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강성 역사적 시조 강여상(姜吕尙)
32대 667년 제나라 강성(姜姓) 열전<4>
주(周) 천하 세 부분 중 두 곳을 차지하다
천하를 세 부분으로 나뉘었는데, 그중 두 부분은 모두 주나라 영토입니다. 영토 대부분을 점유할 수 있었던 것은 강여상의 책략 때문이라 합니다. 무왕은 주를 건국한 지 3년 만에 병사하였고, 태자 희송(姬誦)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니 그가 성왕(成王)입니다.
강여상은 연(燕)나라 시조 소강공(召康公)을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얼마 전 전갈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소강공은 주나라 황실의 청으로 강여상의 고견을 듣고 오라는 명을 받고 방문했노라 했습니다.
기원전 1043년 무렵, 성왕은 아직 나이가 어렸으므로 무왕의 동생인 주공(周公) 희단(姬旦)이 섭정했습니다. 관숙 형제는 이에 불만을 품고 주공 희단이 왕위를 빼앗을 것이라는 말을 사방에 퍼뜨렸습니다. 형제는 상나라 마지막 왕 주왕의 아들 무경(武庚)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삼감(三監)의 난(亂)’이라고 합니다. 무왕이 상나라를 멸하고 상나라 옛 지역인 하남성 안양을 무경이 관리하도록 맡겼습니다. 주공(周公) 희단은 제후들을 단속하며 반란의 진압에 나섰지만, 동쪽의 회이(淮夷)와 연합한 상(商)나라의 유민들이 저항했습니다. 주나라 성왕이 젊어서 왕위에 오를 때 무왕의 셋째 아들 관숙(管叔)과 노나라를 크게 다스린 채호(蔡胡)의 아버지 채숙(蔡叔)과 주왕의 아들 무경이 이 반란을 일으키고 회수 하류 지역에 살던 고대 부족 회이(淮夷)도 주나라를 배반했기에 소강공을 보낸 것입니다. 강태공은 먹과 붓으로 지도를 그리며 설명했습니다.
“동쪽에서 큰바다로, 서쪽에서 황하로, 남쪽에서 산동성 임구현 목릉(穆陵)으로, 북쪽에서 산동성 부부 무체(无棣)에 있는 다양한 제후들과 아홉 나라 지방 장관 구백(九伯)이 난을 일으키면 천자를 대신해 정벌하라는 천자의 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제후들이 천자를 대신해 토벌하겠다고 천자께 진언해 주십시오.”
주공은 주나라에 복종하지 않은 제후국들을 토벌하는 전권을 강여상에게 맡겼습니다. 강여상은 군대를 거느리고 동쪽 반군을 제압했습니다.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 3년이나 걸렸습니다. 이때 강태공의 전략으로 주공(周公) 희단을 도와 ‘무경(武庚)’이 주도한 난을 평정했습니다. 주공은 성왕이 스무 살이 되자 모든 권력을 넘겨주었습니다.
강여상 태공(太公)이 붕어했을 때 약 100세였고 그의 아들 정공(丁公) 급(伋)이 군위(君位)를 계승했습니다. 정공 급이 죽고 그의 아들 을공(乙公)이 군위를 계승했습니다. 3대 을공이 죽고 그의 아들 계공(癸公) 자모(慈母)가 군위를 계승했습니다. 계공이 죽고 그의 아들 애공(哀公)이 계위를 이었지만, 서주나라 이왕(夷王) 3년에 기후(紀侯)의 참소를 받고 주나라 서울 섬서성 서안시 장안구 호경(鎬京)으로 끌려간 뒤 가마솥에 넣어 끓어서 죽이는 팽형(烹刑)에 처해졌으며, 주나라 이왕(夷王)은 애공의 이복동생 정(靜)을 제나라 임금으로 세웠습니다. 그가 6대 호공(胡公)입니다.