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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기/펼치기 정의
철분이 조금 섞인 백토로 만든 형태 위에 철분이 1∼3% 정도 들어 있는 장석질 유약을 입혀
1,250∼1,300℃ 정도에서 환원염으로 구워낸 자기.
접기/펼치기 개설
이 때 유약의 색은 초록이 섞인 푸른색으로 비취색(翡翠色)과 흡사하고 투명에 가까우며 태토(胎土)의 색은 흐린 회색이기 때문에 청자의 색은 회색이 바탕이 된 녹청색이 되며 고려사람들은 이를 비색(翡色)이라 하였다.
청자의 태토와 유약은 청자를 만든 나라와 지방, 그것을 만든 시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고 굽는 방법도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여기에 따라서도 태토와 유약의 색이 조금씩 다르다.
우리 나라 청자도 신라·고려시대에는 앞에 설명한 것과 같으나 조선시대에는 태토가 백색인 백태(白胎)청자도 있다. 중국의 경우에는 월주요청자(越州窯靑磁), 북송(北宋)의 여관요청자(汝官窯靑磁), 남송(南宋)의 관요청자(官窯靑磁), 용천요청자(龍泉窯靑磁)와 북방청자라 불리는 요주청자(耀州靑磁), 임여요청자(臨汝窯靑磁)가 모두
조금씩 다르며, 같은 용천요청자와 남송 관요청자 중에서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우리 나라 청자와 흡사한 중국청자는 월주요와 여관요청자인데 월주청자는 유약의 투명도가 약하고 갈색을 약간 머금은 올리브그린(olive green)색을 띠며 여관요청자도 유약의 투명도가 낮다. 남송 관요청자는 유약과 태토가 우리 청자와 비슷한 것도 있으나 태토가 흑색이며 청자색은 아주 흐리고 유약이 두껍고 불투명한 것이 있다.
용천청자는 유약이 두껍고 불투명하며 청자색이 아주 진한데 태토가 백색인 백태청자도 있다. 요주·임여요 청자계통은 유약이 갈색을 머금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주로 태토와 유약 속에 섞여 있는 철분의 함유량과 환원염이냐 산화염이냐에 따라 나타난다.
최성기 우리 나라 청자는 환원번조로 고운 비취빛의 아름다운 비색 청자이지만 불길이 잘못되어(산화염) 황색이나 갈색을 머금고 있는 것이 있으며, 같은 그릇인데 어느 부위는 비취색이고 다른 부위는 갈색을 머금은 예도 상당량에 달한다.
중국 만당(晩唐)·오대(五代)의 월주청자와 북송 여관요청자, 남송 관요청자·용천요청자도 어떠한 일정한 시기 중에서 제한된 수량만이 명품이고, 모두가 비색(翡色)의 아름다움을 지닌 청자는 아니다. 그 시대가 지향하는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운 청자는 최고의 정점에 도달한 일정한 시기와 특정한 지역에서만 가능할 수 있다.
접기/펼치기 청자의 발생 , 회유토기와 중국청자의 발생
청자는 토기에서 발전한 것이다. 토기가 발전하여 고화도환원번조(高火度還元燔造)의 석기(炻器) 단계에 이르면 가마에서 자연히 생겨나는 재티가 고온의 토기 표면에 내려앉아 태토에 들어 있는 규사질(硅砂質)과 합하여져 녹아붙어 자연유가 되는데 이런 경우 재티를 많이 날게 하여 인위적으로 자연유를 입히기도 한다.
이러한 자연유의 성분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것을 잿물 또는 회유(灰釉)라 한다. 이 잿물을 토기 표면에 바르고 고온으로 구워내면 회유토기(灰釉土器, 또는 灰釉炻器)가 되고 이 회유토기가 청자발생의 시초이다.
중국 회유토기의 시원은 은대(殷代)이며,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부터 연유(鉛釉)가 발달하였지만 동양에서 유약의 기본은 회유였다. 이 회유는 한대(漢代)에 들어오면서 전 시대보다 유약 표면이 매끄럽게 되는데, 이러한 단계를 시원적 또는 초기적 청자라고 할 수 있다.
육조시대(六朝時代)에는 태토도 점차 양질이 되고 유약도 장석유(長石釉)에 가깝게 발전하여 질적으로 청자에 한 발 다가서게 되고 당대(唐代)에 이르러 청자가 세련되기 시작하여 만당·오대에는 질적으로 완벽한 청자가 되었다.
화남(華南)과 화북(華北)지방에서 다 같이 청자를 만들었지만, 화북지방의 것은 조질(粗質)이었으며, 오대까지 중국청자를 대표하는 것은 양쯔강 남쪽 하류에서 널리 생산되던 청자 중에서도 저장성(浙江省) 동북쪽 상린호반(上林湖畔) 일대를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던 가마에서 만들어낸 월주청자였다.
이 밖의 중국청자는 이른바 북방청자라고도 불리는 요주요 계통의 청자와 북송 여관요청자(河南省 寶豊縣 淸凉寺), 남송 용천청자·관요청자 등이다. 이 중에서도 중국 도자사상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11세기 말∼12세기 초 북송대에 만들어진 여관요청자이며, 남송대의 관요와 용천요의 명품도 높이 평가된다.
시유토기와 우리 나라 청자의 발생
우리 나라는 삼국시대에 고화도로 환원번조한 토기를 만들었다. 삼국토기 중에서도 신라·가야토기는 질적으로 가장 우수한 것이어서 1,200℃ 이상이나 올라가는 고화도환원번조로 표면색은 회청흑색이고 무쇠같이 단단한 것이었다. 삼국시대의 토기를 거쳐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토기에서 자기로 이행되는 기반이 확립되었다.
통일신라시대 토기는 부장용(副葬用)보다는 주로 실생활용으로 안정된 것이었다. 이때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토기 표면에 유약을 입힌 연유계(鉛釉系)인 녹유토기(錄釉土器)와 갈유토기(褐釉土器)가 발달하여 세련되고, 8세기경부터는 회유토기가 발달하여 시유토기(施釉土器)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고 있어서, 토기에서 자기로 이행되는 기반이 확립되었다.
자기에 대한 지식은 삼국시대부터 중국 육조청자(六朝靑磁)의 유입이 상당량에 달하고 있고(일부 백자·흑유자의 유입도 있음.), 8세기부터 성당(盛唐)의 도자기가 들어왔으며, 특히 9세기경부터는 월주지방의 만당도자기(주로 청자와 일부 다른 지방 백자)와 그 기술이 해로(海路)를 통하여 활발하게 우리나라 서해안과 일부 남해안에 많이 유입되어 초기 청자인 이른바 일훈문굽계청자(日暈文─系靑磁 : 햇무리굽청자)와 소량이지만 백자도 만들기에
이르렀으며 뒤이어 녹청자(綠靑磁)도 만들었다.
중국 저장성 월주청자의 영향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이 청자는 9세기 후반경부터 비롯되어 10세기까지 계속되었다고 생각되며, 일훈문굽계 청자요지는 주로 경주지방과는 멀리 떨어지고 중국과 가까운 우리 나라 서해안과 남해안 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곳만 하여도 8, 9개소에 이르고 있으며, 그중에서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와 계율리 일대에 집중적으로 많이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첫째, 통일신라 말기가 되면 수도인 경주의 왕권이 약화되고 지방호족들의 세력은 확장되기 때문이다. 둘째, 그 대표적 호족세력인 장보고(張保皐) 등에 의한 중국과의 해상무역을 통하여 서남해안지역이 중국 도자문화의 영향을 가장 일찍 받게 되었다.
또한 풍부한 이 지역 물산과 함께 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 등으로 이 지방의 사회·문화·경제적 요건이 경주 등
타지역보다 앞섰다. 따라서 새로운 도자기문화에 대한 이해와 수용태세가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9세기 전반 동북아 해상무역의 왕자였던 장보고 등의 해상활동에 의하여 중국청자(백자·흑유자도
포함)가 수입되고 청자번조기술이 도입·전파됨으로써 이 일대는 이미 토기를 사용하는 생활문화권에서 벗어나
자기를 사용하는 문화권으로 진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 서남해안의 가마에서는 석기에서 청자로 이행되는 초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환원번조가 잘되고 갑발(匣鉢 : 도자기를 구울 때 재티 등이 자기 표면에 내려앉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도자기를 넣는 개비)을 사용한 본격적인 청자를 번조하기 시작하였고, 일부 백자와 흑유자도 번조하였다.
그 뒤 강진과 부안은 중앙인 개경과 연결되어 관요로 이어져서 이곳 가마가 집중적으로 운영되어 발전하게 되고, 중국 남북방요의 영향을 체계있게 정리, 이용함으로써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초기 청자와 녹청자
햇무리굽청자는 양질이었기 때문에 생산비가 높아서 그 소비계층도 지방호족 등 부유한 계층이나 상류계층이었을 것이다. 9세기 무렵 햇무리굽 양질 청자의 수요가 늘어나자 서남해안 일대에는 수많은 가마가 생겼다.
이제까지 발견된 가마만 보아도 북쪽으로부터 황해도 송화군 운유면 주촌리와 봉천군 원산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용인시 이동면 서리,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고창군 아산면 용계리, 강진군 대구면 일대와 칠량면,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등 널리 분포되어 있다. 이들 가마는 규모가 방대하고 모두 갑발을 사용하여 값이 비싼 양질의 청자를 생산하려고 노력한 가마들이다.
청자문화가 이같이 급속히 퍼져나가게 되자 자연히 질이 떨어지는 조질의 값싼 청자가 역시 서남해안 일대에서 생산되어 일반 백성들의 수요에 충당하게 되었다. 이 조질청자는 태토에 모래 등 잡물이 섞이고 번조한 뒤에도 기공(氣孔)이 많은 등 치밀하지 못하고, 유약도 회유와 흡사하여 그 색이 녹갈색을 머금고 있으며 유면(釉面)도 고르지 못하다.
이러한 청자를 녹청자라고 하는데, 이 녹청자요지는 인천광역시 서구 경서동, 충청남도 서산시 성연면 오사리, 보령시 천북면 사호리, 전라남도 함평군 손불면 양재리, 영광군 염산면 오동리, 해남군 산이면 일대 등지에 있으며, 해남군 산이면에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만도 50개가 넘어 이 시기 청자문화의 급속한 발달을 엿볼 수 있다.
녹청자의 발생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현재로서는 햇무리굽청자가 발달, 보급되는 시점에서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보다 앞서 신라 회유토기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으나 아직까지는 더 확실한 자료가 없다.
접기/펼치기 고려청자의 발달 및 쇠퇴 ,시대구분과 각 시대 개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미 통일신라 말기에 청자를 만들고 일부 백자와 흑유자도 만들기 시작하였으나, 고려에 와서 청자는 더욱 많이 만들어지고 발전, 세련되어 고려청자의 이름이 높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시기를 구분하여 고려청자를 살펴보고자 한다.
전기 : 고려 초기에 강진의 햇무리굽청자가마는 점차 확산되었으나 다른 지방의 햇무리굽청자가마는 점차 없어지거나 지방의 조질청자가마가 되고 녹청자가마도 생겨나게 된다.
강진가마에서는 청자의 질과 형태와 문양이 안정되고, 중국의 제반 양식과 번조수법이 고려적으로 변모해 나가 16대 예종연간까지는 그 질과 양식에서 중국적인 것을 거의 청산한 단계에 이른다. 그러므로 고려초에서 16대 예종(1122)까지를 전기로 한다.
중기 : 17대 인종 때부터 고려자기가 고려적으로 아름답게 세련되어 독창적 기형과 독특한 비색청자를 완성하고, 18대 의종 때에는 상감기법과 문양구성이 가장 뛰어났으며, 청자·청자상감(靑磁象嵌)·철채(鐵彩)·동화(銅畫)·동채(銅彩, 또는 辰彩)·연리문(練理文)·철채상감·화금자기(畫金磁器) 등 다종다양한 청자가 만들어졌고 청자기와도 만들었다.
인종대에 이미 귀족간의 알력이 심화되어 의종 때 무신의 난이 일어났는데, 무신이 집권한 시대의 고려자기는 질과 양식이 퇴보하였지만 고려자기의 모습에 커다란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몽고군이 침입하면서부터 급격히 퇴보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1123년(인종 1)부터 몽고가 대군으로 침입하기 직전인 1230년(고종 17)까지를 중기로 한다.
후기 : 몽고 침입 이후에 원종대와 충렬왕 초까지 소수의 상품(上品)을 제외하고는 고려자기가 많이 퇴보하였으나 중기의 모습은 아직 남아 있고 충렬왕대부터 화금과 진사설채가 다시 나타나며 새로운 기형과 문양이 생기고 청자의 질이 좋아지는 등 일시적 성황을 보이다가 다시 퇴보하는 고려말까지를 후기로 한다.
전기(발전기)
9, 10세기는 청자가 발생하고 백자도 일부 만들어 그 질이 자질(磁質)로서 완성되는 시기이다. 이때의 청자와 백자는 현대에서 말하는 완전한 자기는 아니며 완전한 자기로 발전하는 과정이다. 이 때 청자·백자 이외에 흑유자도 일부 특수한 지역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에서 약간 만들었으며, 점차 고려도자기가 다양화되는 시기였다.
청자에는 청자의 기면(器面)을 파내어 상대적으로 파내지 않은 면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대담하고 크게 나타낸 이형연판무늬가 등장하고, 오목새김문양(거친 국당초문 등)과 철화문(鐵畫文) 및 퇴화문(堆花文)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11세기 말∼12세기 초에는 중국의 산시성(陜西省) 요주요, 광저우(廣州) 서촌요·정요·자주요·수무요 등과도 교류가 있어 음각(오목새김)·양각(돋을새김)·양인각(압출양각)문과 철화문·퇴화문이 발전하는 등, 청자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기형·문양·번조수법 등이 고려적으로 세련되어 갔다.
강진의 가마는 점차 확대되어 대구면의 용운리·계율리 일부, 사당리와 칠량면 삼흥리 일대에서 사당리 전면과 수동리 일대로 확산된다. 그리고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과 진서면 일대에도 청자가마가 생기고, 그 뒤 가마도 관요형태의 대규모의 청자요로 발전하였다.
중기(성기)청자의 세련
12세기 전반기는 고려청자 중에서도 순청자가 가장 세련되는 시기였다. 청자의 색은 처음부터 환원번조로 시작되었으며, 이미 11세기에는 완벽한 환원번조로 독특한 청자색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12세기 전반기는 그 절정기로서 이 때 청자의 모습은 17대 인종왕릉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청자과형화병(靑磁瓜形花甁) 등 일괄유물로 대표된다.
1123년(인종 1) 북송 휘종의 사행의 일원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고려도경 高麗圖經≫에서 “근년 이래 제작이 공교(工巧)하며 색택(色澤)이 더욱 아름답다.”라고 한 것이나, 북송말경으로 생각되는 태평노인(太平老人)의 기록인 ≪수중금 袖中錦≫에 “고려청자의 비색이 천하제일”이라고 지적한 바와 같이 반실투성(半失透性)의 빙렬(氷裂)이 거의 없는 우수한 비색 유약을 완성하였다(1차비색 완성).
비색 유약의 완성과 더불어 기형·문양·번조수법 등에 남아 있던 중국의 영향이 거의 사라지고 자연에서 소재를 얻은 독창적인 형태와 문양이 고려적으로 변형, 발전되며 독특한 세련을 보인다.
이와 같은 청자의 세련은 12세기 중엽까지는 또 다른 의미의 진전을 보여 유약은 반실투성에서 조금씩 더 밝아지고(2차비색 완성), 새롭게 구상된 음각·양각·투각문양 등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러한 발전은 ≪고려사≫ 세가 의종 11년(1157)조에 보이는 청자와(靑磁瓦)의 기록과,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당전마을에 산재한 청자와편(靑磁瓦片)을 반출하는 요지에서 증명이 된다.
이 당전마을의 청자와편을 반출하는 요지에서 출토되는 파편의 유약은 인종릉에서 출토되는 일괄유물인 1차비색 완성기(12세기 전반)의 것보다 유색이 조금 더 밝아졌으며 기형과 문양이 고려적으로 좀더 완숙한 상태를 보여 주고 있다.
또 획기적인 시문방법으로 고려자기에 상감기법으로 문양을 나타내는 새로운 기법이 등장하였다. 상감 완성과 때를 맞추어 상감을 여러 가지로 응용한 것, 또는 상감기법 외의 다른 여러 방법으로 문양을 나타내는 기법(철채상감·철채백퇴화·철유·철유상감·철유백퇴화문 등)이 싹텄을 뿐 아니라 이러한 여러 가지 기법이 완숙한 상태에 도달하였다.
1159년(의종 13)에 죽은 문공유(文公裕)의 지석(誌石)과 함께 출토된 청자상감보상당초문완(靑磁象嵌寶相唐草文盌)은 유약이 맑고 투명하며, 상감의 기법과 문양의 포치(布置) 등이 매우 발달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문공유묘 출토 대접을 만든 시기는 유약·기형·문양과 문양의 포치·번조수법 등이 가장 아름답고, 고려자기의 기준이 되는 그릇들을 만든 때였다.
청자유약은 기포가 적고 비색이 밝아져서 문양이 잘 보이게 되고 빙렬이 있는 것이 많아진다. 기형은 선이 더욱 유려해지면서도 유연하여 그 시대양식을 확실하게 지니게 된다.
문양은 사실적 문양을 약간 도식화(圖式化)하고 양식화(樣式化)하였지만, 자연의 향기를 지녔으며, 그 시대양식을 분명하게 확립하고 있고, 부위마다 적합한 문양을 개발하였다.
대접의 경우 각 문양의 포치·구성은 먼저 주문양(主文樣)과 종속문양(從屬文樣)이 있어 그릇의 넓은 중앙·중심부위에 주문양을 배치하고 구연부(口緣部)나 안쪽바닥 굽언저리 등 주문양 상하에 종속문양을 배치한다. 주문양은 사실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공예의장의 성격으로 양식화되지만, 회화적이고 여백을 많이 살려 자연이 지니는 맛을 잃지 않는다.
종속문양은 동일 패턴이 반복되는 공예의장이지만, 주문양에 비하여 매우 좁은 공간에 시문되어 주문양의 상하여백을 마무리해 주고 안정감을 주는 구실을 하여, 전반적인 문양은 회화성을 갖춘 공예의장이나 그릇과 일체가 되어 상호 보완하는 입장에 있다.
이 시대는 문화적으로 매우 세련된 시기여서 비색·기형·문양뿐 아니라 그릇의 굽다리를 어떻게 깎느냐, 또 구울 때 굽다리에 어떻게 하여 눈 자국이 작게 남느냐 하는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예의 검토, 실험되고 있다.
따라서 굽다리는 대체로 작게 하고, 매병류 등의 큰 그릇은 안다리굽이 많고, 보통 병류나 주전자 등의 그릇은 굽이 조그마하고 낮으며 큰 것은 내화토(耐火土) 모래비짐눈으로 번조하고, 일반 그릇(작은 것)은 규사(硅砂)눈을 받쳐 구워 굽이 작고 예쁘며 규사눈 자국이 작고 희게 보여 그릇의 바닥까지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제작하고 있음을 본다.
자기 자체를 정교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물론 청자(백자도 같음)의 비색을 더욱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이미 9세기부터 사용하던 갑(匣·匣鉢 : 개비)을 발전시켜 갑발의 내화도를 훨씬 높여 갑이 일그러지는 것 등을 방지하고 갑도 만드는 등 크게 발전하였다.
상감문양의 발생과 발달
12세기 전반 상감 발생기의 청자요지(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당전마을의 청자기와를 반출하는 요지)에서의 상감문양은 기명(器皿)의 일부에만 사실적인 문양으로 나타나며, 상감이 시문된 위치는 11세기 후반경이나 12세기초경의 기명에 음·양각으로 시문하던 자리의 일부 또는 전면에 나타난다. 이 경우 내외면 중 일면시문으로 문양도 음·양각문과 흡사하다.
이러한 초기 상감상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12세기 중엽인 상감 최성기에 이른다. 처음의 상감문양은 기명의 내측이나, 외측의 일부에 나타나다가 점차 전면에 나타나며 좀더 발전되면 내외면에까지 시문이 확대된다.
문양은 상감 발생 초기의 사실적인 문양에서 도식화되기 시작한다. 그릇의 면을 분할하여 구도를 잡아 주문과 종속문을 구분, 시문하여 상감되는 부위에 따라 새롭게 고안된 여러 가지 문양이 적절히 포치되어, 하나의 일정하고 통일된 구성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문공유의 묘에서 출토된 청자상감보상당초문완은 바로 상감 최성기의 작품으로, 이러한 완숙한 경지까지 도달하려면 상감 발생기로부터 상당한 시일이 경과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상감의 발생시기는 12세기 전반인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상감발생기는 상감이 여러 가마에서 고안되어 일반화되는 처음 시기를 말하는 것이며, 특수한 지역 또는 특정한 기형에 예외적 또는 우발적으로 상감이 시문된 예는 12세기 초는 물론이고 11세기 또는 10세기에도 가능할 수 있다.
실제로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서리 백자·청자가마 발굴 때 10세기를 내려오지 않는 층위에서 서툴지만 특이한 상감을 한 파편이 발견되었고, 전라남도 함평군 손불면 양재리에서도 10세기경 청자가마에서 흑상감 파편이 발견되었다. 그 밖에 11세기로 추정되는 청자에 상감이 들어간 예는 여러 가지가 있다.
기타 청자문양
상감기법과 문양이 가장 세련된 12세기 중엽에는 상감기법 이외에 10세기경부터 나타난 화청자·퇴화문청자와 그 밖에 철채·철채백퇴화·철채백상감·화금청자·청자동화〔銅畫=辰砂〕설채·연리문〔絞胎〕자기 등이 함께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다.
특히 산화동 안료로 환원번조상태에서 선홍의 발색을 성공시킨 진사설채는 중국보다도 2세기 이상 앞서 세계에서 가장 먼저 사용하였지만, 절대로 붉은색을 자기 표면에 남용하지 않았다.
후기(쇠퇴기)
무신집권 이후 점차 그 폐단이 쌓이더니, 13세기 초부터는 고려자기에도 변화를 보여 기형이 조금 둔해지고 굽도 조금씩 커지고 밝은 유약의 비색이 조금 어두워지면서 문양도 조금씩 퇴보해 가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몽고의 침입으로 가속화되어 원종대와 충렬왕 초에 매우 타락한 청자로 전락된다.
이 때의 상황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는 1269년(원종 10)부터 1287년(충렬왕 13) 사이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 간기(干記 : 己巳·庚午·壬申·癸酉·甲戊·壬午·丁亥)가 들어 있는 청자상감 그릇들이다.
이들 청자기명들은 암녹색이 비낀 흐린 유약과 뿌연 빛, 둔해진 곡선의 그릇으로 문양도 12세기 이래의 상감문양이 계속되고, 일부 새로운 당초계 문양도 나타나고 있지만 퇴화된 상태로 거칠고 생략되었으며, 굽도 둔하고 모래받침이 조금씩 나타난다.
≪고려사≫ 세가 충렬왕조와 ≪고려사≫ 열전 조인규전에는 고려에서 원나라 세조에게 화금청자(畫金靑磁)를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화금청자는 12세기 전반부터 극소수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데, 양식적으로 보아 충렬왕 때에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 것(청자상감화금원숭이토끼당초문편호·청자상감화금당초모란문대접)을 통하여 상감청자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충렬왕 즉위 중반 이후에 일시적인 안정으로 청자의 유약이 약간 불투명하지만 비색유약이 그전보다 아름다워졌고, 문양도 그 이전부터 시문하던 문양과 새로운 문양이 등장한다. 그전부터 사용하던 문양은 원형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상태였으며, 새로운 문양은 사실적으로 안정되었다.
주문양에 조그만 이파리가 많이 달린 새로운 당초문과 봉황문·용문양이 간혹 보이며 학의 몸에 봉황의 꼬리가 달린 기형이 나타나기도 하며, 종속문양이 여러 단으로 구성되기도 하며, 기형에도 양면을 두드려 편평하게 만든 항아리〔扁壺〕 등이 새롭게 등장한다.
이러한 변화는 충렬왕대부터 원나라를 통한 중동지방과 서방문화의 유입으로 일부 기형과 문양·번조수법 등에 조금씩의 변화를 보인 것 중 일부분이다. 그 밖에 번조 때에도 변화가 있어 상품은 환원번조하였으나 하품에는 산화번조가 있으며, 시대가 내려올수록 점차 환원이 보장되지 않아 청자의 색에 황색과 갈색을 머금게 되었다.
충렬왕·충선왕 이후 잠시의 안정이 다시 끊어지고 사회가 불안해져서 14세기 초를 조금 지나서부터는 주로 청자상감과 순청자기류만이 생산되었고, 14세기 중엽부터 질과 기형·문양·번조수법이 극도로 타락하고 퇴보된 상태에 이르렀다. 공민왕 때 상품청자가 일시 그 질이 향상되었으나 다시 타락하며, 이러한 타락한 상태가 조선왕조로 넘어와 분청사기의 모체가 된다.
고려청자의 특색
우리 나라 청자는 12세기 전반에 비색 순청자로서 유례가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나타냈고, 12세기 중엽 유약을 맑고 밝게 발전시켜 청자상감으로서 다시 한번 꽃을 피웠다.
고려자기 중에서는 청자가 특히 세련되고 많이 생산되었다. 토기에서 청자로의 발전이행은 인류문화 발전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으나, 고려시대의 청자는 그 자연과 시대적 배경에 힘입어 더욱 많이 생산되고 가장 세련되었다.
중국청자가 색이 진하고 유약이 불투명하며 예리하면서 장중한 데 비하여 고려청자는 은은하면서 맑고 명랑한 비색, 유려한 선의 흐름과 탄력이 있고 생동감 있는 형태, 조각도의 힘찬 선, 기물과 일체가 된 회화적이며 시적인 운치가 있는 상감문양 등에 특색이 있으며 또한 세계에서 최초로 자기에 붉은색을 내는 구리의 발색기법을 창안해냈으면서도 한두 점 악센트로만 강한 색 [銅彩發色] 을 쓰면서 모든 색을 담담하게 구사하는 등 언제나 자연과 같이 호흡하고 일체가 되고자 하는 것이 그 특색이다.
접기/펼치기 조선청자
고려 말의 타락한 청자는 조선조로 들어오면서 큰 줄기는 분청사기로 이행되고 다른 한 줄기는 조선청자로 그 맥락이 이어진다. 고려청자를 계승한 조선 초기 청자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고려 말 퇴락한 재래의 청자를 계승하였으나 그 질과 기형·문양 등이 조선조의 특질을 조금씩 나타내면서 발전하는 청자이고, 또 하나는 새로운 백자가마에서 새로 만들어내는 청자이다.
재래식 청자는 고려청자의 퇴락한 상태의 말기적 조질청자에서 약간 발전, 변형되어 질이 향상되고 기형에 생동감이 있으며 문양이 활달해져 초기 분청사기상감과 기형·문양이 거의 같다.
새로운 청자는 백자가마에서 같이 생산되며 백자태토에 청자유약을 입혔고, 기형도 고려청자 기형에서 발달한 것이 아니고 새로운 백자와 거의 같고 음각문양이 있는 것도 있다.
광주 중앙관요 중에 조선 전기의 초기가마는 광주군 퇴촌면 우산리와 도마리, 중부면 번천리·오전리, 초월면 무갑리 등에 있으며, 전기의 중엽가마는 퇴촌면 정지리와 관음리 등에 있고, 전기의 말엽가마는 광주읍 탄벌리, 도척면 상림리, 초월면 선동리 등에 있다.
조선청자는 15세기 중엽까지는 두가지 계통 모두 질이 양호하고 기형과 문양이 생동감 있고 활달하였으나 15세기 후반부터 고려청자를 계승한 청자는 자취를 감추고 새로운 조선조 청자만이 백자가마에서 소량 생산되었으며 17세기 중엽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접기/펼치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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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청자-(최순우 감수, 중앙일보사, 1981)
『한국청자도요지』(최순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2)
『고창아산댐 수몰지구발굴조사보고서』(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1985)
『국보』-청자·토기-(최순우 편, 예경산업사, 1986)
『완도해저유물』(문화재관리국, 1985)
이종민
한국의 청자는 한반도에서 처음 만들어낸 자기질(磁器質) 그릇이다. 자기란 고운 태토(점토)로 기물을 만들어 유약을 바른 후 높은 온도에서 구워 완성해 낸 그릇을 말한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청자가 생산되었다는 사실은 ‘도기(陶器)에서 자기로’ 도자 생산의 중심이 옮겨가는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자 제작의 성공은 부가가치가 높은 신소재의 도자 생산을 통해 새로운 문화를 영위할 수 있는 계기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면 과연 한반도의 청자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한국 청자의 출현 시기를 알기 위하여 이해가 필요한 부분은 고려시대 이전의 차 문화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차는 선덕여왕(632∼647 재위) 때부터 있었고, 통일신라시대에는 흥덕왕 3년(828)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온 대렴(大廉)이 차 종자를 얻어오자 왕이 이를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고 전한다.85) 『三國史記』 卷10, 新羅本紀 興德王 3년조. 이를 보면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상류층을 중심으로 차가 음용되고 있었고 9세기 이후 부터는 차를 직접 재배하기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자골호
특히, 통일신라시대에는 당 문화의 접촉 속에서 중국의 차는 물론 차를 마시기 위한 도자용기가 수입되어 널리 이용되었다. 수입이 이루어진 중국제 찻그릇은 주로 자기로 제작된 다완(茶碗), 다호(茶壺)로서 중국의 형요(邢窯) 백자와 월주요(越州窯) 청자, 장사요(長沙窯)의 청자가 애용되었다.86) 李鍾玟, 『韓國의 初期靑磁 硏究』, 홍익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12, pp.25∼28 ; 김영원, 「한반도출토 중국도자」, 『우리 문화속의 中國陶磁器』, 국립대구박물관, 2004, pp.140∼143. 이러한 중국산 자기들은 8세기 후반 이후 중국의 대외무역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점차 한반도로 유입되었으며, 수입된 시기는 주로 9세기였다. 국내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중국 자기들은 당시 대도시였던 경주 지역과 호족세력들의 근거지였던 지방의 중소도시, 혹은 대형 사찰이나 성(城)과 같은 방어시설에서 발견된다. 이는 차를 음용하는 계층이 어떠한 부류였는지를 추측하는 데 도움을 준다.
9세기 말부터 10세기 초반 사이, 한반도는 후삼국시대에 돌입하면서, 특히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전선(戰線)이 형성되었다. 불분명한 경계 사이의 고을을 영토권 안에 편입시키고자 하였던 치열한 전쟁은 중국과의 교류를 저해하는 가장 큰 요소로 자리 잡았다. 마침 중국도 907년부터 960년경까지 오대(五代) 10국(十國)이 난립하는 상황에 직면하면서 중국 도자의 안정적인 국내 공급은 거의 불가능하였던 것 같다. 이로 인해 중국 차도구의 국내 소비는 자연히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차는 고려 국초부터 국왕의 하사품이나 국가의 공식적인 대소사에 필수적인 의식절차에서 활용되어 그 수요가 줄지 않았으며 이에 필요한 각종 차 도구가 필요하였다.
백자완
확대되어 가는 차 소비와는 다르게 정치·외교관계의 불안정으로 말미암아 중국산 수입도자의 부족은 자기를 생산하지 못하던 고려 입장에서 보면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듯 10세기대에 제작된 중국 도자는 한반도에서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 결과적으로 고려는 자기제 차도구를 직접 제작해야 하였을 것이다.87) 李鍾玟, 「韓半島初期靑磁の分類と編年」, 『東洋陶磁』 34, 東洋陶磁學會, 2004∼2005, pp.87∼113.
한국에서 청자가 처음 만들어진 시점은 시각 차이가 있으나 대략 고려 초인 10세기 전반 경부터였다. 수도 개경(開京)은 고려 초에 들어와 상주인구가 증가하고 권력이 집중되면서 최대의 자기 소비시장이 되었다. 이를 이해할 수 있는 구체적 사례들은 개성을 중심으로 황해도와 경기도, 충남 일부 지역에 퍼져 있는 고려 초의 가마터 자료에서 확인된다.
중서부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가마터 유적중 경기도 용인 서리, 시흥 방산동, 여주 중암리, 황해도 배천 원산리의 가마는 발굴조사를 통해 고려 초부터 청자가 제작된 증거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지역의 가마들은 약 총 길이 40m 내외에 벽돌을 주 재료로 축조한 대형 규모의 이른바 전축요(塼築窯)이다. 같은 양상을 보이는 가마 구조는 중국 절강성의 월주요의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바 있어 한반도의 전축요들이 중국 남방계 가마의 영향을 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황해남도 배천군 원산리 청자가마터
‘순화3년’명 고배
이들 가마터에서는 차를 마시기 위한 사발인 다완이 가장 많이 출토되었다. 그 밖에도 주자, 꽃 형태의 접시(화형접시), 기타 접시류, 잔, 잔받침, 소형 항아리, 장고, 제기편 등이 포함되어 있으나 차와 관련된 품목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청자를 생산한 주 목적이 차도구 확보였음을 알려준다. 유물 중에는 글자가 음각되었거나 연대 추정이 가능한 사례가 포함되어 있어 한반도의 청자 발생 시기를 추측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황해도 배천군 원산리의 2호 가마터의 최상부에서 발견된 청자고배를 주목할 만하다. 이 고배의 굽바닥에는 원형으로 글자를 돌려 명문을 음각하였는데 내용은 ‘순화3년임진태묘제사실향기장왕공탁조(淳化三年壬辰太廟第四室享器匠王公仛造)’라고 씌어 있다. 이를 해석해 보면 ‘순화(송 태종의 연호) 3년인 992년, 태묘에서 광종을 모시는 네 번째 방에 (이 그릇을 넣기 위해) 제기 만드 는 장인인 왕공탁이 만들었다.’라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도 한 해 뒤인 993년에 태조의 제실에 넣기 위한 만든 제기항아리가 전해지고 있어 제작 성격이 같은 이 두 유물은 함께 배천 원산리에서 만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순화3년명고배 밑부분
언제, 무엇을 위해, 누가 만들었는지를 알 수 있는 기록을 가진 이 유물의 존재는 고려시대 초기의 청자 제작사를 이해하는 데 상당히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준다. 왜냐하면 이들 명문 자료들은 배천 원산리의 가마터 발굴조사 때에 가마바닥의 최상부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가마바닥의 최상부는 마지막 폐요 단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배천 원산리 2호 가마는 명문 있는 제기들을 포함한 청자를 구운 후 곧 요업을 중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가마 바닥의 두께가 1m에 가까운 점을 고려한다면 원산리 2호 가마는 더 이른 시기부터 청자를 구워내었던 것이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된 가마가 중서부 지역에는 여러 곳에 있다는 점이다. 가마의 구조나 생산품의 조형 등에서 시흥 방산동의 방산대요(芳山大窯) 발굴조사는 유사한 가마가 다른 지역에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88) 海剛陶磁美術館·京畿道 始興市, 『芳山大窯-始興市 芳山洞 初期靑磁·白磁 窯址 發掘調査 報告書』, 2001. 발굴 지역들을 중심으로 중서부 지역에 퍼져 있는 이들 전축요들은 지표조사 결과 운영시기 등이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흥미로운 사실은 전축요들의 폐요 과정이 모든 가마들간에 유사하여 같은 시기에 전축요들이 폐기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배천 원산리 2호의 명문제기들은 원산리 가마유적을 포함하여 유사한 성향을 갖는 다른 전축요들의 폐요 시점을 추측하게 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청자의 개시 시점은 10세기 후반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으며 전축요들은 10세기 말경, 혹은 11세기 초반경의 어느 때인가 사라져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 고려의 3대왕 정종(定宗, 재위 945∼949)의 안릉(安陵)에서 출토된 청자화형발, 청자화형대접, 청자잔탁, 청자주자뚜껑 등은 949년 정종이 승하하였을 때 무덤에 부장된 유물이었다.89)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조선유적유물도감』 12, 1992. 이와 똑같은 형태를 지닌 청자들은 중서부 지역의 전축요에서 파편으로 발견되고 있어 안릉의 부장용 청자들을 토대로 제작 시기를 판단하면 고려에서의 청자제작은 적어도 10세기 전반부터 가능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고려청자의 최초 제작 집단은 중국인 도공이었다. 가마의 축조기술이나 축조재료, 세부적인 구조물, 생산된 도자의 종류와 형태는 10세기 전반경인 중국 오대 시기의 월주요 장인들이 구사하였던 기술과 동일하다. 그러나 처음 고려에 이주하여 청자기술을 전해준 중국 장인 집단의 영향력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고려가 정치적으로 안정되기 시작한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반경 사이, 중앙정부의 행정력은 한반도의 끝자락까지 미쳤으며 전라남도 강진을 위시한 전라남도의 서남해안 지역으로 요업 중심이 이동하면서 고려 도공에 의한 청자 제작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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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릉 출토 청자 일괄품-청자화형발
안릉 출토 청자 일괄품-청자잔탁
안릉 출토 청자 일괄품-청자잔탁
서남해안 지역은 지하에 굴을 파고 도기를 굽던 요업의 전통이 강한 곳이었다. 이곳에서의 청자 제작은 전통적인 도기가마를 지상으로 끌어올리고 자기가마의 장점을 결합하여 새로운 소형의 토축요(진흙으로 축조한 가마)를 운용하면서 시작되었다. 제작품들은 도기를 만들던 장인 집단이 청자기술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여주는 듯, 전축요 생산품 스타일의 중국식 청자 형태와 전통적인 도기식 청자 형태가 공존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90) 李鍾玟, 「南部地域 初期靑磁의 系統과 特徵」, 『미술사연구』 16, 2002, pp.199∼227.
강진 용운리 10-4호 가마구조
이들 지역의 가마들에서는 10세기대에 만들어진 청자와는 변화된 형태의 그릇들이 생산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면서 유색이 좋아지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기술이란 초벌을 말하는 것으로 이로 인해, 특히 강진 지역의 청자들은 유약층이 두꺼워지고 유색(釉色)이 진초록 빛을 띠기 시작하였다. 초벌 과정이 적용되면서 고려청자는 색조에서 중국청자와 차별화된 느낌을 주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만들어진 품목의 핵심은 차용기인 다완과 여러 종류의 관련품들이었다. 이들 중 생산 수량이 가장 많은 다완은 넓은 굽지름과 접지면, 그리고 내면에 낮게 깎은 원지름(내저원각)을 갖고 있어 중국의 다완과는 차이를 보이는데 사람들은 이를 흔히 해무리굽완[日暈底碗]이라고 부른다.
11세기대에 서남해안 지역에는 강진을 위시하여 그 주변 지역인 해남, 고흥, 장흥 등지에서도 청자 생산이 이루어졌다. 수요층이 확산되면서 생산된 청자의 품질은 다양하였으며 발달하기 시작한 운송 루트를 따라 이 시점의 청자들은 전국 각지에서 소비되었다.
이종민
청자완
청자의 전개 과정에서 비색의 성취와 더불어 가장 고려적인 특색을 보이는 것은 상감청자가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태토를 파내고 다른 흙을 감입함으로써 태토와 대비되는 색조의 문양을 표현하는 상감기법(중국에서는 讓嵌이라 한다)은 원래 중국 섬서성의 황보요(黃堡窯)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섬서성 요주요(耀州窯), 하북성 자주요(磁州窯)와 산서성 혼원요(渾源窯) 등지에서 시도된 상감기법은 주로 중국 북방계 가마에서 볼 수 있는 도자 표현기법 중 하나였으나106) 秦大樹, 「宋·金代 북방지역 瓷器의 象嵌工藝와 高麗 象嵌靑瓷의 關係」, 『美術史論壇』 7, 1998, pp.45∼76. 그리 흔한 기법은 아니었다.
고려의 경우 상감기법은 청자 발생 초기 단계인 10세기 경에 중서부 지역의 전축요계 가마에서 처음 시도되었다. 선상감 위주의 당초문과 같은 문양들을 묘사한 상감기법은, 특히 장고와 같은 악기에 집중되고 있어 특별한 의미를 가진 기종에 선별적으로 시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려청자가 중국 남방의 월주요에서 영향을 받아 개시된 상황에서 북방계의 상감기법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북방에서도 기법의 일부가 함께 들어왔음을 알려주는 예가 된다.107) 張南原, 「고려初·中期 瓷器 象嵌技法의 연원과 발전」, 『美術史學報』 30, 2008, pp.159∼192.
청자 제작 초기 단계부터 소량 시도된 상감기법은 12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점차 비율이 증가하며 고급 청자를 묘사하는 방법으로 자리를 잡았다. 1159년에 세상을 떠난 문인인 문공유(文公裕)묘 출토 청자상감보상당초문완은 보상화 당초를 역상감기법으로 새김으로써 고려 중기의 상감수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 1255년 에 수축된 명종(明宗, 1171∼1197재위)의 지릉(智陵)에서는 여러 점의 청자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청자상감여지문대접>의 경우 13세기 전, 중반의 상감기법과 표현방식을 잘 알 수 있는 기준작으로 알려져 있다.108) 韓盛旭, 「高麗 後期 靑瓷의 器形 變遷」, 『美術史學硏究』 232, 2001, pp.57∼99.
청자상감보상당초문완
청자상감보상당초문완
청자상감여지문[荔枝文] 대접
이 밖에도 축조 연대를 알 수 있는 많은 왕릉에서 발견되는 상감 청자의 상당수가 대부분 13세기와 14세기에 집중되어 있어 상감기법이 고려에서 절정을 맞이한 것은 12세기 후반 이후나 되어서야 가능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상감기법에 의한 청자 생산이 강진, 부안과 같은 고급 청자 생산지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상감청자는 지방요에서 발견되는 사례가 매우 적고 강진, 부안 지역에서도 한정된 수량만 확인된다. 결국 상감기법은 특정 상류층을 대상으로 한 도자기에 들어가는 고급 기법이었던 것이다
이 밖에도 축조 연대를 알 수 있는 많은 왕릉에서 발견되는 상감 청자의 상당수가 대부분 13세기와 14세기에 집중되어 있어 상감기법이 고려에서 절정을 맞이한 것은 12세기 후반 이후나 되어서야 가능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상감기법에 의한 청자 생산이 강진, 부안과 같은 고급 청자 생산지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상감청자는 지방요에서 발견되는 사례가 매우 적고 강진, 부안 지역에서도 한정된 수량만 확인된다. 결국 상감기법은 특정 상류층을 대상으로 한 도자기에 들어가는 고급 기법이었던 것이다.
청자상감인물문매병
상감청자는 13세기 전반부터 청자 제작의 중심의 하나로 자리하였다. 주목되는 것은 이 시기에 강진보다도 부안 일대에서 더 많은 상감청자가 제작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강진이 우수한 품질과 장구한 시간 동안 청자의 역사를 이끌어 간 상황에서 부안 지역이 갑자기 청자 제작사의 전면에 등장한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우연일지 모르겠으나 1170년경 무신의 난을 정점으로 고려 사회는 일변하였으며, 부안요업도 함께 급성장한 것으로 보아 무신란 이후의 권력구도 변화가 부안의 청자요업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지 추측할 뿐이다.
고려청자의 독창성을 돋보이게 하는 상감문양의 의장(意匠)은 크게 두 가지 특징이 공존한다. 표현방식은 문양을 마치 동양화처럼 회화적으로 표현한 계통과 디자인 풍으로 반복적인 문양을 묘사한 계통이 알려져 있으며 후자가 훨씬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상감청자에서는 문양을 배치하는 방식에서 중심 문양과 보조 문양의 구분이 뚜렷해지며 각종 동물문과 식물문, 기타 여러 문양의 조합 예들이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시문된 문양의 소재로는 국화문, 국화당초문, 모란문, 모란당초문, 보상화당초문, 여지문, 여의두문, 연판문, 연당초문, 포도문, 포도동자문, 학죽문, 운학문, 구름문, 운봉문, 용문, 앵무문, 포류수금문, 유로수금문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문양은 중심문양과 보조문양으로 구획하면서 다른 기법과 혼용하여 표현한 경우가 보인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정병
청자상감포류수금문정병
이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상감청자로는 13세기경 부안 지역 생산품으로 추측되는 간송미술관 소장의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이다. 좁은 입구에 긴장된 어깨부와 유려한 곡선미를 보이는 이 매병에는 원권안과 밖에 구름과 학을 반복적으로 묘사하여 공예 의장적인 표현방식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상감청자의 제작 시기에는 금속이나 나전칠기와 같은 목공예품의 제작도 활발하여 이들 간에 상호 조형적 영향을 주고받았던 흔적이 보인다. 금속 표면에 홈을 파내고 금·은과 같은 재료를 두드려 감입하는 입사(入絲)기법과, 목기의 표면에 얇은 금·은판을 오려 옻칠과 함께 부착하는 평탈(平脫)기법은 재료와 명칭만 다를 뿐 적용되는 방식은 동일하다. 실제로 국보 제66호인 <청자상감포류수금문정병>은 국보 제92호인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정병>과 기형, 문양소재, 표현 방식면에서 차이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 밖에도 유사한 사례는 매우 많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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