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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54
요한계시록 14:9-12
예수의 믿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지 않고 교인들은 믿는다는 말을 쉽게 한다. 일요일을 주일로 여기고 교회라는 건물에 나와 기도하고, 찬송하고, 교회가 요구하는 헌금을 하고, 봉사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의 반복으로만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즉 종교적인 문화에 젖어 살고 자녀들도 그런 문화 속에 있으면 기독교 가정이고 예수 믿는 가정으로 생각하면 되는가? 편안하게 교회 다닐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종교적 문화 안에 있으면 자신은 성도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성경을 꾸준히 읽고 성경 공부를 하고 있으면 그것 자체를 신앙생활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모습이라는 생각해 보신 적이 있는가? 예배하며, 성경 공부하며, 찬송하며, 기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전도하며 봉사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예배하면 하나님이 무조건 받으시고, 찬송하며 기도하는 것, 십일조나 헌금을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은 인간들의 것을 일절 받지 않으신다. 인간은 다 죄인이기 때문이다(롬 3:9-12). 죄인의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롬 3:23). 그래서 예수님께서 “20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0-23)라고 말씀하셨다. 죄인은 그저 악을 쏟아낼 뿐이다(잠 15:28).
그러므로 인간 스스로 구원을 받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자기 의지로 신앙생활 한다는 말은 성립이 되지 않는 말이다. 죄인이 하늘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늘에서 땅의 세계로 오셔서 죄인들을 대속하고 모든 피조물을 회복하는 일을 하셨다.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십자가를 지셔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온전히 성취하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대속하실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와 찬송을 하며 예배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어린 양으로 죽임을 당하신 그것이 완전한 기도요 찬송이며 예배이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그 안에서 온전한 기도, 찬송, 예배가 된 것이다. 따라서 교회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날마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그것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십자가에 근거하여 날마다 이루시기에 그저 십자가 은혜 안에서 이끄시는 대로 따라갈 뿐이다. 이것을 가지고 신앙 생활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무엇인가를 행하여서 하나님께 드리려고 한다면 그것은 종교 생활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오늘 살펴볼 말씀은 우리의 신앙이 종말론적 상태에 있는가를 묻는 말씀이다.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9-10절). 또 다른 셋째 천사가 첫 번째 두 번째 천사의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선포한 내용이다. 이 말씀 역시 앞의 말씀과 연관되어 있다는 뜻이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라 말씀한다. 구약에서 잔에 담긴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욥 21:20, 시 75:8, 사 51:17, 렘 25:15-26, 49:12, 겔 23:31-34).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9절) 바벨론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바벨론은 율법적 자기 행위로 영생을 취하고자 하는 십자가의 대적자로서 사람들에게 진노의 포도주를 먹게 하였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노의 잔이다. 그러기 때문에 진노의 잔에는 아무 것도 섞인 것이 없다고 말씀한다.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하게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진노라는 뜻이다. 또한 그것은 묽지 않은 포도주이기에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완벽하고 강력한 진노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고 하였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는다는 것은 바벨론이 행하게 하는 음행에 동참하고, 바벨론이 주는 잔을 받아 마신다는 것이다. 힘으로 어떤 나라가 권력을 잡아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의 손이나 이마에 외형적으로 문신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 안에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으로 이미 판가름 나 있다.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은 말씀 안에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이미 결정된 것이지 우리의 행위에 따라서 미래에 결정되는 운명이 아니다. 따라서 지금 말씀 안에 있지 않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가 어떤 것인가?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라고 하였다. 그리고 11절에서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는 것과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 같은 하나님의 심판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불과 유황”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용어이다.
24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25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창 19:24-25)
본문에서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라는 표현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 받은 상황과 같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현장에서 연기가 솟구치는 것을 아브라함이 보았다(창 19:28). 짐승과 우상에게 예배하는 일은 끊임 없이 연기를 하늘에 올리는 것이고 그것이 곧 고난이다. 그래서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한다. “쉼”이라는 말 ‘아나파우시스’는 ‘아나파우오’에서 유래한 단어로 ‘중단, 안식, 휴식’이라는 뜻이다. 즉 짐승에게 예배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아나파우오)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아나파우시스)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란 분명 ‘율법의 짐’이다(마 23:4). 율법의 짐을 지고 괴로워한다는 것은 자기 의를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 때문에 쉼을 맛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 있는 모든 자가 바벨론이고, 소돔이며, 애굽이다. 곧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하신 이 선언은 먼 미래에 있는 영원한 안식이라는 의미도 될 수 있지만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는 쉼을 누린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미래에 있을 안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자체가 바로 안식이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다.
짐승의 사고방식, 용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쉼이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쉼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째 쉬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을 즐거워하며 영광을 누리는 상태이고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완성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곧 쉰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서 십자가로 성취한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즐거워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사야서에 보면 하나님의 긍휼을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22 네 주 여호와, 그의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 네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비틀걸음 치게 하는 잔 곧 나의 분노의 큰 잔을 네 손에서 거두어서 네가 다시는 마시지 못하게 하고 23 그 잔을 너를 괴롭게 하던 자들의 손에 두리라 그들은 일찍이 네게 이르기를 엎드리라 우리가 넘어가리라 하던 자들이라 너를 넘어가려는 그들에게 네가 네 허리를 땅과 같게, 길거리와 같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사 51:22-23)
성경은 자주 하나님의 심판을 진노의 잔을 받아 마시는 행위로, 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를 진노의 잔을 거두시는 것으로 표현한다. 사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의 잔에 있는 진노의 포도주와 대조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잔에 있는 자비의 포도주로 많이 표현한다. 그래서 시편 기록자는 이렇게 노래하였다.
12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13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시 116:12-13)
이는 은혜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거저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아니 믿어졌다는 것은 우리가 이 은혜를 입고 구원의 잔을 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노의 잔을 대신 받으셨기에 주어진 은혜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막 14:25)라고 하셨다. 하나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잔을 들게 되었고 쉼을 얻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7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7-9)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12절). “인내”란 ‘휘포모네’는 우리가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게 하신 은혜이다. 여기서도 “예수에 대한 믿음”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소유격으로 표현된 말로 ‘예수의 믿음’이다. 우리 성경은 인간이 주체가 되어 이해되도록 의역을 하였는데 본문이 말씀하고자 한 것은 “하나님의 계명”이 “예수의 믿음”이라는 의미이다. “지키는 자니라”라는 말씀 역시 ‘테레오’로 마음에 품고 새기는 것을 뜻한다.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3-24)
이미 요한계시록 13:10에서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라고 선언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는 자기 의지로 짐승에게 예배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가 아니다. 예수님의 믿음을 마음에 품고 새기도록 하셔서 십자가의 길을 가도록 인내 가운데 두셨기에 세상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자가 교회요 성도이다(20231008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