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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의 실용화에 대한 의미부여
원광대 서예과 김 수 천
Ⅰ. 고찰의 단서
서예의 실용화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이를 주제로한 학술대회가 있었다.1) 이어서 본 학술대회에서는 서예이론가, 서예가, 서각가, 문자 디자이너, 폰트업체 경영인이 한자리에 모여 “서예의 실용화 에 대한 다각적 탐구”라는 대주제를 놓고 자기의 전문분야를 논의하게 되었다.2)
학회 차원에서 이와같은 행사를 하는 이유는 오늘날 국내외적으로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실용서예3)가 유행처럼 지나가는 시류문화(時流文化)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또한 이와같은 문제가 담론화되므로서 서예발전의 통로가 새롭게 펼쳐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본 논문에서는 서예의 실용화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역사적인 측면에서 고찰하려고 한다. 논의의 과정에서 서예사외에 미술의 역사를 포함시키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보다 확대된 시각으로 바라보기 위함이다.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말을 남겼다. 실용서예를 살려내는 길 또한 역사의 선상에서 큰 틀이 잡혀질 수 있다고 본다.
논문의 정리에 앞서 대전에서 발표자를 중심으로 예비모임이 있었다. 이날 모임에서는 논자의 논문에서 제기된 서예에 있어서의 ‘순수’와 ‘실용’이 명확한 경계로 나뉘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가 가장 큰 관심사였다. 그렇다. ‘순수’와 ‘실용’의 개념은 뚜렷한 경계로 나눌어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사실상, 과거에는 그런 구분조차 없었다.4)
그런데도 이러한 논의를 해야 하는 이유는 근현대이후 순수미술(fine art)의 등장으로 인해 서예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크게 달라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서예가 순수미술의 장르에 포함되고부터 서예는 작품의 감상성을 최고의 목표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서예가 지녀왔던 실용적인 의미가 주변으로 밀려나게 된다. 이에 대해 서예인들은 거의 문제제기기 없었던 것 같다.
이제는 그러한 문제에 대해 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서예를 오로지 감상을 위한 순수예술로만 생각하는 경향은 진로를 옹색하게 만든다. 서예인들은 서예가 단지 감상만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실생활과 관련된 실용서예임을 동시에 인정할 때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현재 실용서예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 새로운 문화현상이 아니라, 과거에 본래 있었던 것이 다시 복권(復權)된 것임을 밝히려고 한다. 우리는 이에 대한 분명한 고찰을 함으로서 최근 등장하기 시작한 실용서예에 역사적인 힘을 실어줄 수 있다. 실용서예에 역사의 뿌리를 찾아주는 것은 본 논문이 이루려고하는 가장 큰 목표가 된다.
Ⅱ. 서예의 본모습
과거의 서예는 실용과 더불어 감상적 가치가 공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서예는 감상적 가치만을 위한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근대미술의 형성과정에서 생긴 공모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근대미술의 개막을 알리는 미술이라는 용어와 미술공모전이 생겨나기 이전의 서예는 오늘날의 서예와 성격상으로 많은 차이가 있다. 이 문제에 대해 고찰하는 것은 실용서예의 중요성을 이 시대에 부각시키는 데 있어 선행되어야 할 연구라고 생각한다.
‘미술’ 이라는 말은 중국, 한국, 일본의 옛 문헌(文獻)에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일본의 메이지 시대에 들어와서 서양말의 역어(譯語)로 차차 보급되었다.5) 이것은 일본이 서양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영어의 ‘Fine Art'를 번역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1883년 창간된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 기사에서 미술이라는 용어가 맨 처음 받아들여졌으며,6) 그것이 사회적으로 공용된 것은 서화미술원과 서화미술회(1911)에서 처음이었다.7) 미술이라는 새 낱말은 근대미술사의 새로운 개막을 상징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미술’이라고 하는 신조어는 민족적 자존심이 있었던 대부분의 서화가들에게는 거부반응이 매우 심했다.8) 그러나, 이러한 저항은 오래가지 못한다. 1921년 총독부에 의하여 용의주도하게 계획된 조선미술전(朝鮮美術展 : 鮮展)은 본격적인 미술의 시대로 접어들게 했다. 총독부는 조선인 서화계의 지도적 인사들을 초대하여 조선미술전에 협력할 것을 강압적으로 당부하였다.9)
서화협회전(書畵協會展 : 協展)10)이 수십 명에 불과했던 회원들의 출품 및 고서화 진열에 그친 데 반해, 조선미술전은 막강한 힘을 가진 전시회였다. 본 전시는 도쿄의 제국미술원전(당시 일본 최대의 관전 = 약칭「제전帝展」)의 운영체제를 본딴 공모 ․ 심사의 입선 및 시상제를 채택함으로써 기성 ․ 신진을 막론하고 경쟁심리와 명예욕을 자극시켰다. 미술가로서의 입신(立身) 또는 명리(名利)를 위한 조선인 출품자가 해마다 늘어났다. 조선미술전은 일본이 패망하기 전(1922~1944)까지 미술공모전중에서 가장 권위있는 행사로 계속 거행되었다.11)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조선미술전에서 공모된 작품분야이다. 제1회 조선미술전은 제1부 동양화(東洋畵), 제2부 서양화(西洋畵), 제3부 서(書)로 시작된다. 국가에서 주관하는 가장 권위있는 미술공모전인 조선미술전에 서예가 들어갔다는 사실은 당시 미술에서 차지하는 서예의 위치가 그만큼 높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미술속에서의 서예의 위치는 조선미술전이 끝나고, 다시 국가적인 행사로 시작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國展 : 1962~1981)와 대한민국미술대전으로 이어진다. 조선미술전을 시작으로 출범한 공모전은 우후죽순처럼 늘어나, 현재 200군데?를 넘을 정도로 대성황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지적하지 않으면 안될 사실이 있다. 조선미술전으로 출발된 공모전은 처음에는 화려하게 출발되었지만, 1세기를 바라보는 오늘에 와서는 대점검을 하지않으면 안되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작가가 되는 유일한 등용문(登龍門)이라 할 수 있는 공모전은 공모전을 위한 작품활동이 전부가 되다시피하면서 글씨를 보는 관점이 기법(技法)위주로 고정되고 있다. 공모전은 그 자체가 전문작가양성이라는 우리 서예역사에서 일찍이 없었던 순기능을 가지고 온 측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글씨예술의 폭을 좁히는 부작용을 초래하였다.’12) 더 심각한 문제는 붓만 잡으면 누구나 공모전에 출품하여 입상을 하는 것이 목표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같은 단면적인 사고는 서예인들의 의식을 황폐하게 했고, 급기야는 서예를 시대에 뒤떨어지는 약체문화(弱體文化)로 만들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공모전이 시작되기 이전에 존재했던 서예의 모습을 다시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조선미술전 이후로 가장 크게 변화한 것은 전통적으로 이어져오던 실용서예가 점점 희석되었다는 점이다. 왜 그런가? 서예인들이 목표하는 것은 오로지 공모전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의 서예인들에 있어서는 이미 익숙한 현실로 받아들여지지만, 생활속의 바탕에서 이룩되어온 3천년 서예사의 맥락으로 볼 때는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전통서예가 감상만을 목적으로 제작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예를 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서예로 상나라 때 제작된 청동기 명문이 전하고 있다. 당시의 글씨는 문양과 함께 어우러져 있는 글씨들이 많은데, 어떤 것이 문양이고 어떤 것이 글씨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글씨가 문양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13) 서예의 출발은 이렇게 감상도가 높은 아름다운 문양과의 조화속에서 탄생된 것이었다. 그러나 훌륭한 예술미를 느끼는데 손색이 없는 명문서예는 감상만을 목적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제사의식에 관련된 성물(聖物)로서의 역할이 더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상나라 명문과 같은 시대에 등장한 갑골문 또한 아름다움을 느끼기에 충분하지만, 감상을 위한 용도로 제작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와당(瓦當), 전(磚)은 장식서예의 극치를 이루는 것이지만, 그것 또한 집을 짓는데 사용된 기와와 벽돌이라는 실용적 용도를 넘어서지 않는다.
그 외에 비단 위에 쓴 백서(帛書), 대나무와 나무판에 쓴 죽간(竹簡)과 목간(木簡), 인장(印章), 봉니(封泥), 비(碑), 첩(帖), 묘지(墓誌), 마애(磨崖), 사경(寫經)에 쓰여진 글씨는 대부분 감상도가 높은 서예임에 분명하지만, 그것은 모두 감상만을 위주로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들은 모두 쓰임의 용도가 분명한 것들이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볼 때, 과거의 서예는 ‘감상을 목적으로 한 오늘의 서예(순수서예)’와 차이가 있다. 전통서예가 감상만을 목적으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서예명작에 담긴 글의 내용을 통해서도 충분한 설명이 가능하다.
종요(鍾繇 : 151~230)는 해서의 완성자이자 가장 격조 높은 해서를 쓴 서예가로 유명하다. 그가 남긴 천계직표(薦季直表)는 종요가 나이가 많아 정무를 돌볼 수 없게 되자 위(魏)나라를 위하여 예전에 위나라 조정의 신하였던 계직(季直)을 다시 추천하는 내용이다. 하첩표(賀捷表)는 종요가 조조(曹操)에게 올린 편지로서, 촉(蜀)나라 장군인 관우(關羽)가 죽은 것은 위(魏)나라의 군사와 정치활동에 많은 도움이 된다는 희소식을 알리는 내용이다.
왕희지(王羲之 : 321~379, 303~361)의 최고의 명작으로 전하는 난정서(蘭亭序)는 영화구년(永和九年 : 353) 회계군에 위치한 난정(蘭亭)에서 수계의식(修禊儀式 : 고대의 풍속으로 3월 3일 물가에서 몸을 씻는 도가적(道家的) 의식이다)을 하고 거기에 참여한 문인들이 곡수(曲水)에 잔을 띄워 술을 마시면서 시(詩)를 읊었는데,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쓴 글이다.
안진경(顔眞卿 : 709~785)의 대표작으로 전하는 제질문고(祭姪文稿)는 제문(祭文)의 초고(草稿)로 안사(安史)의 난때 죽은 종질(從姪) 안계명(顔季明)을 추도하는 내용이다. 쟁좌위(爭座位) 역시 초고로서 관료들의 집회에서 자신의 공적을 앞세워 지위보다 윗자리에 앉은 우복야(右僕射) 곽영예(郭英乂)에게 편지를 써서 훈계하고 질타하는 내용이다.
양응식(楊凝式 : 873~954)이 쓴 구화첩(韮花帖)은 낮잠에서 깨어나 출출함을 느끼고 있을 때, 마침 부추 꽃으로 만든 음식을 대접받고 만족감에서 감사의 말을 전하는 내용이다. 소식(蘇軾 : 1037~1101)쓴 황주한식시첩(黃州寒食詩帖)은 동파가 황주에 귀양가 있을 때 한식(寒食)을 전후하여 귀양살이하는 처량한 생활을 기록한 내용이다. 황정견(黃庭堅 : 1045~1105)이 쓴 송풍각(松風閣)은 황산곡이 유배생활에서 느끼는 고독함과 답답함을 표현한 시이다. 김정희(金正喜 : 1786~1856)가 쓴 세한도(歲寒圖)는 제주도에 유배중 이상적이 중국의 새로운 자료들을 보내주자 그에 대한 답례로서 제작한 것으로 편지의 형식으로 되어있는 작품이다.
이것들은 높은 미의식을 인정받는 작품들이지만, 미적 감상만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궁중, 사찰, 사당에 걸려있는 현판(懸版), 문기둥에 쓰여진 주련(柱聯), 신년휘호를 장식하는 입춘대길(立春大吉)에 이르기까지 전통서예는 쓰임(用)의 용도를 우선으로 하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감상을 목적으로하는 오늘날의 서예와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분명히 밝혀야 할 문제는 그것들이 모두 쓰임의 용도를 중시하고 있다고 하여 예술성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지나친 감상의 중시, 이것은 오히려 서예의 생명력을 약화시키는 주요인으로 작용한다.
Ⅲ. 순수와 실용의 공존(共存)
감상만을 추구하는 예술이 오히려 창조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은 이미 동서의 미술이론가들에 의해서도 심각하게 제기되어온 문제이다. 유종열(柳宗悅 야나기무네요시 : 1889-1961)은 순수미술로 일컬어지는 Art의 권위로 인해 인간이 본래부터 간직하고 있던 창조성이 죽어간다는 것을 철학적인 입장에서 설파하고 있다. 오히려 그는 미술의 본질을 실용미술인 공예에서 찾으려고 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할때나 휴식을 취할 때나 여러 가지 기물 없이는 생활을 할 수 없다. 우리는 옷을 몸에 걸쳐 체온을 조절하고, 그릇에다 음식을 담아 먹고, 세간〔生活用品〕을 고루 갖추어 일상생활을 한다. …… 온갖 기물이야말로 우리 생활의 가장 구체적인 표현이 아닌가.… 미(美)는 한갓 감상(鑑賞)에 그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보다 깊숙이 생활에 활용(活用)되지 않으면 안된다.”14)
그에 있어서 생활에 사용되는 실용미술은 감상에 목표를 둔 순수미술 이상의 가치가 있으며, 인간의 문화를 이루는 중대한 기초로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이론은 순수미술을 미술의 원류(原流)로 보고 실용미술을 지류(支流)로 보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의 상식을 뒤집는 이론이 아닐 수 없다. 유종열은 퇴화되어가는 심미적 감수성의 갱생을 위해서는 실용미술이 바로 서야 하며, 순수미술과 실용미술을 새롭게 종합하는 것이 미술의 목표가 되어야 함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미술에 있어서 순수와 실용의 조화에 대해서는 서양에서도 거듭 강조되어온 바이다. 미술사가 하버트.리이드는 순수미술 중심적 미술관(美術觀)에 대해 강도 높게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그는 ‘우리들의 감각과 감수성 속에 무엇이 결핍해서 본능적인 응용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일까’라고 하는 심각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해답을 ‘과거와 현재 사이의 단절(斷絶)속에서 비롯된다’ 고 본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론에서 찾는다. 다음에 소개되는 글은 바로 허버트.리이드가 찾은 답안이다.
“감수성의 지속적인 연결(the concontinuous chain sensibility)은 선사시대부터 근대의 초기에 이르기까지 뻗쳤으며, 근대초에 툭 끊어져 버렸다. 이러한 상태가 더 진행되기 전에 끊어진 관계가 다시 연결되지 않으면 안되며, 전통의 연결(the chain of tradtition)이 재 결합되어야 한다. 무수한 세대에 걸쳐 공예가들의 신경과 혈맥을 따라 흘러왔던 감수성은 다시 우리들의 산업 디자이너들의 신경과 혈맥 속에 다시 흐르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단절(疎外感 : alienation)을 치료해 주는 유일한 근본적인 구제책이며 이 가능성 위에서 우리들 시대의 예술에 의한 위대한 감각회복이 존재하는 것이다.”15)
허버트.리이드는 ‘선사시대부터 지속되어온 감수성이 근대초에 툭 끊어져 버렸다’고 보았다. 근대 초기는 어떠한 시기를 말하는가? 바로 순수미술이 실용미술을 지배한 시대이다. 하버트.리이드는 이른 바 순수 미술이라고 부르는 회화 조각과 같은 분야를 미술의 전부로 한정지으려는 왜곡된 교육으로 말미암아 미술의 감수성이 현저하게 퇴화되었다고 보았다.16) 모리스는 “대예술도 생활예술에 의지하지 않고 불리될 경우 타락하고 무의미한 허식, 열등한 부속물이 될 수 있다.”17)고 보았다.
순수미술이 미술의 중심이 될 수 없다는 것은 현대미술의 형성에 큰 역할을 한 바우하우스(Bauhaus, 1919~1933)18)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그 근거가 제시될 수 있다. 바우하우스에서 활동한 작가들은 순수미술과 실용미술을 격의(隔意) 없이 아우르려고 했다. 여기에 참여한 작가로는 20세기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칸딘스키, 폴 클레 등 유명 작가들이 포함되어있다.19) 그들은 순수와 실용의 양 진영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모두에게 커다란 기여를 한 작가로 기록된다.
위에서 제시된 내용은 미술에 있어서의 순수와 실용의 관계가 위 아래로 구분지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라 서로 상생관계(相生關係)임을 말해주고 있다. 오늘날의 서예는 예술적 감상성을 중시하는 액자서예에만 집착한 결과 서예가 담당해야 할 많은 일들을 저버리고 있다.
책, 거리의 간판, 도로 표지판, 영화포스터, 제품페키지, 컴퓨터 워드, 모바일(핸드폰 글씨)등 눈을 뜨면 만나는 글씨들이 많은데도 대부분의 서예인들은 그에 대해 무관심하다. 이러한 현상은 글씨문화를 지나치게 예술로 제한시키려고 하는 좁은 사고에 기인하는 것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논자는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대안이 서사문화를 대하는 선인들의 태도에서 찾아질 수 있다고 본다. 선인들은 변하는 환경에 대한 적응도가 현대인들보다 유연했다. 논자는 그의 한 예를 금속활자의 역사에서 발견한다.
조선시대는 초기부터 금속활자제작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첫 번째 활자가 1403년 부어 낸 동활자인 계미자(癸未字)이다. 인쇄기술은 세종이 즉위한 후 한층 더 발전된 양상을 보이는데, 이때 만들어진 것이 경자자(庚子字)이다. 세종은 1434년 7월에 또다시 활자의 개주(改鑄)에 착수하여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를 만들어낸다. 여기에서 주의깊게 살펴야 할 것은 본 작업에 참여한 사람이 당대를 대표하는 유명서예가라는 점이다.
안평대군 이용(李瑢 :1418~1453))은 조선시대 최고의 서예가로 일컬어진다. 그는 1450년에 주조한 동활자 경오자(庚午字)를 제작하는데 직접 참여하였으며, 거기에 쓰여진 원작은 안평대군의 친필이었다. 그러나, 감상적인 관점에서 본 경오자(庚午字 : 1450)는 우리가 보아온 안평대군의 글씨가 아니다. 수려하고 기운생동하는 안평대군의 본래의 해서와 비교한다면 금속활자로 제작된 경오자는 필획이 둔하고 격조가 훨씬 떨어진다. 그런데도 왜 글씨를 내주었을까? 논자는 거기에서 안평대군의 위대함을 본다. 금속활자로 제작되는 과정에서 본인 글씨에 예술성이 다소 손상되더라도 활자의 대량보급에 가치를 느껴 허락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세종때의 명신(名臣) 강희안(姜希顔 : 1419~1464)은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지낸 대학자였다. 시서화에 능했으며, 세종의 옥새(玉璽)를 전서로 쓴 인물로 당대를 대표하는 서예가였다. 그 또한 유명서예가인데도 금속활자본 제작에 참여했다. 그가 제공한 글씨는 을해자(乙亥字 : 1455)로 만들어진다.
금속활자를 만드는 작업에는 왕도 직접 참여하였다. 세조(世祖 : 1417~1463)는 젊은 나이로 이승을 떠난 왕세자 덕종(德宗)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왕세자가 생전에 쓴 『금강경』을 비롯한 다른 사경(寫經)을 장책(粧冊)라는 한편, 『금강경』의 정문 대자를 친히 필사하여 글자본으로 삼고 동활자를 만들어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를 찍어 냈다. 이것을 만든 해의 간지(干支)를 따서 정축자(丁丑字 : 1957) 또는 금강경 대자라 일컬어지고 있다.
동국정운자(東國正韻字 : 1448) 이후 을유자(乙酉字 : 1465) 까지는 국내 명필가의 글씨를 바탕으로 주조한 것이었다.20) 금속활자에 제공된 필사본은 금속활자의 공정을 거치면서 글자의 격조가 저하되는 현상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참여한 서예가들은 자기 글씨의 예술성만을 고집하려하지 않고 글씨의 눈높이를 용도에 맞추었다. 이와같이 시속(時俗)을 따르는 정신은 오늘날의 서예인들에게 어필하는 바가 크다.
현재 국내외적으로 실용서예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데도 관심밖의 일로 생각하는 서예인들이 있다. 그 이유는 ‘예술은 존귀하고 실용은 비천하다’는 잠재된 관념이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노자(老子)는 이러한 사람들을 위하여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는 말을 남겼다. “화광동진”은 귀와 천, 시비와 분별을 넘어선 경지를 말한다. 고상한 선비하고도 통하고 투박한 대중과도 소통하려고하는 마음, 클레식과 대중에 뚜렷한 금을 그으려하지 않는 관용(寬容)의 세계관, 이러한 정신이 서예인들의 마음에 자리할 때 21세기의 서예는 보다 다각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Ⅳ. 실용서예를 살려내는 길
실용서예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서예기법을 이용한 간판, 영화포스터, 제품패키지, 인테리어용품, 뮤직비디오, 북디자인, 로고 등이 제작되고 있고, 이를 주제로한 다양한 전시회가 개최되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21) 이와같은 현상은 서구의 디자인계에까지도 미치고 있다.22)
이러한 작업들은 최근 몇 년간 젊은 서예인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것으로 디자인과의 접목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시선을 집중하게 한다. 올 3월에 거행된 ‘사춘기전(四春記展)’은 서예기법을 활용한 문자디자인이 서예인들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23)
그러나, 실용서예에 참여하는 서예 인구에 비해 성공의 확률은 극히 낮은 편이다. 그 이유는 순수서예에 중심을 두고 그것을 가볍게 차용하는 정도로 실용서예를 해결하려고하는 데에 있다고 본다. 즉, 제품에 있어서의 실용의 요구를 잘 읽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감상의 서예에 요구되는 시간이 길듯이 제품에 이용되는 실용서예 또한 긴 수련과정을 요구한다. 논자는 이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해법(解法)이 서예의 역사에서 찾아질 수 있다고 본다.
과거의 서예는 글씨가 속한 공간환경과의 조화에 민감했다. 바로 이점은 앞으로의 실용서예를 개척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서사재료와 서예가 걸리는 장소와 주변환경에 따라 과거의 서예는 수시로 모습을 달리하고 있다. 왜 변하는가? 주위환경과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이다.
오늘의 서예는 주변환경과의 조화라는 측면에서 연구가 매우 인색했다. 왕희지, 구양순, 안진경, 김정희의 글씨가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소속되는 공간환경에 조화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쓸모없는 흉물이 될 수도 있다.
서예에 능한 선인들은 특히 공간을 느끼는 감수성이 무척 예민했다. 공간환경이 바뀔때마다 글씨는 적재적소(適材適所)하게 변형되었다. 죽간과 목간, 그리고 비, 각석, 마애는 같은 시대에 쓰여진 것이라 하더라도 용처(用處)에 따라 서풍의 스타일이 현저하게 달라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비(碑)는 가장 진화된 형태로서 귀부(龜趺)와 이수(螭首)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글씨를 쓰는 비면 또한 잘 다듬어져 있다. 따라서 이와같은 비의 형식미에 잘 어울리는 글씨가 요구되었을 것이다. 각석(刻石)은 비와는 달리 귀부와 이수같은 장식이 없고 자연석을 대충 다듬은 돌을 재료로 하였다. 따라서 각석에 쓴 글씨는 다듬어지지 않은 돌과 같이 거칠다. 고구려 <광개토왕비>와 <중원고구려비>, 고신라시기에 제작된 <냉수리비>, <봉평비>, <청제비>등은 각석에 속한다. 글씨가 쓰여지는 면이 거칠므로 자연히 그에 요구되는 글씨 또한 그와 어울리는 글씨가 쓰였을 것이다. 기암 절벽위에 새겨진 마애(磨崖)는 글씨가 거칠 뿐만아니라, 글씨가 성글고 가늘고 크다. 그 이유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욕구라기 보다는 먼데서 잘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으로 파악된다.
과거의 서예는 주변환경과의 조화를 추구했을 뿐아니라, 서사의 재료 또한 다양한 선택을 했다. 암벽에 새겨진 선사시대의 회문자(繪文字)는 바위를 쪼아 새기거나, 석채(石彩)로 쓴 글씨이다. 거북이 배딱지와 소의 견갑골위에 칼로 새긴 갑골문, 주물을 부어만든 청동기 명문(銘文), 대나무와 판나무에 쓴 죽간(竹簡)과 목간(木簡), 비단에 쓴 백서(帛書), 돌에 글씨를 새겨 구워만든 화상전(畵像塼), 이것들은 서사재료가 문방사보(文房四寶)에 한정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붓, 먹, 벼루, 종이라는 문방사보를 탄생하게 한 역사는 아무리 거슬러 오른다 하더라도 동한대 위로 올라갈 수 없다. 그것은 채윤의 종이의 발명과 함께 동한대에 비로소 탄생된 것이었다. 와당(瓦當), 동경(銅鏡), 전화(錢貨), 인장(印章) 또한 서예가 문방사보의 범주에 머물러있지 않다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Ⅴ. 변통(變通)의 미학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전통서예는 변화되는 공간환경과 서사재료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했다. 자기를 조절하여 주변과 가장 잘 적응해나가는 변통(變通)의 미학(美學). 이것은 3천년 서예사에서 끊임없이 이어져온 전통이다. 오늘날은 과거와는 달리 서사의 요구가 옛날보다 훨씬 다양해지고 개방되어있다. 따라서 이에 맞는 서예문화를 꽃피우기 위해서는 변화하는 환경에 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서예가 개발되어야 한다.
실용서예를 거듭나게 하는 방법은 전통과 현대를 잇는 고민과 노력속에서만이 가능하다. 상나라때 씨족과 부족의 표식으로 알려진 족휘(族徽)는 로고(CI)로 응용될 수 있다. 한나라때 궁중이나 분묘를 장엄했던 전돌, 건축의 와당과 주련글씨는 건물의 인테리어로, 금속활자는 폰트로, 동경(銅鏡)과 전화(錢貨)는 기념주화로, 현판(懸板)은 간판으로 충분히 응용가능하다고 생각한다.
『周易』에 “막히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 窮卽變, 變卽通, 通卽久”라는 말이 있다. 서예의 진리 또한 마찬가지로 변통(變通)을 중시한다. 획과 자획의 결구는 한곳에 머물지 않고 늘 변화를 추구한다. 전통 서론(書論)에서 거듭 요구되어온 대소(大小 : 크고 작음), 비수(肥瘦 : 굵고 가늠), 기정(奇正 : 기울고 바름), 소밀(疏密 : 성기고 빽빽함), 경중(輕重 : 가볍고 무거움), 참치(參差 : 들쭉날쭉함)의 변화는 진정한 서예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속에서 항상 자신의 모습을 바꾸면서 적응하고 조화롭게 자기를 살려내는 것, 이것이 3000여년 서예사에 면면히 이어져내려온 정신임을 자각할 때, 미래의 실용서예는 싱싱하고 다양하게 펼쳐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본 논문은 2006년도 한국서예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내용입니다. 이와 관련한 논문이 "서예학연구" 제 9호에 게재되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