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애도의 중요성
『몬스터 콜스』(페트릭 네스, 웅진주니어, 2012)
유영진
1.
우리의 앎은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앎(known known), 모르는 것을 모른다는 앎(unknown unknown), 모르지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지식(unknown known), 알고 있지만 모른다고 생각하는 앎(known unknown, 무의식과 관계된 앎), 이렇게 넷으로 나뉜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중요한 앎은 바로 네 번째 앎, 바로 (무의식은) 알고 있지만 (의식은) 모른다고 생각하는 앎이다.
2.
한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 엄마는 아이가 열 살 때부터 치명적인 병을 앓기 시작했다. 아이는 엄마의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가 듣기 싫었다. 예쁜 옷을 입고 아이와 함께 봄나들이도 하지 못하고 밥도 차려 줄 수 없는 엄마는 생을 마감하기 1년 전부터 사회적 의미의 ‘엄마’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 치명적인 병은 그 아이의 엄마의 전신을 갉아먹어 3년 뒤에는 결국 생을 마감하게 했다.
그 마지막 날 오후에는 억수 같은 비가 천둥 번개와 함께 내렸다. 아이의 이모는 엄마가 죽기 전 “엄마 예뻤던 모습만 기억하라.”라며 엄마가 죽어 가는 방에서 아이를 내몰았다. 아이는 그 이모가 고마웠다. 너무나 무섭고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혼자 방에 남겨져 있던 아이에게 아빠가 아이처럼 울며 다가왔다. 아이도 온몸의 수분이 다 빠져나갈 것처럼 울었다. 3일의 장례 기간이 끝난 뒤 아이는 모든 걸 새롭게 출발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은 그 아이는 홀가분함에 가까운 이 느낌의 실체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 느낌과 관계된 네 번째 앎이 앞으로 그 아이의 생에 두고두고 족쇄가 되어 그 아이를 괴롭힐 것인지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25년 정도의 세월이 지난 뒤에야 어른이 된 아이는 깨닫는다. 그 죽음과 연관된 죄의식과 상실감의 실체를. 그리고 무의식은 그 실체를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음을. 알고 있지만 모른다고 생각하는 앎은 그 아이 삶을 오랫동안 지배했다.
3.
『몬스터 콜스』의 주인공 코너의 엄마는 암에 걸렸고, 아빠는 이혼한 뒤 미국으로 떠나 재혼을 했다. 가장 가까운 친구 릴리 때문에 코너 엄마의 이야기가 학교에 알려진다. 그 뒤 코너는 학교에서 ‘투명인간’ 같은 존재가 되었다. 마치 코너 엄마가 아픈 게 아니라 코너가 아픈 것처럼. 선생님들은 코너가 숙제를 안 해 와도 혼내지 않으며, 친구들은 코너에게 말도 걸지 않는다. 오직 해리 일당만이 코너를 괴롭힐 뿐이다. 코너는 해리의 괴롭힘을 선생님에게 말하지 않고 릴리의 친절도 받아들일 수 없다. 코너는 죄의식 때문에 “선생님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볼 수도 없었고, 선생님 목소리에 담긴 걱정의 기색을 도저히 견딜 수도 없었다. 코너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기 때문이었다.”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코너는 엄마를 돌봐 주러 온 할머니의 강압적 태도와 엄마의 죽음을 암시하는 말투가 싫다. 코너는 이래저래 삶의 코너로 몰려가고 있다.
이런 코너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린다. 악몽이 시작된 뒤로 12시 7분이 되면 악몽의 괴물과는 다른 주목 모양의 몬스터가 코너를 찾아온다. 이 몬스터는 코너가 불러서 나타난 것이라 한다. 그리고 코너에게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며, 네 번째 이야기는 코너 스스로 몬스터 자신에게 들려주게 될 것이라 예언한다.
몬스터가 들려준 첫 번째 이야기는 자신이 사랑하는 농부의 딸을 죽이고 이를 마녀라고 짐작되는 새 왕비에게 덮어씌워 왕국을 구한 한 왕손의 이야기이다. 왕은 전쟁을 통해 네 아들을 모두 잃었지만 왕국을 지키고 평화를 이룬다. 이웃 나라의 젊은 공주와 새로 결혼을 한 왕은 왕손이 열여섯이 되었을 때 죽고 만다. 왕손이 왕이 되기에는 이른 나이기에 이 새 왕비가 섭정을 하게 된다. 왕비가 마녀라 왕비가 왕을 죽였다는 소문이 돌지만 이 젊고 아름다운 왕비는 나라를 잘 다스린다. 어린 왕손이 왕이 될 나이가 되자 권력을 내놓기 싫은 왕비는 왕손과 자신이 결혼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왕손은 사랑하는 농부의 딸과 도망쳤다가 주목 밑에서 몸을 섞고 농부의 딸을 죽인다. 가슴 찢어지는 일이지만 왕국을 위해서, 악을 무너뜨리기 위해 희생이 필요하다고 하며. 그리고 다음날 아침 피 묻은 손으로 이는 자신을 살인자로 몰기 위한 왕비의 계략이라고 외친다. 성난 사람들은 왕국으로 쳐들어가 성을 부수고 왕비를 화형 시키려 한다. 왕손은 나쁜 짓을 했지만 몬스터에게 벌을 받지 않는다. 몬스터는 다만 화형 직전의 새 왕비,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죄 없는 마녀를 구할 뿐이다. 몬스터는 코너에게 이 이야기를 통해 “항상 좋은 사람은 없다. 항상 나쁜 사람도 없고, 대부분 사람들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지.”라고 말해 준다.
두 번째 이야기는 자기 생각만 했던 남자의 이야기이다. 신식 문물에 밝은 한 목사는 초목근피로 치료를 해 주는 약제사의 전통적 방식을 반대하는 설교를 하며 치료제를 만들기 위해 목사관 마당의 주목을 베어 달라는 약제사의 제안을 거절한다. 이 약제사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고 있었지만 욕심 사나운 자라 목사의 설교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움직일 수 있었고 약제사의 사업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어느 날 목사의 두 딸이 끔찍한 전염병에 걸리고 어떤 신식 치료 방법이나 기도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죽음 직전 상황에서 이 목사는 약제사를 찾아가 딸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주목이든 무엇이든 자신이 믿는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약제사는 매몰차게 “그렇다면 내가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소.”라고 답하고 딸들은 결국 죽고 만다. 그리고 그날 밤 몬스터는 도움을 주지 않은 약제사를 벌주지 않고 자신의 믿음을 저버린 목사를 벌주기 위해 목사관을 파괴한다. “치료의 절반은 믿음이다……. 믿음이 가장 절실히 필요할 때 그걸 저버렸다. 목사의 믿음은 이기적이고 비겁했다.”고 하며. 코너는 이 모순에 가득차고 복잡한 두 이야기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없다.
세 번째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코너를 괴롭히던 해리는 어느 날 점심시간, 이제는 아예 “네가 안 보”인다며 코너를 무시한다. 몬스터는 낮 12시 7분에 나타나 아주 짧은 이야기만 해 준다. “그러다가 어느 날 보이지 않는 사람은 결심했다. 저들이 나를 보게 만들 것”이고, “그 사람은, 몬스터를 불렀다”고. 곧이어 코너와 몬스터는 한 몸이 되어 “해리가 코너를 보게 만들”기 위해 해리의 팔과 코뼈를 부러뜨린다.
이 세 이야기는 코너의 삶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가? 첫 번째 이야기는 좁게는 코너의 할머니, 두 번째 이야기는 코너 자신과 관계된 이야기, 세 번째는 코너의 분노에 대한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단순히 일대일의 관계로만 환원되지 않는다. 이 세 이야기는 코너와 코너를 둘러싼 사람들, 그리고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 방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몬스터는 자연을 지배하는 정령이자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알고 있지만 모르고 있는 앎을 알려 주기 위해, 자신이 만든 감옥과 형벌에서 코너 자신을 구하기 위해 호출된 코너의 무의식이다. 무의식은 자신의 숙주인 존재에게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무의식은 강력한 에너지를 가지고 매우 파괴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코너가 할머니의 거실을 초토화 시키고 해리를 곤죽으로 만드는 사건을 보라) 그래서 작가는 이 무의식을 몬스터라고 부르는 것이다.
엄마 죽음 직전의 순간 몬스터는 마지막으로 나타나 코너에게 마지막 이야기를, 진실을 스스로 말할 것을 요구한다. 엄마를 낫기 위해 온 게 아니라 “너를 낫게 하려고 왔다”고 하며. 코너가 끝내 고통스럽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코너의 이야기, 코너의 진실은 무엇일까? 몬스터를 불러내기 전 코너가 악몽에서 본 것은 무엇이며, 그 꿈의 무엇 때문에 해리의 괴롭힘을 적절한 징벌이라 생각할 정도로 죄의식에 시달린 것일까?
이 책을 아직 읽지 못한 독자를 위해 코너의 진실, 남은 이야기들은 자세히 쓰지 않겠다. 내가 느낀 감동을 독자들도 온전히 누릴 권리가 있기에. (눈치 빠른 이들은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4.
진정한 애도만이 사랑하는 이를 진정으로 떠나보낼 수 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빚어질 많은 심리적 고통. 그 고통의 깊이가 한없이 참담하다 하여 이를 외면해서는 진정한 애도를 할 수가 없다. 죽음으로 인해 빚어진 고통보다 훨씬 더 가슴 아픈 진실을 고통스럽게 마주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애도이다. 그리고 이것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을 너무나 고통스럽게 말한 뒤에야 코너는 진정으로 엄마를 떠나보낼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이다.
『몬스터 콜스』는 소설을 구상한 이와 실제로 쓴 이가 다르다. 구상한 이는 시본 도우드라는 작가였으나 암으로 죽고, 이 구상을 가지고 실제 글을 쓴 이가 패트릭 네스이다. 둘 중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누군가는 어린 시절 이런 고통을 실제 겪은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었다. 이는 정말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쉽게 알 수 없는 진실의 심연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뛰어난 작품을 ‘한 아이’가 진작 읽을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제 어른이 된 그 아이는 한숨을 내쉬며 글을 마친다. 진정한 애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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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진
아동문학평론가. 본지 기획위원. 서울 자운초등학교 교사. 『몸의 상상력과 동화』로 제2회 창비어린이 신인평론상을 받았으며,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평론 부문 창작지원금을 받았다. 평론집 『몸의 상상력과 동화』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