, 딸도 출가했으니 이제부터 야구를 위해 힘 써달라’며 ‘리틀야구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회상했다.
‘말 많고, 탈 많은’ 야구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으려던 한 회장은 결국 두 이의 간청에 떠밀려 리틀야구연맹 회장직을 맡는다. 그리고 ‘이왕 맡은 김에’라는 생각으로 리틀야구계를 개혁해나갔다.
말이 리틀야구 최고 기관이지 사무실은 고사하고 직원 한 명 없는. 가뜩이나 대한야구협회와 KBO에 사고 단체로 찍혀 별다른 지원도 받지 못하던 ‘유명무실 연맹’을 떠안은 한 회장은 ‘재정 자립만이 연맹의 자활을 이끌 수 있다’는 목표 아래 FILA, 아시아나항공 등 기업체를 찾아다니며 스폰서십 체결에 나섰다.
여기다 ‘리틀야구의 대중화를 위해선 반드시 TV 중계가 필요하다’는 신념으로 케이블 스포츠채널 MBS SPORTS+를 찾아가 “프로야구의 근간이 되는 어린이 야구를 살리려면 방송사도 힘을 보태야 한다”고 설득했다. 결국 한 회장은 방송사로부터 ‘2007년부터 2011년까지 5년간 연맹이 주관하는 10여 개의 리틀야구대회를 중계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한국리틀야구계의 새로운 홈타운이 될 '화성 리틀야구타운' 조감도 |
2006년 ‘0’원이던 연맹 예산은 4년 만에 1억 원을 넘어섰고, 리틀야구 중계를 시청한 아이들은 앞다퉈 리틀야구단에 가입했다.
무엇보다 한 회장은 이른바 ‘1구-1리틀팀’이라는 룰을 지키면서 팀명에 반드시 연고지명을 쓰도록 했는데, 이는 한국 리틀야구 발전에 결정적 호재로 작용했다.
신현석 연맹 전무이사는 “한 회장께서 부임하신 뒤 시·군·구에 각 1개 리틀야구팀 창단만을 허락하고, 창단 시엔 ‘구리 리틀’ ‘종로 리틀’식으로 연고지명을 팀명으로 쓸 것을 명했다”며 “당시 회장의 정책에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이들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회장님의 결정은 리틀야구팀의 무분별한 난립을 막고, 리틀야구팀이 해당 지자체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데 일등 공신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한 회장, 신 전무를 비롯한 연맹 직원들과 리틀야구 구성원들이 일치단결하며 한국리틀야구는 현재 리틀야구팀 156개 팀, 리틀주니어 32개 팀 총 188개 팀으로 늘어난 상황이다. 최근 들어선 리틀야구 인프라 확충에도 성공했다.
지난 4월 2일 연맹은 화성시와 시유지에 야구장 6면을 조성하는 ‘화성 리틀야구 타운 우선협약(MOU)’를 체결하며 야구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한 회장은 “화성 리틀야구타운이 조성되면 미국, 일본처럼 우리 리틀야구대회도 초교 3·4학년, 5·6학년, 중학 1학년, 중학 1·2학년으로 세분화에 치를 수 있을 것”이라며 “그때가 되면 유소년 학생선수들의 눈높이에 맞는 수준 높은 리틀야구를 전개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리틀야구 중흥’의 백기사들 장충 리틀야구장 '우중간 담장' 뒤로 보이는 전광판. 구본능 KBO 총재가 사재를 털어 만들어준 전광판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한 회장이 리틀야구 부흥을 주도한 이라면 KBO와 구본능 KBO 총재, 허구연 KBO 야구실행위원장, KBO 육성위원회는 리틀야구 발전에 실질적인 도움을 준 이들이다.
한 회장은 “만약 2006년부터 KBO가 앞장서 리틀야구계를 지원해주지 않았다면 여전히 전국의 리틀야구팀은 스무 개 안팎에 불과했을 것”이라며 “이번 세계리틀선수권대회 아시아-태평양 예선 때도 KBO에서 2천만 원을 지원해줬다”고 고마워했다.
사실이다. KBO는 해마다 3억 원 가까운 돈과 야구용품, 대회 참가비 등을 리틀연맹에 지원해주고 있다. 장충동 리틀야구장의 전기료도 KBO가 직접 부담하고 있는데, KBO 관계자는 “2007년부터 개최하는 KBO 총재배 전국유소년야구대회의 경우 팀마다 하루 체재비 40만 원씩을 지원해줘 최대한 리틀야구팀의 부담을 덜어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구 총재는 KBO 수장이 되기 전, 이미 리틀야구에 헌신적인 지원을 했던 이다. 2007년 구 총재는 장충 리틀야구장에 전광판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거금을 쾌척했다. 1971년 개장하고도 36년 동안 전광판 하나 없던 장충 리틀야구장은 구 총재의 성금으로 비로소 전광판을 설치할 수 있었고, 덕분에 국제대회를 문제없이 치를 수 있게 됐다.
구 총재는 KBO 수장이 된 이후에도 리틀야구 현장을 틈틈이 방문해 아이들을 격려했다, 이번 한국 리틀야구 대표팀이 아시아-태평양 예선에서 우승했을 때도 구 총재는 기쁜 마음으로 우승 축하연을 열어줬다. 구 총재를 도와 KBO 살림을 책임지는 양해영 KBO 사무총장 역시 프로야구만큼이나 유소년 야구에 신경 쓰며 야구 저변 확대에 노력하고 있다.
KBO 구본능 총재가 한국 리틀야구 대표팀의 아시아-태평양 예선 우승을 축하해주는 장면 |
허구연 KBO 야구발전실행 위원장은 리틀야구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이다. 허 위원장은 그간 “리틀야구는 연맹이 잘 운영하고 있다”며 주로 중·고·대학 야구팀 창단 지원에 나섰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진다면 허 위원의 ‘야구 전도’ 노력은 리틀야구 발전에 큰 영향을 줬다. 바로 리틀야구계의 숙원인 ‘전국 중학교 야구부 창단’을 허 위원이 주도해왔기 때문이다.
야구계의 어른임을 자처하며 틈만 나면 “대한민국 야구는 이래야 한다”고 목소릴 높이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재능 기부’는 고사하고, 아마추어 야구계와 담을 쌓고 사는 일부 야구인과 달리 허 위원은 바쁜 일정에도 몇 년째 전국을 돌며 학원 야구부 창단을 유도하고 있다.
덕분에 허 위원장이 야구발전실행위를 맡기 전인 2009년까지 79개 팀, 1천907명이었던 전국 중학교 야구팀과 등록선수는 허 위원장이 등장한 이후 2014년 7월 16일 기준으로 98개 팀, 2천675명으로 늘어났다. 중학교 야구부와 등록선수가 늘어나며 리틀야구선수들의 중학 야구부 진학률도 덩달아 오르게 됐다. 다시 말해 과거에 비해 중학교 야구부에 입단하는 게 쉬워졌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KBO 육성위원회에서 잔뼈가 굵은 장덕선 팀장의 노고도 대단했다. 장 팀장은 2006년부터 KBO 육성위원회 팀장으로 근무하며 KBO와 리틀연맹의 가교 역할을 충실히 담당했다. 특히나 리틀야구에 예산지원을 하는 ‘돈이 오가는’ 일을 하면서도 그 흔한 뒷말조차 듣지 않았다.
리틀야구계는 “우리를 진심으로 후원하고 지원하는 ‘백기사’들이 있는 한 리틀야구는 예전처럼 역주행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며 “조만간 ‘리틀야구팀 200개 돌파’라는 신화를 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