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어서 본 ‘상윳따니까야(Saṃyutta Nikāya)’ 16강
12. 기뻐함 경(S1:12, Nandatisutta)
Sāvatthinidānaṃ. ~~ (생략)
1. Ekamantaṃ ṭhitā kho s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aṃ gāthaṃ abhāsi:
1. 한 곁에 선 그 천신은 세존의 앞에서 이 게송으로 여쭈었다.
2. 난다띠 뿟떼히 뿟띠마, 고마 고히 따테와 난다띠
Nandati puttehi puttimā, Gomā gohi tatheva nandati,
우빠디히 나랏사 난다나, 나 히 소 난다띠 요 니루빠디띠.
Upadhīhi narassa nandanā, Na hi so nandati yo nirūpadhīti.
2. 아들을 가진 자는 아들 때문에 기뻐하고
소치는 목자는 소 때문에 기뻐합니다.
감각적 쾌락의 대상은 인간의 기쁨이고
감각적 쾌락의 대상이 없으면 기뻐할 것도 없습니다.
바가와(bhagava)
세존
3. 소짜띠 뿟떼히 뿟띠마, 고마 고히 따테와 소짜띠,
Socati puttehi puttimā, Gomā gohi tatheva socati,
우빠디히 나랏사 소짜나, 나 히 소 소짜띠 요 니루빠디띠.
Upadhīhi narassa socanā, Na hi so socati yo nirūpadhī”ti.
3. 아들을 가진 자는 아들 때문에 슬퍼하고
소치는 목자는 소 때문에 슬퍼한다.
감각적 쾌락의 대상은 인간의 슬픔이지만
감각적 쾌락의 대상이 없으면 슬퍼할 것도 없다.
이 경의 내용은 부모들은 자식들 때문에 행복해 지고 소치는 목자는 소 때문에 행복하고 또 이들 때문에 슬퍼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소의 존재가 아주 귀한 존재였습니다. 지금도 스리랑카에는 소 한 마리가 있으면 온 가족이 먹고 사는데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가져다줍니다. 부처님 시대에 인도에서는 소가 아주 귀하고 가족의 의식주를 해결해 주는 존재였습니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외국가면 슬퍼하고, 죽어도 슬퍼하고, 사고가 나도 슬프고, 감옥에 가거나 범죄로 잡혀가거나 할 때도 슬프고, 귀한 자식으로 인해서 슬퍼하는 일이 많습니다. 소치는 목자는 소를 누가 훔쳐 가지고 갈까 걱정합니다. 소가 남의 것을 먹어 주변 사람들과 불편해져서 슬프고, 귀한 소로 인해 슬퍼지는 일이 많아집니다. 무엇이나 갖게 되면 기쁘지만 오히려 가진 것 때문에 슬픔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고 무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구조적 문제 때문에 인간의 삶은 괴롭습니다. 그래서 괴로움은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여기서 천신이 말하는 것은 우리가 귀하다고 생각하면 기쁨도 주지만 어려운 일이 생기고 슬픔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범부는 귀한 것에 감각적 욕망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그 애착은 재생의 근거되고 윤회의 고리가 됩니다. 아라한은 감각적 욕망이 없어 기뻐할 일도 슬퍼할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재생의 근거가 소멸하여 윤회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게송에 ‘난다띠 뿟떼히 뿟띠마(Nandati puttehi puttimā)’에서 난다띠(Nandati)는 ‘기뻐하다’, ‘자랑하다’이고, 뿟떼히(puttehi)는 ‘아들’, ‘자손’이고, 뿟띠마(puttimā)는 ‘아들에 속하는’, ‘아들을 가진’입니다. 이때 아들이라고 하지만 아들과 딸이 모두 자손이라는 뜻에서 딸도 포함됩니다. 인도사회에서는 딸이 주도권이 없어서 아들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아들을 가진 자는 아들 때문에 기뻐하고’입니다.
다음에 ‘고마 고히 따테와 소짜띠(Gomā gohi tatheva nandati)에서 고마(Gomā)에서 고(go)는 ’소‘라는 뜻이고, 고히(gohi)에서도 고(go)는 ’소‘라는 뜻입니다. 다음에 따테와(tatheva)에서 따타(tatha)는 ’‘이렇게’,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난다띠(nandati)는 ‘기뻐하다’입니다. 그래서 ‘소를 가진 자는 소 때문에 기뻐한다’입니다. 두 문장을 종합하면 ‘아들을 가진 자는 아들 때문에 기뻐하고, 소를 가진 자는 소 때문에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다음 문장 ‘우빠디히 나랏사 난다나(Upadhīhi narassa nandanā)’에서 우빠디(Upadhī)는 ‘근거’, ‘기초’, ‘존재의 본질’, ‘존재의 요소’, ‘세속적 소유’, ‘감각적 쾌락의 대상’, ‘소유물’, ‘집착의 대상’ 등등의 많은 뜻이 많습니다. 우빠디(Upadhi)는 조금 뒤에 자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다음에 나라(nara)는 ‘인간’이고, 난다나(nandanā)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감각적 쾌락의 대상은 인간의 기쁨이고’입니다.
다음에 ‘나 히 소 난다띠 요 니루빠디띠(Na hi so nandati yo nirūpadhīti)’에서 나(na)는 부정하는 뜻으로 ‘없다’이고, 히(hi)는 ‘왜냐하면’, ‘정말로’, ‘확실히’, ‘그러면’, ‘그렇다면’ 등의 뜻입니다. 다음에 소(so)는 ‘그는’이고, 난다띠(nandati)는 ‘기쁨’입니다. 요(yo)는 요히(yohi), 요수(yosu), 야(ya)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데 ‘어느 것’, ‘무엇이나’라는 뜻입니다. 다음에 니루빠디(nirūpadhi)는 ‘욕망이 없음’, ‘집착의 대상이 없는’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감각적 쾌락의 대상이 없으면 기뻐할 것도 없습니다.’입니다. 이를 좀 더 자세하게 풀이하면 ‘감각적 욕망이 없어서 집착의 대상이 없으면 그는 확실히 어느 것도 기뻐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게송이라서 간결하게 하였습니다.
‘감각적 쾌락의 대상이 없으면 기뻐할 것도 없습니다.’라는 천신의 말은 욕계의 감각적 욕망은 궁궐과 아름다운 침상과 옷과 장신구와 갖가지 음식과 무희와 수행원을 가질 수 있어서 누구나 기쁨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아들이나 소떼처럼 이들 감각적 욕망도 사람을 기쁘게 합니다. 그래서 천신들은 감각적 욕망이 없으면 하등에 기뻐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다르게 보면 감각적 욕망이 없는 자는 가난하여 옷과 음식도 구하지 못해서 기뻐할 것이라곤 없습니다. 이와 같이 아귀나 다름없고 지옥중생이나 다름없는 자가 과연 무엇을 기쁘게 생각하겠습니까,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감각적 욕망이야말로 생존의 근본이라는 견해입니다. 이것은 감각적 욕망이 아닌 것을 모르는 욕계천신의 말입니다.
하지만 ‘감각적 쾌락의 대상이 없으면 기뻐할 것도 없습니다.’라는 천신의 말과 다르게 부처님께서는 ‘감각적 쾌락의 대상이 없으면 슬퍼할 것도 없다.’라고 답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감각적 쾌락이 없으면 재생의 원인이 되는 업을 생성하지 않아 번뇌가 소멸한 아라한이기 때문입니다.
천신이 부처님께 게송으로 여쭈어 본 내용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들을 가진 자는 아들 때문에 기뻐하고
소치는 목자는 소 때문에 기뻐합니다.
감각적 쾌락의 대상은 인간의 기쁨이고
감각적 쾌락의 대상이 없으면 기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천신의 게송을 들으시고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답변하셨습니다.
“아들을 가진 자는 아들 때문에 슬퍼하고
소치는 목자는 소 때문에 슬퍼한다.
감각적 쾌락의 대상은 인간의 슬픔이지만
감각적 쾌락의 대상이 없으면 슬퍼할 것도 없다.”
여기서 천신과 부처님의 말씀은 모두 똑같은데 단어 하나가 다른 것이 있습니다. 천신은 ‘기쁨’이라는 난다띠(nandati)를 말했지만 부처님께서는 똑같은 천신의 말에 슬픔이라는 소짜띠(socati)를 바꾸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욕계천상에 사는 천인이 본 삶과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이 보신 삶에 대한 견해의 차이입니다. 천신은 항상 기쁨이 충만한 채로 살지만 부처님은 기쁨도 있지만 윤회하는 생명은 반드시 슬픔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게송의 본문에 우빠디(upadhi)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우빠디(upadhi)는 매우 많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빠디(upadhi)는 ‘근거’, ‘기초’, 존재의 본질‘, ‘존재의 요소’, ‘세속적 소유’, ‘감각적 쾌락의 대상’, ‘소유물’, ‘집착의 대상’, ‘의착’ 등입니다. 여기서 집착의 대상이란 다시 태어남의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모든 토대가 되는 집착을 말합니다. 그래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번뇌도 포함하고 있으며 갈애도 포함됩니다. 우빠디(upadhi)는 존재의 본질이라서 인간이 생존한다는 것은 바로 우빠디(upadhi)에 근거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각적 쾌락도 생존의 힘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현재의 삶에도 기초가 되지만 미래의 태어남에도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감각적 쾌락은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재생의 요소로도 작용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을 통틀어서 삶에 필요한 토대나 소지품이나 소유물이나 설비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한 감각적 쾌락이라는 우빠디(upadhi)는 집착이라는 뜻의 우빠다(upadā)라 비슷한 단어입니다. 두 가지 단어의 어원은 다르지만 큰 틀에서 동일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빠다(upadā)라는 집착을 원인으로 업을 생성해서 다음 생이 일어나는데 재생의 토대가 됩니다. 우빠디(upadhi)도 이와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감각적 쾌락이라는 뜻의 우빠디(upadhi)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감각적 욕망인 애욕에 대한 집착인 애취(愛取)는 가마 우빠디(kāma-upadhi)입니다.
둘째, 오온에서 무더기에 대한 집착인 온취(蘊取)인 칸다 우빠디(khandha-upadhi)입니다.
셋째, 오염원인 번뇌에 대한 집착인 번뇌취(煩惱取)는 낄레사 우빠디(kilesa-upadhi)입니다. 넷째, 업형성을 집착하는 위작취(爲作取)는 아비상카라 우빠디(abhisaṅkhāra-upadhi)입니다.
옛날에 어떤 돈이 많은 부자가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고 못된 일을 많이 했습니다. 이 사람이 죽어서 하인으로 태어났습니다. 하인으로 태어났지만 별로 불편하지 않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났는데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 때문에 그는 마을에서 쫓겨났고 아이로 인해 불행한 일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사람은 우빠디 삼빳띠(upadhi psampatti) 없어서 그렇다고 하셨다.
우빠디 삼빳띠(upadhi sampatti)에서 우빠디(upadhi)는 앞서 밝힌 것처럼 ‘근거’, ‘기초’ 존재의 본질‘, ‘존재의 요소’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삼빳띠(sampatti)는 ‘성공’, ‘도달’, ‘성취’, ‘행복’, ‘행운’, ‘탁월’, ‘장엄’이라는 다양한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빠디 삼빳띠(upadhi sampatti)의 뜻은 ‘성공의 기초’ ‘행복의 근거’를 의미하는 공덕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성공적인 기초가 만들어져 우빠디 삼빳띠(upadhi sampatti)가 있으면 사회적 지위가 구족하고 가문과 아름다움이 구족합니다. 구족(具足)하다는 것은 빠짐없이 두루 갖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빠디 삼빳띠(upadhi sampatti)는 좋지 않을 일을 막아주는 것으로 공덕의 과보로 나타납니다. 축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아지들을 보면 개로 태어났지만 잘 태어나 왕처럼 대접을 받으면서 삽니다. 이것은 비록 개로 태어났지만 우삐디 삼빳띠(upadhi sampatti)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떤 개는 밥도 얻어먹지 못하고 삽니다. 이런 개는 행복의 근거가 되는 우빠디 삼빳띠(upadhi sampatti)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오무간죄(五無間罪)를 짓지 않으면 우빠디 삼빳띠(upadhi sampatti)가 있습니다. 아버지를 죽이는 것, 어머니를 죽이는 것, 승가를 분열시켜 갈라지게 하는 것, 아라한을 죽이는 것, 부처님 몸에서 피가 나게 하는 것이 오무간죄(五無間罪)입니다. 이것을 오역죄라고도 합니다. 오무간죄(五無間罪)를 지은 사람은 계속 그 과보를 받고 살아야 합니다. 오무간죄(五無間罪)를 빤쨔 안안따리야니 아빳띠(Pañña anantariyāni āpatti)라고 합니다. 무간(無間)이라는 말은 ‘틈새가 없는’, ‘지체가 없는’이라는 뜻으로 죄의 과보가 쉬지 않고 계속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공간의 틈새가 없다는 뜻이 아니고 고통이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되는 상황을 말합니다. 무간지옥(無間地獄)이라는 말이 바로 이런 현상을 가진 곳을 말합니다.
우리가 공양을 올리면 다섯 가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장수, 아름다운 몸, 편안함, 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아름답고 건강한 몸을 가지려면 음식 보시가 중요합니다. 자애명상을 하게 되면 우빠디 삼빳띠(upadhi sampatti)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애명상을 하면 분노를 가라앉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애명상도 보시에 들어갑니다.
부처님 시대에 삘린다왓짜(pilindavacca)라는 아라한 스님이 있었습니다. 비구나 재가 신자들에게 습관적으로 “야 이놈들, 이리 와!”하는 등의 천한 말씨를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그가 걸어가는 모습과 앉아있는 모습은 굉장히 품위가 있고 점잖았습니다. 또 이 스님은 잘생기고 매우 아름다운 몸을 가졌습니다. 이 스님은 과거에 옷을 많이 보시해서 아름다운 몸을 가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천한 말씨는 욕을 하고 입을 조심하지 않은 과보로 인해서 아라한이 된 이후에도 그런 습관이 나온 것입니다. 아라한이나 부처님이나 번뇌가 소멸한 것은 같지만 습관에 대한 것은 다릅니다. 아라한은 아직 습관이 남아있고 부처님은 습관조차 완전하게 소멸한 분이십니다.
불교에서 유명한 여성신도 말리까(Malika)가 있었습니다. 말리까(Malika)는 원래 짤라라는 꽃집 딸이 있었는데 자비스럽고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아름답고 인기가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시장에서 꽃을 팔았습니다. 그는 시장에 갈 때 시장에서 먹을 주먹밥을 만들어서 가지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탁발하시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부처님을 만나는 기회가 온 것이 너무 기뻐서 주먹밥 3개를 모두 공양을 올렸습니다. 그때 공양을 받으신 부처님께서 살짝 미소를 지었습니다.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께 왜 미소를 지으십니까, 하고 궁금해서 여쭸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이 사람은 진실한 신심으로 이 공양을 올렸다. 저녁이 되면 이에 대한 과보가 나서 꼬살라왕의 왕비가 될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꼬살라 왕은 아자타삿투 왕과 친척입니다. 그런데 코살라왕은 아자타삿투 왕의 나라인 마가다를 뺏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내서 마가다를 뺏으면 떳떳하지 못해서 일반인 복장을 하고 아자타삿투 왕의 마을 하나를 치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만 성공하지 못하고 싸움에서 지고 괴로운 마음으로 피해서 돌아오는 길에 피곤해서 쉬고 있었습니다. 이때 짤라라는 꽃집 딸이 물을 주면서 따뜻한 말로 도움을 줬습니다. 짤라의 언행에 그만 코살라 왕이 반했습니다. 왕은 대신들에게 짤라가 남편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왕은 짤라가 남편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저녁에 짤라를 왕궁으로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왕궁에 왕의 시중을 드는 궁녀가 500명이 있었는데 이때 짤라는 제1왕비가 되었습니다.
꽃집의 딸이 큰 나라의 첫 번째 왕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짤라의 자비스러움 때문이었는데 이것은 갑자기 일부러 만든 것이 아니고 과거의 전생부터 가지고 온 공덕입니다. 바로 이런 우빠디 삼빳띠(upadhi sampatti)가 있어서 왕비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짤라라는 이름을 말리까(Malika)로 바꾸었습니다. 스님들께서 여성 신자들에게 이런 말씀하십니다. ‘신심 깊은 위사카(Visakhā)와 말리까(Malika)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남자 신도들에게는 ‘아나타삔디까(Anathapindika)처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스님들에게는 ‘아난다(Ananda)와 라훌라(Rāhula)처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조상들께 공덕을 회향하는 것도 하나의 보시입니다. 아사두사다나(asadusadāna)는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큰 보시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꼬살라 왕이 십만 명의 스님들을 모시고 아주 거대한 공양을 올렸습니다. 한 스님마다 코끼리 한 마리가 우산을 받쳐 주는 큰 행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그릇도 새 것으로 준비했습니다. 이 행사의 모든 주관을 말리까(Malika)가 했습니다. 코살라왕도 말리까(Malika)로 인해서 신심이 깊어졌습니다. 그런데 큰 행사를 잘 치르고도 코살라왕은 밤에 잠을 못 잤습니다. 부처님을 만나서 나는 이런 좋은 행사를 하는데 왜 이렇게 잠을 못자고 힘든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큰 보시를 했지만 조상을 모시지 않아서 그러는 것이다. 그분들이 공덕을 달라고 그러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다시 조상들에게 공덕회향을 했습니다.
불교에 스님들께 공양올린 다음 공덕회양을 조상들께 합니다. 조상들께 공덕회양을 하는 풍습이 꼬살라 왕의 이 사건으로 생긴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 제사의식과는 다릅니다. 불법승을 중심으로 해서 그 공덕을 조상들께 회향합니다.
스리랑카에서는 소를 방생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도 소가 필요한 사람에게 소를 방생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방생한 소는 나름의 족보가 있어서 이름, 색깔, 주인 등이 등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방생한 소는 팔지 못하고 잡아 죽이지도 못합니다. 소가 자기 역할을 하고 자연스럽게 죽을 때까지 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방생한 소가 죽으면 땅에 묻어줍니다. 소를 방생해서 소를 못 죽이게 하는 것입니다. 소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기 때문에 강아지와 똑 같습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소를 팔기 위해 저녁 때 소를 살 사람과 얘기를 마쳤습니다. 소가 그것을 알아듣고 저녁밥을 안 먹었다고 합니다. 소를 죽이려고 데리고 갔는데 소가 도망을 나와서 자기가 살던 집에 돌아와 주인을 죽였습니다. 소가 기억력이 아주 좋고 머리가 좋다고 합니다. 동물 중에 제일 똑똑한 동물이 코끼리와 소라고 합니다. 말을 잘 들어서 소는 머리가 나쁘다고 말하는데 머리가 좋으니 일을 잘 하는 것입니다. 스리랑카에서는 마을 이장이 각서를 쓰고 방생한 소를 팔거나 죽이지 못하도록 관리합니다. 방생한 소가 아니고 그냥 키우는 소는 잡아서 먹습니다.
스리랑카에서 소고기 먹는 사람은 이슬람교 사람들과 술을 먹는 사람들입니다. 이슬람교 사람들은 일주일에 한 번 씩 소고기를 먹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마을에서 소를 1주일에 한 마리씩 잡습니다. 소를 죽일 때 20분간 경전 독송하고 칼을 휘두르는 의식을 합니다. 아이들 앞에서도 목을 자릅니다. 지금은 시대가 변해서 아이들 앞에서는 목을 자르지는 않습니다.
불교는 전 우주를 아우르는 윤회의 세계를 말하기 때문에 어디에서도 없는 오랜 시간을 나타내는 단어가 많습니다. 이 중의 하나가 겁(劫)입니다. 이 겁(劫)을 깝빠(kappa)라고 합니다. 깝빠(kappa)는 기본적으로 '적합한, 적당한'의 뜻인데, 율장에서는 '계율, 법도'의 뜻이고, 여기서는 '정해진 적합한 시간'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겁(劫)은 상상을 초월하는 매우 긴 시간을 나타내는 단위로 씁니다.
이 겁(劫)에도 여러 가지 겁(劫)이 있습니다.
첫째, 중간겁인 안따라 깝빠(antara-kappa)가 있습니다. 인간의 수명은 열 살에서 만 살까지 증가하였다가 다시 열 살로 감소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중간겁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나이가 만 살 될 때 미래의 붓다인 미륵불이 태어난다고 합니다. 땅이 넓어지든지 줄어들든지 1인치 움직이는데 1000년 걸리는 시간이 중간 겁입니다.
둘째, 아승지겁인 아상케야 깝빠(asaṅkheyya-kappa)입니다. 아승지겁을 무량겁이라고도 합니다. 아승지겁은 중간겁의 20배에 해당하는 기간을 아승지 겁이라고 합니다. 10에 140승이 아승지겁인 아상케야 깝빠(asaṅkheyya-kappa)입니다.
셋째, 대겁인 마하 깝빠(mahā-kappa)입니다. 대겁은 아승지 겁 네 개가 모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겁이 바로 대겁입니다. 이 대겁에는 부처님이 5분이 나오십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벽지불, 전륜성왕이 태어나고 앞으로 오실 미륵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륵불은 인간의 나이가 만 살 때 오십니다. 그래서 현재의 대겁을 행운의 겁이라고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40만 대겁 동안 바라밀을 행하셨는데 27분의 부처님을 만났습니다. 24분의 부처님께 수기를 직접 받았습니다. 3분은 만났지만 수기를 받지 않았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정진을 많이 하신 정진 부처님입니다. 테라와다(Theravāda)에서는 우리 시대의 부처님이신 석가모니 부처님만 얘기합니다. 부처님은 지혜 높으신 부처님, 신심 깊으신 부처님, 정진력 높은 부처님이 계시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은 정진 부처님이십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믿음이라는 뜻의 삿다(saddhā) 위주의 바라밀을 행하시고, 지혜라는 뜻의 빤냐(paññā) 위주의 바라밀을 행하시고, 정진이라는 뜻의 위리야(viriya) 위주의 바라밀을 행합니다.
연등불이신 디빵까라(Dīpaṃkara) 부처님께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부처가 될 것이라고 마하수기를 주셨습니다. 연등 부처님 앞에 3분이 있습니다. 데와닷따도 연등불 시대에 부처님과 만났던 사이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자기 스스로 부처가 되겠다고 생각을 하고 살았습니다. 이러한 분을 보살이라고 합니다. 붓다가 되기를 서원을 세운 보살(菩薩)을 보디삿따(Bodhisatta)라고 합니다. 보살(菩薩)은 오직 붓다가 되기 위해 바라밀 공덕을 쌓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지옥은 안가셨습니다. 축생으로도 태어나서 항상 바라밀을 행했습니다. 왜냐하면 보살의 서원을 세우면 어느 생에서도 보살이 되고자하는 서원을 잊지 않습니다. 테라와다(Theravāda)인 상좌불교에서는 아디붓다(Ādibuddha)라고 하는 이 부처님이 연등 부처님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아미타불을 아디붓다(Ādibuddha)라고 말합니다. 아디(Ādi)는 ‘처음’, ‘최초’라는 뜻입니다.
대겁은 16마일 길이의 박스를 만들어서 백년에 한 번씩 겨자씨를 한 알씩 넣어도 다 채워지지 않는 기간을 말합니다. 또 16마일의 큰 바위를 100년에 한 번씩 비단옷으로 스쳐서 바위가 다 닳아지는 기간입니다.
넷째, 공겁인 순냐 깝빠(suñña-kappa)입니다. 공겁(空劫)에는 부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순냐(suñña)는 ‘빈’, ‘텅빈’, ‘공허한’, ‘비실체적인’, ‘공(空)’이라는 뜻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은 순냐(suñña)라는 뜻의 공(空)을 말합니다. 이때의 공(空)은 비어있어서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공(空)은 인연에 따라 생겨나므로 아(我)와 아소(我所)라든가 실체와 자성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라고 하거나 나의 소유라고 하는 것이 없으므로 이것을 주도하는 실체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자칫 불교의 공(空)이 아무 것도 없다는 식의 견해를 가지면 허무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몸과 마음은 있지만 이것을 소유하는 자아가 없는 것이 공(空)입니다. 그래서 공(空)은 무아(無我)라는 의미와 뜻을 같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