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9]
3.1혁명 100주년 특집
“너희들은 수심연성守心煉性에
지극한 정성을 다하라”
-의암성사의 생애(8)
편집실
의암성사 동상 / 청주 의암유허지
포덕 51년(1910) 8월,
나라가 망하고 세상이 뒤바뀌자
많은 세상사람들이 천도교를 찾았다.
10월 23일에
최린이 성사를 찾아뵙고 제자 되기를 맹세하고
25일 입교식을 행하였다.
최린은 의암성사와 천도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일본에서부터
그의 훈도를 받아온 인연도 인연이러니와
그의 인격을 논하며
당대 제일인자라고 경모하였던 바이다.
나는 천도교를 종으로 횡으로 또는
질로 양으로 주도하게 검토해 본 결과
장래 사회적 생활에 대하여
그 진로와 처소를 택하려면
천도교단에 입교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얻었던 것이다.”
이해 12월 의암성사는
경영난에 처한 보성학교를 인수하였고,
계약 조건은 3년 이내에
전 경영자가 요구할 때에는 실비로 반환하고
3년이 지난 뒤에는
인수한 측에 영구히 귀속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소식이 알려지자
천도교는 일진회의 잔당이라며
보성학교가 천도교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은
간과할 수 없다며
직원, 학생들이 동맹휴교를 선언하고
학교 문을 폐쇄하였다.
성사께서는 최린에게 사태수습을 부탁했고,
최린은 교장으로 취임한지 20여 일 만에
학교가 정상으로 되었다.
보성학교를 인수할 때
보성관과 보성사를 함께 인수하게 되어
각종 출판사업과 인쇄에 착수하였는데
사업이 잘 안되어 경영난에 빠져
많은 적자를 보게 되었다.
총부직원들이 폐업을 건의하였다.
성사는 “한 때 밑져 가면서도 끌고 나가노라면
필요하게 쓸 때가 있을 것이다.
마치 국가에서 많은 재정을 허비하며
군대를 양성하는 것은 유사시에
크게 한 번 쓰려는 것과 같으니라.” 하였다.
포덕 52년(1911) 2월에
송현동(현 종로구 안국동)에
2층 양옥을 건축하고
대사동에 있던 중앙총부를 이전하였다.
3월에 성미 성적이 우수한 교구를
등급별로 포상하였다.
이때 수원대교구 산하 남양교구는
전국 교구 성미 실적 1위를 차지하였고
김흥열, 백낙렬, 김인태, 한세교 등은
함께 성미를 나귀에 싣고서 중앙총부에 상납하였다.
등급별 포상은 다음과 같다.
1등 :
남양, 서흥, 중화, 의주, 북청, 이천(伊川), 풍천
2등 :
진위, 여주, 파주, 강화, 홍천, 연산, 이천(利川),
장흥, 순천, 남원, 김제, 익산, 순창, 옹진, 문화,
수안, 재령, 봉산, 평양, 원은산, 용강, 태천, 곽산,
용천, 벽동, 위원, 박천, 덕원, 금성, 평강, 금화
3등 :
곡산, 영변, 운산, 구성, 창성, 정주, 가산,
홍원군제교구
4월 5일 제 51회 천일 기념식은
송현동 신축교당에서 거행하였다.
각 지방에서 3천여 명의 교인이 참석하여
대성황을 이루었으며,
8일 성사의 50회 생신날에도
1,500여 명이 총부에 모여 축하식을 거행하였다.
보성소학교 학생 백여 명이 축가를 부르는 등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해 4월 동덕 여학교를 인수하였고,
또 용산의 양영학교, 양덕여학교, 마포의 보창학교,
삼성보성소학교, 청파동의 문창학교,
교동의 오성학교, 전주의 창동학교,
대구의 교남학교와 명신여학교, 청주의 종학학교,
안동의 봉양의숙, 선천의 보명학교 등
전국적으로 수십 학교를 인수경영하거나
보조금을 주었다.
5월 23일 성사는
대도주 박인호 이하 모든 관장 및 부원과
보성중학 교직원 및 학생 수백 명과
경주 대신사의 태묘를 성묘하시고
용담정과 가정리를 방문하였다.
1년 전 매입한
경주교구의 해월신사 생가터를 방문하였다.
대신사의 태묘는
포덕 5년(1864) 3월 17일
대신사의 조카 세조와
해월신사의 매부 임익서, 양사위 정울산 등
세 사람이 가정리 대릿골 밭두둑 위에
대신사의 시신을 안장하였으며,
그 후 포덕 48년(1907) 10월 17일에
시천교에서 대신사의 태묘를
현 위치로 이장한 것이었다.
그 후 시천교에서 포덕 52년 5월 15일
서울에서 기차 편으로 석상을 운반하여
묘소에 세웠다.
이때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구미산하에 사통팔달의 대로가 개통되어
오거사마(五車四馬)가 왕래할 날이
있으리라”고 하셨다.
경주교구 연혁 = 1910년 1월
해월생가터를 매입했다는 것과
1919년 1월~2월
경상도 지역 대표기도처임을
기록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태묘 = 태묘 앞의 오른쪽 작은 석상은
시천교에서 1911년 제작한 것으로
한국 근대 최초의 인물조각상이라
평가되기도 한다. /사진 표영삼
수련도장 봉황각을 건축하고
7차례의 특별연성을 실시하다
천도교단에서는
포덕51년 3월 서울에 사범강습소를 설립하고
각 지방에도
강습소를 확대하여 8백 개가 넘어섰고
포덕53년(1912) 3월 강습소 규정을 만들어
교인들에게 대한 교육을 체계화하였다.
천도교인들이 폭발적으로 늘자
총독부의 탄압은 가중되었다.
의암성사와 천도교를 탄압하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를 통해
성사를 ‘최면술사’, ‘일대괴물’,
‘과대망상에 걸린 정신병자’, ‘사이비 교주’ 등
온갖 음해를 퍼붓고 비방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사께서는
제한적으로 허용된 종교 활동을 십분 활용하여
수도원을 건립하게 된다.
수도원은
교인이면 누구든 전국 어디에서나 올 수 있고
수련 기간도
제한이 없이 침식을 같이 하기 때문에
일제의 감시를 피하는 데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성사는 포덕52년(1911) 봄부터
우이동 일대를 답사하고
임야 약 3만 평(27,946평)을 800원에 매입하고
이듬해부터 3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6월 19일 봉황각을 준공하였다.
봉황각이란 현판은 당대의 명필 오세창이 썼다.
포덕53년(1912) 4월 15일
제1회 수련회를 우이동 도선사에서 시작하여,
2회부터 7회 수련회는 봉황각에서 실시하고
포덕 55년(1914)년 3월 25일까지
연성수련을 마쳤다.
7차례의 연성수련으로
서울과 지방의 천도교 교역자 483명이
조직화 되었고 이들은 전국으로 퍼져나가
3.1독립운동 지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때 성사는 이신환성설과
성령출세설을 설법하여 말씀하셨다.
7차례의 특별연성 수련자의
각 도별 통계는 다음과 같다.
포덕 55년(1914) 무렵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서
총부의 입출금까지도 감시하므로
성미를 무기명으로 상납하라 하고
교구에서는 성미 총 호수만 보고하였다.
4월 2일 성사께서
춘암대도주 외 두령 70여 인을 소집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다 대신사가 되었으니
대신사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요
너희들 성령 속에 계시다.” 하고
춘암대도주에게 법문을 받아쓰게 하였다.
법문은 스승님께서
단전밀부(單傳密符)로 전해온 심법의 내용을 밝히어
마음을 지켜 한울님과 하나가 되도록 하라는 글로,
성사는 “3백만 교인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전해 주는 것이 원칙이나 사실 불가능한 일이므로
3백만을 대표한 여러분들에게 전해 주니
여러분들은 돌아가 모든 교인에게
내가 한 이대로 이 법문을 전하라.” 하였다.
汝必天爲天者 豈無靈性哉 靈必靈爲靈者 天在何方
汝在何方 求則此也 思則此也 常存不二乎
너는 반드시 한울이 한울된 것이니,
어찌 영성이 없겠느냐.
영은 반드시 영이 영된 것이니,
한울은 어디 있으며 너는 어디 있는가.
구하면 이것이요 생각하면 이것이니,
항상 있어 둘이 아니니라
포덕 55년(1914) 7월
전국의 23개 대교구를 37개 대교구로 확대하였다.
대교구와 교구장은 다음과 같다.
경기 경성 장기염, 수원 이종석, 이천 전철진,
경성용산 민영순, 진위 박창훈, 시흥 임기진,
부천 안계식, 여주 임순호, 양평 신재원,
파주 이동수, 수원남양 한세교, 강화 구덕희,
가평 임윤상, 용인 진종구, 광주 한순회,
인천 김종원, 안성 김지풍, 연천삭령 백영노
충남 서산 박용태, 논산은진 최상익, 부여 김현필,
홍성 이진해, 당진 차동노, 논산연산 심영훈,
연기 김운득, 서산태안 안재덕 충북 청주 정광조,
음성 김두환, 진천 박문화, 영동황간 배세창,
충주 양재원 전남 장성 박준승, 순천 박락양,
강진 김병태, 무안 송두욱, 해남 홍순, 장흥 강봉수,
고흥 정영순, 담양 이경섭, 광주 윤기섭, 영암 양빈,
진도 김의태, 완도 신명희, 곡성평창 황정욱,
곡성 김영학, 나주평남 박인화, 보성 문장형,
구례 강철수, 광양 황병수, 무안초도 안병수,
무안장산 허동필 전북 전주 김봉년, 익산 장남선,
남원 박진경, 전주고산 김현구, 정읍고부 송대화,
옥구 최순봉, 익산광산 정대원, 장수 임두홍,
고창무장 김두평, 순창 지동섭, 정읍태인 김연구,
임실 김영원, 익산함열 민영순, 진안 형극구,
김제 공문학, 김제금구 김중화, 김제만경 전길호
강원 춘천 박장우, 평강 김병주, 횡성 이승우,
홍천 박수동, 정선 전덕기, 금화금성 이규면,
이천 김병렬, 철원 최병훈, 화천 김정희,
금화 유희열, 이천안협 이춘호, 회양 유한영,
양구 조희은, 평창 이필화, 삼척 윤시엽
경남 진주 전희순, 울산 김교경, 사천 최진규,
합천 김정진 경북 대구 신태연, 성주 김건희,
영천 이채일, 경주 김진용, 안동 이종엽
평남 평양 황학도, 강동 한관진, 성천 이돈하,
안주 김안실, 중화 김영언, 강동삼등 백관범,
순천자산 김선호, 영원 송계조, 개주 배원학,
순천은산 김기수, 맹산 방기창, 중화상원 최주억,
양덕 손태룡, 용강 김광한, 강서 이초옥,
평원순안 김광준, 평원숙천 강극삼, 평원 김영실,
덕천 박왕식, 순천 최단봉 평북 의주 최석련,
초산 홍순걸, 삭주 주창건, 정주 김진팔,
선천 이군오, 영변 김명선, 구성 이종수,
강계 이정화, 운산 윤기호, 태천 이병기,
정주곽산 김경함, 용천 김귀연, 희천 김기관,
벽동 김순택, 박천가산 안처흠, 창성 강익점,
서변하계 조덕용, 철산 최영곤, 자성 김준여,
위원 이조경, 서변상계 변경용, 박천 최사민,
후창 장취환 함남 함흥 홍성운, 영흥 이인숙,
북청 박창훈, 고원 임근태, 정평 김양근,
홍원 서면주, 이원 정계근, 단천 신태천,
장진 계영선, 갑산 전윤영, 덕원 김종봉,
문천 오경청, 풍산 주병남 함북 경성 정계완,
성진 유병순, 명천 이유수, 길주 김학천,
종성 문주탄, 은성 서양봉, 북간도 박병연,
화룡 손기진, 연길 백락섭 황해 서흥 강인주,
안악 김승주, 옹진 정한영, 옹진강령 안경구,
장연 김치명, 송화 김득수, 신천 최흥숙,
곡산 이정석, 평산 이양배, 수안 김영만,
재령 임창우, 황주 황기타, 봉산 이상현,
해주 안명석, 김천토산 황위승, 신계 김병건,
연백 황락연, 김천 이재도
8월 4일에 총인원에 주재할 의사원을
대교구별로 1인씩 선정하였다.
의사원은 다음과 같다.
중화 최주억, 평양 김수옥, 용강 김광한,
강동 백찬호, 성천 김국언, 덕천 손태용,
안주 한오준, 영변 길학성, 강계 김명준,
초산 김순택, 삭주 강익점, 의주 오명운,
선천 한현태, 정주 서인화, 구성 백응규,
안악 안명석, 서흥 이관국, 이천 신정집,
횡성 이필화, 춘천 오창섭, 평강 김병열,
서산 장세화, 익산 정용근, 전주 구창근,
장성 송년섭, 순천 김창문, 강진 김의태,
영흥 이용뢰, 함흥 이기완, 북청 김태종),
경성 이경화, 경성 장효근, 수원 나천강,
청주 한창억, 진주 황태익
10월에 성사께서 일반 교도에게
105일 기도식을 행하게 하시며 설법하시기를,
“대신사가 성령으로 출세하여
도석(道席)을 베푸시고 수많은 종도(宗徒)에게
도를 시험할 날이 있을 것이니
그때 합격할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이때는 대신사의 출세기(出世期)이니
너희들은 성심으로 수도하라” 하셨다.
기도기간은
10월 1일부터 이듬해 1월 30일까지였고,
기도시간은 하오 9시였으며,
주문은 신사주문을 105회 심송(心誦)하며
모든 심고에
‘대신사의 본지를 달하기로 결심하오며
창생의 수명을
대신사께 전탁하옵나이다.’고 하였다.
황해도 도인 오응선 등이
105일 기도 후 10월 15일
용담정을 다시 건립하였다.
용담정 입구 용담교 가기 전
오른쪽 암벽에 새겨진 글씨.
1914년 10월
오응선 이계하 등이 용담정을 복원하고
암벽에 새긴 글씨.
오응선은
백범 김구를 동학에 입도시킨 황해도 도인.
“우리 교의 지금은 희화熙和시대라”
포덕 56년(1915) 성사께서는
105일 기도를 마치시고 시 한 수를 읊으셨다.
3월 10일 대신사순도 기념식을 거행한 후
의암성사는
‘신앙통일과 규모일치’의 설법을 하였다.
또 말씀하셨다.
“사람은 그 때를 밝게 보는 것도 귀하지만
장래를 밝게 생각하는 것이 더 귀하니라.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내 나라 내 민족과 천하창생의 일을 생각하는 고로
누가 개인인 나를 욕하는 것은 관계할 바 없으나,
국가 민족을 위하여 또는 천하 창생을 위하여
만약 우리 교를 방해하는 자가 있다든지
내가 생각하는 것을 굴복시키려는 일이 있다면
이것은 내 이마에서부터 갈아서
발꿈치까지 간다고 하여도
조금도 사양치 아니하리라.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게 마련인데
차라리 죽을 바에는 내가 뜻한 그대로 행할 뿐이요
구차스럽게 죽고 사는 것을 돌아볼 바가 아니니라.”
7월 동대문 밖 동묘 북쪽 숭인동에 있는
박영효의 별장 1만 650평과
건물 백여 간을 3만 3천원에 매입하고 수리하여
상춘원이라 이름하고 성사의 사택으로 사용하였다.
7월 18일 고향 청주 대주리를 찾아
청주교인들과 종학학교 학생 등
1천여 명의 영접을 받았다.
다음날 청주대교구에서 특별성화회를 개최하고
선산을 성묘하고 친인척을 만나보았고,
초정약수터를 거쳐 성사의 생가를 둘러보았다.
포덕57년(1916) 3월 10일에 성사께서
총부직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우리가 천도교를 믿는 것은
누구나 한 가지 희망이 있을 터인데
희망만 있고 성공이 없다면
그 희망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희망을 가지는 것이 귀한 것이 아니요
그 희망을 이루는 것이 귀한 것이니라.
그러므로 그 사람의 뜻이 높다 낮다 하기보다
그 사람이 그 일을
성공 하는가 못하는가 하는 것으로
그 사람의 뜻이
높고 낮음을 평가하는 것이 옳으니라.”
6월 10일 성사께서는
총부직원들과 교역자에게 다음의 법설을 남겼다.
“우리 교의 과거는 의뢰시대라 이때에는
한울이 기적과 영적으로 사람을 인도하였다.
그러나 우리 교의 금일은 희화(熙和) 시대라.
우리 신도는 이제로부터
한울님과 스승님께 의뢰하는 마음을 타파하고
내 한울을 스스로 믿으라(自天自信).
만약 자천(自天)을 자신(自信)치 못하고
천사(天師)만 의뢰하여
임사(臨事)에 자력을 얻지 못하면
진실한 건보(建步)를 얻지 못하리라.
자천은 시천주의 본체니
우리 신도들은
주체와 객체를 구별하여 수련하라.”
이때 시천교인
김영학, 한화석, 염창순, 김택현, 박봉윤, 김도빈,
방순필, 김상묵, 손동희, 채동환, 이희주, 염달한,
문순영, 김병욱, 남병문, 이관용, 염창석, 유재풍,
전봉래, 심훈지, 조형식, 김영하, 강성태 등
20여 명이 천도교로 돌아와
참회식을 행하고 천도교인이 되었으며,
8월에 또
시천교인 홍성관, 송종대 등 29명이
참회식을 행하고 천도교로 돌아왔다.
9월에
의사원 일동이 봉황각에 나와서 성사를 찾았을 때
성사는 이신환성의 내용을 설법하였다.
12월 20일 성사는
‘연원과 교인의 의무’ 라는 제목으로 설법하였다.
“보국안민이 되지 못하면 연원은 해서 무엇하겠느냐?
안심가에
‘요순 성세 다시 와서 국태민안 될 것이니’ 라고 하셨고,
몽중노소문답가에
‘너는 또한 선분 있어
아니 잊고 찾아올까’라고 하신
대신사의 말씀을 생각하여 보라.
우리 교인은 세 가지 복무(服務)할 것이 있다.
첫째는 천도교회에 대한 복무요.
둘째는 국가 사회에 대한 복무요,
셋째는 양위 신사에 대한 복무이다.
천도교에 대한 복무란 것은
개인으로서 아무리 정성이 지극하여
영통 도통이 되었다 할지라도
천도교란 기관이 확정되지 못하면
그 사람을 가리켜 이인(異人)이라고는 할지언정
교회의 목적을 달성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천도교인은 누구나 물론하고
교회 확장하기를
자기 개인의 행복이나 도성덕립보다 더 극진히 해야
자기가 세상에 태어났던 보람도 있고
천사의 은덕을 보답하는 도리가 될 것이오.
또 천도교회를 확장하여
이 세계에 영구 장존(永久長存)케 하는 것이
한울님의 본지를 달성하는 일이 될 것이다.
국가 사회에 대한 복무란 것은
우리의 목적이 보국안민 광제창생이 아닌가?
이것은 대신사의 본지 그대로를 확장하는 것이요.
다음에 양위 신사에게 복무한다는 것은
양위 신사님은 한울님과 사람 두 사이에서
우리들의 수명 복록을 얻게 하셨으므로
우리는 보국안민 광제창생을 하여
양위 신사의 본지 그대로 확장하자는 것이니
교인으로서 이것을 모르면
대도사업에 발전을 기할 수 없느니라.”
포덕58년(1917) 1월 10일에 성사는
시천교에서 천도교로 온 권병덕과 유세증을 데리고
김연국을 만나 말씀하시기를
“그대와 내가 비록 문호는 각립(各立)하였으나
한울님과 스승님을 숭배하는 마음은 하나이고
도를 이루고자 함도 하나이다.”하고
서로의 감정을 풀고자 이후 4차 방문까지 하였으나
김연국은 끝내 돌아서지 않았다.
2월에 수도승 백용성이
성사를 찾아와 뵙고 도를 물으니
성사 대답하시기를,
“부처가 없어야 부처가 있는 것이고,
한울이 없어야 한울이 있는 것이라” 하셨다.
이 무렵 성사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성(性)은 천지만리(天地萬理)의 부모가 되고,
심(心)은 세계만유의 군사(君師)가 되니,
너희들은 수심연성(守心煉性)에
지극한 정성을 다하라” 하셨다.
이때가 세계대전 때이므로
교인들이 수심정기에 힘쓰도록 지시하셨고
나용환, 나인협, 오영창, 임례환, 홍기조, 홍기억 등을
신앙통일과 규모 일치의 법설로서
황해도 평안도를 순회하게 하였고,
계속해서 나용환, 오영창으로
함경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순회하게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일어난
유럽을 중심으로 한 전쟁으로
900만명 이상이 사망했고,
참전국은 수많은 혁명 등 정치적 변화를 경험했다.
전쟁의 한편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협상국이며,
다른 한편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동맹국이다.
이탈리아, 일본, 미국이 연합국에 가입했으며
오스만, 불가리아가 동맹국에 가담했다.
일본도 전쟁의 승전국이었기에
이 시기에 미국 대통령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는
한국, 중국에 영향을 미쳤지만
식민지 상황을 벗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포덕 58년(1917) 11월,
시천교의 중진인
호남 두목 김낙철이 정갑수, 정원섭 등
10여 명을 이끌고 천도교로 돌아와
포고문에서 말하기를,
“지금 우리 교의 크게 번창하는 길은
서로 보호하고 합하여 크게 화하고
같은 마음으로 협력하는데 있으니,
낙철이 비록 노둔하고 용렬하나
그 이치를 대강 알고 있는지라…
의암성사의 높으신 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으니,
다만 몸이 천사의 본지를 우러르는 곳으로 나아가서
우리 도를 크게 창성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라 하였다.
“지금은 사람과 한울이 열리는 때”
포덕 59년(1918) 2월에 성사는
교리연구부를 설립하여
공히 대신사의 연원 아래에 있는 일반교도로
서로 진리를 연구하게하니,
그 주된 뜻은 상애(相愛)를 주로 하며
교리와 교법을 일치하게 하는 데에 있었다.
이에 앞서 교중(敎中)에서 시천교인과 상의하여
상애(相愛)의 도를 강구하였다.
성사가 이 말을 들으시고 매우 기뻐하시며
홍병기, 나용환, 양한묵, 오지영, 박봉윤, 김상묵,
김택현 등으로 하여금 이를 발기(發起)하게 하시고
지난날 출교하였던 이용구 등 60여 인의 벌안을
아울러 모두 깨끗이 씻어 주셨다.
그리고 시천교 측의
한화석, 이필영, 염달한, 박형채, 박정동, 김진태,
윤경순, 박해묵, 윤정식, 김영걸 등
여러 사람을 불러 만나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신사께 도를 전수받은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똑같이 대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선사(先師)의 심법을 받은 제자 중에
비록 서로 파가 갈라진 자가 많더라도
누구를 따질 것 없이
모두에게 선사의 도법이 일치되게 하는 것이 옳으니,
너희들은 이를 깨달았는가?” 하시니,
모든 사람이 모두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여
연구부에 열심히 종사하였다.
시천교는 이용구가 천도교에서 출교당한 뒤
박형채·권병덕·송병준 등과 신도들을 모아
1906년 서울 견지동에서 교당을 세웠고,
김연국을 시천교의 대례사가 되었다.
1912년 이용구가 사망하자 1913년에는 김연국은
권병덕 등과 가회동에 시천교를 세워,
견지동시천교와 가회동시천교로 분열되었다.
김연국은 1920년부터 계룡산으로 본부를 옮겼고,
이후 상제교, 천진교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포덕59년(1918) 6월,
성사께서 금강산 경치를 두루 구경하고
시 한수를 남겨 말씀하셨다.
億萬山中金剛秀 억만 산중에 금강이 빼어나고,
十兆人間天士高 십조 인간에 한울선비가 제일 높다.
종령120호. 1918년 12월
전국교구에 전해진 49일 기도 공문. 기도기간은
1919년 1월 5일부터 2월 22일로
심고는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대원’이었고
신사주문(신사영기아심정무궁조화금일지)을
세송(細誦)하였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