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잠들었다. 시끄러운 매미들의 울음소리로 눈을 떴다. 문득 내 인생이 오래된 책 속의 주인공처럼
무의미하고 나른하게 느껴진다.' 오늘도 엄청 덥겠지. 얼마나 답답할까?' 심해도 너무 심한 여름 더위가 아침부터 기온을 뺀다. 산뜻한 새 아침이 아니고 여러 날째 같은 언저리를 헤매는 느낌이다.
바람이라도 쒈까 하고 차에 올랐다. 에어컨 탓인지 펼쳐지는 푸른 하늘 탓인지 그나마 시원하다. 올림픽 대로를 달리다 보면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꽃이 보인다. 회색의 담벼락을 타고 자라는 초록 잎 속에 주황색 옷을 입고 고고하게 핀 능소하다.
능소화가 만개했다는 것은 곧 장마철이 다가온다는 뜻이다. 능소화는 예쁘지만 슬픈 예고는 어쩔 수 없다. 활짝 핀 꽃이 거센 장맛비로 흠뻑 젖는다. 가뜩이나 활짝 핀 채로 뚝뚝 떨어지는데, 그 위에 비라도 쏟아지면 그 모습이 너무 처연하다.
능소화는 핀다는 표현보다는 주렁주렁 열매가 달리듯 열린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
꽃 이름치고는 꽤 강한 의미를 갖고 있다. '업신여길 능, 하늘 소' 자를 쓴다. 하늘을 업신여기는 꽃이라는 뜻이다. 6월에 피어 8월의 절정을 이루는 이 꽃은 장마와 태풍 그리고 푹푹 찌는 더위를 이기고 피어난다. 궂은 날씨를 퍼붓는 하늘의 조화를 이겨내며 피어난다고 해서 능소화라 한다. 임금의 발길을 그리워하며 죽어서 핀 꽃이라는 전설이 있는 걸 보면, 능소화의 인내와 끈기는 대단한 듯하다. 능소화는 죽은 나무도 타고 올라가 꽃을 피운다. 마치 죽은 나무를 살려낸 것처럼 그 나무에 화려한 생명을 만들어 낸다.
이 꽃을 보면서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가 떠오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세찬 장맛비, 거센 바람 같은 모진 고난을 이겨 내고 아름답게 피었다가 여름이 지나면 미련도 없이 떨어진다. 이처럼 쿨한 마인드와 이름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붉고 커다란 꽃은 야릇한 흥분을 하게 해준다. 여러 방해꾼들을 이기고 피어난 능소화는 질 때도 저답게 고고하다. 시들 때 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활짝 피었을 때 그냥 툭 떨어져 땅에도 아름다운 주황색 꽃 카페트를 만든다.
우리네 인생사에도 똑같은 일들이 일어난다. 누구든 어느 날 활짝 만개했다가 툭툭 떨어지는 날도 있다. 미련 없이 떨어지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발버둥치며 구질구질하게 매달려 있어도 시간이 흐르면 다 떨어지게 된다. 떨어지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
인생의 꽃을 피운 것만큼 잘 지는 것도 중요하다. 열심히 해놨다면 그 마무리도 잘해야 또 다른 다음을 준비할 수 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가야 할 때를 아는 이의 뒷모습은 언제나 아름다운 법이다. 삶이 지치고 힘들어 내 마음에만 먹구름이 껴 있는 것 같은 때, 삶이 영영 끝나지 않는 한여름 무더위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올 여름처럼 유난한 더위처럼 힘들고 지칠 때 능소화를 생각해 보자, 하늘을 보고 업신여겨 주자. 그리고 힘을 내서 그저 한 뭉텅이의 꽃을 짠하고 피워내면 된다. 한 줄기에 주렁주렁 피어나는 능소화처럼 우리도 힘을 합쳐서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뽐내며 다시 한 번 하늘을 비웃을 힘을 기르면 된다. 우리는 할 수 있다. 미련 없이 떨어지자 그리고 다음에 다시 피기로 하자. 능소화처럼 무더위 같은 힘든 시기를 꿋꿋하게 즐겨야 한다. 더워도 너무 더웠던 그래서 징그러웠던 여름. 그래도 또다시 능소화의 계절 여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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