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미예수님
어느 성당에서 중고등부 학생들을 삼박 사일간 섬에 보내 캠프를 했다고 합니다. 섬에는 공소가 하나 있었는데요 도착한 학생들이 가장 절실히 찾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풍경이 좋다는 명소를 찾은 것도 아니었고 카페나 마트를 찾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가장 절실히 찾은 것은 스마트폰 충전기였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이해가 가실 겁니다. 어디를 놀러가던 충전기를 꼽아야 되고 다음으로 와이파이가 터지는지 확일은 해야 마음이 놓이는 것이 요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은 절실함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양 아흔 아홉 마리를 놓아두고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목동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도 아흔아홉마리의 양을 돌봐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잃어버린 한 마리가 그만큼 절실한 겁니다. 잃었던 은전을 찾는 사람은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친구와 이웃들을 부를만한 일은 아니더라도 무척 기쁜 일이었을 겁니다.
바리사이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보며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물어보고 계십니다. “왜 저 사람들을 놓아둡니까? 왜 저 사람들과 따로 떨어져 있습니까?”
저는 도시 지역의 성당에서 신학생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성당에 이사를 왔고 방학때만 잠깐 보여서 청년들과 친해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청년들과 술자리를 가지면 구석에 있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석에 있는 A라는 청년이 있었는데 나이도 많고 직업도 변변찮고 약간 어눌한 사람이어서 저는 그 청년과 대화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저는 이른바 폭탄 처리반 같은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어느 공동체에나 그렇습니다. 멋지고 잘난 사람은 공동체에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 소외되고 따돌림 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무조건 다가서라는 말은 아닙니다. 소외받는 사람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괜히 다가섰다가 낭패를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나와 분리된 사람으로 여기진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바리사이란 말의 뜻은 ‘분리된 자’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엄격히 해석해서 자신들을 다른 이들과 분리시켰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차별받고 소외된 이들과 우리 스스로를 분리시킨다면 바리사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도시 본당에서 술만 얻어먹던 청년들은 아마 지금쯤 뿔뿔이 흩어졌을 겁니다. 하지만 구석에 있던 A라는 청년만 혼자 남아 지금도 다른 청년들을 위해 기도를 드려 줄 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이웃을 향한 절실한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가졌던 그런 마음을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며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