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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53
창세기 19:1-11
소돔의 죄악과 의로운 롯
소돔과 고모라의 죄가 무엇인가?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이유가 무엇인가? 흔히들 동성애의 죄에 대해 말할 때 본문을 가장 많이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고 결국 심판의 대상이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본문을 가지고 동성애에 대한 죄를 규정하고 심판에 초점을 맞추어서 본다. 만약 이렇게만 본다면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의 행위에 대한 문제로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동성애의 죄를 범하면 심판의 대상이 되고 동성애의 죄를 범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문제가 된다. 이런 해석은 성경 전체의 맥락에 맞지 않다.
또한 18장 후반부에서 아브라함이 의인 열 명을 위해 간구한 것을 중보기도로 본다면 오늘 본문도 혈육을 위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로 롯이 구원을 얻었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한 본문을 잘못 이해하면 연결하여 계속 잘못된 방향으로 해석을 하게 되고 종국에는 성경이 말씀하고자 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해석을 하게 된다. 성경은 언약적 흐름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본문도 단순히 소돔과 고모라의 동성애의 죄악만 보고 그에 따른 심판에 치중해서 볼 것이 아니라 언약적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나타내고 있는가를 보아야 할 것이다.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밤을 새우리라”(1-2절). “소돔”의 히브리어 ‘세돔’의 뜻은 ‘불타는’이라는 뜻이다. 고모라 성과 쌍둥이 성으로 알려져 있다. “롯”이라는 이름의 뜻도 ‘라하트’(불타다, 태우다, 타오르다)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두 천사”가 방문한 것으로 기록되었기에 18장 후반부에서 한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이셨고 세 사람 중에서 두 사람을 ‘천사’로 밝히고 있다. 두 천사가 왔을 때 롯은 “저녁 때”,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고 하였는데 “저녁”이란 ‘에레브’로 창조 때에 “저녁이 되며”(1:5, 8, 13, 19, 31, 라고 하였을 때 그 표현으로 ‘어둠의 시작’이다. 소돔 성의 상태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날이 뜨거울 때”, “장막 문”에 앉았던 아브라함과 대조된다(18:1).
롯이 아브라함을 처음 떠날 때는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차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13:12)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소돔 성문에 앉아”라고 말씀한다. 이는 단순한 표현이 아니다. 보통 성문에서 재판이 치러지는 상황임을 생각할 때 롯은 소돔 성에서 상당히 영향력 있는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표현이다(참고 34:20). 즉 ‘불타는’이라는 뜻을 가진 “소돔”과 ‘태우다, 타오르다’라는 뜻을 지닌 “롯”이 연합한 하나가 되어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라는 말씀을 보면 외형적으로는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한 것과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제사에 참여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롯은 종교적 열심으로 의식을 치르는 것이었다. 그것을 다음 구절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롯이 간청하매 그제서야 돌이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3절). “간청하매”라는 말은 9절에서 “롯을 밀치며”라고 하였을 때 “밀치며”와 같은 단어 ‘파차르’로 ‘강제하고 억압하는 것’을 뜻한다. 즉 소돔 성 사람들이 행하는 것과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롯은 두 천사에게 자기 열심으로 강제하고 억압하여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라함보다 더한 종교적 열심으로 대접하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가셨을 때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며 봉사하는 일로 분주하였으나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들었다고 하였다. 그러자 마르다는 예수님께 마리아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으며 나를 도와주도록 말씀해 주시도록 요청하였다(눅 10:38-40). 그때 예수님께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41-42)라고 하셨다.
마리아가 “이 좋은 편”을 택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택하셨기에 마리아는 말씀의 섬김을 받는 좋은 편에 있었던 것이다. 마르다는 자기 종교적 열심으로 예수님을 섬긴다고 한 것이나 예수님을 말씀을 친히 섬기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나타내셨다. 즉 우리의 종교적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자기 백성을 섬기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로 오셨고 그 섬김의 절정이 십자가이다(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라는 표현을 통해 단순히 롯이 두 천사를 대접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급하게 이 성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계시로 주신 떡이다. 다시 말해서 무교병을 먹음으로 소돔 성을 탈출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셨다. 출애굽 때 무교병을 준비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말이다. 즉 소돔 성의 탈출을 위한 떡이었다. “그들이 애굽으로부터 가지고 나온 발교되지 못한 반죽으로 무교병을 구웠으니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쫓겨나므로 지체할 수 없었음이며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하였음이었더라”(출 12:39).
“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4-5절).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라는 표현을 통해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의인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백성들”이 남성 복수이고, “노소”라고 하였을 때 “노”의 ‘자켄’은 ‘늙은, 나이 먹은, 노년의’의 남성 단수이고 “소”의 ‘나아르’는 ‘아이, 소년, 젊은이’의 남성 단수로 표현하여 소돔 성의 남자들만 롯의 집을 찾아왔다고 말씀한다(그래서 영어의 ‘sodomy’는 ‘남성 동성애’를 의미하는 단어가 되었다). 그들의 죄악상을 선지서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49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50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겔 16:49-50)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한 일을 “거만하여 가증한 일”이라고 말씀하였다. 하나님이 거부하는 일이 단순히 구제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은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이었다.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을 통해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가난한 상태였을 때에 출애굽의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을 생각해야 했었다. 이런 점에서 언약의 실체가 되시는 메시아는 이 땅에 가난한 자로 오실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롯은 나그네를 영접한 자로, 소돔은 나그네를 핍박하는 자로 대조하여 악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즉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핍박하는 것을 죄로 규정한다(마 12:31).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전하는 자를 어떻게 대접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어떤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무시하는 그것 자체가 죄의 권세에 매인 우리의 죄악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남성끼리의 육체적 동성애를 묘사한 것이라면 여자들에게는 상관없는 죄가 된다.
그래서 “상관하리라”라는 말을 ‘야다’, 즉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겠다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두 천사는 씨 가진 존재로서 말씀을 가지고 여자를 찾아간 것이었다. 그러나 소돔 성의 사람들은 자신을 철저히 남자로 나타내고 있었다. 말씀과 하나가 되려면 자신이 여자임을 먼저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남자로서 스스로 씨 가진 존재로서 말씀을 가진 자와 하나 되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간음이고 음행이며 동성애이다. 단순히 소돔 성의 동성애가 죄악이라는 말이 아니라 말씀을 무시하는 그것이 소돔 성의 음행이고 간음이며 동성애라는 죄악으로 설명하고 보여주시는 것이다.
“롯이 문 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6-8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라고 하였는데 롯은 소돔 성 사람들을 형제로 말하면서 행위가 악하다고 규정한다. 이런 점에서 소돔 성의 사람이나 롯이나 별반 차이 없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을 내어주겠다는 것은 상식적인 면에서 이해하기 힘드나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통해 진리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씨 가진 존재의 말씀이 씨 없는 여자를 찾아와 말씀의 은혜를 입히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무시하는 것이 그들의 죄악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나그네를 영접한 롯을 의인이라고 표현하였다.
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7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8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6-8)
롯의 행위가 의롭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소돔 성에 주어지는 것을 통해 두 천사를 영접하고 소돔 성의 사람들에게 자기 두 딸을 내어주는 것으로 씨 가진 존재는 씨 없는 자와 하나 되는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고 있다는 측면에서 “의로운 롯”이라고 말씀한다. 결국 아브라함 언약에서 제외되어 있는 겉 사람 롯이 말씀의 은혜가 임하여 속 사람으로 바뀌어져야 하는 의인이 어떤 존재인지 보여주는 계시를 위해 선택된 존재였다. 자기 행위가 없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은혜로 임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구원이고 생명이다.
“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9절). 롯은 소돔 성과 하나되어 성문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겉으로는 소돔 성과 하나인 것처럼 보이지만 소돔 성의 사람들에는 여전히 이방인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 진리를 대하는 죄인들의 모습이다. 우리가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이러하다.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고 문 밖의 무리를 대소를 막론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헤매었더라”(10-11절).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두 천사는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고 롯을 문 안으로 끌어들여 문 밖의 무리와 분리한다. 이것이 말씀이 주어질 때 드러나는 현상이다.
23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행 28:23-28)
(20230917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