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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아산 UBF 신년 제 3 강 메시지
열둘을 택하신 예수님
말씀 : 누가복음 6:6-19
요절 : 누가복음 6: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누가복음 6장 6절부터 10절에는 안식일에 일어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 은총을 받아 주의 종인 사람들이 심각한 폐쇄형 독선에 빠져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폐쇄형 독선이 개선될 가능성이 없음이 드러납니다.
오류를 수정하지 않는 지도자는 사회 전체로 하여금 막대한 비용을 소모하게 합니다. 듣지 않는 리더가 과오를 깨달았을 때, ‘무지’와 ‘실수’ 핑계를 하지만 사실은 ‘탐욕’의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지키지 않는 문제를 따지지만 ‘안식일’과 ‘성전’을 내세워 유대백성들을 틀어쥐고 있는 기득권에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에게 인정받으려는 탐욕이 회개를 거부하게 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 그들이 갱신할 기회를 주셨지만, 유대인들은 악한 편, 죽이는 편을 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셨습니다. 밤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철야기도 결과는 열두 제자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심은 최고의 선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택하신 열두 제자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최고의 방법으로 생명의 복음이 확장되게 하신 예수님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최고의 해결책을 내놓으신 예수님을 그대로 배워서 사람을 보는 우리의 시각이 예수님과 같이 바뀌고 우리도 시대를 감당할 예수님의 제자들을 세우는 역사에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실 때였습니다. 그날은 안식일이었고 회당에서 예수님 말씀 듣는 사람 중에 한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오른쪽 손이 마비되고 말라 붙어 오그라져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달픈 한 인생이 회당에 나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은혜 받고 있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양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각 인생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발 하려는 자기들 목적을 달성하고자 불쌍한 인생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일하는가? 안하는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눈은 이것만 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가만 둘 수 없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마음 중심에는 악한 생각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의 마음 중심의 악한 생각을 아시고 얼마나 마음 아프셨겠습니까? 양들을 돌보아야 하는 유대의 영적 지도자요 목자들이 양심이 마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흉계를 아시고 그릇된 마음을 분명하게 지적하셨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저가 일어나 서거늘" 예수님께서는 오른 손 마른 사람을 회당 한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교지도자들과 충돌을 피하고자 내일 사람 없을 때 다시 오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고 하셨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예수님께서 안식일이 어떤 날이 되어야 하는지 안식일을 지키는 기준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기준이 일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 이것이 관건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기준에 집착하여 결코 바꾸기 어려웠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성전과 안식일은 그들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백성 통제수단이었습니다. 성전과 안식일에 관한 율법과 규례와 세부사항들은 절대로 바꿀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굳어있는 관점, 생명 없는 기준에 도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준수의 기준은 선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올바로 지켰는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아무런 일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기준이었고, 예수님께서는 선을 항하고 생명이 살아나게 하는 것이 기준이라 말씀하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한 손 마른 사람을 모든 무리들이 보는 앞에서 고쳐주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어 그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의 오그라진 손이 놀랍게 쭈욱 펴지고 건강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났습니다. 이런 일은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치유를 통하여 예수님의 기준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임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안식일은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날임이 분명 합니다. 이쯤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다시 생각해 봄직 합니다. ‘우리가 잘 못 생각한 것 아닌가?’
11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역사를 보고도 예수님의 기준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악을 행하는 것을 택하였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죽이는 것을 택하였습니다. 유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악을 행하는 날로 만들고 생명을 구하는 날로 하지 않고 죽이는 날로 만든 자들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모독자입니다.
올바른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기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공부한 후 예수님의 기준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기준과 가치를 성경 중심, 예수님 기준으로 바꾸는 것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삶입니다. 어떤 분에게 두 자녀가 있습니다. 하나는 엘리트입니다. 부모에게 공손합니다. 착하고 성실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적극적으로 돌보지는 않습니다. 간단한 인사 외에 타인의 말을 오래 들어주는 일은 없습니다. 또 다른 자녀는 부모가 틀린 말을 하면 틀리다 말합니다. 부모가 감정을 드러내어 화내면 같이 대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의 삶은 교회에서 빛납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영접하고 따뜻하게 관심을 가져줍니다. 사람들을 참아주며 돌봅니다. 똑똑한 엘리트 자녀는 서울의 명문대 사람과 결혼시켜 소통하고 힘을 합할 수 있는 엘리트 그룹으로 보내주어야 합니다. 양들을 잘 돌보는 자녀는 비록 부모에게 대들더라도 감당해주고 연약한 양들과 함께 해주고 따뜻한 마음으로 그들을 돌보므로 그 은사를 살리도록 지방에서 양들 돌보도록 해주는 것이 맞습니다. 거꾸로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엘리트 그룹으로 보낼 사람은 무리하게 곁에 두고 양 잘 돌보는 자녀에 대해서는 ‘내보내고자 한다’며 분기 가득한 이야기를 이곳저곳 몇 년간 하고 다녔습니다. 사랑하는 자녀 보는 기준조차 ‘나에게 잘하느냐 잘 못하느냐’ 기준으로 삼은 것입니다. 아무리 주님께 충성할지라도 인간‘목자’에게 공손하지 않으면 기뻐하지 않고, 주님을 위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살아도 인간‘목자’에게 공손하기만 하면 세워주고 아껴주고 지원을 아끼지 않으니 그런 곳에서 누가 주님의 양들을 돌보며 충성하겠습니까? 그런 곳에서 살아남는 길은 사람이 하라는 것만 하면서 얌전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문제없이 지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중시하는 것을 우리도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예수님께서 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우리도 덜 중요하게 생각하여야 합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가치를 매기고 예수님 기준으로 우리의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 우리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2.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12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존재 의미가 없듯이 만민구원역사에 관심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존재 의미를 상실한 것입니다. 이 때, 존재의미를 상실한 사람들을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열심당원들은 자기들 기준에 반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물리적인 해를 가하여 가차없이 처단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마음이 전혀 없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악한 행실을 보신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열심당원 같이 물리적 해를 가하였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심각한 문제를 안고 산으로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밤새 이어졌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개인의 야망을 위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면면히 이루어지는 것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항상 우리의 모범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무엇이든 간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개인의 어려움, 개인의 상처, 개인의 한을 품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볼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하고 바람직한 기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밤새워 기도하신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후 어떤 답을 얻으셨습니까?
13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얻은 답은 열둘을 택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도하신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타락을 보시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신 최상의 결정은 열둘을 사도라 칭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는 ‘전권대사’의 의미가 있다고 배워왔습니다. 단어의 본뜻으로는 ‘어디든지 가라고 하는 대로 순종하여 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열둘을 택하신 것은 역사적으로 새로운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세우셔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나라를 이루고자 함이었습니다. 그 나라를 제사장 으로 삼아 세상만민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삭을 키우시고, 야곱을 감당하시고 야곱에게서 열 두 지파나 나오게 하셔서 열두 지파가 애굽에서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비전과 소망을 이룰 새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만민 구속역사를 이루시고자 열둘을 택하신 것입니다. 세상만민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역사에 쓰임 받는 새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열두 사도입니다.
예수님께서 택하신 열두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14~16절을 보십시오.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열둘 중에는 같은 이름들이 있습니다. 시몬이 둘이고 야고보가 둘이고 유다가 둘입니다. 열둘 중에는 형제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가 형제이고 요한과 야고보가 형제입니다. 같은 이름들이 있고 형제들도 있지만 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개성과 인격을 가졌습니다. 이 사람들은 장차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됩니다.
베드로는 네로의 박해 때 로마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안드레는 러시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고 그리스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요한의 형 야고보는 열둘 중 가장 먼저 순교하였고 헤롯 아그립바에게 체포되어 순교하였습니다. 빌립은 그리스 일대에서 복음을 전하였고 터키에서 순교하여 거기에 무덤이 있습니다. 바돌로매(나다나엘)은 아르메니아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순교하였으며, 인도까지 왔던 도마가 쿠로시오 해류를 따라 올라오는 배를 타고 한반도에도 다녀갔다는 학설이 최근 등장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이디오피아 혹은 페르시아에서 순교하였다고 하며,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바리새인들이 성전 꼭대기에서 밀어 떨어진 후 돌에 맞아 순교하였습니다. 가룟 아닌 유다는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순교하였으며, 가룟 유다 대신 열 두 제자에 뽑힌 맛디아 역시 악숨이라는 지금의 이디오피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순교하였습니다.
열두 사도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으며,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을 믿어 순종하게 하였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유대교와 유대인 경계를 넘지 않았던 것에 반하여, 열두 사도들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로 나갔습니다. 예수님의 뜻이라면 순종하여서 어디든지 갔습니다. 열둘은 세상 만민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고 사도라 칭하신 열 두 제자를 통하여 우리가 배우는 바가 무엇입니까? 열둘의 가장 큰 장점은 예수님 말씀에 대한 수용입니다. 열두 사도들은 첫째, 예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둘째, 열 두 사도들의 특징은 말씀을 잘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열 두 사도들의 특징은 예수님께서 가라는 곳으로 나가는 확장성, 개방성이 있었습니다.
이런 점들은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 어떤 방향으로 성장하여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또한,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아 나온 우리의 양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교훈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 영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잘 받아들이고 영접하는 부드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받고서 그 말씀이 주는 감동과 깨달음을 즐기고 있거나 자아도취에 머물러 있지 말고,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밤새도록 수고하였어도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데로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 곳에 그물을 다시 던지는 순종의 사람이 되고자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이름을 위하는 일이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확장과 개방이 가능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양들과 우리의 자녀들도 그런 주의 사람이 되도록 양육하여야 합니다. 제가 보수 야당 사람들을 겪어보면 그들은 사람을 평가할 때, 타이틀을 따집니다. 삼성에서 부장이었대, 검찰에서 부장검사였대, 국정원 간부였대 학벌과 직업만 좋으면 대우해주고 문을 열어 줍니다. 진보 여당 사람들은 그런 점은 심하지 않아서 좋긴 한데, 이 사람들은 편을 가르고 나눕니다. 이와 같이 학벌을 따지거나 누구 라인이냐? 나누는 것은 일반 직장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가장 잘 꽃피운다는 미국에서도 개신교 앵글로색슨계 백인을 우대합니다. 유색인종들은 주택담보 대출 받을 때, 이자율을 더 높게 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인간관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것을 우리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나에게 고분고분 잘하는 사람만 선호하거나 밀어주며 차별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최악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둘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우리가 다시 예수님의 제자들을 세워야 합니다. 그럴 때 운명과 저주에 상처받고 가슴 치는 영혼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됩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더 가까이 체험할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열둘을 한꺼번에 세우고자 하기보다 먼저 한 사람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크고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한 사람을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열 두 제자 중에서 안드레의 형제 시몬에게 베드로라 비전 넘치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제자 중의 수제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도 한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해’입니다.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이해’를 영어로 하면 ‘understand’인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이해는 ‘Under’에 ‘stand’하여야 한다는 말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그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며, 이해는 그 사람의 아래에 서야 가능한 것입니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그에 대한 이해에서 나오고 이해는 나의 마음이 낮아지고 나의 생각이 낮아지지 않고는 아주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그리 큰 죄를 짓지 않아서 죄인들을 잘 모르겠다’는 말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심각한 정욕의 죄를 지은 사람이 도리어 다른 사람의 죄를 쥐 잡듯 하는 일은 허다하게 많습니다. 죄인이 되어 보아야 죄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실존적이지 않은 주장입니다. 자신이 예수님 앞에서 죄인으로 깊이 자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죄인이며, 어떤 심각한 죄에서 구원받았는지 올바로 인식하고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죄에 대한 경험이 충분한데도 이해는커녕 더 바리새인 되는 일이 많다는 것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7~19절에는 예수님께서 시대의 양무리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섬기는 일에 사도들을 데리고 함께 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열 두 사도들이 서야 할 곳은 산 속이 아닙니다. 열 두 사도들은 상처 받은 사람, 아픈 사람,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 곳 평지에 서야 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병 고치심, 귀신 쫓아내심,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이방 땅 두로와 시돈 해안에서 온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들은 시대의 어려운 양들을 돕는 예수님과 함께 하며 예수님의 거룩하심과 예수님의 목자이심, 예수님의 사랑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캠퍼스에 말씀을 전하고 세계선교 하라고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부르심 받은 우리는 자기를 뛰어넘어 문제 많은 예수님의 양들, 시대의 어려움 겪는 영혼들을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처음 만나는 대학생과 어떻게 대화하여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목자가 알려줄 수 없습니다. 오늘 나는 나의 대화법을 개발하여야 합니다. 또한 양들이 믿음이 자라고 은혜를 잘 알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사랑하여야 할지 자기 노하우를 개발하여야 합니다. 어제 잃어버린 패턴대로 오늘 또 양을 잃어버리고 내일 또 똑같이 하다가 양을 잃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부르심 입은 예수님의 제자로써, 양들의 내면에 있는 죄를 어떻게 해결하게 하여야 할지 목자의 훈계 방법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양들이 자라나 스스로 말씀의 샘을 파고 다른 사람을 능히 도울 수 있는 제자의 도를 교육할 경험과 경륜을 쌓아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자기 스타일을 버리고 자기 기준을 버리며 예수 안에서 항상 새로움 갖기를 기도합니다. 사람을 정죄하지 말고 사람을 얕잡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양들을 수준이 낮다고 보지 말아야 합니다. 이해의 사람이 되고자 하고 이해가 억지로 이루어지거나 부자연스럽지 않도록 겸손하여져야 합니다. 겸손과 이해와 사랑은 예수님 제자의 가장 중요한 길입니다. 불순한 야심과 욕심은 이 길을 시작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2022년 우리가 힘써서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확신하고 예수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곳으로 언제든지 갈 수 있는 믿음 갖기를 기도합니다. 2022년 부르심 입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 될 캠퍼스 지성인들을 초청하고 주 안에서 성장하도록 돕고 영적으로 연단 받을 수 있게 도와 제자의 길을 가도록 돕는 일을 잘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아산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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